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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한국 여자컬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
한국 여자컬링 국가대표팀 ‘팀 킴’이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컬링 사상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했다.팀 킴은 28일 캐나다 프린스 조지에서 열린 2022 여자컬링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스위스의 팀 티린초니에 6-7로 패했다. 경기는 마지막까지 팽팽했다. 8·9엔드에서 1점씩을 주고받으면서 6-6으로 맞은 10엔드. 9엔드 득점으로 선공에 나선 팀 킴이 수비에 집중하며 스틸(선공으로 나선 엔드에서 득점)을 노렸지만, 대회 무패행진을 달리던 스위스의 막판 집중력이 더 좋았다. 팀 킴의 방어용 스톤을 하나하나 제거한 스위스는 마지막 스톤으로 하우스 안에 있던 팀 킴의 스톤을 모두 밀어낸 뒤 결승점으로 연결했다. 팀 킴은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컬링 첫 은메달에 이어 세계선수권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 한번 한국 컬링의 새 역사를 써냈다. 이전까지 컬링 세계선수권 최고 성적은 2019년 춘천시청의 ‘팀 민지’의 동메달이었다
2015년 서울 지하철9호선 2단계 구간(신논현~종합운동장 4.5km) 연장개통
2014년 헌법재판소 야간시위(해가 진 뒤부터 자정까지) 금지한 집시법 위헌판결.
2014년 박근혜 대통령 평화통일구상 발표(드레스덴 선언
2010년 중국 산시 성 (산서성) 왕자링 탄광에서 침수 사고
2009년 런던에서 G20이 가난과 기후 변화, 실직에 대해 해결하라는 대규모 집회
2009년 탈레반 무장 세력이 파키스탄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 소속 트럭 12대 파괴.
2009년 미국의 레드 강 수위가 12m 이상으로 올라가 노스다코타 주에서 긴급 대피 명령
2009년 캐나다 연구팀이 중국 해커 집단이 전 세계 103개국의 컴퓨터에 침투해 정보 를 빼내고 있다고 발표
2009년 함종빈 전 국회의원 별세
2008년 북한이 황해에 여러 발의 미사일 발사
2008년 1945년 일본 오키나와 현에서 발생한 주민들의 집단자결에 일본군이 깊이
관여한 사실이 인정된 다는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2005년 수마트라 섬 앞바다에서 규모 8.7의 강진
2004년 오스카상 수상자이자 영국의 저명한 배우 겸 극작가인 피터 유스티노프 사망
러시아계인 피터 유스티노프는 1921년 런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러시아 황제군 장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때 연극 무대에 데뷔한 그는 영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연기활동을 펼쳤다.
1951년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 황제역을 맡아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던 그는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년)와 ‘보석 강탈작전’(Topkapi·1965년)을 통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두 차례나 받았다.
러시아어, 그리스어, 터키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하는가 하면 10여권의 저서와 여러편의 시나리오를 집필했을 만큼 다재다능했고, TV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나타냈다. 유스티노프는 문화, 자선사업 분야에서 이룩한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90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2003년 일본, ‘한반도 정찰위성’ 발사
2003년 인천 백령도 서남서 80km 해역 규모 5.0 지진
2002년 최규선 게이트 첫 폭로
2002년 3월 28일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부사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세상에 처음 폭로됐다.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의 시작이었다. 최규선의 측근인 천호영씨가 이날 경실련 홈페이지에 "최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를 등에 업고 체육목표사업 등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등의 주장을 제기하자, 처음엔 이를 부인하던 최규선도 4월 8일 조선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홍걸씨에게 9억원 건넸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4월 10일 서울지검이 수사에 나서, 최씨 등 관련자 6명을 출국금지시켰다. 4월 12일·13일 최씨와 김희완 전서울시부시장, 최성규 총경 등은 비밀대책회의를 가진 후 최총경은 홍콩을 경유, 미국으로 도피했고, 김희완씨는 모습을 감췄다.
검찰은 최규선을 구속하고, 홍걸씨가 타이거풀스주식 13,000주를 보유한 사실을 확인, 타이거풀스 사장 송재빈을 구속했다. 결국 미국에서 생활하던던 홍걸씨도 5월 16일 검찰에 출두, 구속됐다.
