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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제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는 새롭게 탄생된 첫 교회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맡기신 까닭입니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대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이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보호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27)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공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복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되신 일이 벌어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4)
주님!
당신께서는 휘장을 찢으시고 가로막힌 모든 것을 치우셨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물과 피로 우리의 영혼을 씻으셨습니다.
온 누리를 새로 지으시고 아버지의 향기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사랑의 옥함인 당신 몸을 부수어 사랑의 향유로 온 세상을 기름칠하셨습니다.
오늘,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 사랑에 제 영혼이 뛰놀며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으로 성숙한 기도>
잘아시다시피 오늘 축일로 지내는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은 2018년 처음 축일로 지내기 시작한 축일이고 이동 축일입니다.
곧 어느 한 날로 축일이 정해져 있지 않고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날 지내게 되어있는 축일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은 성령과 마리아 사이에, 또는 성령 강림과 마리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관계일까요?
이 축일 독서로 창세기 뱀과 하와 얘기를 우리는 듣습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자손인 우리에게 원죄를 안긴 어머니입니다.
여기서 뱀은 성령과 반대되는 악령이지요.
이에 비해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으심으로써 그 영적 자녀인 우리에게 구원을 안긴 우리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라는 얘기를 오늘 독서 창세기를 통해 교회 전례는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며 제자 요한과 당신 어머니를 영적 모자 관계로 맺어주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ㄷ.27ㄱ)
이로써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모두의 어머니로 내어주신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모두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런 당부에 따라 마리아는 제자들과 떨어지지 않고, 성령 강림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십니다.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행전 1, 14)
그래서 오늘 감사송도 이런 마리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또한 사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의 간구를 제자들의 기도에 결합시켜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가 되셨나이다.”
저는 요즘 우리 공동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자주 권고합니다.
공동체의 누구를 특히 공동체 봉사자들을 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들을 욕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고, 실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에 대해서도 욕하기보다 기도하자고 합니다.
지금까지 실컷 욕했으면 이제는 기도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나라를 이끄는 분이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잘못했어도 이제는 우리나라를 위해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니 실은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으로 성숙한 것뿐 아니라 마리아처럼 공동체를 위해 같이 기도하는 영적 성숙입니다.
우리는 영적 성숙 특히 기도와 관련한 영적 성숙을, 자기가 기도의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만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영적 탐욕이요 이기주의이기 쉽습니다.
영적이고 진정 높은 경지의 기도는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임을 그 본보기이신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어머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버림받은 유다인의 임금이 되셧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떨어져 나가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십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끝까지 따른 이들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과의 모자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이십니다.
요한 사가는 예수께서 구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카나 혼인 잔치에서와 구원 사업의 완성을 이루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르심으로써 성모님이 신약 백성의 어머니, 곧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와는 뱀의 속임에 넘어가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했으나, 성모님은 천사의 말을 믿고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뉴먼 추기경)
예수님을 통해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은 큰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어머니를 집에 모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자에 의해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관계를 새롭게 하여 고귀한 어머니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 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하고 이행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누굴까?
우리는 요한이라고 생각하지만 드러내 놓지 않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데 그 세상은 ‘믿음의 세상’입니다.
성모님을 나의 어머니로, 교회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영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선물로 주셨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기억하는 만큼 자신도 이웃을 위한 사랑의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 헌신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보여주신 성모님의 태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귀감입니다.
교부 암브로시오는 말합니다.
