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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베드로 1서의 말씀 1,10-16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10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11 그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께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에 가르쳐 주신 구원의 시간과 방법을 두고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12 예언자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일들이 하늘에서 파견된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14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부자 청년은 재산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버리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님 또는 복음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그 소중한 것들을 버려야만 할까?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한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고 ‘진정한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내려놓아야 할 것들임도 알아갑니다.
사실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진정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과 ‘복음’과 ‘사랑’이 늘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온전히 당신의 것이오니,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욕망이 아니라 희망을>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베드 1,13.14-15)
오늘 베드로 서간은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거룩한 것입니까?
앞의 말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희망을 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서간은 희망과 욕망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즉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희망은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이고 욕망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 우리에게 희망이 없으면 안 됩니다.
도무지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은 그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경우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더 살아봤자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더 살아야 할 의지, 곧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없겠지요.
이렇게 보면 욕망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든 사는 것이 목표라면 욕망이라도 있는 것이 나을 것이고, 하다못해 세상 욕망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 많은 사람이 이런 욕망 때문에 세상 희망을 가지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신앙인의 희망, 영적인 희망과 다른 점이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희망은 어떤 것입니까?
영적인 희망은 우선 세상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희망은 쇠가 용광로를 통과하듯 세상 욕망이 다 좌절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영적인 희망은 하나도 없고 세상 욕망만 있던 사람은 이때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밤을 경험할 것입니다.
욕망이 빚은 세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눈은 하늘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밝히던 모든 불이 꺼질 때 그때 하늘의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어두워지자마자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고, 한동안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어둠이 꽤 짙을 수도 있고 그 시간이 꽤 길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절망의 고통이 너무 클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간은 세상 욕망이 쏙 빠질 때까지 필요합니다.
사실 아직 어둡고 여전히 어둡다는 것은 세상 욕망이 아직도 있고 여전히 있다는 반증이거나 어둠의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조급증 때문입니다.
갑자기 빛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차츰 보이기 시작하듯,
내게서 다른 것은 바랄 수 없고 어둠만이 나의 것이라고 인정할 때,
그때야 하느님만이 빛이심을 인정하게 되고 그 빛이 은총으로 비쳐올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1베드 1,13ㄴ)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얘기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타난다는 것은 없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으로 가득할 때는 내 안에 없던 빛이신 주님이 욕망이 좌절되고 어둠으로 가득할 때 은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빛으로 거룩해지고 거룩한 희망을 지니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위해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한 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불리하면 칼을 대고, 유리하면 줄을 대는 세상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 하였을 때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 명예, 내 권력,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나 명예든 지금 첫째라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내려놓는 작업을 통해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1독서 1베드 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상 모든 것을 100배 누리는 법>
오늘 복음은 어제의 부자가 예수님의 뜻대로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어놓지 못하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간 다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과 당신 복음을 위해 내어놓는 것은 100배로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아버지께서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면 어땠을까요?
사제가 되어 만나는 수많은 아버님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집문서나 땅문서, 혹은 호적에 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제관에서 잘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의 황창연 신부는 잠비아에 엄청난 크기의 생태 마을을 조성 중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조달할까요?
그분은 유튜브에 잠시만 필요한 액수만큼 모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단숨에 20억이든, 30억이 모입니다.
그러면 바로 계좌를 닫아버립니다.
돈을 기부하고 싶었어도 기회를 놓친 이들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신부님이 투명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돈이 모이는 법칙은 단순히 종교적인 자선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초밥 도시락을 팔아서 수천억대의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은 이러한 원리를 ‘수각 이론’이라 하여 가르칩니다.
