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독립운동사
Ⅲ. 경제권 수호운동
3)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1) 일제의 탄압책동
앞서 본 바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가자 한국의 경찰업무를 실질적으로 맡아하던 일제 통감부 경무총장(警務總長)은 3월 2일 이 운동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통감 이등박문에게 보고하였다.
작금 경성(서울:필자주)에는 국채보상기성회라는 것을 발기하는 자가 있다. 그뒤에는 청년회(靑年會)·자강회(自强會) 등의 단체가 있고, 궁중에서도 암암리에 동정을 보내는 것 같다. 『대한매일신보』도 크게 고취하고 있어 일반의 인심은 이를 크게 환영하여 의연금을 내는 자가 많다. 그 목적은 현 한국정부가 부담하고 있는 일본의 국채 1천 3백만원을 보상하는데 있다고 표방하나, 내용은 국권회복을 의미하는 일종의 배일운동(排日運動)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이의 도화선은 이보다 앞서 대구에서 유지자들이 회합하여 어느 기간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회원 한 사람이 1원을 각출하여 2천만 동포에게 미치면 1천 3백만원의 국채는 보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여 부르짖은 것이 일반의 이목을 움직여 이 운동의 시초가 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한 일본 관헌은 이 운동의 극력 금지, 탄압을 책동하였다.
일본 관헌은 을사오적(乙巳五賊) 중의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에게 이 운동을 즉각 금지시킬 것을 협박하자 이지용은 “우리 국민들이 나를 역적의 괴수라 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내가 어찌 이 운동을 금할 수가 있겠오”하고 답변하였다 한다.
또 한편 4월 4일 일제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 주구들도 이 운동이 “한국에 무슨 재정이 있어 거액 차관의 금액을 모을 수 있느냐, 일찌감치 자진 해산해야 할 것”이라고 이 운동을 극력 반대하는 언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어서 5월 7일 그들 일진회에서는 9개 조목을 열거하여 정부에 장서(長書)라는 것을 제출하고 각 대신들이 일제히 몸을 받들어 물러가기를 권고하였는데 그 조목 중에 “인민이 국채를 보상한다 하여 각 의연금을 모집함은, 실로 애국사상은 가상하되 힘을 헤아리지 못함을 깨우치지 아니하고 수수방관하는 일”에 대하여 당시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을 오히려 탄핵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이와 같은 일진회의 서슴없는 망동이나 선동은 도둑의 무리보다 더한 짓이라고 지적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때는 이 운동이 한창 고조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좌절되지 않았다.
사실 일제는 침략의 만행을 진일보시켜 7월 24일에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사법 행정권 및 관리임면권을 박탈하여 통감의 내정간섭을 합리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의 저항에 대처하기 위해 언론탄압을 합법화한 ‘신문지법(新聞紙法)’, ‘보안법(保安法)’을 한국정부로 하여금 7월 27일에 공포케 하여 우리 국민의 정당한 의사표시와 항일운동에 규제를 가하였다. 여기에서 이 운동의 핵심적 단체였던 대한자강회가 동우회(同友會)와 함께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신문 기사의 삭제, 언론인의 감금·추방 등 일련의 언론탄압은 민족지의 항일언론활동을 위축시켜 결국 이 운동의 기세를 약화시킨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소장을 역임한 김종한의 일진회에의 가입과 앞서 본 대한자강회가 강제로 해산됨에 따라 이 운동의 핵심이 되었던 자강회원들의 소극화, 그리고 국채보상기성회 총무 오영근의 보상금 횡령혐의사건, 또 도처에서 의연금 보관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일반국민에게 불신감을 주었고 그것은 또한 일제의 탄압 이간의 책동과 더불어 이 운동의 추진주체의 취약성으로 일부 지도층 인사가 동요되고 조직이 혼미하여져서 1907년 말을 전후하여 이 운동은 쇠퇴하여 갔던 것이다.