2001년 김포국제공항, 국제공항 시대 마감
‘국제’ 공항으로서 마지막 날을 맞은 28일 오후 11시 김포공항 2청사 계류장. 비행기를 끌 때 쓰이는 견인 장비인 50t 토잉트랙터를 견인차에 싣기 위해 D운송업체 직원 10여명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형광 주황색 조끼를 입은 이들은 트랙터를 이용, 특수견인차에 토잉트랙터를 싣느라 바삐 움직였다.
국제선 2청사 2층 건물 외곽에 붙어있던 항공사별 안내표지판도 철거됐고 대신 체크인 카운터 위쪽 벽에 ‘김포공항에서 함께 한 32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다.
오후 9시 50분, 국제선 1청사에서는 28일 김포공항에서 떠나는 마지막 항공편인 우즈베크 항공 HY514편이 이륙했다. 한국공항공단 김건호 이사장은 이륙 직전 기장 카디로브마흐티에르(47)씨에게 기념 꽃다발을 건네기도 했다.
마지막 항공편이 어두운 하늘을 날아오르자 김포공항 여객청사에도 불이 꺼졌다.
1999년 루이스 곤살레스,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
1997년 정보근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상 횡령혐의로 구속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97년 3월 28일 한보그룹 정보근 그룹회장이 회사 공금 3백70억여 원을 횡령, 개인용도로 유용한 사실을 밝혀내고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상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정 회장은 회사 공금을 빼돌려 (주)한보철강이 발행한 전환사채 2백72억원 상당을 자기 명의로 구입하고 개인세금 34억원을 납부했으며, 한보철강과 한보상호신용금고 증자과정에서 63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검찰은 밝혔다.
정 회장은 1996년 3월 재계 최연소인 35세 나이에 당시 재계서열 14위의 한보그룹 총수의 자리에 올라 화제를 뿌렸다. 정태수 총회장의 3남으로 서울 남강고와 동국대를 거쳐 미국 보스턴대 경영학과를 나와 고려대 국제대학원 최고국제관리과정을 수료한 그는 고려대 및 동국대 출신을 중심으로 정.관.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분을 쌓아왔다. 만 6년여에 걸친 경영수업과정에서 선이 굵고 과감한 업무 추진능력을 발휘, 재계에서 일찌감치 사업가로 인정을 받았다.
1995년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마` 시험발사 성공
국방부가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해온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K-SAM) `천마`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1995년 3월 28일 발표했다. 국산 지대공 미사일 개발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마는 국방과학연구소(ADD)와 민간 방위산업체가 1980년대 말부터 공동개발해 온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로 유효 사정거리는 5㎞다.
우리 군의 약점으로 지적돼 온 저고도 적 항공기에 대한 요격용으로 개발된 천마는, 역시 국내기술로 개발된 30㎜ 대공자주포 비호 (사정거리 3㎞)와 함께 주로 기계화부대나 공군기지의 대공 방어용으로 실전 배치돼 활용되고 있다. 천마가 개발되기 전까지 수도권 및 공군기지에 주로 배치돼 있던 단거리 지대공미사일은 미국제인 스팅어 , 프랑스제인 미스트랄 , 영국제인 재블린 등이었다.
