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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유다서의 말씀 17.20ㄴ-25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20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3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25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마르 11,30)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저울’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일하는>
유다서는 많이 읽히지도 않고 짧은 서간인데, 잘 뜯어보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선 내적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얘기해줍니다.
내적 생활이란 이웃 사랑과 관련한 외적인 생활과 다른 생활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기 전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내적으로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행복해야겠지요.
내적 생활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이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기도라는 것에 이의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다 서간은 기도하라고 하는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유다 20ㄷ)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는 기도도 있다는 것인가요?
그런 기도는 없고 또 없어야 하지만, 기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악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 그러니까 저 웬수 벼락 맞아 죽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기도만 하는, 그런 사람은 있을 것이고 많을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의 말로 바꾸면 기도의 영이 아니라 육의 영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다 서간은 이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유다 21)
영원한 생명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가 나를 구원하시도록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바르티메오처럼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구원을 위한 내적 생활을 잘하라고 권고한 다음,
유다의 서간은 이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권고합니다.
내적 생활에 이어 외적 생활에 대한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내적 생활에 관해 얘기했는데, 성령 안에서 기도했다면 이제 그것이 외적 생활로 드러날 것입니다.
곧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 <복음의 기쁨> 2번은 이렇게 진단하며 경고합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오늘 유다 서간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어떤 이들에게는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유다 22-23)
여기서 의심하는 이들은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이들을 멸망의 불에서 구하기 위해 자비를 베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유다 서간은 재미있게도 속옷까지 미워할 사람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속옷까지 미워할 어떤 이들이란 이단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이단들도 물들까 두려워하면서도 자비의 대상이니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것은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로 종합이 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기로 맘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자기의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존경받기보다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뭔데 쓸데없이 나서서 나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느냐?’ 는 마음을 지닐 때가 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석 사제들은 ‘하늘로부터 온’ 율법에 의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받고 그곳에서 성행하는 장사꾼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확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바르고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았습니다(마르 11,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깡그리 부정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은 “모르겠소” 하는 핑계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3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에게 아무리 얘기해 봐야 엉뚱하게 받아들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은 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굽으면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당신이 무엇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길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의 행동으로, 때로는 불이익과 미움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응답하고 그 권위를 증언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언젠가 나름 어깨 힘주는 분들 모인 한 단체에서 저를 강의에 초대하면서 엄청 꼬치꼬치 묻더군요.
신학교 외에 어느 대학, 어떤 분야를 전공했는지, 유학은 어떤 나라를 다녀왔고, 취득한 학위는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디서 가르쳤는지.
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워낙 좋지 않아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습니다.
몸도 좋지 않아 성적도 언제나 바닥이었으며, 유학이라고 몇 년 다녀왔지만, 배운 바가 거의 없는, 정말이지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초대 계획을 취소하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취득한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리로 몰려가는 군중, 당대 유다 세력가들을 너무나도 당연히 경계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뒤를 캐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가문 출신인가? 어디 율법학교를 졸업했는가? 그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 교수 자격증은 취득했는가?
알아봤더니, 웬걸, 예수란 인물은 깡촌 중의 깡촌 나자렛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무학력자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는 율법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직접 나서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때 예수님은 기가 막힌 역질문을 하나 던지시는데, 그 질문 하나로 그들의 말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당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명망과 인기와 인지도는 전 국민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백성들 사이에 하늘로부터 온 하느님의 전령이자 구약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대예언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백성들의 불신과 공분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고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늘에게서 온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진정성이 없었으며 다분히 계산적이었습니다.
질문다운 질문이 아니고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정치적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답(無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당시 영적으로 무지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라는 사실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언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것이고, 백성들에게 가르칠 권한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온 권한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권한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권한은 사람들을 내리누르기 위한 권한, 코너로 몰아붙이기 위한 권한이 아니라 사람을 격려하는 권한입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살리는 권한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권한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이미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으로 일하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또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논쟁을 통해서 믿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는 보기가 어렵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만 커지는 것을 흔하게 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논쟁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
어쩌면 논쟁이라는 것은 사탄이 신앙인들의 신앙을 뒤흔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논쟁이나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신앙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모르겠소.” 라는 사제들과 학자들과 원로들의 말은 정말로 몰라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알려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모르겠소.” 라는 말이 “관심 없다.”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든지 사람에게서 왔든지 간에 자기들의 기득권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은 특히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성전 정화’ 사건은 자기들의 기득권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겠소.”를 “관심 없다.”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그들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한을 알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당신은 권한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라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좁은 뜻으로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인된 랍비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당국이나 로마 당국으로부터 무슨 권한을 받으신 적도 없습니다.
