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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정동섭 교수가 말하는 행복의 심리학
정동섭 교수(기독교상담학)
들어가는 말
우리는 가끔 “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가?”하고 혼자 묻는다. 사는 일이 힘들 때 대체로 그런 의문이 들지만, 힘든 것 자체보다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은 것이 문제가 된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공통된 욕구가 있다. 하나는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하려고 하는 생존의 욕구요, 다른 하나는 그저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행복의 욕구이다. 식물과 동물은 물론 모든 인간은 강력하고 엄숙한 생명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이 살되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살려고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이라면, 행복은 인간의 삶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목적이라 할 것이다(고범서, 1994). 행복은 시대와 인종과 지역을 넘어서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심리적으로 병들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 지기를 바란다. 아기가 태어나도 젊은이들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취직을 하여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늙어서 회갑과 고희를 맞이하여도 여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축원한다.
실로 행복을 추구하고 불행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우리의 욕망은 성생활에서 자살에 이르기까지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좌우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행복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행복의 추구를 인간의 기본 권리로 선언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헌법도1) 행복추구권을 국민의 기본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행복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행복하기를 바랄 뿐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알지 못한 채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행복을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객관적인 생활조건이 점점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왜 그다지 행복해하지 않은갚에 대한 심리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도들의 관심도 커졌다. 심리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처음 생겨난 이후 지난 120여 년간 우울증이나 불안, 수치심, 죄책감, 스트레스와 같은 부정적인 인간심리에 대한 연구가 건강과 사랑, 그리고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주제를 다루는 연구보다 훨씬 더 많았다(마이어스, 2001).
실제로 심리학 교과서를 살펴보면 행복보다는 괴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변하고 있다. 젊은 심리학자들의 연구덕택으로 이제는 행복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남보다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특성의 성격, 어떤 대인관계, 어떤 경험,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자신이 행복감을 높이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한 신선한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정서적 건강과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행복의 비결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도 행복에 대하여 다양하게 해석하고 정의하였다(행 17:18).2)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행복을 최고선(the highest good)이라 주장하면서, “행복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다른 모든 것은 행복을 얻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철학자요 심리학자였던 William James도 “결국은 행복을 얻고 그것을 지키고 되찾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숨은 동기가 되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에, 근세 최고의 철학자 Immanuel Kant에게 있어서는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은 도덕법에 자율적으로 복종하는 선의지이지 행복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행복의 근원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성현들이 계속 출현하였다. 그중 더러는 행복이 덕스러운 삶을 사는데서 나오는 것이라 하는가 하면, 악을 멀리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라 보기도 하고, 이 순간을 위해 사는데서 오는 것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래를 위해 사는데서 생기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독한 삶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된 신화에서 사회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진실을 가려내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의 식생활, 평균수명, 사망률, 경제지표, 주거생활 등을 관찰하면서 우리들의 육체적, 물질적 행복을 측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객관적 행복’의 측정치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의 ‘주관적 행복’, 즉 그들의 행복감이나 삶에서의 만족도 등에 더욱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이러한 요소들을 규칙적으로 측정하기에 이르렀다.3)
1970년대 이후 행복학(science of happiness)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행복(happiness)’, ‘삶의 만족(life-satisfaction)’, ‘주관적 삶의 질(subjective quality of life)’, ‘안녕(well-being)’과 같은 주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질문은 어떤 경험, 환경, 특성, 태도들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누가 행복하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그리고 무엇이 있으면 행복한가? 이 논문은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의 삶은 Fromm(1976)이 말한 것처럼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한편 Tillich(1952)는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 중에서 존재의 삶을 기독교적인 신앙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해석하였다. 필자는 행복은 본질적으로 물질이나 권력 또는 명예 같은 것을 소유하고 즐기는데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잠재적 가능성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발휘하는 삶의 방식에 대하여 증여되는 선물(고범서, p.58)이라는 전제 아래 행복에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행복이란 무엇인가?