“나는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는 구절은 읽었지만, 어디에서도 통곡했다는 구절을 읽지 못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풍파를 겪을 때, 십자가 아래 꿋꿋이 서서 고통을 견디어 낸 성모님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은 온유함과 강인함의 어머니이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유인을 어머니로 둔 자녀가 노예의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는 미국의 노예 해방과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본명은 이사벨라 바움프리(Isabella Baumfree)였으며, 1797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소저너 트루스는 신앙심이 깊었던 인물로, 그녀의 삶과 활동에 있어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Sojourner Truth’로 바꾸었는데, 이는 ‘진리를 위한 여행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결정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소저너는 하느님께서 그녀를 부르시어, 진리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설교하라는 영감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소저너 트루스는 뉴욕주의 한 노예 가정에서 태어나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가운데 자랐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노예로서의 가혹한 대우와 노동에 시달렸고,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노예 생활했지만, 1826년에 뉴욕주의 노예제도가 점차 폐지되면서 그녀는 두 자녀와 함께 도망쳐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트루스는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법정에서 자기 아들을 주인에게서 되찾기 위해 싸웠으며, 이는 뉴욕주에서 흑인이 백인에게서 법적으로 아이를 되찾아온 첫 사례였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투쟁은 자녀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위한 강한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자유를 찾은 후, 녀는 자신의 삶을 노예 해방 운동과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며, 연설과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유명한 연설 “나도 똑같은 여자가 아닙니까?”는 여성의 권리와 인종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한 연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소저너 트루스의 자유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투쟁은 그녀의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자유의 중요성과 인권을 위한 싸움의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녀의 아들 피터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유를 찾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자녀가 자유인이 되려면 당연히 엄마도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트루스가 독립시킨 자녀들은 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트루스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중요했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믿음은 그녀가 노예제도에서 벗어나 인권 운동을 위해 싸우는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하와는 자유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권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을 어머니로 믿는 이들 또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하와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와는 존재한다, 생존한다는 뜻의 ‘하야’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하와는 바로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고 옛 하와는 죽은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성모님을 여인이라 부르십니다.
두 번째 하와이고 당신이 두 번째 아담이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나는 오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 그리스도를 아버지로 모시게 됩니다.
그렇게 두 자유인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우리가 이미 하느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어머니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까지 믿었는데,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그냥 인간에 불과하다면 성모님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스스로 하느님처럼 될 필요가 없는 이미 하느님처럼 된 존재임을 믿었기에 참 자유인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자녀도 당연히 그렇게 믿어야만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성월을 지내는 가운데, 또 다시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신앙의 성장 여정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나자렛 산골의 시골 소녀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서 성모님은 사도들의 우리 모두의 어머니,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마침내 승천하신 성모님은 하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십니다.
성인치고 성모 신심이 없거나 부족한 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우셨던 분,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계셨던 분, 예수님과 일심동체였던 분으로서, 오늘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성모 신심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돈독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입만 열면, 성모님, 성모님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수녀회를 창립하셨는데, 수녀회 이름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의미에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회’로 명명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업적을 칭찬하면, 이 모든 것은 성모님이 하신 것이라며 성모님께 공을 돌렸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돌아가시기 3년 전, 1885년 6월의 일입니다.
당시 살레시오 수녀님들은 프랑스 니짜 몬페라토란 곳에서 총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쇠한 돈보스코 성인께서 수녀님들에게 총회 마무리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쇠한 돈보스코 성인은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많은 것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나는 이미 늙었고 말하기조차 힘듭니다.
그래서 간단히 한 말씀만 드리자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십니까?
성모님께서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당시 돈보스코 성인을 수행하던 보네티라는 사제가 돈보스코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말을 받아 수녀님에게 큰 소리로 통역 아닌 통역을 해드렸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어머니시고 여러분을 보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보네티 신부의 전언이 마음에 안 들었던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그게 아니라며 안간힘을 다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게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이 집에 계시며 여러분들에게 흡족해하고 계십니다.”
보네티 신부가 다시 돈보스코 성인의 말을 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돈보스코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이 항상 잘하신다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만족하실 것입니다.”
또다시 엉뚱한 말을 전하는 보네티 신부에 화가 난 돈보스코 성인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치십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여기 여러분 가운데 정말로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이 집안을 거닐고 계시며 당신의 망토로 이곳을 덮고 계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성모님은 도움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그 표시로 성모님께서는 항상 우리 옆에 현존하시며 우리의 일생을 동반하십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걸음에 함께 하십니다.