1994년 한-중 정삼회담 (북한 핵문제, 경제협력 집중논의)
1993년 변정일 WBC 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3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 구포역입구서 지반붕괴로 전복(68명 사망, 123명 경상)
1991년 소련 모스크바주재 미국대사관 화재발생
1990년 차세대전투기사업의 기종을 제너럴다이내믹스사의 F16으로 확정
1985년 프랑스 화가 샤갈 사망
`나와 마을`로 유명한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이 1985년 3월 28일 그림만큼이나 화려한 생을 마감했다. 샤갈이 추구한 작품들은 회화 이론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이었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성서의 예언자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의 이미지들을 묘사한 민속적인 작품들로 말미암아 20세기 파리파의 중요한 전위미술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런 환상적인 주제를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는데, 그의 양식은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1914년 이전의 운동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함 없이 개인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는 1887년 비테브스크에서 출생했다. 비테브스크는 모든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러시아의 정신과 유태인의 전통이 함께 섞인 곳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에서 미술관련 단체 일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파리에서 작품 활동중 나치로 인해 미국에 머물렀다가 프랑스 방스로 돌아와 그의 고향과 소박하고 열정적인 국민들을 그리면서 그의 생애를 보냈다.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83년 농업보험 1987년부터 실시 계획
1983년 소련, 아시아태평양지역담당 사령부 신설
1982년 멕시코 치아파스의 엘치콘 화산 폭발로 약2천여명 사망
1980년 미국-터키 군사협력협정 조인
1980년 박동진 외무부장관, 스리랑카서 주최한 리셉션에 PLO대표 초청하고자 접촉
1979년 영국 캘러헌 노동당정부 붕괴
1979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서 방사능누출사고 발생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핵사고가 발생했다고 연방 관리들이 1979년 3월 28일 전했다. 또한 그들은 펜실베니아의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원자력 발전소의 중심부가 부식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첨가했다. 이 발전소는 내부의 냉각장치 고장으로 이틀전에 방사능을 누출했으며 가동이 중지되었다.
예비 조사에서 이날의 사고는 설비상 결합과 방사성 원소를 지속적으로 물로 가라앉히는 냉각 장치를 포함하는 인간의 실수라고 지적했다. 어떤 밸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어떤 것은 관리자에 의해서 실수로 열려져 중심부가 노출되어 우라늄 차단 연료 막대를 부식시켰다고 지적했다.
이후 조사에 따르면, 사고는 제2 원자로의 자동밸브장치 이상으로 메인 급수 시스템에 대한 물 공급이 중단된 것이 발단이 되어, 완전히 녹은 20t의 핵연료가 원자로 밑부분에 용암처럼 고여 원자로를 뚫고 나가기 직전의 상황까지 이른 것으로 밝혀졌다. 원자로 노심의 냉각장치가 작동 불량이 됐고, 냉각액이 누출되어 핵연료의 외피에 입혀진 지르코늄이 주위의 과열된 증기와 반응, 수소 기체가 발생했고 그중 극히 적은 양의 수소를 비롯한 방사성 기체들이 대기 중에 누출됐다.
사고 당시 펜실베니아 주 당국은 어린이와 임산부들에 한해 소개령을 내렸지만, 수천명의 주민이 도망나왔다.
이 사고는 0~7단계 원전사고 중 '레벨 5'에 해당하는 것으로 1986년 4월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당시까지 발생한 최악의 원전사고였다.
1974년 한국-오만, 국교수립
1972년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 방북(-31일)
1969년 김수환 대주교, 한국최초로 추기경에 서임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한국 천주교계의 큰 별이였다.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고 정신적 지주였다. 1970~1980년대 민주주의가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으며, 우리 사회가 반미 친북으로 심하게 요동치던 2000년대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심을 잡아주는 조타수 역할을 했다.
김수환은 대구의 가난한 옹기장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하고 부모 역시 신자였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지닌 그는 모친의 권유에 따라 1933년 11살 때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당시 교장이던 장면 박사의 추천으로 일본 조치대 철학과로 유학을 떠났으나 1944년 태평양전쟁에 학병으로 끌려가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광복을 맞았다. 일본에서 나머지 학업을 마친 그는 1946년 12월 귀국해 서울의 성신대(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1956년부터 7년간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뒤에는 1966년 2월 주교로 서품되어 초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68년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한 뒤를 이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했으며 대주교 승품 후인 1969년 마침내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추기경에 서임되었다는 3월 28일의 로마 교황청 발표에 이어 4월 28일 로마에서 정식으로 서임식을 가짐으로써 그는 당시 생존했던 136명의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5번째, 나이로는 최연소 추기경이 되었다.
