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 5,13-20
사랑하는 여러분,
13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14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15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18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
19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헤맬 때 누가 그 사람을 돌이켜 놓았다면,
20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3-16
그때에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9장)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4-15)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함은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들어가는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획득하는 나라’가 아니라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어른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어린이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아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모르기에 놀라워하고 경이롭게 여기고 경외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아들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까닭입니다.
아인쉬타인은 말합니다.
“경외심을 느끼고 감탄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떤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곧 지성적 동의를 통해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니 아는 것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선사된 것, 베풀어진 것, 선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요,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의탁과 신뢰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결국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습니다.
베풀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선사되고 주어져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막고 있는 이들을 깨우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4-15)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5)
주님!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놀라워하고 경배하게 하소서.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속해 있고, 당신 생명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야고 5,13)
오늘 야고보서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통을 겪을 때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할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 고통을 겪을 때 의외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자들이지요.
이들은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니 고통은 물론 어떤 경우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과 관련 없이 생각하고 행위를 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뿐 실제의 삶은 하느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실제 삶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은 것입니다.
강론을 들을 때나 누가 하느님 얘기를 하면 그때 잠깐 그의 귀에 하느님께서 머물다가는 이내 자취를 감추시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무엇을 합니까?
껌을 계속해서 씹듯 고통을 씹고 또 씹습니다.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고통과 싸웁니다.
고통 때문에 이웃과 싸웁니다.
그래서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고통을 남에게 토로합니다.
고통을 가지고 상담을 합니다.
이것은 혼자 고통과 씨름하고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낫고 점쟁이한테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사제에게 가지 않고 하느님께 달려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면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야고보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면
고통이 있을 때 고통을 곱씹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으로 남과 싸우지 말고 기도하라고,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원망하지 말고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어제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병 주고 약 주냐고 화를 내기도 하는데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병을 주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렸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설혹 내 잘못과 내 죄로 병이 나고 고통이 왔을지라도
그것들이 하느님과 전혀 무관치 않다고 믿는 자들이고, 그것들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무엇보다 치유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먹어 간이 나빠졌을 경우,
내 잘못으로 간이 나빠진 것이 분명하지만, 벌로 주셨건 사랑의 매로 주셨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벌로 하느님을 만나건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기도이고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신앙이어야 한다고 오늘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즐거울 때는 하느님 찬양 기도가 나오는 것이 다를 뿐이겠지요.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즐거울 때 혼자 싱글벙글하거나 히죽거리지 말고 찬양 노래합시다.
오늘 우리.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와 같은 사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 순수함을 지니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탁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거듭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유다 사회에서는 12세 이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직 잔머리를 굴리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잠시, 딴짓하다가도 부모가 안 보이면 놀라고 겁을 내어 다시 부모의 품을 찾게 됩니다.
또한 정직합니다.
잘못을 꾸짖으면 금방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순진무구, 천진난만! 전적인 의존성”
어느 날 가정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글을 알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기도하자 했더니 ‘식사 전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후딱 외워 내려갔습니다.
내용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늘 부모와 함께 기도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성 시간에 참석하였는데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던지요!
놀라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꼭 안아주셨다고 하더라고요.
반 모임에 갔는데 18개월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기도를 하는 중에는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기도를 마치며 참석한 교우들에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해 드렸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자기 할머니에게 가서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그를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칭찬하고 왔습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가 되어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눈이 맑아지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면 하느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분명히 얻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린이들의 축복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자유”라는 이론을 내세워 ‘유아세례’, ‘첫영성체’에 무관심한 분이 계십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무지한 부모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종교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의 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교육 문제를 놓고 “나중에 커서 스스로 공부하게 될 때까지 신나게 놀아라.” 하십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여주고 가르치며 신앙의 근본을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커서 신앙의 가치와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고, 또 전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협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 학교 갈 때, 입시나 먼 길을 떠날 때, 군대 갈 때, 결혼할 때.... 늘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주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힘없는 이들’>
1)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는데,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다면 가르침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이고, 쉬시는 중이었다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언짢아하시며’는 뜻으로는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한 일은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하는데, 교회 공동체에서 발언권이 약하거나 없는 ‘종교적 약자들’도 포함됩니다.