많은 이들에게 행복은 삶의 지상목표이다. 일하고 돈 벌고 멋 내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등의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하여서”하는 일들이다. 행복, 행복감을 정의하기는 매우 힘든 일인데,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간단히 넘어가서 “당신은 행복합니까?”를 직접 물어보는 방법을 택한다. 보다 근래에는 행복이라는 너무 일상적이고 광고 문구에서 남용되는 단어보다는 (주관적)안녕(subjective well-being) 혹은 안녕감(sense of well-being)이라는 용어가 더 자주 쓰이고 있다(예, Diener, 1984; 이훈구, 1997).
행복이란 무엇인가?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행복인 것이다. “행복이란 전반적인 삶에 대하여 느끼는 주관적인 자기만족이다”(이훈구, 1997, p.214). 행복이라는 말 앞에 주관적이란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할 만큼 행복은 본인이 스스로 삶을 즐겁다고 느끼는 넓고 일반적인 의미를 내포한 주관적인 생각이다.
행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그것이 현시점에서 삶 전체가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는 것이며, 얼마나 즐겁고 만족스러우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마이어스, 2001, p.2). 만족이 인지적 판단의 결과인데 비해 행복은 감정과 느낌으로, 즉 매개된(mediated) 반응이 아니라 직접적인(immediate) 반응으로 이해된다(홍숙기, 1994). 그러나 만족감과 안녕감 그리고 행복도는 흔히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
행복이란 어떤 경험인가? Davitz(1969)는 성인 남녀에게 행복은 어떻게 느껴지는가를 말로 표현하게 했다. 응답자들은 “내적인 따듯한 환희와 희망이 넘치는 느낌”(82%), “미소 짓고 싶은 느낌”(72%), “안녕감과 내적 평화”(66%) 순으로 응답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한 상태,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행복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행복, 즉 주관적 안녕의 정의에 대하여 아직 심리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지 않다. 다만 Veenhoven(1991)의 정의가 현재로서는 가장 포괄적인 정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주관적 안녕을 크게 전반적 개념과 세부적 개념의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전반적 개념에는 생활만족(life satisfaction), 욕구충족(contentment), 그리고 기쁨수준(hedonic level)을 포함시켰고, 세부적 개념에는 직무만족(job satisfaction), 자긍심(self-esteem), 그리고 통제신념(control belief)을 포함시키고 있다.
Maslow(1970)는 생리적, 안전, 사랑, 자존감, 자아실현 등 5단계 욕구위계이론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의 5가지 욕구는 크게 두 가지, 즉 결핍(defficiency)동기와 성장(growth)동기로 묶여진다고 주장하였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는 무엇인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욕구로 결핍욕구에 해당하며, 반대로 자아실현의 욕구는 어떤 욕구가 결핍되어서 발생하기 보다는 자신을 개발하고 향상시키려는 욕구이므로 성장욕구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욕구충족과 주관적 안녕간의 관계를 연구한 최경희(1995)는 생리적 안전 욕구 보다는 성장욕구가 주관적 안녕과 더 높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우리의 행복에는 생리적 욕구보다 성장욕구의 충족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이훈구, 1997, p.102).
한편, Averill과 Moore(1993)는 행복을 세 가지 체계에서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생리적 체계와 심리적 체계, 그리고 사회적 체계이다. 이들에게 행복이란 세 가지 체계 각각의 여러 수준의 목표를 최적화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예컨대, 생리적 체계에서 최고수준의 목표는 유기체를 존속시키는 것이고, 심리적 체계에서의 최고수준 목표는 자아실현이며, 사회적 체계의 최고수준의 목표는 사회적 관계의 유지이다.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사회생활과의 조화된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윤리학자 고범서(1995)는 생리적 긴장과 심리적 긴장의 해소에 수반되는 쾌락(pleasure)과 풍요의 영역에서 인간의 경험하는 희락(joy)을 구별하면서, 희락을 행복과 동일시하고 있다. 굶주림(hunger)은 단순한 생리적 욕구를 나타내는데 비해, 식욕(appetite)은 맛있는 미각적 경험에 대한 예상이다. 즉, 음식에 대한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그것이 일정 시간 지속되면 강한 긴장을 자아내며, 그것이 충족되면 만족 즉 쾌락을 느낀다. 이와는 달리 식욕은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각의 만족은 굶주림의 만족과 질적으로 다르다. 굶주림과 식욕은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미각은 음악이나 예술의 맛처럼 문화적 발달과 세련의 산물이요, 풍요라는 말의 문화적 및 심리적 의미에서의 풍요의 상황에서만 발달될 수 있다. 굶주림은 결핍의 현상이며, 그것의 만족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식욕은 풍요의 현상이며, 그것의 만족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생산성의 현상이다. 식욕의 만족에서 수반되는 쾌락은 기쁨, 즉 희락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Fromm, 1947, p.187).
