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조선 궁궐 탐방 후기[창덕궁과 창경궁] <2>
<2024년 5월 11일>
두 번째 조선 궁궐 탐방 후기[창덕궁과 창경궁] 1편에 이어
제2편 창경궁 탐방 사진입니다.
*** 창경궁 사전답사를 5월 8일 오후에 하였기 그때 찍은 사진 일부를 포함하여 게재합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으로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다.
다른 궁궐에 비해 보조적인 궁궐이지만 숙종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영조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얽히고설킨 얘기들이 엄청 많다. 중종 때 대장금 또한 창경궁에서의 일이다.
(창경궁의 궐내각사가 복원되지 않아, 대장금 드라마는 수원 화성행궁에서 주로 촬영했지만 ~~~.)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하였다.
광복 후 1983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후,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경궁은 남향으로 있는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궁능유적본부 <퍼온 사진>
서울대학교 암병동 4층 하늘정원에서 찍은 사진
동궐도 전각의 20% 정도 복원.
1828년 ~ 1830년경[순조(효명세자 대리청정 기간)]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는 2부가 있으며 둘 다 국보로 지정(1989년)
크기는 가로 576cm X 세로 273cm.이며 1부는 고려대 박물관, 다른 한 부는 동아대 박물관 소장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함양문.
[홍화문]
홍화문(弘化門-1963년 보물로 지정)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라는 뜻이다.
홍화문은 창경궁 창건 당시 건립,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세금제도의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또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홍화문 사미도] <퍼온 사진>
[옥천교]
창경궁의 금천은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이라 부르는데, 1484년(성종 15)에 조성한
옥천교(玉川橋-1963년 보물지정)는 창경궁의 온갖 수난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옥천은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를 지나
청계천으로 연결되는데, 다른 궁궐의 금천이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데 옥천은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른다.
다리 양쪽 아래에 홍예(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홍예 사이에 귀면] 흘러 들어오는 물길에 사악한 기운이 없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다.
그런데 나가는 물길의 귀면은 웃고 있다는 얘기들이 있어 찬찬히 살펴보는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옥천 건너편에서 봐도 정말 웃고있는 듯하다. 설사 사악한 기운이 있어도 이미 지나가는 물길이니 웃으며 보낸다. 해학이 넘친다
[명정문]
명정문(明政門-1986년 보물지정)은 정전인 명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명정문은 명정전과 함께 처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다.
[명정전]
명정전(明政殿-1985년 국보로 지정)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명정’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정치공간보다는 생활공간 위주의 궁궐로 단층으로 지어졌다.
1616년 어좌 그대로, 단청 또한 그때의 것으로 400여 년이 지났다. 참고로 요즈음 화학성분의 단청은 100년을 넘기기 어렵단다.
천정 중앙에 봉(鳳 - 수컷)과 황(凰 - 암컷)을 조각하여 달아 놓았다. *** 창덕궁도 같은 방식인데 천정이 높아 잘 볼 수 없다.
문정전 가는 길, 바로 옆에 있는 편전인데 정전이 동향인데 비해 문정전은 남향이다.
문정전 *** 무슨 행사인지는 마당에 큰 차일을 쳐두어서 현판만 찍었다.
그래도 아쉬움에 퍼온 사진 한 장 올립니다. 야경이라 보기에 더 좋네.
1986년 복원 건물이라 풋풋한 느낌이다.
문정전(文政殿)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문정’은 ‘문교(文敎)로서 정치를 편다‘라는 뜻이다.
문정전은 왕이 신하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편전 외에 왕실의 장례 때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재건,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하였다.
문정전 앞마당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추존 장조(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곳이기도 하다.
*** 당시 문정전은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사용 중이었으며, 사도세자가 자진을 거부하자 이곳 앞마당에서
뒤주에 가두고 다음날 문정전 앞 선인문 쪽으로 옮겨 결국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 2008년 토지보상문제관련 불만으로 [남대문]을 전소 시킨 70대 노인이 2006년 같은 이유로 이 문정전에 방화를 했으나
관람객이 조기 진화하여 화를 면했다. 자칫 그때도 조기 진화에 실패했다면 400여 년이 넘는 국보인 명정전까지 소실 될 뻔.
[숭문당]
숭문당(崇文堂)의 ‘숭문’은 ‘문을 숭상한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왕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던 곳이다.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하기를 즐겨 했다. 현판은 영조 어필.
저 문을 나서면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
숭문당 곁의 주목이 작년 8월 명을 다했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데 ~~~.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 방부처리하여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한다.
부디 오래오래 견뎌 주기를!!!
[함인정]
함인정(涵仁亭)의 ‘함인’은 ‘인에 흠뻑 젖는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정자의 형태로 지었으며,
함인정은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사시(四時)라는 시가 걸려있다.
[경춘전] 오늘은 공연이 있네.
