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형의 눈에는 한눈에 보아도 사람들 눈에 띄는 큰 점이 있는데,
그 점을 보고 40여 년 만에 찾아온 우리 형제들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당시 아버지 가게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형들의 이야기로는,
서문시장 건어물 가게의 시작과 끝이 모두 아버지 소유의 점포였다고 했다.
주식회사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절, 아버지가 ‘조선물산 주식회사’를
처음 만드시고 대표이사를 하셨다는 걸 늦게 알았다.
아버지는 북한과 러시아 연해주 쪽 차가운 바다에서 나는 황태를 전국 각 도매상에 팔았다.
황태장에 죽 널린 명태가 영하 20~30도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봄이 되면 황태가 된다.
미역국에 황태를 넣어 끓여 먹으면 산모한테는 아기 젖도 잘 나오고
산후찌꺼기도 다 나온다고 해서 여성과 산모에게 가장 좋은 보양식으로 통했다.
안동 지역의 부자들은 강원도 위쪽 지역의 황태를 구해서
미역국을 끓여 먹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아버지는 직접 현지에 가셔서 황태, 미역, 가오리, 오징어 같은 건어물을
대량으로 사서 기차 화물칸 2~3개를 전세 내어 대구로 실어 오셨다고 한다.
그때는 남북분단 이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6.25 전쟁으로 남과 북이 끊기며 건어물 유통이 힘들어진 아버지는
주식회사를 다 떼어 팔고 내가 고1 때쯤에는 가세가 기울어 급기야 사업이 접게 되었다.
주요 점포 2개만 두고 나머지 가게들은 모두 작게 나누어서 직원들을 독립시켜 생계를 이어가게 하시고,
지금의 노점상처럼 가게 앞에서 큰 다라이를 여러 개 놓고 하는 장사도 하게 해 주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당신이 끌어안아서
끝까지 책임지시려는 모습이 아버지의 정情이었고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속이 상하고 울분이 생겼던 아버지는 말년에 술을 많이 드셨다.
처음에는 정종을 드시다가 막판에는 45도나 되는 독한 백구소주를 즐겨 드시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후두암에 걸리게 되셨다.
암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니 제대로 된 약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힘든 병마 속에서도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내가 조선물산 직원들에게 가게 내준 거는 정말 잘한 일이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다 날아갔을 끼다.”
그렇게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족처럼 여기고 모두 당신의 가슴에 품으시곤 돌아가셨다.
지금이었다면 후두암에 걸리신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암에 걸리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집안이 기울어지니 주변에는 빚쟁이밖에 남지 않았다.
여덟 형제 중 제일 위의 세 형들은 그래도 부모님 덕에 공부를 마치고 의사, 법관, 기업인으로 성장하였고
또 내 밑에 있는 동생들은 큰형이 자리를 잡은 후 뒷받침을 해줘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는 어떠한 도움 없이 일찍부터 독립해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기에
정말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바로 위의 형과 나는 자립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형은 아버지 가게 점원을 권유받았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일이 답답했던지 가방과 짐을 싸서 서울로 갔다.
형은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더니 혼자 힘으로 한양대에 입학하였다.
당시 형은 돈을 아끼려고 추운 겨울에도 방에 군불을 때지 않았는데
주인이 훈기라도 쬐라며 반쯤 탄 연탄불을 문 앞에 가져다줄 정도였다.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해서 결국 한양대 교수를 맡아 학업을 일구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나는 일찌감치 알아서 살 방도를 찾아다녔다.
병아리감별사, 인공수정사, 영어 학원 등을 전전하다가 김영환 몬시뇰의 추천으로
우연히 호텔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버지가 더 오래 살아계셨더라면, 집안의 가세가 그렇게 기울지 않았더라면,
나의 삶도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아버지로부터 나는 더 큰 부副를 물려받았다.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많은 것을 소리 소문 없이 나누셨고
또 끝까지 직원의 생계까지 책임을 다하시려고 했던 아버지의 삶은 인생의 전범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그 정신적인 유산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나는 후일에서야 형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아낌없이 나누시고 베풀어주신 아버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습니다~*
시인님
늘 건강하시기를 마음 모읍니다...
글을 읽으니 가슴이 뻐근해집니다
아버님의 크신 마음ㆍ깊은 사랑이
전해집니다
글을 읽는 동안 저희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시내한복판
기타를 치며 봉사로 구걸하던 맹인에게
조용히 겸손하게 바구니에 넣고오라며
5000원 지폐를 쥐어주시던 엄마
고아원 착한아이를 데려와
수양딸로 키워서 시집까지 보내주신
아버지
부모님의 깊은 마음 감사할뿐입니다
귀한글을 통해 다시금 감사로 채웁니다
정신적유산을
남겨주신
최고의 리더십의 아버님
안
해본게 없으시내요
교훈 가득 안고 갑니다
멋진인생
박수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요,
나는 그런 아버지를 원했습니다
후일에 내가 살아온 예기도 한 번올리겠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이웃을 가족처럼 생각하시는 아버님의 마음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리소문없이 나누시는 아버님의 마음이 너무나 정답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잠시 아빠 생각에 잠깁니다...항상 베풀어 주시는 깊은 배려와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아버님의 나눔이 작가님께로 이어지셨나 봅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아버님의 정신적 유산,
가슴 한켠이 찡합니다 .
감사합니다 .
나눔은 쉬운듯하면서도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눔의 행복을 실천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고 존경스러우셨을 것 같습니다
참 훌륭하신 아버님이셨네요. 존경스럽습니다.
큰 사업을 하시면서도 직원들을 챙기고 보살펴 주신 아버님의 마음을 생각 합니다.
작가님의 이야기가 큰 감동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을 가족처럼 여기며 나눔을 실천하신 아버지의 정신적인 유산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 귀한 시간이었네요.
감동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
세상에 따스함의 온기를 전하셨던 아버지, 그립고 또 그리우실것 같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더 큰 정신적 유산을 받았다고 하시는 작가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원들을 모두 챙기시고, 함께 살아가려 나눔을 실천하신 아버님의 정신적 유산이
정말 소중하고 귀한 유산이네요.
부모님을 존경하며 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사랑나눔을 배우시고
실천하시는 정광호 작가님
존경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
힘든 상황속에서도 가족같이 여기던 직원들의 생계를 위해 가진것을 아낌없이 나누신 아버님이 삶이 정말 훌륭하고 존경스럽습니다. 부모님이 떠나신후 혼자힘으로 독립하시는 과정도 감동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베풀고 끝까지 직원들을 책임지려 하셨던 아버님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지원 없이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찌감치 여러 일을 하신 작가님 존경의 마음 올립니다.
몸소 나눔을 실천하신 아버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말이 아닌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신 작가님의 아버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저도 한 아이의 엄마로써
작가님의 아버님이 남겨주신 정신적 유산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 아이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