Maslow(1970)는 Fromm을 인용하여 전자의 쾌락을 낮은 기쁨(결핍동기의 충족), 후자의 즐거움을 ‘높은 기쁨(성장 또는 존재동기의 충족)’이라 부른다. 낮은 기쁨은 단순자극(simple stimulus)을 통한 긴장해소에서, 높은 기쁨은 활성화자극(activating stimulus) 내지 긴장고조에서 나오는 것이다(홍숙기, p.50). 행복은 높은 기쁨, 즉 희락의 계속적 또는 통합적 경험을 말한다. Fromm(1947)은 희락에 비추어 행복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희락과 행복은 질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양자는 희락이 단일한 행동에 대하여 말해지는데 대해서 행복은 희락의 계속적 또는 통합된 경험에 대해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한에서 다르다. 우리는 (복수로) 희락들(joys)을 말할 수 있지만 (단수로) 행복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p.189). 희락은 자기실현의 목표를 향한 길에서 체험되는 것이다”(Fromm, 1976, p.117).
예술에서건 학문에서건 또는 사업에서건 직업에서건 인간이 그의 잠재적 가능성을 생산적으로 발휘하는 활동에 수반되는 만족감, 즉 즐거움이 희락이요 행복인 것이다.
과정이론 또는 몰입이론의 주창자 Csikszentmilhalyi(1990)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면서 느끼는 황홀감 때문에 그 일에 매달린다고 주장하면서“한 활동에 너무 몰두해서 다른 아무 것도 상관이 없는 상태”(p.4)를 최적경험(optimal experience), 흐름(몰입: flow), 혹은 즐김(enjoyment)이라 불렀다.
행복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인간은 음악과 미술에서 즐거움을 느낄 때, 한가하게 산책하며 자연에서 조화의 미와 우주의 미를 즐길 때, 독서에서 삶과 역사와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희열에 젖을 때 행복을 체험할 수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며, 거기에는 고생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직업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생산적으로 발취하며 예술의 감상과 지적 이해와 자연이 주는 희락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범서, p.113).
1)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안녕(행복)과의 관계
과학기술의 발달, 경제성장, 자유와 개인주의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생활수준의 향상과 개인의 자유라는 밝은 현실의 바로 뒤에 존재하는 범죄, 마약문제, 가족의 해체, 정신병리 증가 등의 어려운 현실을 보는 사람은 이 물음에 ‘그렇다’보다는 ‘아니다’라는 대답을 하게 된다.
삶의 질과 주관적 안녕 간의 관계는 두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국가 간의 비교연구이고, 또 하나는 국가내의 연구이다. 최근 Diener와 그의 가족은 한국을 포함한 55개국의 삶의 질과 국민들의 주관적 안녕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이 못 사는 나라의 국민보다 더 행복한 것도 아니었고, 한 나라 안에서도 국민총생산의 성장과 더불어 행복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횡단 적으로 볼 때도 수입수준과 행복의 상관은 미미한 것이었다(Diener, 1984; 홍숙기, 1994; 이훈구, 1997).
객관적 삶의 질(예컨대 GNP, GDP, 사회복지수준, 교육수준, 인구과밀, 교통체증, 수명, 범죄율 등등)과4) 주관적 안녕과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상관관계가 높지 않을 수 있다.