경춘전(景春殿)의 ‘경춘’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처음 1483년(성종 15)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다.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현왕후 민씨, 헌경황후 홍씨(혜경궁)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환경전]
환경전(歡慶殿)의 ‘환경’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왕이나 왕세자가 생활하던 내전 건물로 보인다.
환경전은 창경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층층나무 꽃
서쪽에서 동쪽으로 땅이 많이 기우려져 있으며, 내전의 중심 건물인 통명전부터 차례로 양화당, 집복헌과 영춘헌이 있다.
[통명전]
통명전(通明殿)의 ‘통명’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으로, 왕비의 침전이며 내전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다.
통명전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통명전 서쪽에 동그란 샘과 샘물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에 만들었다는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영조가 '열천(冽泉)'이라 하였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에서 용마루가 없는 유일한 건물이며,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통명전 주변 언저리에 흉물을 묻곤 하였다.
백당나무 꽃
이가 시리도록 차겁다는 그 열천(洌泉)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의 ‘양화’는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뜻으로,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하였다.
[집복헌과 영춘헌]
양화당과 집복헌 사이 큰 바위이나, 바위의 생김을 그대로 두고 건물을 세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집복헌과 영춘원]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보인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영춘헌의 ‘영춘’은 ‘봄을 맞는다’라는 뜻이고, 집복헌의 ‘집복’은 ‘복을 모은다’라는 뜻이다.
두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영춘헌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1800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복헌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 정조의 경우, 유비 박씨가 집복헌에 있어 영춘헌에 자주 들러 머문게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으며,
영조나 정조 모두 검소하며 애민정신이 강하며 작은 방에서 자주 오랫동안 머물기도 했다 한다.
오른쪽 끝 두 칸이 정조가 주로 머물며 독서를 하던 방이란다.
[성종대왕태실과 태실비]
성종 태실비(成宗 胎室碑)는 조선 9대 성종의 태를 묻은 태실의 비석을 말한다.
태실은 아기의 태(탯줄과 태반)를 묻은 석실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산에 묻고 비석과 석물을 갖추었다. 이는 아기의 건강뿐 아니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이후 전국에 있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경기도 광주 경안리에 있던
성종의 태실 석물과 비석을 이곳에 옮겨놓았다
**그 부근에 있던 자경전터에 일제가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그와 연관하여 대표적인 태실과 태실비를 둔게 아닌가 싶다
[춘당지] *** 오른쪽에 보이는 단풍나무가 해마다 아주 곱고 화려하게 단풍드는 대표적인 나무.
춘당지(春塘池)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원래는 뒤쪽의 작은 연못이 본래의 춘당지이다.
본래의 춘당지 앞쪽 큰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내농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왕이 직접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유원지로 만들었다.
1986년 창경궁 복원 때 춘당지 가운데에 섬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하였다.
춘당지에 빠진 구름이 아름다워 나도 한 컷.
[팔각칠층석탑]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은 춘당지 옆에 세운 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1층 몸돌에는 탑을 세운 때가 새겨져 있어, 1470년(성종 1)에 이 탑을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나는 중국의 탑으로 알고 있었는데 ~~~.
[대온실] <퍼온 사진>
대온실(大溫室)은 1909년(융희 3)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
[백송(白松)]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하얀색으로 ~~~.,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연리지]
*** 사람들은 흔히 혜경궁 홍씨와 정조가 구중궁궐의 살얼음판을 걸으며 서로서로 보호막이 되어 ~~~, 그렇게들 얘기힌다.
쥐똥나무 꽃
선인문 앞 회화나무. *** 흔히들 얘기한다. 옆에 놓여 있던 뒤주에 갇혀 뜨거운 여름 날씨에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8일을 견디다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와 아픔을 같이한 나무라고 ~~~, 어쩌면 회화나무 밑동이 이렇게도 험하게 뒤틀렸을까!!!
나는 창경원을 들를 때마다 이 나무 곁에서 생각에 잠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히여 ~~~,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관계, 향후 왕위 승계 문제, 어미인 영빈 이씨가 자식의 자진을 영조에게 권할 때의 심정은 ~~~.
영조는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독백한다. '너와 내가 왕과 세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그리고 정조의 효(孝)에 대해 또 생각한다. 물 한모금 드리지 못한 아픔에 아버지의 수은묘를 함춘원(현 서울대 병원 내)으로 옮겨
사당(경모궁)을 짓고, 통명전 뒤 언덕 위에 어머님을 위해 자경전을 지어 모시고, 건너편 경모궁을 언제라도 바라볼 수 있게 ~~~.
정조는 경모궁과 통하는 위치에 월근문(月覲門)을 만들어 매월 초하루 경모궁을 찾고, 아버지의 능, 화성 융릉으로 행차도 하고,
어머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 어머님에 대한 사랑을 백성에게 까지 골고루 나누고 ~~~.