사제들과 학자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즉 최고의회 의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설치는 것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대답을 회피하신 말씀이 아니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내가 하는 일에 관해서 들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마태 7,6).
3)
‘하늘에서’ 라는 말과 ‘사람에게서’ 라는 말에서, 사도행전에 있는 ‘가말리엘’의 말이 연상됩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5,38-39)
만일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사람이 세운 종교라면, 박해를 받았을 때 없어졌거나, 아니면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없어졌을 것입니다.
지난 이천 여 년 동안 안팎으로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이렇게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한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하느님의 종교” 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라고 자칭하는 사이비 종파나 이단 종파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한 사이비 종파들을 보면, 설립자가 죽은 뒤에는 힘을 잃고 저절로 없어지는 것을 흔하게 보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없어지지 않고 대를 이어가면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닌 것, 즉 ‘사탄’에게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종말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의 일을 방해할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하나? -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예수 성심(聖心)뿐이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시편 63,2)
미사에 참석한 우리는 물론이고 오늘 기념하는 성 유스티노 순교자도 평생 이렇게 진리이신 주님을 목말라 찾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지난 성모성월 5월 어머니의 달은 나라 사정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참 아름다운 신록의 자연에 참 좋은 날씨의 연속이었습니다.
6월 달력을 여는 순간 예수성심성월이란 말마디가 참 반갑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어머니의 달 5월 성모성월에 아드님의 달 6월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예수성심이야말로 우리의 참 희망이자 빛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성심성월,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을, 즉 겸손한 사랑, 온유한 사랑, 지혜로운 사랑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예수성심뿐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날마다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어제 일간지 전문가의 다음 기사 내용이 더욱 이런 물음을 갖게 합니다.
“현 세계경제는 마치 병원에서 중환자가 산소 호흡기를 달고 억지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과 같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묘수가 없다.
자연은 고갈되고 인구는 저출산, 고령화로 치닫는다.
이젠 ‘발상의 전환’이 답이다.
‘많이 먹고 많이 싸는’ 기존의 성장주의를 버리고, ‘조금 먹고 조금 싸는’ 대안 구조가 돌파구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지난 5월은 폭풍전의 고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올 여름의 더위가 걱정됩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입니다.
“지구온난화, 한가한 소리다.
지구열탕화가 맞는다.
‘가마솥 안 개구리’는 비유가 아닌 현실이다.
지구는 가마솥과 같이 달궈지고 있고,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은 2019년 기준 50만명에 이른다.”
이런 부정적 비관적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진단이 우리의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 참된 생태적 회개를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의 길이자 진리이자 희망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예수성심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문장 “다산 어른의 하루”라는 일력(日曆) 6월의 주제는 전미개오(轉迷開悟)입니다.
불교용어로 “껍질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의 중심을 세우라”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무지의 껍질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재앙 중의 재앙, 불행 중의 불행이 삶의 중심 예수님을 잃는 것입니다.
6월 첫날 다산의 말씀도 좋습니다.
“인생의 시험은 매일 반복된다.
바로 어제 일으킨 분발심을 오늘도 계속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도전이다.”
작심삼일에 머물지 말고 한결같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中)은 지극히 선한 것이고, 용(庸)은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면서 오래 할 수 있으면 중용(中庸)이다.”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한결같이 올바른 상태의 중용의 지혜는 예수님은 물론 성 베네딕도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무지하고 사악한 이들과 지혜로운 예수님과의 대결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무지로 왜곡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원로들은 흡사 기득권에 찌든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보는 듯 합니다.
눈밝은 민초(民草)들은 예수님의 온갖 행적들은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알아채는데, 무지에 눈먼 종교 권력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지혜롭게도 요한의 세례를 예로 들면서 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어느쪽도 대답할 수 없기에 이들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예수님 역시 “모른다”로 답하심으로 논쟁을 끝냅니다.
무지한 자들과의 논쟁은 끝이 없고 오히려 유혹에 휘말릴수 있기에 이렇게 조기에 끝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유다 사도의 가르침도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구도자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예수성심의 자비와 지혜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유스티노 순교자입니다.
성 유스티노는 2세기 초 그리스 사람으로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평생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진리를 찾았던 구도자였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이요, 이를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성인은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였지만 영혼의 허기는 여전할 뿐 만족할 수 없던 중, 어느날 에페소의 바닷가를 걷던중 노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고 다음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은 즉시 끓어올랐고,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엄습해왔다.