2)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행복한 것은 아니다. 철학자 Bertrand Russel은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하다고 말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의 저자 Dennis Wholey는 미국사람의 약 20%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한다. 『행복을 이루기 위한 15가지 비결』이라는 책에서 Archibald Hart(1988)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0%보다 훨씬 적다고 보고 있다. 전국적인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약 1/3이 “매우 행복하다”고 답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하루의 50%가 행복감을, 22%가 불행감을, 그리고 나머지 29%가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닌 그저 그런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Myers, 1992, p.48).
① 한국인의 생활만족도
삶에 전체적으로 만족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갤럽의 국제비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만족도는 비교된 나라들 중 가장 낮았다(5.5가 중심점인 10점 척도에서 5.34; 참고로 일본은 6.61; 미국은 7.60; 18개국 전체평균은 7.48, 한국갤럽, 1990). 그래도 반수가 만족 쪽으로 응답하였다. ‘아주’(8%), 혹은 ‘약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는 사람들의 비율(65%)도 절반이 넘었지만, 국제적으로는 가장 낮은 비율이었다(일본은 77%, 미국 92%, 18개국 전체평균 83%).
150편에 가까운 연구를 종합해 본 결과 남녀라는 성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1%미만이며, 설사 있다하더라도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더 행복감을 느낄까 말까하는 정도이다. 적어도 행복감에 있어서는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남녀가 평등한 것 같다(Myers, p.80). 행복이란 자신의 흥미에 맞는 일을 하고 능력을 발취하고 성취하는 데 있다. 재산, 나이, 성, 부모의 사회적 지위, 주거지역, 교육수준 등이 행복수준을 점쳐주지 못한다(p.86).
불행을 경험하는 데는 남녀 간에 차이가 있다. 여자가 남자 보다 장기적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두 배나 된다. 여자가 우울증, 불안, 공포증에 걸리는 경우가 남자보다 배로 많은데 비해, 남자는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다섯 배나 높은 것은 남자의 자존감이 낮은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Myers, p.86).
삶의 질에 대한 국내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1981)에서 12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만족과 행복의 평균점수는 50점 이하로 나타났다. ‘만족’은 31.5, ‘불만족’은 13.1, ‘기쁨’은 48.1, 그리고 ‘걱정’은 24.7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19%가 만족과 기쁨보다는 불행 쪽으로 응답했음을 발견했다. 한국 사람의 주관적 안녕감이 외국에 비해 비교적 낮게 나온 것은 한국이 불행한 과거를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지난 2,30년 동안 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은 엄청나게 높아졌지만, 삶에 대한 만족이 같이 높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주로 일과 사랑의 세계에서 만족과 행복, 불만과 불행을 체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만족도와 행복도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매우 낮으며, 직업과 가정생활에 만족하는 정도도 마찬가지로 매우 낮다(한국갤럽, 1990). 이는 가정과 직장을 포함한 우리의 생활환경이 우리에게 편안한 곳 이라기보다는 각박하고 살벌한 환경이라는 것을 시사한다(홍숙기, 1994).
<미주>
1) 대한민국 헌법 2장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2)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2-270)를 시조로 하는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행복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덕이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①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우침 없이 살아야 하며 ② 두려움을 없애고 ③ 동료를 사랑해야 한다. 반면에 제노(Zeno: 기원전 300)를 시조로 하는 스토아학파에서는 사람이 의지에 따라 살면 자신의 운명을 실현시킬 수 있다; 행복이란 단순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기 보다는 선악을 구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욕망을 다스리고 사는데 있다고 가르쳤다(마이어스, 2001, xv).