그래서 창경궁 출입문인 홍화문에는 [효의 궁궐]이란 팻말까지 붙이고 있다.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집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자식은 부모에 대한 효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가정의 달이 아니더라도 늘 깊이 생각해야 할 명제요 숙제가 아닐까,
사전답사 때의 사진 한 장, 함께 합니다.
미선나무 열매
국수나무 꽃
이 언덕에 올라서면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시야도 탁 트이고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들어가는 길 부근 위치쯤에 [월근문]이 있다. 정조가 경모궁 행차를 위해 별도로 만든 문이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효의 궁궐 창경궁] 팻말이 보인다.
[경모궁 터]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함춘문] 창경궁 동쪽의 정원이었던 함춘원의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모두 훼손.
*** 일제 때, 1924년 경성제국대학 개교. 대학본부 및 법문학부(현 동숭동), 의학부 및 부속병원(현 연건동)
서울대병원 식당가
혜화역 3번출구 조금 지나면 이런 표지판이 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창경원(1909년 ~ 1983년) 때의 옛 사진 몇 장 퍼왔습니다.
동물원
봄철, 벚꽃놀이, 케이블카, 보트, 놀이기구 등.
달리, 마땅한 쉼터가 없었으니 ~~~, 남산이나 삼청공원 등이 고작.
일본식 건물이 눈에 띈다.
여름철
겨울철
1983년 창경원을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벚꽃나무는 여의도 윤중로 등으로 ~~~.
1984년 서울대공원 개원. (경기도 과천시)
통명전 뒤 언덕에 정조가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던 [자경전]을
1867년(고종 4) 경복궁 재건 때, 경복궁으로 이건한 후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1911년 그 자리에 [이왕가 박물관] 본관을 일본식 건물로 지었다.
*** 박물관 명칭은 帝室박물관, 창경궁御苑박물관, 창경원박물관, 이왕직박물관 등으로도 불렀다.
1992년 철거와 존치 논란이 분분했으나 철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 (철거) 조선 궁궐에 일본식 건물 둘 수 없다. vs (존치)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 1909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명전전, 통명전, 양화당 등 주요 전각을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했었다.
창경궁을 들를 때 간혹은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개인적 숙제이긴 하지만 ~~~, 영화 속 벤치가 놓여 있던 이 자리가 창경궁 어디 쯤일까.
하기야 1983년부터 창경궁 복원 공사를 하면서 창경원 공원 벤치쯤이야 뭐 어느 누가 신경이나 썼을까.
*** 1966년 이만희 감독 작품, 2017년 고 신성일 선배는 말했다. '수많은 출연작 중 꼭 한편의 영화를 꼽으라면' 하는
질문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라고.
지금도 생각난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문정숙,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고 소슬바람에 낙엽이 휘날리던 창경원의 그 쓸쓸함.
감사합니다.
|
첫댓글 한마디로 한 권의 역사서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내부터 후기까지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설명글이 두서없이 좀 길어진 듯합니다.
좀 더 깔끔 명쾌하게 줄였으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창경궁은 거의 와보지 않았는데 요번에 구석구석 잘 보았습니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도 아름답지만 창경궁의 연못 물 떨어지게 만들어놓은 시설..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1편 낙선재의 창틀은 사진으로 보니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이렇게 예쁜 창틀은 태어나서 첨 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밤벚꽃놀이부터 먼저 생각나는 창경궁이지만,
전각 하나, 나무 한 그루, 그루마다 저마다 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으니 ~~~.
창틀 하나에도 장인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듯.
창살의 깊이가 그날따라 유독 깊어 보였답니다.
볼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니 ~~~,
하여, 궁궐이 참 좋습니다.
창경궁은 이래저래 슬픈 사연이 많습니다.
뒤틀린 이 나무를 오늘 처음봄...
나무가 저런데 영빈이씨 혜경궁홍씨 맘은 .....
슬픈 사연들 중에 낙선재에서 외롭게살다 간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도 너무 불쌍하고..
나라가 좀 살먼하니 이런 역사도 뒤돌아보네요.
국민 모두 ..우동길벗님들 모두가
계속 역사를 잊지않고 현실에 충실하여
오래도록 우리나라 건전하게 잘살면 좋겠네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아무런 말 한 마디 없이 제자리만 지키고 있는 한 그루 고목이지만
가만히 다가서서 마음의 문을 열면 많은 얘길 들려주지요.
'溫故而知新' 공자의 말씀이 새삼스럽습니다.
낙선재에서 마지막을 보낸 황실 가족들을 기억하며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
그냥 한 묶음으로 조선에 포함하여 넘어가지만,
세계 열방의 틈바구니에서 힘 없는 국가의 마지막 몸부림,
그 일정기간은 좀더 깊이 있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무언가 막연한 불안 속에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 입장에서 더더욱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