그리고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유익하고 확실한 철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들로부터 참 진리이신 예수님께로의 삶의 회개가 이뤄진 유스티노는 130년경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합니다.
성인이 그리스도교에 빠진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150년경 로마로 건너가 평신도 신학자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을 가르치고 호교론 학파를 설립합니다.
성인은 2세기 호교론자들 중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고 대표적 저서로는 호교론과 트리폰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성적 방어와 반대파의 주장을 누르는 빼어난 논쟁 능력은 많은 적들을 낳게 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 시절인 165년 6명의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의 순교를 당합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 첫날을 여는, 평생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 살았던 성 유스티노의 예수님께 대한 순교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길이자 진리요 희망이자 생명이신 예수성심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 속에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시편 63,4-5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권한>
댈러스에 와서 뉴욕 면허증을 텍사스 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타주로 이사 가면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나라이니까 그냥 바꿔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먼저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했습니다.
예약을 하는데 90일 정도 밀려있었습니다.
예약하면 이메일로 확인 서류를 보내줍니다.
서류에는 면허증 갱신 장소, 예약 번호, 준비물이 있습니다.
준비물에는 기존 면허증, 소셜 번호, 그린카드 혹은 비자, 살고 있는 곳이 표시된 페이퍼(은행 잔액 증명, 핸드폰 요금 고지서 등등), 차량 보험 서류 등이 있습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바코드를 찍거나 예약 번호를 입력하면 대기 번호가 나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양식을 기재합니다.
인적 사항을 적고, 건강 상태에 대한 물음에 예스나 노로 표기합니다.
기존 면허증에 대한 것도 기록합니다.
유효기간, 생년월일, 키, 몸무게, 눈 색깔, 머리 색깔 등을 적습니다.
적성검사를 위한 양식도 기재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대기 번호를 부릅니다.
창구에 가면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고 잘못 기재 했거나 미진한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고칠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간단히 시력 검사를 한 후에 사진을 찍으면 임시 면허증을 발급해 줍니다.
30$ 정도의 수수료를 내면 운전면허증 발급 작업이 끝납니다.
쉬운 것 같지만 처음 하면 긴장됩니다.
그런데 전 ‘사제 찬스’가 있었습니다.
저의 성직자 복장을 본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자기도 신자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성당 이야기도 하고, 신앙 이야기도 하니 분위기는 편안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최대한 가능한 방법을 찾아주었습니다.
제가 실수로 잘못 적은 곳도 친절하게 고쳐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30분 만에 운전면허증 발급 절차가 끝났습니다.
직원은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많은 직원 중에서 가톨릭신자를 만나서 감사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면 어떻게 될까?”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신앙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사제의 직무에 성실했던 사제들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세례 때 ‘인호’를 받았으니,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곳에서도 친절하게 안내받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톨릭신자를 만나서 친절하게 안내받았지만, 꼭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지 못했으면 새로운 운전면허증 발급은 어려웠을 겁니다.
절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면허증, 소셜 번호, 비자나 그린카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제가 댈러스에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신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봐줄 수 있겠지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서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지 말고, 영원히 좀 먹지 않는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
우리가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할 보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자캐오처럼 회개하고,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어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베드로 사도는 언제든지 천국 문을 활짝 열어줄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권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권한은 능력, 재력, 권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재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한없이 약하고, 순결하신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겸손함과 정결함,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였으며, 그분의 권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틀렸다’라는 단정>
캄보디아의 독재자, 학살자, 일명 ‘킬링필드’로 불리는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세계사를 넘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악의 학살자라고 불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캄보디아 전체를 문자 그대로 황폐화한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이 인물은 바로 ‘폴 포트’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대학살극을 벌입니다.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최소 1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사람들이 ‘폴 포트’의 학살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명령한 사람 중에는 안경 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은 지식인 계급, 부르주아, 그리고 농민의 착취자라는 이유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해 이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안경 쓴 저도 그 당시에 캄보디아에 있었다면 사형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엄청난 학살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나의 이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면서 거리를 두는 사람이 참 많음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으며 홀로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절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내가 틀렸습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의 덕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가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물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유일하게 권한을 지닌 이는 대사제밖에 없었지요.
대사제는 하느님께 권한을 받아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권한을 받으셨다고 답하시면,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과 그를 대신하는 대사제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고, 대사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면 이 권한은 부정한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은 틀렸다는 단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틀렸다는 가정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역시 ‘틀렸다’라는 단정을 너무 많이 합니다.
이런 단정 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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