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6월 육군 2군단장 시절의 백선엽 장군.
백 장군은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아
51년 말부터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치던 중
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운 백 장군은 그 뒤
2군단장과 육군참모총장에 차례로 올랐다. [백선엽 장군 제공]
작전의 최종적인 책임은 내게 있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라는 부대 명칭에 이름을 올린 토벌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나는 마땅히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따라서 작전이 펼쳐지는 동안 내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만큼, 아니 오히려 나에 비해 더 큰 고민을 했던 사람이 유양수 대령이었다.
그의 건의대로 작전계획을 변경까지 해서 적을 덕유산 방면으로 추격했지만, 한동안 빨치산이라곤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무렵에 꽤 속이 탔던 모양이었다. 동료인 공국진 대령이 작전계획 변경 건 때문에 해임까지 된 상태라서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적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2월 31일 적은 잠시 추적망에 걸렸으나, 이내 깊은 밤의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빨치산을 쫓던 모든 부대원은 이날 밤 덕유산의 봉우리에서 야영을 했고, 1952년의 첫 아침 해를 산속에서 맞아야 했다.
새해 첫날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사령부에 전해진 것은 비보(悲報)였다. 일방적으로 적을 쫓던 우리에게 아주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장인 박노권 소령이 부대 배치 상황을 점검하다가, 약 120명의 빨치산 병력의 기습을 받아 부하 두 명과 함께 현장에서 전사했다는 급보였다. 늘 숨어 다니던 적은 새해 첫날 우리의 의표(意表)를 찌르고 그렇게 기습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빨치산 부대는 곧바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대대장을 잃은 1연대 3대대 부대원들이 무서운 정신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들은 날이 밝는 대로 곧장 추격에 나섰다. 자신들의 대대장을 공격해 숨지게 한 적의 발뒤꿈치를 따라, 이틀 밤낮을 산중에서 꼬박 걸었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추격전이었다. 적은 상대를 정말 잘못 골랐다.
그 집념에 불타는 3대대의 추격전은 뜻밖의 성공으로 끝을 맺었다. 이들의 거친 추격에 쫓기고 쫓기던 빨치산 부대원들은, 허기와 피로에 지쳐 거창의 강변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그대로 생포되고 말았다. 제대로 규모를 갖춘 정규 대대 병력이 산속 생활에 이골이 날 정도로 기동력이 좋은 빨치산 부대를 도보로 따라잡는 ‘사건’을 벌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좋은 징조였다. 기적과 같은 3대대의 파이팅이 벌어진 직후, 곳곳에서 적의 주력이 추격대의 그물에 걸리기 시작했다. 1월 4일까지 수도사단은 그에 배속된 예비대 및 전투경찰 병력과 함께, 덕유산과 삼도봉·황석산 일대에서 적을 속속 포착해 약 1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토벌대의 끈질긴 추적으로 속속 꼬리가 잡힌 전북 도당의 주력 빨치산 부대는, 숨을 쉴 새도 없이 벌어진 토벌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대부분 그 자리에서 마지막 운명을 맞곤 했다. 이로써 빨치산을 상대로 한 토벌작전은 큰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그것은 작전의 대성공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군 8사단도 백아산 일대를 훑고 다니면서, 전남 지역 빨치산 부대를 소탕했다. 전남 지역 빨치산 주력 부대의 대부분이 8사단의 치밀한 작전으로 거점을 잃은 뒤 도망가거나 흩어졌다. 2기 작전이 끝을 맺어가면서 세력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부대는 지리산 일대의 남부군 직속 81· 92사단, 경남 도당의 57사단 정도였다.
주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빨치산의 고급 간부도 속속 붙잡혔다. 충남 도당 68사단의 참모장 이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당시 29세로 북한 정규 인민군 포병 장교로,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다가 퇴로가 막혀 북으로 도망치던 도중 충남 도당과 합류해 68사단의 참모장이 된 인물이다. 그는 운장산에 머물다가 수도사단의 공격을 받아 도망을 가던 중 전투경찰대에 붙잡혔다.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54년 처형대에 올라 생을 마감했다. 당시 충남 도당 부대는 병력과 화력이 떨어진 데다 제대로 ‘보급 투쟁’을 하지 못한 채 산속에 숨어 도토리로 연명한다고 해서 ‘도토리 부대’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그럼에도 호위 병력을 거느리고 다니는 고위급 간부가 정규 토벌대의 후방을 받치고 있던 전투경찰대에 붙잡혔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주력이 무너지면서 조직을 재건하지 못하는 빨치산 내부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토벌대에 계속 밀렸던 빨치산은 결국 그렇게 조직을 다시 세우지 못한 채,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져 산속을 헤매는 신세로 전락했다.
우리가 벌이는 모든 작전 내용은 미군에게도 신속하게 알려졌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에 나와 있는 미 고문관은 매일 벌어지는 전투상황을 미 8군 사령부에 시시각각 정확하게 보고했다. 미군은 아주 꼼꼼하게, 이번 작전이 어떻게 펼쳐지고,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52년의 새해가 밝고, 사령부의 작전이 매일 커다란 성과 속에서 펼쳐지던 1월의 어느 날, 참모 한 명이 내게 쪽지를 건넸다. 무선으로 받은 통신 내용을 정리해서 내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적은 쪽지였다.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백 야전전투사령부 백선엽-중장 승진.’ 대한민국 국군에서 3성 장군은 나와 함께 승진한 이종찬·손원일 장군 외에 우리에 앞서 중장이 된 정일권 장군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전투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저 ‘토벌작전을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모양이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산중에 있었기 때문에 번쩍거리는 세 개의 별을 구해 올 데도 없었다. 계급장 자체를 구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그렇게 승진 소식을 들었고, 그를 즐길 만한 여유라곤 전혀 없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