어린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원문 단어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에는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그냥 내버려두어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신앙인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어라.”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할 때, 그 만남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큰 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3)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야고 2,1-4.8-9)
코린토 1서에 바오로 사도가 부자들을 꾸짖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1코린 11,17.20-22)
당시 코린토 교회의 부자들이 ‘아가페 만찬’을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먹고 마셨고,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소외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상황을 전해 듣고 대단히 노해서 그 부자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4)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의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차별도 역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고, 유식한 사람도 없고 무식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으니,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그런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 자기가 유식하다고 해서, 지금 고위직에 있다고 해서, 지금 상류층에 있다고 해서, 지상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도 특별대우를 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와 같이 되라 -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청춘을 즐겨라”, 새벽 코헬렛 독서 중 한 말마디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인생을 즐겨라” 권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그러니 고해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새벽에 젊은 군인 자살자 13명의 연미사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사관 9명, 병사3명, 군무원 1명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나이도 20-30대 젊은이들 같은데 사랑의 추억, 사랑의 스킨십이 있었더라면 허무하게 인생 마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구보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순수한 인간 원형을 상징합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나이에 관계 없이 어린이가 살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두 분에게서 이런 어린이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주고 받은 댓글의 일부,소개합니다.
“이 거룩한 요셉수도원에 와서 집을 짓는 일 미사드리는 은총
어린이같이 순수하신 수사님들 뵈면 매일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저에겐 싯귀처럼 예쁜 마음이 반짝였고, 저는 장미꽃 사진과 함께 다음 댓글을 보냈습니다.
“자매님 글이 시같이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리며 장미꽃 사진 선물합니다.”
순수한 마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소녀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살아있는 자연의 반응이 신비롭고 고맙습니다.
수도원 뜨락에 벌써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고 몇 개 따먹던 중 이 장면을 포착한 수사님이 사진에 담았고, <앵두와 노수도승> 이란 시도 적어 보내줬고,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노수도승이란 말을 읽으며 노수도승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새로이 했습니다.
“오늘은 한 개
내일은 두 개
모레는 세 개 먹어야지
앵두와 함께 익어가는 수도승의 삶”
빙그레 미소짓게 하는 어린이같은 마음이 반짝이는 시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누구나 사랑스런 어린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13세였던 아이들이 지금은 60세인데 이번에도 수도원을 찾아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줄 때의 모습은 그대로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올해 5월은 피정집 공사라 피정손님들을 받지 못했지만 예전 5월 소규모 인원의 피정때는 꼭 어린이날 노래, 동요를 불렀습니다.
노년에 속한 피정자들이 흥겹게 부를때는 그대로 어린이들 같았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동심의 회복을 위해 동요부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날라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수도형제 모두가 흥겹게 부르는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 세 번째 후렴과 시편 131장 후반부 내용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오늘 복음은 한폭의 살아있는 그림 같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잘 드러납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 역시 순수한 아이같은 어른들입니다.
쓰다듬어 주는 사랑의 터치, 스킨십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의 스킨십이 결핍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공허한 마음에 영혼의 몸살을 앓습니다.
저는 동생이 생기기전 6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으며 컸습니다.
애정이 넘치고 치유하는 스킨십의 터치는 아이들, 병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안아주라 있는 가슴이요 악수도 하고 등을 두드려 격려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고 있는 또 만세를 부르라 있는 두 손입니다.
두 발에 두 손의 직립인간에 주어진 축복의 두 손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아주 권위적입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은 바로 우리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일수 있습니다.
섬기는 일이 아닌 통제와 조종에 그 권위를 사용합니다.
순간 예수님의 개입이 기민합니다.
오늘 우리의 경각심을, 우리의 동심을 일깨우는 평생 교훈으로 삼아야 할 복음입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 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멋진 어른인지요.
매주 수요일 삼종기도 후 강론 전 베드로 광장에 어린이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행렬하는 도중 아이들을 받아 쓰다듬으며 축복하시는 교황님의 모습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큰아이 교황님처럼 보였습니다.
어린이다운 특징은 무엇입니까?
개방적인 열린 마음, 순수한 의탁, 편견없는 정신, 단순성이요 예수님은 물론 성인들이나 우리 주위에서도 우리는 이런 천진무구한 어른들을 간혹 만나기도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 라는 잠언도 우리의 무지를 깨우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말라
큰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7-8세기에 걸쳐 살았던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성 베다 학자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은 7세때 수도원에 보내져서 원장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도를 받으며 19세에 부제품, 30세에 사제품을 받았고 평생 어린이다운 순수성을 잃지 않고 베네딕도회 본연의 수도승생활에 충실했던 분입니다.
