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가 감춰둔 이순신 이야기
이순신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순신 스토리텔링'에서 옮겨온 글-
임진년 1월 10일
오늘, 새로 부임한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을 만났다.
일기를 쓰던 이순신(李舜臣)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낮에 왔던 방답첨사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은근히 마음이 가는 것이다. 늠름한 어깨며 듬직한 목소리에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순박한 눈동자가 이순신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장군, 장군 휘하에서 수군의 임무를 맡은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충정을 다 바치겠나이다."
돌산 방답진은 중요한 군사요충지로 임무가 막중한 자리이다. 조정에 알릴 봉수대의 직봉이 있는 곳이고, 성이 쌓여진 곳이며, 거북선을 만들어야 하는 선소가 있을 뿐 아니라, 본영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전라좌수영을 통솔해야 하는 지휘체계에서도 선봉에 서야 하는 곳이다.
방답첨사가 어떤 인물이 부임해 오느냐에 따라 이순신의 전력은 크게 좌우된다고 봐도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순신은 방답첨사의 인물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더더욱 우연치고는 기함할 사실은 그가 자신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방답첨사도 이순신(李純信)이었다!
밤새 잠을 못 이룬 탓인지 이순신은 혀가 까끌하여 아침상을 도로 물리려 했다. 그런데 어제 방답 이순신이 가져왔다는 젓갈과 김치가 눈에 띄어 한 숟갈 하기로 작정을 했다.
전어 밤젓과 고들빼기 김치였다. 참으로 신기했다. 짭짤한 젓갈 때문에 밥 한 그릇이 뚝딱 감추어졌다. 꺼끌꺼끌한 혀에 침을 돌게 하는 데는 쌉싸름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고들빼기 김치만한 게 없었다.
땅이 기름진 돌산에서는 갓과 고들빼기, 마늘 등 온갖 채소가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또 섬에서 해풍으로 익힌 막걸리는 장군뿐 아니라 본영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그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래도 물자가 풍요로우니 군졸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고 인심도 박하지 않아 수군들이 머무르기에 다소 여유로울 수 있으니 말이다.
동헌에서 장계를 쓴 후 이순신 장군은 엄하게 명을 내렸다.
"앞으로 방답첨사를 칭할 때는 꼭 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언감생심, 전라좌수사 이름을 함부로 부르도록 지시를 하고 있으니 장군 휘하의 모든 군졸들이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서릿발 같은 장군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전라좌수사도 이순신 장군으로 불렀고, 방답첨사도 이순신 장군으로 불렀다.
이후 이순신(李舜臣)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바다를 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군이 방답진 선소에서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한다고 해서 돌산도로 가면 어느 새 장군은 본영 선소에서 쇠사슬을 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금방 화정면으로 떠났는데 어느 새 석창성을 돌고 있다고고 했고, 진해루에서 활을 쏘고 있다고도 했다. 누군가는 이순신이 축지법을 쓴다고 했고, 누군가는 둔갑술을 부린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판옥선 위에 우뚝 선 장군도 이순신(李舜臣)이고, 대해전에 출전하는 선봉장도 이순신(李純信)이었다. 순찰을 도는 장군도 이순신(李舜臣)이고, 돌산도에서 배에 쓸 목재를 운반해 오는 책임자도 이순신(李純信)이었다. 맡은 책임을 다 하지 않는 군졸들에게 곤장을 치는 장군도 이순신(李舜臣)이고, 군졸을 훈련시키고 봉화대에 불을 올리게 지시하는 자도 이순신(李純信)이었다.
바다에 있는가 하면 어느 새 육상에서 호령을 하고 있고, 동헌에서 장계를 올리는가 하면 어느 새 잡아온 왜적들의 목을 치게 했던 이순신, 어느새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왜란(7년전쟁) 중에 유독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여수 앞바다에서만 큰 해전이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에게 참패를 거듭한 왜군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기었고 무기를 내동댕이친 채 앞 다투어 도망을 갔다. 임진년의 4차례 해전에서 보여준 이순신의 놀라운 연전연승이 축지법이니 신통술이니 하는 바람결에 떠도는 믿기 어려운 소문들에게 믿음을 심어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왜적 척후병들의 정보에는 이상하게도 방답진에 늘 이순신이 상주해 있었으니까....
본영과 방답진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갈 수 있는 이순신의 신통한 능력은 왜군의 어리석은 정보와 판단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순신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겁을 잔뜩 먹은 왜군은 세계해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23전 23승이라는 완벽한 승리를 이순신에게 바치고 말았던 것이다.
방답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을 끔찍하게 모셨다. 다른 사람은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서 빠져 나올 궁리를 하지만, 장군은 오히려 전쟁 한 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늘 그의 건강과 안위를 염려했다. 그래서 장군을 만날 때는 군평선어와 갓김치 그리고 고들빼기김치를 방답(돌산)에서 챙겨오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한 심성 때문인지 방답 이순신의 성품은 다소 유했다. 화살촉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는 그런 성격이 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한산도 승첩을 아뢰는 이순신의 장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의 대선 한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성과는 적을 얼마나 죽였느냐의 숫자 싸움이다. 일본은 조선군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냈고 조선은 왜군 머리를 베어 성과의 유무를 가렸다. 그런데 방답첨사 이순신은 적을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다.
즉, 머리를 베는 일에 소홀했기에 군법에 따라 엄격히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장계였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서 적을 사살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방답 이순신은 잘라 온 머리통 수를 세어 공적을 세우는 일에는 그다지 열심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은 적을 두 번 죽이는 참담하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되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이순신(李舜臣)은 다시 장계를 올렸다.
권준, 이순신, 어영담, 배홍립, 정운 등은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 의기투합하여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였습니다. 그러나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는데,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시기를 엎드려 기다립니다.
과연 이순신다운 장계가 아닐 수 없다. 전쟁 중에는 사사로운 감정을 누르고 군율에 따라 군대의 기강을 튼실하게 다잡았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면 한 사람도 억울함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랬다. 이순신은 그랬다. 그래서 장군 주위에는 늘 충직하고 정직한 군관들이 모여들었고 끝까지 그와 함께 했다.
장군의 직접 지시를 받는 중간 지휘관이었던 방답 이순신도 전쟁기간 내내 이순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임진년 4월 원균이 구원 요청을 해오자 이순신 장군은 누구보다도 먼저 방답 이순신과 상의를 했다. 방답 이순신은 옥포해전에서 중위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쓰러지자 조선수군을 총지휘하여 개선하였다.
과연 그 장군에 그 장수였다. 장군은 장수를 각별하게 챙겼고, 장수는 장군을 충직하게 섬겼다. 이순신과 이순신! 그들은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던 7년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역사 앞에 자신을 바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진한 향기를 뿜어내다가 온전한 꽃떨기 그대로 툭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진하고 강렬한 생을 살았다.
여수에서 만난 이순신과 이순신. 두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또한 여수의 꽃이라 불리는 두 송이의 동백꽃이었다.
이순신(李舜臣) - 덕수 이씨,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 노량해전 중 순절, 시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純信) - 전주 이씨, 방답진첨사, 전라좌수사, 전라병마사 재직 중 별세, 시호 무의공(武毅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