3) 사회학자와는 달리 심리학자가 주관적 ‘삶의 질’ 또는 ‘삶의 만족’에 관해 연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1970년대 말에 ‘주관적 안녕’ 또는 ‘행복'을 측정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에 일리노이 대학의 Diener를 위시한 일단의 성격, 사회, 임상, 측정 심리학자들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사회학자들이 연구한 생활만족도가 심리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심리학자들은 이 지표를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 또는 ’행복‘이란 제목 하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4) OECD의 삶의 질은 모두 여덟 개의 사회적 관심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① 건강 ② 교육과 학습 ③ 고용과 작업환경의 질 ④ 시간과 여가 ⑤ 재화와 서비스의 지배력 ⑥ 물리적 환경 ⑦ 사회적 환경(자살률) ⑧ 개인적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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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들의 특징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성격이 주관적 안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겉모양과 소유가 중시되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행복감에 도움이 된다. 지난 10여 년간 성격과 주관적 안녕간의 관계를 살핀 연구들이 꾸준히 등장했는데, 이들 연구에서 행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성격요인은 적극적인 정신적 태도로서, 외향성(extravertism)과 자존감(self-esteem), 개인적 통제감 또는 자기효능감(sense of personal control/self-efficacy), 그리고 낙관주의(optimism)이다(Diener, 1995; Myers, 1992).
성격이란 무엇인가? 성격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그 차원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특질과 자아개념, 그리고 신념과 태도상의 개인차이다. 외향성-내향성은 성격특질에 속한 것이고, 자존감은 자아개념의 한 특성이고, 낙관주의니 자기효능감이니 하는 것은 신념과 태도에 가까운 것이다.
① 자존감 : 행복한 사람은 자신을 좋아한다.
자존감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내리고 있는 평가인데, 이는 긍정 또는 부정으로 표현되며 자신이 유능하고 중요하며 성공적이고 가치 있다고 믿는 정도를 나타낸다”(Coopersmith, 1967). 높은 자존감, 즉 자긍심, 자부심, 자중감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의 연구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느낌은 자신의 약함뿐 아니라 강함에 대한 지각, 약함에 비해 강함을 더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을 토대로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Pelham & Swann, 1989). Veenhoven(1991)은 자긍심을 주관적 안녕의 한 구체적 정의라고 말하면서 성격의 한 요소인 자긍심이 주관적 안녕, 즉 행복과 같은 개념이라고 까지 주장했다.
일반적인 생활만족도를 가장 잘 예언하는 것은 가정생활의 만족, 친구관계, 금전적 수입 등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도라는 것이다. 자신을 좋아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활전반에 대해 좋게 생각한다는 것이다(마이어스, p.133).
자긍심이 많은 사람, 즉 자기존중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고 유복감을 느낀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학문적 수행이 더 우수하고, 심리적으로 더 잘 적응하며, 실패 및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고 적절하게 분노를 표현하며,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외부적 원인에 귀인하며,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그 이후에 수행을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이훈구, 1997, p.114).
행복한 부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UCLA 연구원 Allen Parducci(1984) 박사는 이 주제를 연구한 결과, 돈과 성공, 건강, 아름다움, 지능, 권력 등은 부부의 주관적 행복과는 별로 관계가 없음을 발견하였다. 오히려 행복한 부부는 그들이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적응능력과 올바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레스 패로트 부부(Les & Leslie Parrott, 1998)는 당신과 배우자가 평생을 행복하게 사느냐 불행하게 사느냐하는 것은 당신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하였다(p.80).
건강한 자존감은 긍정적이며 현실적이다. 따라서 현실에 기반을 둔 이상을 순수하게 성취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살아간다. 따라서 건강한 자존감은 좀 더 영구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준다.
② 개인적 통제감(자기효능감) :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감을 예언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생활의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자신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통제감이다. 자기통제감이란 무엇인가? “내 인생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또는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나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는 진술 중에 어느 것에 동의하는가? “세상은 몇몇 사람의 권력자가 지배 한다” 또는 “보통 사람이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진술은 어떤가? 이때 우리는 자신의 운명은 재수와 운명에 달려있다고 운명론적 생각을 하든지,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지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통제소재 또는 통제부위(locus of control)라고 지칭하는데, 전자를 외적 통제신념이라 하고, 후자를 내적 통제신념이라 한다. 자기 통제력이란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으로서, 자신의 삶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만족, 자신이 인생에서 성취하는 업적에 대한 만족, 그리고 자신에 대한 만족을 나타내는 차원이다(이훈구, p.208).
