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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베드로 2서의 말씀 1,2-7
사랑하는 여러분,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을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줍니다.
계속되는 인내와 관용과 자비가 배신으로 돌아와도,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애타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동시에 이 사랑의 이야기는 그 애절한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외아드님의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사랑의 노래입니다.
또한 이는 그 큰 사랑을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 ‘포도밭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실까요?
그것은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정화를 하시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라고 따졌기 때문에, 당신의 권한과 신원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리석은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 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 구원의 새로운 백성을 세우실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된다는 유대인들의 선민의 특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계속해서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자비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르 12,11)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감사와 순명의 열매, 자비와 믿음의 열매를 바쳐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르 12,11)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꽁꽁 묶으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당신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덧셈 인생, 뺄셈 인생>
뺄셈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나 정파를 배제하는 정치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덧셈 정치도 있겠고 그것은 가능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일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의 한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르 12,8)
여기서 포도밭 밖이란 공동체 밖이란 뜻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것은 공동체서 축출했다는 뜻이며,
머릿돌이어야 할 주님을 사람들이 버려버렸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저와 가까운 공동체들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척 슬프고,
그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마음이 무척 아프고 그 사람들이 무척 가엽습니다.
왜 덧셈은 할 줄 모르고 뺄셈만 하는가?
그런데 자기가 그런 줄은 알고 있을까?
자기가 그런 줄 안다면 무척 슬플 테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럽니까?
그것은 그것이 그의 능력이고 한계이기 때문이고, 달리 말하면 그에게 있어야 할 덕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이란 선덕의 줄임말로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반대로 악덕이란 선은 행할 수 없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덕이 있어야 선을 행할 수 있는데 덕은 없고 악덕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덕이 있고 어떻게 덕을 지닐 수 있을까요?
보통은 덕을 쌓는 사람에게 덕이 있고 오늘 베드로 서간도 이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2베드 1,5-7)
사실 믿는다면서 덕이 없는 사람이 있어 욕을 먹습니다.
능력은 많은데 덕이 없는 지도자들이 욕을 먹는데,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의 덕에 다른 덕들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가지 덕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되고,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6-7)
우리 인생도 그럴 것입니다.
뺄셈 인생이 있는가 하면 덧셈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덕에 다른 덕을 하나하나 그리고 차례차례 쌓고, 그 덕들 덕분에 모두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덧셈 인생이 있는가 하면, 선덕을 쌓지 않아 악덕에 악덕을 하나하나 그리고 차례차례 쌓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다 적으로 만들어 배제하는 뺄셈 인생이 있을 겁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고 나는 어떤 인생입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 나고 돈 났다>
살아가면서 많은 재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위축되고 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뿐더러 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재물이 없어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반면에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된다’ 합니다.
돈만 가지고 있으면 존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재물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재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고 재물을 담보 삼아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어진 사람은 재물로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이재에 밝아 자기의 몸을 망쳐 재물을 일으킨다.”(대학)는 옛말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재물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 세상은 끝장난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밭을 일구어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가 포도 철이 되자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매질하고, 어떤 종은 죽이고 결국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보낸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러고는 상속자가 죽었으니 그 포도밭이 자기들 것이 되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 그 주인은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은총의 신이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 분노에 더디시고 항구하게 사랑하시며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만약 종을 몇 차례 보내고 아들까지 보내며 기다려 주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행동하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없이 인내하시며 변덕스러운 우리들을 참아주고 계십니다.
받은 은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잃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잃는 것입니다.
잃어 놓고는 하느님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작인이라면 포도밭을 맡겨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 주시고 계신데 전혀, 아닌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베풀어 주신 은혜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고 말하면서도 ‘돈 나고 사람 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삶의 구심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하나 열어주십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르왕가와 21명의 동료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북아프리카에 비해 동아프리카 지역의 복음화는 꽤 늦었습니다.
