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개신교회가 천주교회의 미사와같은 개념인 예배가
약간 다름을 알게됩니다
개신교회의 예배는 주로 목회자인 목사가 주관하지만
목사라는 것이 신학교를 나와서 안수를 거쳐서 임명되지만 그 성격은 다소 다르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는 목사는 성직자라기보다는 평신도중에 어떤 역할을 맡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없는 예배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성직자인 사제없이는 하는 것을 공소예절이라고 해서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곳 즉 공소에서 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강론이나 설교라는 단어를 듣게 되는데요
이는 천주교회여서 하는 것은 강론이거 개신교회에서 하는 것은 설교라고 아는데
실제적으로 그렇다고 보여지는데
그 의미는 강론은 성서귀절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는 방식이고
설교는 성서말씀으로 살아가는 체험이야기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점에서 볼때에 개신교 목사의 설교는 실제적으로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신교회는 성서를 해석하는 일 즉 천주교회의 강론과 같은 일은
하지 않는것일까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평일 미사에 해당되는 평일예배는 거의
드리지 않지만 대부분은 수요일예배는 드린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예배시간에 드리는 것도 설교라는 이름으로 목사가 하지만
실제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역할을 하는 강론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들어서 천주교회도 성서교육도 하고 필사도 하고 통독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개신교회와 다른점은
개신교회는 수시로 성서경시대회를 통해서 어떤 성서귀절을 암송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아름대학은 한학기를 마치면서
반별로 나와서 각자 마음에 두는 성서귀절을 발표하였지요
실제적으로는 이를 암송형태로 하려고 했지만 대부분 나이드신 분이시라
적어가지고 온것을 발표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떄마다 전례에 따르는 그날의 성서귀절을 선포하고 이를 듣고
또 이귀절을 가지고 사제가 강론을 하지만
실제적으로 거의 이귀절을 암송하는이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귀절을 암송하고 말고가 그리중요하냐고 하고 싶지만
만일 이를 길거리에 다니면서 선교를 한다고 한다면
그 차이는 아주 심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장 하는 바를 성서에서 인용하기 위해서라면
그때마다 성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성서에 밑줄끗고 표기한 부분을 읽을수가 있지만
사실 즉석에서 암송한 성서귀절을 말하는 것이
상대를 설득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500여년전에 루터라는 사제가 나와서 교회를 갈라놓았고
쯔빙글리도 마찬가지로 사제였으나 교회를 뛰쳐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시작은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었지요
그러나 루터는 지금 독일시골에서만 볼수 있는 루터교회만으로 남아있고요
쯔빙글리는 일찍이 요절했기에 그의 사상은 루터에 의해서 묻치게 됩니다
그이후 유럽은 온통 종교전쟁에 휩싸이게 되는데요
이는 그당시 새로일어나는 여러 열강의 왕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이를 위한 장애물이라고 여기는 교황권의 약화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회를 영어권에서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내세운것인 성직자주의의 타파인것입니다
그래서 그이후에 전개되는 개신교회의 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구호는 오로지 성서만으로라고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주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서와 더불어서 전통인 성전도 중요하다고 여겼고
이는 전례주의로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기에
오늘날에도 마치 성서말씀보다 더 중요한것이 성서절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기이후에 천주교회에서는 은수자와 신비주의자들이 많이
생겨난것인데요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박은 신비주의자들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자비의 모습을 그린 파우스티나수녀와
예수의 성심을 예수님의 성목요일의 피땀흘리며
바치시는 것을 재현한 마르가르타 마리아 수녀로부터 시작하는 성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영적분별력인 영의 식별과 예수님과 함꼐 하는 예수님현존의식이 꼭 필요하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경험이나 훈련없이 신자들을 이러한 의식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비주의를 말할때 흔히 하게되는것은
상주데레사와 목포의 성모동산을 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관련사람들이나 집단에서 신비주의에 의한 직통계시를 주장하지만
교황청이나 교구에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들어보면 이 두가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수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이런것을 아무런 언급없이 하게되면
이에 대한 훈련이나 경험없이는 도저히 이를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광이 나는 십자가안에 성체를 모시고 성당이 있는 동네를
다니면서 성체를 현시한적인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성체의 중요성을 읹식해서 성체현시는 본당내에서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영의 분별력을 교육하는데는 성령기도회에서 은사세미나뿐이라는
그것이기에 일반신도들이 이를 경험할수있는 계기가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피정때에 반드시 하는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일도