위와 같은 질문에 내적 통제력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 즉 자신이 자기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학교 성적도 높고,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며, 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다(Myers, p.113). 내적 통제는 여러 문화권에서 학교성적, 인지발달, 그리고 다양한 성취와 정적인 상관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Findley & Cooper, 1983).
통제감의 상실은 가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돈이 주는 그 조그만 행복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데서, 즉 우리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Myers, p.114).
개인의 통제력을 높아지면 건강과 사기도 올라간다. 경쟁상황에서 외적 통제자들은 쉽게 포기하지만 협동상황에서 내적 통제자 은 더 잘 적응한다. 대인간 행동에서 내적 통제자들은 이성과 더 자주 교제를 하고 그 관계에 만족한다(이훈구, p.118).
자신의 시간을 잘 관리해서 통제감을 갖는 자는 역시 행복하다.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 특히 시간을 계획하지도 채우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불만에 차게 마련이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들은 시간이 꽉 차있고, 계획되어 있으며,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불행한 사람들은 미룰 때가 많으며, 비효과적이다(Myers, p.116).
민주주의와 개인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인간은 가장 잘 번영한다. 그 이유는 대개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자신이 노력하면 상황과 운명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적 통제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Koch(2000)가 어렸을 때의 사소한 일, 우연한 사건, 그리고 작은 원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유아기에 형성되는 자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유아기의 사고방식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이도 형성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힘을 얻어 현실로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믿으면 실제로 그렇게 되고, 모두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실제로도 그렇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하는 사람이 된다(p.185).
새로운 배우자, 새로운 직업, 새로운 집, 생활양식 또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태도 등에 대한 결정은 모두 한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또한 모두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숙명론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 별로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인간에게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가 있다(Koch, p. 186).
③ 낙천주의 : 행복한 사람은 희망에 차 있다.
영혼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이 모여 진리가 된다. 안에 있는 것이 곧 밖으로 나온다.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 23:7). 사물을 보는 태도가 긍정적일수록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물 반잔이 있을 때 반 밖에 없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반이나 남은 쪽을 보는 태도가 더 행복을 느끼게 한다.
질병의 결과에 획기적인 차도를 가져오는 가장 확실한 것은 희망이다(스위트, 2001). “희망은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를 성취하려는 의지와 방법이 있다고 믿는 것”(Koch, p.188)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낙천적인 사람이 더 건강하며 병도 잘 안 걸리고 심장수술이나 암에서 쉽게 회복하며 혈액검사를 해보면 면역성도 크다고 한다(Myers, p.117). 정신적, 감정적 상태의 변화가 신체의 변화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낙천적인 사람은 “신념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다”와 같은 태도로 인생을 대한다. 낙천적인 사람은 성공을 더 많이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연문희(1996)는 성공은 성공의 어머니이고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라고 했다.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성공한 것만큼 자기가 성취할 수 있는 목록이 늘어난다. 그것이 쌓여서 자신감을 갖게 하고, 자신 있게 문제에 도전할 때에 온 정력을 집중시켜 일할 수 있다. 그런 경우 문제는 잘 해결될 수 있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성공으로 기록이 남게 되어 자아개념을 긍정적이 되게 한다”(p.169).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단순한 사실이며 번영과 성공의 놀라운 법칙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 그것은 나쁜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태도만 바꾸면 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다” 등등의 표현은 다 같이 낙천주의에 대한 낙천주의요, 귀담아 들을만한 진실을 담고 있다. 늘 습관적으로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기쁨과 모험을 더 즐긴다.
여기서 말하는 낙천주의는 허상적이고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던 기대가 무너질 때에는 부끄러움과 좌절감이 따를 뿐이다. 현실을 무시한 끝도 없는 낙천주의는 끝도 없는 욕구좌절을 가져온다. 행복을 위한 처방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 생각 하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넉넉한 낙천적 사고’로 희망을 가져야 하지만 ‘염세적 직관’도 있어서 안이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현실주의적’ 생각도 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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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찬찬하게 다 읽어보면서 나는 과연 행복한가에 대해 그 주체는 과연 무엇으로 가늠하는가에 대해서 돌아봅니다..귀한 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