결국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은 효도하는 생활>
1)
우리는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시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또는 설명하려고 애를 쓰는 일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증명을(설명을) 도대체 누구를 향해서 하는가?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공경하면서 살았던 세월이 이천 년이 넘었는데,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시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라는 것을 증명(설명)하는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는가?
나 자신이 성모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성모님이 나의 어머니이심을 증명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과연 나는 자녀답게 잘 살고 있는가?”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제자들의(교회의) 어머니로 맺어주신 일은, 어머니가 아닌 분을 어머니로 새롭게 맺어주신 일이 아니라, 성모님은 ‘처음부터’ 신앙인들의(교회의) 어머니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1코린 12,27),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시니까 성모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어머니셨습니다.
그 일은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요한 14,18)라는 말씀에 연결되는데, 이 말씀은 원래 당신의 ‘부활’과 ‘부활 후의 현존’을 암시하신 말씀이지만, 신앙인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르침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절대로 고아가 아니다.” 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또 어머니 성모님의 전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하느님도 안 믿고 예수님도 안 믿는 사람들, 또는 종교도 신앙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고아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분이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메시아이신 분이고, 성모님도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신 분이기 때문에 ‘고아인 사람’은 원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신앙을 거부하고‘고아로 살고 있는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예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이지만, 복음을 전해 주는(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는 채로 고아처럼 살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3)
‘고아처럼’ 살고 있다는 말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살고 있다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마태 9,36)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때문이기도 하고, 그 자신들 탓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고아가 아닌데도 고아처럼 살고 있는 것이나,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의지할 곳도 없고, 외롭고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 방황하는 상황...
신앙생활은 자신이 고아가 아니고, 목자 없는 양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주님이신 예수님과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4)
그래서 신앙생활은 효도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 효도 중에 가장 큰 효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가장 크게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그분들에게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내가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정을 아주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마태 23,37; 루카 13,34)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자꾸만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가엾고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머니인 교회 -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어제 5월19일 성령강림대축일 다음날인 오늘 5월20일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8년 이 기념일을 정해 첫 번째 기념미사를 봉헌했고, 매해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이 기념미사를 봉헌하도록 했습니다.
교황님의 첫째 기념미사 때 강론이 지금도 생생하며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처럼 여성이며 어머니입니다.” 주제의 강론이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갈파했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아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선 교회를 뜻하는 단어인 ‘교회’와 ‘신부’가 여성형이기에 여성적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하는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신부이자 어머니입니다.
여성적인 차원이 없을 때, 교회는 참된 정체성을 잃게 되고 교회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 같은 무엇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교회가 여성이고, 신부요 어머니인 이러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망각할 때, 교회는 이러한 차원이 결여된 남성적인 교회가 되고, 슬프게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출산도 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여성 없이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의 태도는 마리아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입니다.
침묵할 줄 알고,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저주는, 수많은 지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압니다.
또한 사랑이 넘치며,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람으로서, 어머니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어머니 교회입니다."
교회나 수도원이 여성이며 어머니인 자매님들 없으면 참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여 미사예물이나 봉헌금을 바치는 이들은 거의가 자매들입니다.
남자 형제들은 대부분 빈손으로 오지만 자매들은 거의 무언가 들고 옵니다.
봉사자들도 대부분 자매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분들이 바로 어머니들입니다.
모성애에 비하면 부성애는 빈약하기 그지 없으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훌륭한 자녀들을 보면 십중팔구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거룩한 사랑의 어머니들입니다.
특히 교회의 어머니이자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는 모든 어머니들의 모범입니다.
끊임없이 교회가, 우리가 닮아야할 마리아 성모님의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도 재미있습니다.
창세기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된 하와와 복음의 예수님의 어머니와는 참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하와 어머니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한 참 좋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납니다.
5월 성모성월에 참 잘 어울리는 오늘 복음의 성모마리아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이 살아 있는 성화같습니다.