이에 대구 단연보상소(斷烟報償所)의 이현주·서상돈·정재학·김병순·최시교(崔時敎)·최대림(崔大林)·박승동(朴昇東)·박기돈(朴基敦)·이종면(李宗勉)·서병오(徐丙五)·이일우(李壹雨)·정규옥 등은 이 운동을 계속 진전시키기 위하여 광고를 내고 전국민이 대동결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 운동에 처음부터 계속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 꾸준히 참여한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과 총무 양기탁 등을 주축으로 하는 지도층은 일제 통감부의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국민들과 밀착하여 적극 이 운동에 참여하여 항일구국 언론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저지시키고 언론활동을 봉쇄하기 위해서 배설의 국외추방과 양기탁의 제거를 꾀한 수난사건을 일으켜 언론탄압과 더불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행하였다. 이리하여 일제에 의해 집요하게 획책되어진 ‘배설추방공작’은 1906년 7월 1차적으로 배설을 추방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모색한 바 있으나 당장 추방할 만한 뚜렷한 명분과 계기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그후『대한매일신보』가 1907년 1월 16일자 지면에서 고종이 『런던 트리뷴』지 특파원에게 수교(手交)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이란 짐(朕)이 아는 바가 아니라고 부인한다”는 6항목으로 된 친서를 전재(轉載) 보도하여 한국민들의 절찬을 받았다. 반면 일제 통감부의 격분을 크게 사게되어 이 보도를 압살하려고 한데 대하여 다시 논박하고 언론의 탄압과 기만적 행위를 통박하였다.
통감부는 다시 배설 추방공작을 계속 추진하여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샅샅이 들추어 방대한 불온기사 스크랩을 영국측에 제시하면서 배설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등 영·일간 외교경로를 통한 압력을 가하였으나, 이러한 온갖 박해 속에서도 배설은 필봉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끈질긴 영국과의 외교적인 교섭을 진행한 결과 1907년 10월 배설에 대한 영사재판(領事裁判)이 개정되어 “배설은 6개월간의 선행(善行)에 대한 보증금 3천원을 공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배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논설을 통해서 재판의 경과를 자세히 보도함과 아울러 언론탄압에 대한 한국민들의 저항정신을 북돋아 주고 더구나 당시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 나가자, 일제는 그들이 목표로 삼은 배설을 추방하지 않는 한 『대한매일신보』의 예봉을 꺾을 수가 없게 되어 1908년 5월 통감부는 또다시 배설을 추방하기 위해 공소하였다. 배설은 일본측의 집요한 이면공작으로 개정된 재판에서 제1종 경죄범인으로서 3주간의 금고(禁錮), 만기 후 6개월간의 선행보증금(善行保證金)으로 피고 자신 1천불(弗), 보증인 1천불 도합 2천불을 즉시 납부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배설 국외추방공작(國外追放工作)은 금고 벌금형에 그침으로써 일제의 본래의 의도가 실패로 돌아감에 통감부는 다시 국채보상금비소사건(國債報償金費消事件)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좌절시키고자 하였다. 이 보상금비소사건은 배설의 공판이 열린 한달 후인 동년 7월 12일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사가 보관한 보상금을 배설·양기탁 두 사람이 3만원을 횡령 소비하였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로써 양기탁을 구속케 하였다. 여기에 일진회 기관지『국민신보(國民新報)』도 배설이 머지 않아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의연금의 처리에 대해 일반의 의혹을 품도록 만들었다.
이에 영국측은 배설의 재판 때 증인이었던 양기탁을 구속하였다는 것은 또 하나의 배설사건에 대한 보복처사로 보고 영·일간의 외교적인 약속 위반이라는 점을 주장하여 양기탁을 석방할 것을 일본측에 계속하여 강경히 항의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항의에 일본은 영국과의 외교문제를 고려하여 양기탁의 구속은 배설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내세운 한편, 양기탁 구속에 대한 영국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양기탁 기소의 ‘합법화’를 위장하기 위해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였다. 특히 증거로 내세우고자 한 것은 한국인에 의하여 제출된 국채보상금반환청구서(國債報償金反還請求書)였다. 즉 보상금 조사건을 한국인으로서 보상금에 관계있는 자가 경찰에 조사를 청구함에 마지 못하여 이에 응하는 것 같은 형식을 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국채보상금비소사건’이 항일인사를 억압하기 위한 일제의 탄압책동의 일단이 아니라 단순한 형사사건이라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통감부는 이 반환청구서를 증거로 제시하여 양기탁을 비롯한 몇사람의 적극적인 지도자들의 ‘비행(非行)여본’을, 그것도 같이 이 운동의 지도급으로 활약하였던 인사들의 반환청구서를 통해서 실증해 보임으로써 일반국민들에게 적극적인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시켜 국채보상운동을 좌절시키고, 나아가 이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항일언론활동을 탄압코자 하였던 것이고, 일진회 기관지『국민신보』 역시 일제에 동조하여 배설과 양기탁이 국채보상금을 범용(犯用)한 행적이 탄로되었다는 망언까지 서슴치 않았다.