성 베다는 당대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일생동안 늘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승이었으며,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란 칭호를 받은 성인은 뛰어난 학자이면서 지극히 겸손했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우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 불렀으며, 시성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시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육신이 모두 사라져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내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고 싶습니다.”
성인은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했고, “성령께”하고 말하는 순간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 사도 역시 동심의 성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야고보서 마지막으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역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게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어린이와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전존재를 “사랑의 터치”로 치유해 주시고 동심을 회복시켜 주시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삶은 언제나 축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야고 5,13)
여러분의 삶은 즐겁고 행복합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때로는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겁니다.
즐겁고 기쁠 때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지요?
그 흥얼거림이 단순히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라면 더욱 좋겠지요.
기쁜 일이 있다면 내 안에만 감춰두지 말고
하느님께 찬양 노래를 드리라네요.
그건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는데, 반대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을 원망하거나 힘들다고 짜증을 내거나 술을 퍼 마시면 되나요?
사도는 말하네요.
그럴 땐 기도하라고요.
훨 나은 방법이 아닐까요?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즐거울 때는 찬양 기도 드리고 괴로울 때는 청원 기도 드리고...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축제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복된 분이라 믿습니다.
오늘 그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본당 어르신 부부가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원하였습니다.
봉사자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형제님은 집에 있었는데, 자매님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합니다.
전화를 드리니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형제님이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매님이 돌아왔고, 봉성체 날짜를 착각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하루 전날 확인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때로 착각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고백성사와 봉성체를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어르신 부부는 점심을 먹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어서 근처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한(恨)’이 맺힌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던 부부에게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을 믿으면서도 어머니의 가슴에는 ‘한’이 응어리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가슴에도 ‘한(恨)’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이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늘 밝고 화사했던 어머니도 가슴 한 쪽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한(恨)은 아니지만 몇 번의 아쉬움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의 임종을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5월 5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함께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 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도 오셔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들이 미사를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9월 10일 목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뉴욕에 있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으로 갈 수 없었고, 뉴욕에서 다른 분을 위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추기경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잘 마쳤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방송 사장 신부인 동창 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1995년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의 교포사목을 권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느덧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열정은 넘쳤지만, 절제와 겸손의 덕이 부족했습니다.
부덕한 저의 탓으로 미국으로의 인사이동은 취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좀 더 여물게 하신 다음 미국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한 후에 증상에 맞는 ‘처방전’을 만들어 줍니다.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으로 가면 약사는 처방전에 따른 약을 줍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기도’입니다.
즐거운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찬양 노래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처방전은 교회의 원로들입니다.
원로들은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발라줍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처방전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교회와의 연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영혼에 하느님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우리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 분노, 미움, 원한’의 쓰레기를 담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 희생, 나눔, 배려, 인내, 사랑’의 보석을 담으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저희 본당에는 다른 성당과 달리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린이 미사 때 120~130명의 아이가 나와서 열심히 미사에 참석합니다.
노래도 정말 크게 부르고, 율동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 미사 시간이 성인 미사 시간보다 더 깁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그리고 너무 재미있다면서 미사에 임합니다.
저의 역량인 것처럼 생각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면, 저와 아이들의 나이 차가 자그마치 40년이 넘습니다.
또 제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결국 저의 능력이 아닌, 아이들 스스로 집중해서 그런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성가는 전혀 부르지 않고, 기도 손 하는 친구는 이제 찾기 힘듭니다.
청소년들은 말합니다.
미사가 너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말입니다.
분명히 이 아이들도 어린이 미사 때는 열심히 했고 또 재미있어했는데 말이지요.
똑같은 미사인데 과거에는 재미있고, 현재는 재미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미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재미에 너무 중독된 것입니다.
모든 중독성 물질이 그러하듯 재미에 대해서도 내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었던 일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재미와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를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미사에 흥미를 잃었으면 더 집중해야 가능했습니다.
더 집중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 너머를 볼 수 있는 것이 ‘감각’인데, 이 감각이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집중할 때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께 주시는 사랑을 통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이들의 이 감각을 말씀하십니다.
순수한 마음, 작은 것에서도 감탄하는 마음, 무조건 의지하는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편안함만을 추구하면 절대로 믿음의 감각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편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뛰어다닙니다.
뛰어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고 신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향해 순수한 마음으로 신나게 뛰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감각이 사라졌다 싶을 때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