성모님과 우리의 자리가 잘 드러납니다.
흡사 이등변 삼각형의 구도를 연상케 합니다.
이등변 삼각형의 위 꼭지점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고 아래 한 쪽에는 성모님이, 한쪽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아드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느님께 전적 의탁하심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신 케노시스의 절정이었을 것이며, 저절로 거룩한 성모성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애제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는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매님은 “어머니의 딸입니다”로 알아들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모성월 5월에는 모든 어머니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곁에 계신 성모님의 비움의 사랑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 공동체’에서 성모님은 최고의 스승입니다.
이어서 애제자와 동시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 합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이나 교회는 물론이요 가정교회와 같은 가정집에서도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가 받는 은총이 헤아릴 수 없이 클 것이며 무엇보다도 공동체는 모성적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두 임종어를 마리아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더 깊이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목마르다!”
평생 하느님께, 진리에 목말랐던 아드님 예수님처럼, 마리아 성모님도 똑같이 목말랐을 것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아드님 예수님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음을 고백하셨을 성모님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성모님도 남은 생애 아드님의 이 두 말마디를 평생 마음에 담고 사셨을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람을 거스르는 풀은 없기에 모든 가르침은 바름이어야 한다.”
<다산>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백성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바람을 따라 눕는다.”
<논어>
바람이 상징하는 바 성령처럼 생각됩니다.
성령에 따라 배우고 깨닫고 실천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의 전생애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령의 바람따라 성모님과 함께 순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하고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고사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 맹자를 위해서 3번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간 곳은 ‘장의사’ 옆이었습니다.
아들 맹자는 망자를 위해서 ‘곡’을 하면서 놀았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상가가 즐비한 ‘시장’ 옆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맹자는 물건을 파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글공부하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맹자는 글공부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그제야 맹자의 어머니는 만족하였다고 합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3번이나 이사 하였다는 맹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두고 ‘맹모삼천’이라고 합니다.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맹모삼천에 절대로 뒤지지 않습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태평양을 건너서 기러기 엄마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온갖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른 지출을 줄일지라도, 자녀의 교육비에 대한 지출은 줄이지 않습니다.
지하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가난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정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배우자의 외모, 재력, 능력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머니는 많이 배운 배우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범학교를 나온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난도 참아 낼 수 있었습니다.
사상의 검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능력만 있다면 모두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쌀장사, 밥장사, 파출부 일도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야학에 다니면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성서를 필사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구역장들에게 선물로 주신 ‘신발’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많은 예비자를 입교 권면하였고, 기꺼이 대모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3년 동안 식사 준비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잠시 헤어지는 슬픔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말없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이제 천국에서 아들 사제와 동생 수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에서 길을 찾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찾기 전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구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제도와 전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입니다.
우리는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하고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 전구하시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동정의 몸에 잉태하시고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교회의 시작을 도우셨나이다.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곁에서 아드님의 유언에 따라 모든 사람을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들은 천상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났나이다.
비오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파우스티나 성녀가 남긴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천사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수 있다면, 그들은 두 가지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나는 영성체를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이다.”
많은 이가 영성체에 대해 무관심하고, 또 고통과 무관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바로 천사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은 영이기에 성체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 육체가 없기에 고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성체와 고통은 모두 예수님과 결합할 수 있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과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성체를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고통을 없어져야 할 악(惡)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은총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이 점을 성모님께서도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여라. 죄인들을 위해 희생을 바쳐라. 많은 영혼이 지옥에 가는데, 아무도 희생으로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신 성모님께서 어떻게 보면 하늘 나라의 신비라고 할 수 있는 이 점을 알려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기 직전, 우리 교회의 어머니로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께서는 온전히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해 메시지를 남기시고, 또 우리 곁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께 전구해 주십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도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큰 기도라고 하는 미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성모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그리고 너무 자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에, 가장 큰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성모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시는 성모님을 늘 떠올리면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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