양기탁의 공판을 서둔 통감부는 8월 13일 먼저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장을 역임한 윤웅렬에게 “보상금 중 3만원을 배설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조원서(調願書)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일제 통감부의 이러한 책동에 대해서 대한협회(大韓協會)에서는 양기탁이 구속된 후 7월 19일 특별평의회(特別評議會)를 개최하여 “각 사회에 통지하여 일체회동조사(一體會同調査)”하기로 결정을 보았으며 통지서제정(通知書製定) 과 조사소 위치(調査所位置)와 회동월일(會同月日)을 오세창(吳世昌)·윤효정·이종일 세사람에게 위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8월 8일 특별총회에서는 국채보상금 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와 같은 결정을 본 대한협회는 일진회와 더불어 양기탁을 둘러싼 국채보상금 횡령문제를 배설에 추궁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국채보상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잊어버린 채 일제 통감부의 책동에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국채보상운동의 소극화한 지도층이 이 운동의 좌절에 일정한 상승작용(相乘作用)을 하였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경우는 소장을 역임한 윤웅렬이 통감부의 요구에 따라 국채보상금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재무감독인 박용규의 보상금 횡령사건이 거론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른바 양기탁 구속을 확대시키기 위해 일제가 일진회를 조종하여 일으킨 일련의 국채보상운동 파괴공작의 일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의회의 임원에는 일진회원이 다수 침투하여 자체내의 분란이 심해졌다. 즉 지원금총합소의 일진회 계통의 평의원들은 동년 8월 28일 상업회의소에서 임시 평의장 한석진(韓錫振)을 선두로 13명이 배설을 초치하여 이른바 의연금 조치에 관하여 추궁하였던 것이다. 이에 배설은 의연금의 일부로 콜브란(Colbrandt : 骨佛安)의 금광주권(金鑛株券)을 샀으며, 또한 아스토리아호텔에 꾸어 주었고, 그밖에는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에 예금하였다고 대답한 후 그 증거 서류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8월 말에 이르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는 지원금총합소를 정리하기 위해 재무감독을 김윤오(金允五)·김린(金麟), 회계를 유동열(柳東說)·정지영(鄭志永)으로 선정하고 “보상금을 합동보관 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일제 통감부의 탄압책동에 대한 지도층 인사들의 이와 같은 일련의 태도는 이미 국민운동에서 이탈하여 단지 의연금을 보관하려는 소극적 태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양기탁 구속에 대한 영국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8월 31일 경성 재판소에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어 검사 이등덕순(伊藤德順:이또오 도꾸쥰)은 ‘사위취재(詐僞取財)’라는 죄명으로 양기탁을 공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피고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사에 재직하여 동사 사장 영국인 배설과 협의한 후 국채보상 지원금이라는 이름 아래 금원(金圓)을 모집하고 겸하여 따로 배설과 기타의 자와 협의하여 설립한 동 지원금총합소(志願金總合所)의 역원으로서 그 회계사무를 담당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에서 1908년 4월 30일까지 모집한 총금액은 적어도 132,982원 32전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피고는 대한매일신보사에서는 겨우 61,042원 33전 2리를 받아들인 것과 같이 동보지상에 보고하여 일반 의연자를 기만하고 그 차액 71,939원 98전 3리를 횡령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4회 공판의 결과 재판장은 공소 사실은 그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와 같이 통감부는 배설과 양기탁의 유죄 판결에는 실패하였으나 국채보상금 비소사건(費消事件)을 야기시켜 배설·양기탁 등을 구속함으로써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을 좌절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한국민의 열렬한 국채보상운동을 좌절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 운동은 암초에 부딪쳐 이후에는 모금운동의 전개가 아니라 의연금을 조사하기 위한 국채보상금검사소(國債報償金檢査所)가 설립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사실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고 몇사람의 인사로 구성된 사후처리회(事後處理會)만이 존속하였을 뿐이었다.
