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묵호로 돌아왔다.
1978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린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를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엎고 있었으며, 여동생은 어머니 뒤에서 사방이 떠나갈 정도로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찢어진 손바닥이 나을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 손바닥은 유리 조각을 쥐고 싸운 덕분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아버지가 보면 않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1978년 그 가을날의 그곳에 와있다. 그러나 많이 변해있다. 묵호는 동해시로 이름도 변했고 중심가도 과거 야산이었던 신도시 천곡동으로 옮겨갔다. 과거의 중심지 묵호동 발한동 부곡동은 이제 과거의 중심지에서 퇴색된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묵호 어판장 앞의 색시집 골목에 이제는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가씨들의 껌 씹던 소리가 요란했던 묵호극장은 이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리마트와 뮥호지구대가 들어섰다.
그러나, 묵호항은 그곳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때 안묵호 동문산 자락 오징어 덕장에 마치 만국기 처럼 널려있던 오징어는 사라지고 겨울이면 러시아 수입산 명태가 걸려 있다.
세월은, 철모르고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을 늙은 장사꾼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날의 장면은 마치 영화의 정지된 화면 처럼 나의 머리 속에 화석처럼 남아있다.
그 가을 날의 햇살의 파편과, 나를 쫓아왔던 묵호시내 깡패들의 욕설과,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관중들과, 하늘을 날았던 비행기의 하얀 그림, 그리고 피가 흐르는 줄 도 모르고 유리조각을 들고 서 있었던 내 모습과, 그때 흘렸던 눈물과 어머니의 갸날픈 어깨.
그때, 나는 강릉고에서 묵호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상태였다.
안묵호 어판장을 나와서 기차역 굴다리를 빠져나와 발한동 삼거리가 중심지였다.
묵호는 영동선 기차역의 중요 정차역이었고, 동해안의 유명한 어항이었고, 외국 사람이 들락거렸던 국제항이었다. 대낮에도 묵호 극장은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로 시끄러울 정도였고, 안묵호 목욕탕과 미용실은 그녀들이 없으면 장사를 못 할 정도였다.
삼거리의 카바레는 외항선 탄 남편을 둔, 바람 난 유부녀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굴다리 위 기찻길을 석탄을 실었던 기차가 지나가면, 바람에 까만 먼지가 날아오르곤 했다.
오징어 배가 들어오는 날에는 온 도시가 흥청거렸다.
지나가는 개들 조차 돈을 물고 다닌다고도 했다. 비린 내 나는 돈은 온 도시를 점령했다.
내가 다녔던 묵호의고등학교 아이들도 그 당시 학생으로서는 만지기 힘들었던 천 원짜리 돈으로 짤짤이를 했고, 그런 돈으로 고등학생이 묵호 시내 호프집과 묵호역앞의 포장마차를 교련복을 입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때 순진했던 깡패들이 그립다.
사춘기 소년의 유리조각과 내가 흘렸던 빨간 피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박한 권력마저 순순히 내주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작은 권력으로 나를 내리누르려 했지만, 나는 그 당시 그들의 작은 권력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와 기차역에서 번져 나왔던 까만 석탄 가루,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가 정답게 다가온다.
콘돔을 불고 놀았던 아이들과 악다구니 싸움을 했던 어판장 아줌마들이 사랑스럽다.
분명, 1978 년 그 당시의 묵호의 표정은 십 대 후반의 고등학생에게는 좋지 않는 교육환경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다녔던 명문고에서의 기억에 대한 억한 심정일 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파시즘이 교실에도 지배하고 있었다.
깡패들의 작은 권력은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차라리 그 당시 묵호시내의 천박한 표정이 학교의 이성적으로 포장된 네모난 공간보다 인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