1969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사망
제34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1969년 3월 28일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운명했다. 향년 78세였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지난 11개월동안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1890년 10월 14일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교육으로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해 1911년 육사를 수석입학했다. 소위 임관후 평범한 군인이었던 그가 군 최고계급이었던 원수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2차대전 참전에 있었다.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의 양상을 일거에 바꾼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지휘해 전쟁의 영웅으로 부각됐다. 1946년 군최고계급인 원수로 임명됐다.
그는 두번 대통령(1953년~61년)을 지냈지만 흐루시초프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무능하다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대통령은 아니었다. 우유부단해 덜레스 국무장관이나 애덤즈 비서실장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중용과 선의의 정치인으로 미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68년 한국경제인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
한국경제인협회(초대 회장 이병철)가 1968년 3월 28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명칭을 변경했다. 전경련은 한국경제협의회 창립(1961년 1월 10일)과 한국경제인협회(1961년 8월16일) 창립의 변천과정을 통해 이날 전경련으로 정식 발족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올바른 경제정책을 구현하고 우리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0년 5월 현재 제조업, 무역, 금융, 건설 등 대표적인 업종별 단체 65개와 대표적인 기업 380여 개로 구성되어 있다.
1965년 칠레에 지진, 약 5백여명 사망
1963년 공군수송기 C46 추락 11명 사망
1962년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1962년 시리아, 군부쿠데타로 쿠드시 대통령 취임
1953년 미국의 운동선수 소프 사망
1953년 북한, 부상포로 교환에 합의
1950년 남로당 총책 김삼룡 검거
남로당 총책 김삼룡이 1950년 3월 28일 서울 아현동에서 검거됐다. 그와 함께 남로당을 이끌어온 이주하도 하루 전 검거되고 남로당 조직원 142명도 일망타진됨으로써 남로당 조직은 사실상 와해 단계로 접어들었다.
김삼룡은 박헌영이 월북한 이후 3년간이나 남로당을 이끌어온 실질적인 책임자였고 이주하는 김삼룡의 고문으로 무장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특히 김삼룡은 머리가 비상하고 변장술에도 뛰어나 경찰을 골탕먹이기가 일쑤였다. 체포될 때도 엿장수로 변장한 모습이었고 색안경을 7개나 소지하고 있었다. 비밀 아지트도 서울에만 8개나 돼 수시로 장소를 변경하며 경찰의 추격을 따돌렸다.
이주하는 일제하의 노동운동가로 그가 이끌었던 '태평양노동조합'은 1930년대의 가장 중요한 현장조직이었다. 일제하에서 5년간 복역하기도 했던 이주하는 일제 말에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전향하거나 은둔하고 있을 때 끝까지 노동운동에 몸 바친 '전위혁명가'였다.
남로당의 몰락은 1949년 9월 김삼룡의 한 심복이 검거되면서 시작됐다. 김삼룡의 은신처를 확인한 경찰이 비밀 아지트를 급습하자 김삼룡은 철조망을 넘어 피신하고 이주하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당시 이주하는 극약을 삼켰지만 경찰의 응급조치로 20여 일간 병원 신세를 지는데 그쳤다.
김삼룡이 검거된 뒤 김삼룡과 이주하는 1950년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둘은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의 소재로 이용된다. 6월 10일 북한이 강제억류 중인 조만식과 이들을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우리 정부가 제안을 수락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북한은 교환일자를 연기하는 등 교묘한 지연책을 쓰다가 6.25 남침을 감행했다. 6.25가 발발하자 김삼룡과 이주하는 이튿날인 26일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도 이름이 지워져 남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혁명가로 남게됐다.
1941년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 사망
1939년 ‘2차대전의 리허설’ 스페인 내전 종결
1939년 3월 28일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2년 8개월간을 끌어온 스페인 내전이 사실상 끝났다. 대부분 지역이 이미 반란군에 점령돼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서 마지막 보루 마드리드를 지키는 인민전선 내부의 갈등이 패배를 재촉했다. 결사항전파와 교섭을 통한 전쟁중단파 간의 대립은 급기야 결사항전파를 프랑스로 내몰았고 전쟁중단파는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 ‘학살병기의 실험장’ 등으로 불린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것은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튿날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가 쿠데타를 선언하면서였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과반수를 획득한 인민전선이 정교 분리, 농지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펼치며 중산층과 노동자·농민의 지지를 받자 가톨릭과 지주·자본가들은 불안해졌고 이 틈을 이용한 군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나, 안다루시아 등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곧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할 태세였지만 민병들의 거센 저항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소련을 비롯한 55개국에서 모인 4만 명에 달하는 국제의용군 ‘국제여단’이 인민전선에 합류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견된 정규군이 반란군에 가담함으로써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앙드레 말로,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 세계적인 지성들도 인민전선 지원에 나섰다. 사망자만 30만∼60만명, 망명자가 25만∼50만명을 헤아렸다.