대한매일신보사는 그후 1909년 5월 1일에 배설이 사거하고, 후임으로 그의 비서인 만함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한미전기회사 사주인 콜브란은 귀국하고, 역시 양기탁도 대한매일신보사를 사퇴하고 말았다. 만함은 날로 가중되어 가는 통감부의 압력과 회유책으로 말미암아 박천군수를 역임한 바 있는 이승용(李承鎔)에게 1910년에 이르러 신문의 판권을 넘기고 콜브란과 같이 의연금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사후처리에 관한 아무 보고도 없이 1910년 5월에 일본으로 떠나 버리고 새로 사장에는 이장훈(李章薰)이 취임하여 『대한매일신보』는 전일과 같은 항일구국 논조를 통한 언론활동의 성격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배설이 말한 바 있는 의연금의 투자는 그 후의 행방이 석연치 않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유지들은 1910년 8월 11일 13도 대표로 구성된 국채보상금처리회(國債報償金處理會)를 개최하고 대한매일신보사에 대하여 “도취(都聚)한 의연금을 내놓으라”고 촉구하는 동시에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유길준(兪吉濬)을 회장으로 한 보상금처리회에서는 이 의연금으로 토지를 매입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황성신문사와 국채보상기성회가 모집한 의연금에 대해서도 유원균(劉元均)·윤치호·남궁억·박은식·노백린(盧伯麟)·양기탁 등은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의 기금으로 쓰기로 하고 6백만원의 토지재단을 세운 바 있었으나 통감부가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대한민보(大韓民報)』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이 기금을 공공사업이나 교육비용에 전충(轉充)하려 한다는 설에 대하여 기금의 목적에 어긋남이 없이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세의 변동과 함께 의연금의 사후처리 문제마저 불미스러운 여운을 남기고 말았다.
이러한 일제 통감부의 탄압책동에 의하여 이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아 좌절되고, 그후에도 부채는 계속 늘어만 가서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제로 병탄될 당시 한국의 국채는 4천 5백여 만원에 달하였던 것이다.
(2) 운동주체의 한계성
앞서 본 바와 같이 일제 통감부의 탄압책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하게 되었던 요인을 들고 있으나, 또한 이와 관련하여 이 운동의 주체측의 취약성과 문제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전국적인 이 운동의 구심체로 부상되었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는 강력한 전국적 지도부로서 통일적 지도체계를 확립하지 못하여 그 기능을 유효적절하게 발휘하지 못하였다.
사실 두 보상소외 임원구성 가운데 일제 침략의 추종적 성격을 지닌 고급관료였으며 금융가인 김종한, 친일 금융가인 한상용, 고급관료를 역임한 윤웅렬·이도재 등은 본래 그들의 성분으로 보아 일본에 대한 입장이 애매하였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언동을 바꿀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물론 이 두 보상소가 일제 통감부의 탄압책동을 감안하고 이 운동을 보다 폭넓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략으로 그들을 내세웠다 할지라도, 그들이 표면에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지도부의 임원구성에 있어 취약성과 문제점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그들과는 달리 꾸준히 이 운동을 강력하게 주도한 인사들은 처음부터 국민의 역량을 기반으로 하여 이 운동을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기 위해 ‘수출상품제조방안(輸出商品製造方案)’ 등을 강구하였으며, 일제 통감부의 탄압책동을 예상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세울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지도부 인사들이 각기 그 입장을 달리 하였기 때문에 통일적 지도체계가 형성되지 못하여 이 운동이 강력히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의 탄압책동이 강화되면서 표면화되어 임원직을 사퇴하거나 방관하는 등 소극적 태도로 표변하였고 심지어 일제의 탄압책동에 상승작용 또는 이 운동을 파괴하는 망동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는 김종한의 일진회 가입, 웅렬의 국채보상금 반환청구서의 제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안에 일진회원들이 다수 침투하여 배설의 의연금 조치에 관한 책임을 추궁한 사건 등은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 준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중앙 지도부를 형성하지 못한 조직체제의 취약성은 또한 다른 단체와 언론을 흡수 통할하지 못하여 분파작용을 드러내고 말았다. 