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특별히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감사함으로 나아가자”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한 해 동안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특별한 의미를 둔 날입니다. 구약에서 추수 후에 열매를 곡간에 들이면서 지키던 수장절(장막절)과 영국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가서 첫해 결실을 드린 날을 기념한 것이 유래입니다. 1620년 9월 16일에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어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간 곳이 신대륙입니다. 신대륙에 도착해서 그 해 농사를 지어 첫 번째 감사드린 날이 축제로 변한 것인데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많이 선교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자연히 미국의 영향을 받아 추수감사절이 정해진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전4:7에서 “너희가 받은 것 중에 주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있나 보라”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이 비록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도우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수고로 얻을 수 없는 것들까지도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안 주신 것에 불평하지 말고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전에 제 아들이 시골에서 배와 감을 주니까 “큰 아빠, 왜 제가 좋아하는 토마토와 딸기는 안주고 감하고 배만 주세요? 다음에는 토마토와 딸기도 주세요.”라고 하자 큰 아빠가 대답합니다. “그건 너 아빠한테 사 달라고 해라.” 배와 감을 준 것만도 감사인데 더 많은 것을 요구하다 하마터면 그것마저 끊어질 뻔 했습니다. 우리가 혹 하나님께 그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28세에 스승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후 절망과 실의에 빠져 12년 동안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여행했습니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어서야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를 열고 철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변 국가를 돌아다니며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네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첫째는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 둘째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 셋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 넷째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어떡했겠습니까. 조선 시대, 일제 식민시대에 안 태어난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알고 믿고 따르게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전에 개그 콘스트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면서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를 모션과 함께 반복하는 것인데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마누라가 밥을 안 해줘서 씨리얼을 먹었는데 그게 개밥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밥보다 더 맛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더 맛있게 잘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모든 회중들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초대하는 찬양시입니다. 시편기자는 감격하여 “오라.. 하나님 앞에 와서 노래하고 즐거워하자, 감사하자. 누구에게?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신에게 감사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시인은 청중들을 향하여, ‘오라, 그분 앞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모임, 즉 예배의 자리에 감사함으로 나와서 즐거이 노래하며 찬양하자고 외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그는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므로(1절) 그는 탁월하시며 모든 신보다 크신 왕이시므로(3절)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4,5절).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반석, 즉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국회에서나 국가행사에서 연설하면 어떤 단어를 많이 썼나를 평가합니다. 경제, 민생, 화해, 협력 등의 단어를 몇 번 사용했는지를 헤아립니다. 왜냐하면 단어의 빈도에 따라 연설의 핵심내용,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우리 말 ‘구원’이라는 명사로 번역된 단어만 무려 541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외에 이렇게 구원을 많이 말하고 있는 책이 또 있습니까?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랑하고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이 하나님 외에 또 누가 있습니까?
딤후1:9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구원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거룩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어 생명으로 옮겨주신 구원자이십니다. 요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어 생명으로 옮겨주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또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고 합니다. 이사야 40:26에서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45:18에서도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우연히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이 자연 발생할 확률은 십억 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단지 있는 재료로 새로운 것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전12:1에서 솔로몬은 말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2.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백성으로, 자녀로 삼으시고, 기르는 양으로 받아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7절에서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라고 합니다. 목자는 양의 필요를 채우며 만족케 하듯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만족케 합니다. 목자가 양들의 주림을 해결하고 공급해주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셔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전라남도 해남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며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어서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의 꿈은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집은 가난해서 진학할 수는 없고 꿈은 차오르니 고민하던 소년은 어느 날 방에 엎드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전상서! 하나님, 저는 중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저는 집이 가난해 갈 수가 없습니다. 저를 중학교에 보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봉투에도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집배원 아저씨가 편지를 꺼내다가 주소도 없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난감해하다가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배달하는 게 좋겠다 싶어 그 당시 해남읍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편지를 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 주일 그 소년을 불러 교회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먹고 잘 수 있도록 하고, 다음 해 중학교에 보냈습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한신 대학교 총장을 지낸 오명석 박사이십니다. 시103편 5절에 말씀합니다.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을 감사하라” 하나님이 그를 자녀로 삼아 기르신 것입니다.
3.그러나 감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시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누리지 못했습니다. 평안이 없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험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안 좋은 일만 기억하며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7,8절에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므리바(맛사)와 같이 완악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므리바라 불리는 곳에서 물이 없어서 모세를 원망했던 곳입니다. 당장의 어려움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고 의심하는 것은 다만 죄가 될 뿐입니다.
이런 분들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10,11입니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함을 뜻하지만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함을 말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감사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 양육하시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을 믿고 감사드릴 수 있기를, 감사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