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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베드로 1서의 말씀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 질문은 '선하신 스승님'이 아니라 '주님'으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닌, '당신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본질적으로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자기를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질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 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 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이대로 가면 나의 끝은?>
오늘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어떤 부자의 답에 대견해하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점에서도 이 부자가 대견하지만, 제 생각에 더 대견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르 10,17ㄴ)
지금까지 잘 살아왔을 뿐 아니라 미래 그것도 영원한 미래에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는 이 부자의 나이가 나오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에는 젊은이로 나오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자는 젊은데도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저나 웬만큼 산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하고 그리 대견하다 할 것이 못 되겠지만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벌써 관심이 있으니 대단하지요?
어제 저는 계획된 연수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오랜만에 걷는 월 피정을 할 수 있었는데,
걸으면서 오늘 부자 청년의 이 질문과 함께 내내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자주 저 자신에게도 또 다른 분에게도 던지는 질문,
이렇게 계속 가면 그 끝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에 대한 질문을 또 던졌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잘 산 것이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 살았어도 앞으로 잘못 살면 다 헛것입니다.
지금까지 아주 잘못 살았어도 앞으로 잘 살면 그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계속 가면 나의 끝이 어떻게 될지 물어야 합니다.
노망난 늙은이로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지지난 주, 제가 매주 미사 드리러 가던 수녀원의 수녀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제가 그 장례미사를 주례했는데,
제가 처음 수녀님을 만난 7년 전, 암 수술을 하신 이래로 수녀님은 병치레를 내내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병과 싸우셨습니다.
병을 이겨내려고 무척 애쓰셨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병과 싸우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셨겠지만, 차츰 벗으로 그리고 천국 여정의 반려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작년 말 종부성사를 청하셔서 종부성사를 드릴 때는 거의 성녀가 되어 계셨고 이미 아버지 하느님 앞에 계셨습니다.
앞에서 노망난 늙은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노망이란 것이 늙어 망령부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망령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망령이란 영이 흐려진 것이고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일생으로 수도자로 살았어도 수도자답지 않게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못 견뎌 하고 이 세상 생명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수도자의 정신이 흐려지거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끝은 무엇일까?
노망일까 성덕일까?
초대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잘 따를까? 돌아설까?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런 질문을 얼마나 자주 던지며 살아가시나요?
한 번도 던져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아! 그런데 제가 너무 무례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드렸군요.
그랬다면 용서하시고 제 의도는 그것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족한 하나를 채워라>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생활공간도 컨테이너로 꾸민 한 칸의 방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봉투 하나를 주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 그 사람의 진면모를 알게 됩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 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결혼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이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오늘 부자 청년과 관련된 복음 말씀을 들으시고 나서 고민이 큰 분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이자 전제 조건으로 모세를 통해 건네주신 십계명에 대한 준수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계명에 대한 충실한 준수 외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소유한 부를 혼자 독식하지 말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라는 권고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들 살짝 혼동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권고라기보다는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고 오랜 기간 더 챙겨야 할 여우 같은 부인과 토끼 같은 자녀들이 있는 경우, 말씀 그대로 실천하다가는 결론은 패가망신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부를 창출하고 절약하고, 재정 관리를 잘해서 가족들을 잘 챙기셔야 마땅합니다.
자선을 베풀더라도 현실을 잘 파악한 후에 적정선에서의 자선을 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큰 뜻을 품고 삶을 대대적으로 전환하고 싶은 분들, 이제 달릴 곳을 원 없이 달리시고, 인생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혹시 나는 여유로운 재물이라든지 풍족함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오늘 복음과 나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시면 큰 오산입니다.
이 세상에 나눌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물이라는 표현은 광범위하게 적용됩니다.
비록 재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할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측은지심, 기도, 희생, 미소...베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서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1)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ㅠ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10,17-19).