수각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너무 빠르게 흐르지 않게 파 놓은 구덩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수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롭게 하도록 물을 잠시 모아두는 수각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한 물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식당 요리사가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주인을 망하게 하려고 양념을 팍팍 넣고 양도 많이 주었더니 장사가 더 잘 되어 주인이 더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 이로움이 더 모이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창조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면 무엇이든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한 일을 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면 돈을 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Enron)은 1990년대에 급성장하며 혁신적인 기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엔론은 재생 에너지와 같은 선한 일에 투자하는 기업으로 홍보되었으나, 실제로는 경영진이 회계 부정과 사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2001년 엔론의 부정행위가 폭로되면서 회사는 파산했고, 많은 투자자와 직원들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이 도와달라고 할 때 만약 그 사람의 통장에 많은 액수가 들어있고 고급 승용차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임을 안다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왠지 모기에 피를 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을 쓸 때 물건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듯이 좋은 일에 쓰이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의 배를 불려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기에 피를 빨리는 느낌을 돈 주고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에 집착을 버리고 좋은 일을 향해 모든 것을 흘려버릴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하늘에 두지 않으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가난하게 죽게 됩니다.
내 것은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면서 더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가져도 가난하게 삽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거룩한 이를 통해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재물과 지식과 사랑이 충만히 지나가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십시오.
내가 흘려보내는 것을 백 배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1)
베드로 사도의 말 가운데에 있는 ‘버리고’ 라는 말은 “버려두다. 그대로 놓아둔 채 떠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사도들의 ‘마음’이 ‘세속의 일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에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은 세속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또 세속의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따라나섰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완전한 비움, 완전한 이탈과 자유’를 나타냅니다.
필리피서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그 ‘버림’과 ‘비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리 3,7-11)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허무한 것’을 모두 버리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 8,34ㄴ-38)
이 말씀에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3)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버림’ 자체보다 ‘버리는 이유와 목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버리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또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맹목적인 무소유는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과 이유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인간 세상의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4)
30절의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이 말씀의 바로 뒤에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씀을 붙여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내세에서는 모든 것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백배’ 라는 말은 풍성함,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31절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처럼 처지가 바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루카 16,23-26)
그처럼 이쪽 세상에서 돈과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심판,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나라의 밖에서’ 그 나라의 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6,24-25).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 따름과 보상>
새벽 교황님 홈페이를 여는 순간 “거룩한 소식”에 감동했습니다.
어제 월요일 방콕에서 순례차 온 100명 불승(佛僧)들에게 “더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하자”며 하신 다음 취지의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1. 상처받은 인류와 지구를 함께 치유하자.
2. 어느 누구도 혼자 구원받지 못한다.
3. 서로를 돌보고 환경을 돌보자.
4. 가톨릭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계속해 나가자.
어제의 행복했던 기분이 오랫동안 향기로 남아 있습니다.
거룩함의 향기, 사랑의 향기입니다.
오전 집무실에서 공부중 문이 열리며 환한 얼굴이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왜관 수도원의 사랑하는 블라시오 아빠스님이 방문했던 것입니다.
왜관 어느 수도형제의 모친 장례미사를 봉헌한 후 귀원 도중 요셉 수도원에 잠시 들렸다 제 집무실을 찾은 것입니다.
아빠스님이 함께 찍어 전해준 사진을 이곳 원장수사와 나눔 중 두고 받은 대화입니다.
“사무실에 보름달이 두 개 뜬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니 참 반갑고 고마웠답니다.
떠난 후에도 이렇게 아쉬움 느끼기는 처음이네요.
마치 사랑의 향기, 거룩함의 향기처럼 느껴지네요.
예전 영혼의 고향집 같은 왜관에 대한 향수(鄕愁) 탓인 듯 합니다.”
이런 느낌은 이젠 고인이 된 예전 아빠스님이나 주교님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만나면서 그 반가웠던 느낌과 흡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거룩한 삶, 사랑의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서의 공통적 느낌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수제자 베드로의 단순성이 빛납니다.
어제 많은 재물로 인해 예수님 따름에 실패했던 어떤 부자와는 달리 오늘 베드로와 그 제자 일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음을 선언하며 보상이 뭣인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즉시 따름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초대교회 선교사들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음을 봅니다.