1879년에 이르러서야 첫 선교 사제들이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던 무데시 추장은 선교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무데시 추장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무왕가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는데, 성격이 포악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오만하고 그릇된 최고 통치자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독식하고 좌지우지하고 싶었던 무왕가 추장 눈에, 사랑과 배려, 친교와 나눔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 교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폭군은 가장 충직한 부하였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무카사를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무카사 자리를 계승한 다른 부하가 우간다의 김대건 신부님 격인 가롤로 르왕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스 몰래 4명의 예비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즉시 사형이었음에도 은밀히 신자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폭군은 닥치는 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은 신자들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기고, 온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밤새 빙빙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갖은 협박을 하고 농락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순교자들은 참수형이나 화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이 대체로 폭군 무왕가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왕의 개인 비서도 있었고, 왕궁에서 이런 저런 사무를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당분간 멀리 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순교자들은 결코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간다 순교자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순교 이후 박해의 칼날은 더욱 번득였지만, 입교자, 세례자 숫자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순교 직후 3천명의 예비자들이 쇄도했고, 5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 지금 우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풍요로운 성소의 온상입니다.
유럽이나 북남미, 우리나라까지 포함해서 다들 사제 수도 성소의 급감으로 교회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쪽에서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하나 열어주신다는 말씀이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보여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모범이 일궈내고 있는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박해가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시대 순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어도 나와 맞지 않는 관계라 할지라도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수용하는 자세, 순교 영성을 사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찾아오는 노화나 병고, 실패나 죽음조차도 주님의 크신 구원 계획안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을 지니는 것도 아주 좋은 순교의 한 모습이라고 확신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비유이고, 누구든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비유의 전반부는(1절-5절)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 비유의 전반부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예레 7,25-2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기만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기다림’을 ‘무기한(無期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한없이 기다리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심판 날이 되기 전까지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심판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때는 ‘지금’입니다.
또 “어차피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다.” 라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무조건, 무제한으로 용서하시는 분이다.”라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인데, 옳은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무제한’이 아니라 ‘회개’ 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때가 되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와 자비를 거부하고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비유의 후반부는(6절-11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과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6절의 “그는 마지막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악한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들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자기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은 모르고 그랬더라도, 하느님께 반역한 것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크게 방해한 일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차지하려고 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유대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9절의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비유의 핵심 주제이고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들이 선택된 민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그 은총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또는 예수님의 교회답게 살지 않으면, 우리도 받은 은총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로마 11,19-22)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과 삶 -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삽시다>
오늘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르왕가와 21명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앎과 삶이 하나였던 순교성인들입니다.
무지한 우간다의 무왕가왕은 1885-1887년 사이에 참으로 터무니 없이 배교를 거부한 무죄한 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1964년 이 순교자들의 시성식 때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강론 일부를 인용합니다.
“순교자들의 영광은 재생의 표지입니다.
이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은 순교록에 지극히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더해 줍니다.
새 시대의 첫 열매인 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아프리카 대륙은 자유를 얻어 독립한 아프리카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너무도 참혹하고 너무도 보배로웠던 이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되게 해 주십사 기원합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순교자들이 끊임없는 감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주님 향한 사랑과 앎과 삶의 일치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바르게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알아야 살 수 있고 알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앎 중에 앎이, 공부 중의 공부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보다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이렇게 평생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제발 평생공부에 지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평생공부에 앞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참으로 한결같고 열렬한 바른 사랑이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사랑과 앎과 삶은 함께 갑니다.
어디서 공부합니까?
혼자만의 공부는 부족합니다.
함께와 홀로가 함께 하는 공부여야 합니다.
이래서 공동체 학교에 몸담아야 합니다.
내 몸담아 살아가는 공동체는 말그대로 사랑의 학교, 섬김의 학교가 됩니다.
졸업이 없는 공동체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학인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고 너와 나를 아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평생공부 제대로 못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사랑하여 바르게 알아갈수록 나와 너를 바르게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래야 무지의 편견이나 선입견의 오해나 착각함이 없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참으로 있는 그대로 편견이나 오해없이 제대로 보고 아는 경우는 얼마나 힘든지요.
하나하나는 참으로 좋은 분들인데 극단의 이념이나 편견으로 굳어지면 거의 광적인 광신이나 맹신이 되어 도저히 바꾸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편견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백약이 무효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무수한 비극적 폭력과 살인입니다.
바로 이의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한 인간에 의해 부단히 반복되고 자행되는 현실입니다.
여기 나오는 불의와 탐욕의 소작인들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이고, 종들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이 파견한 무수한 예언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바로 여기서 소작인들은 당대 예수님을 배격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무수한 무지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무지한 소작인들은 비단 잘못된 지도자들뿐 아니라 편견에 물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다음 시편 말씀은 당대의 예수님께 대적했던 무지한 지도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라기만 하네.”
