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최철주
내가 지금까지 가 본 몇몇 종합병원 중환자실에는 벽시계가 걸려 있지 않았다. 수백 가지 중증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과 신음이 가득찬 곳에서 현재 시각을 알려준다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어서 굳이 안 걸었는지 모른다. 모든 의료기기에 시간이 들어가 있고 의료진도 그 시간 속에서 치료에 전념하고 있으니 환자만 시간에서 소외된 셈이다.
의식을 회복한 채 중환자실을 빠져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에게 시간은 초조한 삶 그 자체다. 간호사에게 현재 시각을 물어보는 일이 잦아지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다. 그들은 휴대전화의 시간 서비스를 이용할 힘조차 없어 남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게 보통의 중환자실 풍경이다.
하지만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경기도 포천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는 입원실마다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용인의 호스피스 병동과 충북 음성 꽃동네도 마찬가지였다. 12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이 시계는 어느 날에는 환자들에게 삶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죽음의 사신으로 여겨진다.
예전에 내 아내와 호스피스 병동 2인실을 나눠 쓰던 한 말기 환자는 예민한 청각 때문에 큰 말썽을 일으킨 적이 있다. 자정이 가까울수록 벽시계 초침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심장을 두들기는 것처럼 느껴져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는 벽시계의 문자판이 보이지 않게 돌려놓자고 내 아내에게 졸랐다. 또 며칠 지나서는 아예 시계 건전지를 뽑아버리자고 했다. 급기야 시계를 통째로 떼어버리자는 대담한 제의까지 해왔다.
이런 사정을 전달받은 수간호사의 배려로 밤에만 건전지를 빼서 벽시계의 시침과 초침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선에서 조정했다. 강제로 긴 잠에 들어간 시계가 째깍 소리를 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여성 환자는 “시계 소리가 시끄러워”라고 중얼거리며 귀마개까지 사용했으나 종내는 초침의 환청이 사라지지 않는 듯 연신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이 행동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한참 뒤였다.
그 호스피스 병동 소속 수녀들을 통해 나는 세상과 하직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전해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귀가 왜 계속 열려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됐고, 숨어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는 염장이들의 정체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이 국회 사무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현직 국회 사무차장 시절부터 남몰래 해 온 그의 염장 봉사활동을 아는 사람은 아내와 성당의 신부, 그리고 국회에서 함께 일하는 비서뿐이었다. 야간에 그를 긴급 호출하기도 했던 국회의장조차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차관급 고위 간부가 바로 그 시간에 시신을 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망자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그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으니 그와 휴대전화로 간신히 연결된 후에도 실제로 만나기로 결정하기까지 여러 사람의 보증을 거쳐야만 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탓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난 후 이 염습(殮襲) 봉사자의 놀랄 만한 청각 기능에 경외감을 갖기 시작했다. 인터뷰는 그의 뜻에 따라 무명씨로 진행됐다. 그가 15년 동안 염습을 하는 내내 자신을 드러낸 처음이자 마지막 노출이었다.
그는 망자의 소리를 듣는 3차원적인 청각 기능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나로선 과학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미심쩍은 구석을 찾으려 했지만, 그에게 사선을 넘어 가버렸을 인간의 영혼을 읽는 디테일이 갖추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당시 72세였던 그는 병원 영안실에 보관된 시신을 입관실의 큰 받침대에 올려놓고 네 명의 팀을 지휘하며 염을 진행했다. 그는 시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죽은 자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짚을 수 있고 고통 없이 마지막 시기를 맞이했는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신의 팔다리 등 시신을 똑바로 펴주고 씻긴 뒤 수의를 갈아입힐 때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귀에 들린다고 했다. 하긴 그에게 온몸을 맡긴 망자가 왜 침묵을 지키겠는가. 그러니 그도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망자의 하소연에 자신의 귀를 바짝 세운다는 것이다.
염습하는 과정. 중앙포토
무명씨가 염하는 동안 현장에 있는 상주를 비롯해 유족의 표정과 시선이 죽은 자의 삶을 읽어 주는 안내역을 맡는다. “그 많은 돈은 어떻게 했지? 설마 관에 넣지는 않겠지?”라는 소곤거림이 귀에 와닿는 경우도 있다. 무명씨의 청각은 유족들의 긴장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순간일수록 더욱 예민해진다. 시신을 입관할 때 기이할 정도로 섧게 우는 사람을 보면 망자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유족들은 서로 다른 계산을 하면서 통곡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가 여러 가지 소리 속에서 정리된다. 무명씨는 그가 귀로 들은 소리의 여러 가지 형태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함구했다. 대신 이런 얘기를 전했다. 과거 어떤 상주가 염습을 끝낸 그에게 망자의 귀가 언제까지 살아 있느냐고 질문했단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답은 달랐지만 무슨 답을 하든 유족들은 인간의 청각 기능이 기이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무명씨가 노년의 지금까지 이어온 염 봉사를 더 알고 싶었지만 허사였다. 그 만남 이후 그의 자취가 모두 끊겼다. 기이하고도 특별한 인물이었다.
비록 무명씨에게 더 깊은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망자와 관련한 이런저런 경험을 쌓는 동안 사람이 세상과 이별한 직후에도 청각 기능이 일정 시간 유지된다는 경험담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내 가족의 죽음을 통해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식물인간으로 불리는 환자들에겐 더 많은 사연이 있다. 그러니 어디서든 말조심하라. 떠나는 사람에게도 말조심하라. 망자는 시간과 이별했지만, 그의 영혼은 우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함부로 웅성거리지 말라. 망자의 귀는 열려 있다. 특히 고통받는 사람이 죽어갈 때 더욱 말을 조심하라는 선인들의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에디터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동양방송(TBC)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중앙일보 경제부장·일본총국장·편집국장·논설위원실장·논설고문 등을 역임했다. 정년 퇴직 뒤 칼럼니스트와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이별서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