저 역시 나름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와 주님을 따르기 42년이 됩니다만, 박해의 기억은 없고 받은 축복이 끝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형제자매들이 되고 어머니가 되었는지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수도자들이나 사제들의 소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의 추종에 따른 사랑의 보상과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보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를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축복입니다.
비단 수도자나 사제뿐 아니라 각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모든 이들 역시 보상의 축복이 뒤따릅니다.
베드로의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제1독서 말씀의 권고가 정말 큰 축복을 받은 베드로 사도임을 깨닫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용기백배 더욱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토록 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죽어야 끝나는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참 고무적인 다음 말씀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는 “마음의 허리에 띠를 매고”, 즉 단호히 주님을 따르는 준비된 삶을 상징합니다.
이런 권고 자체가 베드로의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거룩한 삶은 그대로 사랑의 삶의 반영입니다.
사랑의 추종, 사랑의 보상입니다.
주님을 따를수록 사랑과 더불어 거룩해지는 삶입니다.
어제 읽은 거룩함에 대한 주석에서 크게 배웠습니다.
“거룩하다”(하기오스)라는 단어는 일종의 경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삶에 대한 비전과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그에 따른 행동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분명히 나타날 때 그것이 참된 거룩함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특정한 온전함, 즉 우리 자신, 우리 주변 사람들, 우리 환경 전체 및 하느님과의 완전한 조화를 의미한다.”
아가페 사랑과 함께 가는 거룩함임을 깨닫습니다.
9년전 쯤 이때쯤 제 자작시와 이에 대한 댓글을 반가이 다시 읽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사랑이 그리울 때 눈들어 바라보는 바다같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바다, 구름은 섬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라보는 하늘 바다, 구름 섬
나 하늘이 되고,
구름 섬의 바다가 되네
나 하느님의 사랑이 되네”
<2015,5,23>
이 또한 주님을 따름에 주신 은총의 선물같은 깨달음에 시입니다.
이런 사랑의 깨달음이 알게모르게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라파엘라 자매의 오래 전 아름다운 댓글을 지금에서야 제대로 읽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수사님은 하늘을 보시는군요.
불암산이 유난히 수도원 가까이 내려앉았던 지난 달 어느 날(5월10일), ‘서로 사랑하라’는 수사님 말씀을 들었거든요.
우유에 담은 커피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향기로 남았어요.
그리고는 그 향기 다시 맡고 싶은 마음에 이곳 홈페이지를 자주 찾아오고,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를 사서 읽고 그 책을 다시 견진 대자에게 선물했답니다.
아마 그의 영혼도 수사님의 향기로 더 맑아졌을 거예요.
며칠만에 이곳에 들어와서 ‘바다’를 읽는데 미소가 지어졌답니다.
어쩌면 수사님의 마음과 저의 마음이 이렇게 같은 걸까요?
저도 때로는 하늘이 바다로 보이거든요.
언제나 영혼도 몸도 유월나무처럼 싱그러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이 찌푸둥할 때 찾아와 씻을 곳이 생겨서 참 좋은 라파엘라 올림”
<2015.6.3.>
9년 전 이맘때의 글을 오늘서야 제대로 읽습니다.
뒤늦게 라파엘라 자매에게 거룩한 삶의 축복을 빕니다.
문득 생각나는, 만나는 이들마다 친구로 만들었다는 옛 베네딕도회 출신의 영국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은 진정 거룩한 분입니다.
엊그제 어린이들과의 문답식 강론을 하신 89세의 교황님은 참 거룩한 분이자 영원한 어린이입니다.
아이들과의 조화가 참 아름답습니다.
거룩함은 조화의 사랑으로 환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우리 모두가 무엇이라 기도합니까?”
"우리 아버지요."
교황님은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고 부연 설명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할 때 주님을 모시며 그분은 우리 모두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것은 진실입니까?”
"예"하고 대답하는 어린이들입니다.
“성령은 평생 우리를 동반하십니다.
성령은 여러분들이 착한 일을 하라고 인도하시며 어려운 때에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어린이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후 성모님에 대해 나눕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이름은 무엇입니까?”