당대나 오늘이나 무지한 이들의 편견을 깨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집짓는 무지한 이들이 내버린 돌, 바로 죽임당한 예수님을 부활시켜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당대의 무지한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분을 붙잡으로 했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합니다.
무지한 지도자들과는 달리 군중은 예수님을 알았던 것이나 이렇다 해도 군중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무지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로 보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볼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주님의 은총에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는 평생과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제1독서에서 베드로가 줍니다.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를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게 하시고 생명과 신심과 필요한 모든 것을 선사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앎의 완성을 촉구합니다.
앎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나와 너를 아는 앎에는 얼마나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요!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열성-믿음-덕-앎-절제-인내-신심-형제애-사랑’이 하나로 연결된 복합적 실체입니다.
이런 앎의 은총은 영지주의자의 머리로만의 깨달음의 앎이 아니라 생활실천과 관련된 사랑과 삶이 하나로 녹아있는, 참으로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녹아있는 앎입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말씀이 더욱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다산과 삼국지에 나오는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스스로에게 당당할 만큼 힘껏 노력한 후에야, 운을 탓할 수 있다.”
<다산>
"먼저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라(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
<삼국지>
참으로 잘 익은 가을 열매들처럼, 사랑과 지혜의 삶중에 익어가야할 우리의 앎의 열매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사랑과 지혜로 잘 익어가는 앎의 열매들이 되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
본당 청년들과 만났을 때입니다.
청년 레지오에 함께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남편이 피아노를 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레지오 회합이 있는 목요일 저녁에 미사 반주를 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은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에 열심히 연습한 형제는 부활 2주부터 평일미사 반주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레지오 단원들에게 저녁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주임 신부님 포함해서 청년 레지오 단원들이 모였습니다.
단장은 며칠 전부터 허리에 통증이 있어서 못 올 뻔했는데 다행히 운전이 가능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단원들에게 아팠던 경험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있듯이, 나무에 옹이가 있듯이 다들 아팠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도 3년 전에 뉴욕에서 교통사고가 났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고,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때로 시련과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은 모두 그런 시련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6명의 단원이지만 10명이 되면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15명이 되면 분단하기 전에 성지순례를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연례행사처럼 저도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가 되면 ‘목감기’가 찾아오곤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조용히 약을 먹고 쉬면 좋아졌습니다.
본당에 있으니 한 가지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미사를 집전할 때 목소리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목감기는 고맙게도 4일 정도 머물다가 떠났습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왔고, 적응하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목감기는 제가 건강을 확인하는 친구 같습니다.
목감기가 없으면 저는 더 무리하게 일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감기가 없으면 무리하게 지내다가 더 큰 건강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감기가 찾아왔다는 것은 저의 면역력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건강을 믿고 무리하게 행동하면 건강한 몸도 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감기가 오지 않으면 제가 건강관리를 잘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목감기가 찾아오면 제가 건강관리를 더 잘하라는 뜻으로 알고 면역력을 키울 수 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건강관리를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언자의 말들 잘 듣는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자동차가 터널을 지나면 곧 밝은 세상으로 나오듯이, 그런 시련과 고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강한 신앙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를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언자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감기가 찾아온 것은 나의 건강을 확인하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감기가 찾아온 것은 나의 면역력을 키우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감기를 원망하고, 감기를 욕하는 것은 나의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 더 나쁜 길로 가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고, 아들의 말을 들었다면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흔들릴지라도, 비에 젖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닭을 키우려고 닭장을 근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 닭장에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닭장 밑에서 물이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군다나 닭장을 만드느라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써서 수리할 비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닭을 키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모두 팔아 버려야 할까요?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이 역시 올바른 판단은 아닙니다.
닭장 만드는 데 들었던 비용을 모두 날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을 최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닭을 팔고, 그 판 값으로 오리를 사서 닭장에서 키우면 어떨까요?
오리는 물이 필요하니 이렇게 물이 올라오는 것이 최적의 환경일 것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도 사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비로소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뜻만을 주장하고 그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주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으로 원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하지 못해 고민 속에 있을 때, 나의 뜻만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뜻을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이 아닌 최선의 상황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쁠 수 있는 또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마음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일을 주인이 대신 해주었습니다.
또한 포도밭 소출의 전부를 가져오라는 것도 아닌 얼마만을 내라고 합니다.
아마 주인은 자기의 배려와 사랑을 알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작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배려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사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생각의 전환을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늘 나의 입장에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어렵고 힘든 것이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용기 있게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충실한 주님의 소작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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