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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 1,1-3.6-12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성경’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밝힙니다.
‘성경’에 대해,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집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이를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3,6)를 인용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 능력’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곧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마르 12,24)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지닌 영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2티모 1,7)
비겁함의 영이라!
비겁함의 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떠한 영입니까?
비겁(卑怯)함이란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하다고 할 때의 그 ‘천하다’, ‘저속하다’는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저는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에게 아쉬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영(spirit)적인 차원을 중시하지 않거나 간과한다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Scott Peck이라는 분은 좀 다르고 이분의 주장이 저의 생각과 많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약함-두려움-회피의 구조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체력적으로 약하고,
심리적으로 약하고,
정신적으로 약하고
영성적으로 약하기에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자기 부정, 핑계와 변명, 위선과 감추기이고, 자기 합리화와 남의 악 들추기입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spirit)의 힘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일단은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때 그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남의 악 들추기에 비하면 양반인 회피 방법입니다.
약한 사람이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약할 뿐 아니라 악해지기까지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죄와 악을 들추거나 크게 만들고는 그 뒤에 자신의 죄와 악을 숨기고 감추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에 화살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죄악으로 향하던 화살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하느님께 받아 지닌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은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가 악령과 직면하셨듯이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할 힘을 지니게 되는데 그 힘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악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자신을 겸손하게,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죄악과 정면 승부를 겁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나 너무 어려운 주제를 다루다 끝내지 못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우리는 오늘 내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곧 비겁함의 영을 지녔는지 아니면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지녔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 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 12,25.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는 예수님의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으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분을 죽음까지도 극복하시는‘산 이들의 하느님’(12,27)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손희송)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에게 성경을 배워야 할지 결정하는 법>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게 될까요?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을 잊고 또 그러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점차 물을 끓이면 뛰어나오지 못하고 그냥 익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보면서도 보지 못할까요?
모든 멸망에는 이기적 욕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있습니다.
로마도 지나친 쾌락주의에 빠져 멸망에 이르렀고,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굶은 사람들을 조롱하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도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유일한 스승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멸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훨씬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신앙은 그저 액세서리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는 해야 해서 억지로 모세오경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살았는데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 중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소개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죽은 개의 주인이라고 하는 게 무슨 능력을 나타내는 소개가 될까요?
“100억짜리 말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면 놀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신 것이고 그래서 부활은 존재합니다.
다만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안 그럴까요?
욕망은 비교할 때 더 커집니다.
인스타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만 못 가지고 못 먹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굳이 더 맛있는 것을 먹는 프로그램을 보고 더 잘나가는 셀럽들을 찾아봅니다.
이렇게 로마나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보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은 더 극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돈이 부족합니다.
나도 생활 수준이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비경제가 둔화하고 그렇게 살기 어려워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상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뜨거워지는 물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스승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눈이 머는 이유는 욕망 때문인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욕망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는 이라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성령을 힘입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메주고리예는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한 번 가봤는데 성모님의 증인 여섯 명이 전부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무슨 죄냐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싶어집니다.
욕망이 완전히 불타버린다는 뜻입니다.
루르드나 파티마는 성모님을 본 분들이 다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모두 결혼하였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사제였는데 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내나 자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해석하십니다.
그러니 욕망에 조금이라도 사로잡혔다면 그만큼 성경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에 자유로운 예수님과 같은 이들을 스승으로 삼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이들이 많아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땅으로 건너가서, 한두 해가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아니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헌신하는 선교사 형제들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닙니다.
마치도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지리산이나 금강산 능선 타듯이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줄지어 기다립니다.
평생 노력해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언어 문제, 문화 차이, 식습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그저 직진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보니파시오 주교님이 딱 그랬습니다.
주교님의 어록을 묵상하다 보니, 세상 모든 선교사들의 이정표요 모델이 따로 없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배인 우리 교회이지만, 그 안에 선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고 진두지휘하시니 우리 교회는 안전합니다.
비록 전후좌우로 쉼 없이 흔들리지만 굳건한 안전장치인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꾸준히 전합시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는 구원의 문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교도들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외쳤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던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던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당산(堂山) 나무처럼 여기는 그들의 참나무 신목(神木)을 과감하게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로 소성당을 지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의 목숨 걸고 선교활동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선교 사업이 언제나 탄탄대로만을 걸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때로 혹독한 실패도 맛보았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란 없었습니다.