"마리아요!"
이어 어린이들과 함께 성모송을 바칩니다.
강론 끝 무렵 교황님은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부모님들과 조부모님들, 아픈 아이들,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다음 마지막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모두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89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중 어린이들과 대화식 강론을 하시다니 놀랍지 않은지요!
그 사랑의 삶이, 거룩한 삶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 답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더욱 주님 추종과 더불어, 사랑의 향기, 거룩함의 향기 그윽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학전>
'학전(學田)'에 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학전은 1991년 아침이슬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이 세운 소극장입니다.
전 1991년에 서품받았으니, 학전의 역사가 제 사제 생활의 역사와 같습니다.
전 학전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1992년 봄에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습니다.
그때 게스트로 나온 가수가 강산에입니다.
그 뒤로 학전을 잊고 있었는데 이번 다큐를 보면서 예전의 기억이 소환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열정은 가득했지만, 방향을 몰랐던 새 사제였습니다.
예비자 교리는 학원강사 부럽지 않게 강당에 가득 찼습니다.
주일학교는 아이들로 성당을 꽉 채웠습니다.
교사들과 청년들은 성당에서 봉사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본당신부님은 자상하시고 용돈도 잘 챙겨 주셨습니다.
사제 생활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학전을 세운 김민기 선생님은 저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1994년부터 2024년까지 지하철 1호선 뮤지컬을 공연했습니다.
그는 많은 무명 배우를 스타로 키워냈습니다.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윤도현, 안내상, 김대명, 황현희, 이름은 잘 모르지만, 얼굴은 아는 배우들이 학전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무명의 배우를 발굴해서 11주 연습을 시킨 후에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렇게 다듬어진 배우들은 성공하였고, 김민기 선생님은 주저 없이 그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날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학전은 말 그대로 배움의 터전이었습니다.
학생이 졸업하면 학교를 떠나듯이 학전에서 이름을 알린 배우들은 더 큰 세상으로 날아갔습니다.
학전은 배우들의 '못자리'였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일들을 추진했던 개척자였습니다.
배우들의 4대 보험을 학전의 이름으로 가입해 주었습니다.
배우들과 계약서를 만들어서 배우들이 월급을 받도록 했습니다.
학전이 성공하면 배우들의 수입도 늘어났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 은행에서 전세자금을 대출해 주었고 한 무명 배우는 전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김민기 선생님은 자신은 뒷것이라고 했습니다.
배우들은 앞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키운 것은, 학전이라는 극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키운 것은 대한민국의 문화와 예술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에 우뚝 선 K Pop과 K Culture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면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 위에는 조용필 땅 아래에는 김민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나이인 둘은 언젠가 한 번 만났다고 합니다.
‘조용필은 김민기를 존경한다고 했고, 김민기는 조용필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난 내게 주어진 '학전'을 잘 돌보았는가?
난 뒷것이 아닌 앞것으로 나 자신을 내세운 것은 아닌가?
난 건물을 세우고 추억은 만들었지만, 나의 학전에서 만난 이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헌신과 열정을 다했는가?
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이제 어쩌면 저에게 마지막 '학전'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뒷것이 되어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꿈과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로 인해 슬픔은 기쁨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되고, 두려움은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학전의 김민기 선생님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김민기 선생님의 '친구'를 나누고 싶습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나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실천하는 사랑의 삶>
반에서 일등 하는 아이와 꼴찌 하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똑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일등이니 당연히 똑똑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600년대에 똑똑한 사람은 모두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면서 결국 종교 재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똑똑한 사람들은 과연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제일 똑똑한 선구자로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멍청한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판단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정말로 똑똑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무엇 하나 못 하는 것이 없어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다른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중에 동창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남달랐으니,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범했고, 아니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판단 자체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삶 안에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삶을 따라야 했습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당시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도 아니고, 세상의 높은 지위를 인정받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바보 멍청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 안에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닌, 오히려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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