요즈음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반신도들이 혼란스럽게도 성서를 학문적인 비평방식으로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그 성서본문이 기록된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그 본문을 이해하기가 쉽다는 이론이지만
성서라는 것이 그당시만을 반영되어있는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즉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오경에서 하느님말씀을 따르지 않거나 우상숭배등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서 어떤 형태로 처벌받는데요
이를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 잘 연결하기 어려운것은 그런일은 그때당시의 사람에게만
국한 시켜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떤 종교가 들어오든지간에 다분히 샤마니즘 즉 무당과같은 논리가
정통교회에 파고 들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것이 청원기도나 치유기도에 너무 심취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문중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면
알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사제성소자들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것에 준하는 아무런 노력없이
단지 성소자들을 많이 보내달라는 청원기도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것 중에 하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체험이 필요하단것인데
그것없이 하는 모든것은 그냥 바람부는 곳의 모래일뿐입니다
아무리 높게 쌓았다고 해도 바람만 잠시 불면 그냥 날라가버리게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고린토1서에서 바오로사도는 13장에서 사랑의 이야기를 하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아이때 한것들을 어른이 되어서 다 버렸다고 하듯이 우리도 신앙성장에
따라 아이의 모습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당에서 아이들이 첫영성체교리를 받고 있는 이들이 미사에서도 참석하고
통성기도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성가정의 아이들로서 유아세례를 받은자들입니다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 보면 가장 큰 문제점을 나타낸층들이 바로 이런층인데요
그 이유중의 하나는 그들의 신앙의 출발은 스스로 결정했다기 보다는 부모들의 인도에
의해서 그리되었기 떄문인데 성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은자들보다
훨씬 냉담율이 높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모습들을 보게되면 아이들의 신앙생활과 그 아이의 부모의 신앙생활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의 연세를 추측해보면 아이가 첫째일때와 둘째이상일떄에
다소 차이가 나지만 대략 30대에서 40대에 걸쳐서 연령대의 부모인셈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지금 30대에서 40대사이에서 본당에서 그분들이 열의가
있다고 해서 제단체활동이나 관련 분과등에서 봉사할수 있는 여지가 있나요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더나 요즈음 많이 강조하는 레지오도 들어가서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 레지오단원들중에서도 50대도 잘 찾아보기가 어려운 판에
30~40대는 들어가서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청장년층의 레지오가 있는것도 아닙니다
청년레지오가 한때 있었다고 하지만 이들은 대체적으로 미혼일때에만 반짝 할동하고요
결혼하고 나면 잘 하기가 어려운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천주교회는 본당의 아이들과 청년들을 보좌신부나 수녀님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본당이 어쩔수없이 보좌신부를 받지 못해서 다들 본당신부님이 하시지만
다분히 그분들의 영역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년전에 평리성당에 와서 여러분의 보좌신부님과 가까이 지냈지요
저는 운이 좋게도 보좌신부님이 하시는 예비자교리반과 함꼐 할수가 있었지요
서울교구에서 보편화되어있는 동영상강의와 관련 영화를 보여주시면서 하시는 교리강좌에
감동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예비자에게 여러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경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 그리고 관련영화도 여러종류를 보여주시면서
한가지만 보면 우리의 산앙관이 편중되기 쉽다고 하십니다
저는 평리에 와서 놀라운 것들을 보게되는데요 보좌신부에게는 어떤 권한도
잘 주어지지 않는데요 그 이유로는 2년마다 바뀌니까 보좌신부가 좋게여겨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다보면 아이늘과 청년들이 혼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양한 체험이 필요하는냐 안정적으로 쭉 유지하느냐애 따라 달리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신부님이 본당에 오시게 되면
교우들이나 새로부임한 신부나 다 마찬가지로 어려운시기를 만나게 되는데요
서로를 알아가는 시기라고 좋게 말하지만 어느만큼 상대를 잘 설득하느냐에 딸려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이 말하는 말땅이 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외형적으로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등장합니다만
그안에 과연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자비가 어디에 꽁꽁 숨어있는지
찾기가 어려워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로 거론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너무 치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게됩니다
이런 은사는 지금의 본당에서 활동하고 봉사하느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본당에서 수요에 대처할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인의 은사와 완전다른일에 봉사하는 경우를 찾기란 쉬운일이 됩니다
이런일로 지금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아이들의 부모가 설자리가 점차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볼때에는 아이들중심의 첫영성체교육이
부모와 함꼐 하는 방식으로 바뀌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