1938년 중국 남경에 일본의 괴뢰정부 수립
1930년 일본 무교회주의를 선도한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 사망
스페인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일본은 선교사들의 희생에 힘입어 17세기 초에는 신자수가 한때 30만명에 달했으나, 막부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토착화에 실패했다.
이후 200년이 지나 일본식 기독교를 정착시킨 인물이 우치무라였다. 우치무라는 일본이 막부정치 시대를 마감하고 본격 개방을 한 1861년 태어났다. 삿포로 농대시절 소그룹 사랑방 교회로 신앙을 탐구하던 그는 이후 기독교의 뿌리를 찾기 위해 미국 등을 떠돌며 신학을 연구했다. 미국의 에머스트대학과 하트포드 신학교 등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우치무라는 1888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 `교육칙어`에 대한 불경죄로 해직됐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기독교는 동양의 종교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식 기독교 운동에 돌입, 1900년 `성서연구`지를 창간해 무교회주의를 표방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교회주의 즉 `조직화된 제도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의에 반대하는 신앙과 신학사상이다. 그는 교회나 세례의 유무는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로지 성서에 의지하는 무교회주의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주장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김교신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자가 배출됐다. 그에게 직접 배운 김교신은 1927년 함석헌 송두용 등과 `성서조선`을 발간, 한국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1913년 독립운동가 규호 이규창 출생
1910년 앙리 파브르, 최초의 수상기 개발. 비행 성공
1899년 관립의학교 설립
1894년 박영효, 동경서 이일식에 피습 부상
1894년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피살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해의 미국 조계에 있는 일본 여관 동화양행 1호실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44세였다. 당초 피살자와 살해범의 이름이 이와다와 다케다로 알려졌으나 청나라 경찰의 조사결과 이들은 일본인으로 가장한 조선인 김옥균과 홍종우로 나중에 판명됐다.
살해범 홍종우는 암살 후 제주목사, 황국협회 간부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 갈가리 찢긴 채 버려졌으나 일본으로 빼돌려져 도쿄 진정사에 묻혔다.
김옥균은 그후 김옥집 등의 상소로 반역죄가 풀려 순종 때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존됐다. 이로써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일으킨 갑신정변의 주역들 중 김옥균과 홍영식은 살해됐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 등은 대부분 변절해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다.
1871년 파리코뮌 수립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중심의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이 1871년 3월 28일 수립됐다. 시청앞에 운집한 20만 군중은 `코뮌 만세`를 외쳐대며 감격했다.
혁명의 도화선은 보불전쟁에서 싹튼 애국심에 있었다. 전쟁이 패배로 기울어지자 공화주의자들은 1870년 9월 나폴레옹 제정을 폐지하고 제3공화정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체결하자 파리민중은 반정부-반프로이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했다.
코뮌은 재산의 국유와, 노동자의 최저생계보장 등 사회주의적 혁신을 주창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수립 2개월만인 5월 27일 부르조아 공화파가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3만명이 사망하는 참극속에 붕괴되고 말았다.
파리코뮌의 모체는 1870년 9월 파리 20구(區)의 노동자-시민이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천명하며 결성한 `20구 중앙위원회`였다
1868년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창시한 막심 고리키 출생
1854년 크림전쟁에서 영국-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고
1851년 포루투갈의 대통령(1915~17, 1925~26) 마샤두 출생
1643(조선 인조 21) 이순신에 충무공 시호 내림
1592년 칼빈주의 신학과 철학에 기초한 개혁 신학자,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 출생
1430년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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