즉 이 운동은 처음부터 중앙 수합소로 자처하여 온 국채보상기성회와 국채보상중앙의무사, 황성신문사 등을 흡수하지 못하여 분파작용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이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장애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이 발단되어 처음 서울에서 설립된 국채보상기성회는 중앙 의무소로 자처하고 나섰으나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각 언론기관이나 지식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기성회가 대한매일신보사를 수전소로 정하였는데도 중앙기구가 설립될 때까지 의연금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후 대한매일신보사는 신문사내에 전국적 조직의 규모인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립하였으나 국채보상기성회는 이와 연관없이 이 운동을 전개하여 기성회와 지원금총합소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즉 총합소가 각 기구와 지소(支所)의 의연금을 조사하여 그 수금을 집계하기 위해 기성회에 연락을 하였으나 기성회가 이에 호응하지 않아 총합소에서는 “막중한 의연금을 저축하여 둔 것이 분명하지 못하고 문서와 장부가 현혹(眩惑)하여 명백히 조사하기가 어려우므로 이에 널리 알림”이라는 광고를 발표하였으며, 이로 인해 후에 기성회의 총무인 오영근이 의연금 횡령혐의로 경시청(警視廳)에 연행되었다. 그리고 한편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취급하고 있던 의연금 보관에도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는 말이 국채보상기성회를 통해서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갈등은 일반 국민들의 국채보상운동 자체에 대한 열의를 저하시키는 부정적인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국채보상중앙의무사는 국채보상연합회의소, 국채보상기성회와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단독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황성신문』의 경우에도 대한매일신보사내에 설립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독자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양기탁의 구속 때에도 이를 방관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국채보상운동이라는 민족적인 당면과제를 놓고서도 전국적인 통일조직체를 이루지 못하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분파작용을 하였던 것은 마침내 이 운동전개에 장애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결국 국채보상운동을 좌절시키는 일제의 마수가 침투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여 주었던 것이다.
또 한편 이 운동의 주체측의 일관성 없는 지도원리도 운동의 효율적 전개를 마련하지 못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국채 보상운동은 발단부터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무계획적으로 발기된 것과 관련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였고, 그들의 명확한 지표를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국채보상을 위한 의연금 갹출만을 강조하였을 뿐이고, 이것을 어떻게 관장하여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보상한다는 그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며, 일제의 탄압책동과 국내의 분파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온 국민이 이에 적극 참여하자 일관된 지도원리의 부족으로 이를 수렴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이 운동의 파괴를 꾀하는 일제의 탄압책동과 국내의 분파세력에 직면하자 우왕좌왕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운동의 전국적인 전개과정에서 당초에 설정한 목표를 벗어나 국민들의 정성어린 의연금을 우선 얼마동안 다른 용도로 유용하자는 방안이 제기되는 등 일관성 없는 지도원리와 자세를 보여 온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조성시켜 이 운동의 효율적인 전개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일제침략이 강화되어 가자 그 추종세력으로 전변(轉變)한 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의 초기에는 이에 동조하는 듯하였으나, 일제 통감부의 탄압책동에 직면하자 그들은 변신하고 이 운동에서 탈락하였으며, 그후 일제의 사주 아래 이 운동을 파괴하는 망동까지 일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침략의 추종세력으로 전변한 자들과는 달리 꾸준히 이 운동을 강력하게 주도한 인사들은 민족적 저항을 강화시켜 이를 효율적으로 전개시켜 나가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책동과 국내 추종세력에 의한 저지 및 농간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인해 효율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지속시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범국민운동으로서의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좌절을 겪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광범한 국민들의 결집(結集)된 힘에 의한 국권회복운동으로 크게 앙양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이 애국계몽단체의 구국운동이나 반일의병의 항쟁과 함께 일제 침략에 대한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저력이 되어 불굴의 빛나는 전통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