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그랬었지!," 16 한국 등산장비 제조 역사에서 이름난 사람들
옛날 히말라야 원정당시에는 세르파(Sherpa)나 포타(porta)에게 지급되는 등산화는 그들에게는 발에 맞질 않아 신지 못했다.
산중에서 신발 없이 자란 사람들이라 발가락이 모두 양 옆으로 사주경계하듯 넓어져서 등산화를 지급해도 짐에 매달고 갔었다.
그들은 뒤에 등산장비점에 팔기도 하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는 다른 물건으로 바꿔 달라고도 했다.
그 당시 카트만두(Kathmandu) 등산장비점을 뒤지면 각국 원정대들이 사용하다 선물로 주고 갔든지, 팔고 간 질 좋은 배낭과 등산화 등이 있었다.
독일의 사레와(Salewa) 제품의 등산재킷,
영국의 가리모아(Garimoa) 배낭,
미국의 취나드(Chinunder) 암벽장비,
이태리 보나티(Bonatti) 카라비너와 쟈일,
프랑스의 사르레모제(Sarremoje)크람폰과 픽켈,
일본의 타니(Thani) 12발 아이젠, 이러한 것을 구해가지고 와서 국내에서 사용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은 갖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뱃사람들이 사용하던 삼으로 만든 로프를 사용하다가 그 뒤로 남대문 '설악산장'에서 처음으로 암벽용 쟈일을 만들었고,
모래내에서 철공소를 하던 '모래내 금강' 주인인 김수길 씨는 아이젠과 하켄을 만들었고,
을지로 판코리아 앞 송림화점 임효성씨는 수제화 비브람 등산화를 만들었고,
중구 대한극장에서 남산 쪽으로 올라가면 정수장 바로 옆에서 설악산 미륵봉 붉은 절벽을 초등기념으로 레드 헤이스 (RF)라는 상품으로 등산화를 만들다가 자금난으로 그의 친구와 합작해서 영업하다가 친구가 공장을 인수하고 K2 상호로 신발을 만들었고,
스웨덴의 옵티므스(Optimus) 버너를 견본으로 '남문등산장비점'에서 황동석유버너 콜벤을 만들었다
그당시 국산 배낭은 코오롱제품이 최고로 첬는데 해외원정이나 네팔을 갈 때는 많이도 가져가서 지인이 하는 등산장비점에 팔기도 했다
해외 원정용 큰 배낭과 큰 텐트는 남대문 시장의 설악산장에서 주문해서 만들었다.
암벽장비중에 안전벨트나 여러가지 물건은 미국의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제품을 최고로 알아주었는데 이본 취너드씨가 당시 클라이머 1세대였던 선우중옥씨를 찿아가 자일파트너가 되어 북한산 인수봉에 취너드코스를 개척했었는데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씨의 몸집이 동양인과 비슷한 작은 체구였다고 했다.
그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암벽장비는 취나드라는 장비를 최고로 쳤다.
그 후에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씨의 장비는 "블랙다이야몬드"로 의류는 '파타고니아''로 나누어지는데 그당시 나도 처가인 익산에서 한국산장 간판으로 등산장비점을 하던터라 지금 우리집에도 그당시 사용한 취나드제품을 비롯해서 각국의 유명등산 장비들을 보관하고 있다.
근자에 와서는 미국의 블랙다이아몬드사 (개발자 : 이본 취나드) 제품을 모방하여 제주출신인 나와 동갑내기인 동대문에서 등산용품 도매상을 하던 '동진산악' 사장 강태선 씨가 블랙야크라는 상호로 아웃도어 사업을 하면서 그동안 붉은색 노랑색 위주의 등산복이 검은 등산복으로 전국을 휩쓸다시피 해서 성공하기도 했다.
내가 고봉설산을 오를 때 사용하던 이중화는 세월이 오래되어 외부의 신발이 삭아 버리고 가죽신발은 이태리 잠발란과 비브람제품이다.
(2023. 03. 21)
첫댓글 Claude CH Kim
대한민국 등산 아웃도어계의 산 증인이시군요.
Wonsok Yang
옛날 옛적 반가운 이름들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강호언
역사시간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