그러자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하는데(마르 10,20), 그의 말에는 십계명만으로는 무엇인가 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마태 19,20).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것은 십계명을 다 잘 지켜 왔다는 그의 말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가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바라는 그의 지향이 올바른 것임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는 말씀은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전반적으로 잘하고 있지만 원하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 부족한 것 하나를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부족한 것 하나를 채우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부족한 것 하나’는 그가 실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일’입니다.
2)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그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가진 것을 팔아”는 재물을 모두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재물 자체를 버리는 것이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재물을 그냥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게 대단히 어려운 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을 그냥 포기하고 버리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버림’은 ‘사랑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속 재물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부족하다.’ 라는 말은 사랑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안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그 사람의 사랑은, 두 방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사랑이 갈라져 있는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는 “네가 원하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바로 당신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간 것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또는 재물을) 버릴 수도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겪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말로 둘 다 가질 수는 없는가?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가?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도 사랑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뜻으로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부자들만 그렇게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큰 것은 아닙니다.
가난해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큰 경우가 많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의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만’ 사랑한다면, 낙타 같은 사람도 바늘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라 - “부자의 구원도 가능하다”>
"그지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
(시편 18,2)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말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사람들 사이를 해친다.”
<다산>
더불어 성 베네딕도의 ‘침묵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비록 좋고, 거룩하고, 건설적인 담화일지라도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완전한 제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드물게 허락할 것이다.”라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또 논어의 공자 말씀입니다.
“임금에게 자주 간언하면 치욕을 당하고, 친구에게 자주 충고하면 사이가 멀어진다.”
모두 삶의 지혜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어제는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첫 ‘세계 어린이들의 날’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베드로 광장에서 어린이들과의 미사중 삼위일체 교리를 단순하게 압축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created),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saved), 성령님은 우리를 평생 동반하신다(accompanies).”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말마디는 ‘가난’이었고, 아주 예전 수도원 정문 옆 담벼락 넘어, 지금도 건재한 수녀원의 커다란 참나무를 보며 쓴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시이고 지금은 고인이 된 엘리야 수사의 모친 레나타 자매가 무척 좋아했던 시입니다.
“울타리 부근 쓸모없는 땅이라 관심도 없다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
참 넉넉한 자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이 행복이구나
볼품이 뭐 대수랴
너와 나 편안하면 그만 아닌가
내 맘껏 가지들 뻗어 하늘 자유 맛보니 대만족이다
열매들 탐내는 나무아님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늘 나는 새들의 쉼터가 내 기쁨이다
흐르는 구름 은은한 별빛 부드러운 미풍
은자(隱者)의 가슴 떨리는 감동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내 이름은 정주의 참나무”
-2001.3.23.
23년 전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며 아끼는 시입니다.
자발적 가난의 기쁨, 가난의 자유, 가난의 행복을 노래한 시입니다.
생래적으로 가난과 고독, 침묵을 사랑했던 사막 수도승의 후예인 우리 정주의 수도승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결정적 문제점은 이 가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우상처럼 또아리 틀고 있으니 영혼은 여전히 목마르고 배고플 수 뿐이 없습니다.
참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것이 적은 사람이요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 물으니 사막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마디를 바꾸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아주 절박한 물음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놔두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습니다.
이어 젊은 부자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 천하의 영적 명의(名醫)이신 예수님은 부자가 계명을 준수했는가를 확인시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긍정적 말마디 외는 모두가 부정적인 ‘안된다’ 라는 계명입니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횡령해서는 안된다.”
젊은 부자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 말합니다.
아주 좋은 양심적인 신자입니다만 ‘안된다’는 계명 뿐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주 소극적인 삶입니다.
외적인 최소한의 계명준수에 힘썼을 뿐 사랑의 나눔이나 삶의 중심인 주님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러니 내면의 허기(虛氣)는 여전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진단이 정확했습니다.
극단적 처방같지만 부자 청년에게는 이것 뿐이 없었던 것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과연 이 시험을 통과할 부자들은 몇이나 될까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줌으로 땅에 있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권고입니다.
그리고 와서 정말 참보물인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재물을 삶의 중심에 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 나눔과 따름이 없는 외적 계명들 준수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 포기를 거부함으로 구원의 시험에 불합격한 부자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합니다.
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부자의 삶에 큰 긍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어 넋두리처럼 제자들이 들으라고 말합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은 물론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이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물음이 나올 수 뿐이 없습니다.
또 천하의 영적 명의이신 예수님의 기막힌 답변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께는 부자의 구원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구원의 보증 수표는 아닐 것입니다.
부자에 대한 증오나 질투, 탐욕이 내면에 존재하는 한 역시 무지의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부자라도 회개의 은총으로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들과 자유자재 나눌수 있는 무욕의 지혜롭고 자유로운, 참으로 청빈한 부자라면 재물을 소유하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자 기적입니다.
과연 이런 청빈한 부자들 가득한 세상이라면 참 좋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일 것입니다.
복음의 부자는 재물 포기와 예수님 추종에 실패했지만,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는 성공하여 “희망에 대한 감사가”를 신바람나게 부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감사찬미가입니다.
재물을 소유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따름과 나눔의 삶에 충실할 때 함께 부를 수 있는, 참으로 우리를 아름답고 자유롭게 하는 희망과 기쁨의 감사 찬미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를 더욱 고무합니다.
주님을 따르고 나누는 삶에 최선을 다할 의욕을 심어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더욱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따르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주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
(시편 73,28)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어린아이에게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다이아몬드보다는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먹을 수 없지만, 과자는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에게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과자보다는 다이아몬드를 선택할 것입니다.
과자는 먹으면 곧 없어지지만, 다이아몬드는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부유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축복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난민촌으로 봉사 갈 수도 있고, 유럽으로 여행 갈 수도 있습니다.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어떤 사람은 유럽 여행을 선택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떠나라’라는 말처럼 휴가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입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일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난민촌 봉사를 선택할 것입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난민촌 봉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도 난민촌 봉사를 선택하였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게 가능하면 말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따님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모님도 나중에는 딸의 선택을 축복해 주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도시 빈민 사목’을 선택한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삼양동, 금호동, 장위동, 봉천동(중앙동)에 둥지를 마련했습니다.
교구에서 신부님들이 거처할 집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집이 성당이 되었고, 그 집이 회합실이 되었고, 그 집이 친교실이 되었고, 그 집이 식당이 되었고, 그 집이 사제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동창 신부님들은 20년이 넘게 도시 빈민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용산의 철거민들의 모임에, 세월호 유족들의 모임에, 이태원 유족들의 모임에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들 무심코 지나가는데 한 친구는 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내어놓고 사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희생적이지 않았습니다.
사제 인사의 권한은 교구장님에게 있다며, 제게 주어지는 소임에 만족했습니다.
2018년 성소국을 마치면서 처음으로 주교님께 저의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는 인사 적체로 인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구청에서 일했기에 그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 주셨습니다.
저의 선택으로 저는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에서 5년 있었고, 지금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한 신앙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한 신앙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재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보존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넘어지는 유혹은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 유혹이 너무도 강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분은 일류 신앙인입니까?>
요즘 베스트셀러인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조건 3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지식을 훔치는 힘. 둘째, 요약하는 힘. 셋째, 추진하는 힘.
사실 일등이 아니어도 괜찮고, 꼴찌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3류로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주연이길 포기하고 조연으로 사는 인생이 3류 인생일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기보다는, 남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대신해 주기를 또 남들이 나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해 주길 바랍니다.
3류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몇 등이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3류 인생은 되지 말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측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일류의 조건을 새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은 타인의 지혜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하고, 또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둘째, 요약하는 힘은 생각을 정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알아야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삶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진하는 힘입니다.
이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나 자신은 신앙인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일류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삼류 신앙인일까요?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에서 주님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까요?
두 번째 요약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삶에서 잘 실천하고 있을까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삼류가 아닌 일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일류 신앙인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다시 여쭙습니다.
여러분은 일류 신앙인입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 일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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