일단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지난 상황을 복기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또 다시 선교활동의 성공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효과적인 전략을 세운 후, 또 다시 시도하고, 그래서 큰 성공을 거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보니파시오 주교님도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평생토록 수많은 이방인들을 개종시켰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존경받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하면서 편안히 노후를 보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과 구원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교도들의 영혼이 늘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연로한 몸을 추스르고 고단한 선교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앙심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전도 여행 중에 머리에 칼을 맞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던 영혼 구원을 향한 활화산 같은 열정이 오늘 우리 마음 안에서도 솟아나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1)
‘부활 신앙’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두가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섬기는 이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에게 그런 권능이 없다면, 즉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런 신을 믿고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살아 있을 때에 섬겼던 하느님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도 살아 있으면서 섬기는 하느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하신 것입니다.
2)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1코린 15,32).
미래가 없으면 희망도 없고, 누구든지 희망이 없으면 ‘오늘’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아마도 생존본능대로만 살게 되거나, 쾌락만 찾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내세도 없고, 하느님의 심판도 없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쓸 이유가 없게 됩니다.
또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도, 선을 지향하면서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일도 모두 무의미해집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교의 복음도 교리도 신앙도 다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 15,12-15)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향해서 “부활이 없는데도 있다고 믿는 바보들이다.” 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부활이 있는데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바보들입니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는 ‘그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의 삶’은 ‘현세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부활 후에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인간관계들, 욕망들, 갈등들, 다툼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오직 사랑과 평화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있다면 이쪽 세상에서 이혼하거나 사별한 다음에 재혼하고 또는 만났다 헤어지고 그런 일들 때문에 부활 후에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황이 많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마르 12,19-23), 부활 후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누구나 다 금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해서, 또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해서, 가정이 해체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가족의 사랑과 일치가 더 깊어지고 완성될 것입니다.
4)
루카복음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루카 20,35).
부활을 ‘아무나’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들만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은총을 청하지 않고, 또는 주시는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찾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구원의 삶 -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
(시편 18,29)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도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계속 축제같은 아름다운 날씨의 연속입니다.
3월20일부터 시작된 수도원 개인피정집 2채와 수련소 건축이 어제 6월4일로써 끝나고, 그동안 2개월 보름쯤 수고해준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사'인 이승용 아오스팅, 이현옥 헤레나 부부는 왜관 고향집으로 떠났습니다.
참 아담하고 소박한 세채의 건물이 볼수록 사랑스러워 자꾸 눈길이 갑니다.
“순식간 지난 듯 합니다.
거의 3개월인데 마치 3일쯤 걸린 듯 합니다.
하루 평균 10여명씩 인부들이 머물렀고 이들의 음식 뒷바라지를 해줬으니 이보다 역동적인 공동체는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지만 기뻤습니다.
우리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해냈습니다.”
요지의 헬레나 자매의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떠난다하니 서운한 감정이 들기는 처음입니다.
그동안 하루의 일이 끝나면 끝기도 때마다, 또 날마다 미사 때마다 가지런히 앉아있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 때문에 가족처럼 느껴졌던가 봅니다.
정말 내일처럼 최선을 다함으로 감동을 선사한 참 진실하고 성실한 부부입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일을 끝낸 기쁨이 큰지 흡사 승리의 무용담을 나누는 듯 했습니다.
‘하루 묵었다 내일 갔으면 좋겠다.’ 말했지만 미련없이 오후 늦게 떠났고 저는 부부에게 강복을 주었습니다.
문득 떠남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홀가분한 죽음이겠는가.
비록 두 부부는 떠나서 보이지 않지만 왜관집으로 귀향(歸鄕)하여 살아 있듯이, 세상을 떠난 죽음도 그렇지 않겠나.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하여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강론을 나눌 때 나눈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맞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피정집을 짓는 아오스팅 형제님! 맛있는 밥을 짓는 헬레나 자매님! 또 좋은 강론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프란치스코 신부!
모두가 하느님 눈에는 사랑스런 당신의 일꾼일 것입니다.”
“ㅎㅎ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 각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이 영원한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나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쓴 책 서문 내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산 이들은 죽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이요 역설인가!
물론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난다.
그러니 우리 산 이들이 죽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진실인가!
우리는 영원으로 운명되어졌다(We are destined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을 위해 지음 받았다(We are made for eternity)”
오늘 복음의 부활 논쟁에서도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진리를 명명백백 밝히십니다.
새삼 우리의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부활의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는 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중 탈출기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죽은 이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the God of Jacob).’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새삼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확신에 넘치는 고백은 부활신앙에서 연유됨을 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샘솟는 내적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죽음을 폐지하시고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빛나는 삶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정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자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입니다.
그 거칠고 위험한 고난의 삶 중에도 80세 전후의 장수를 누리시다 순교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게르만인들의 사도인 보니파시오는 ‘평화의 친구“라는 뜻의 빈프리트라는 이름을 지닌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되었고, 716년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게르만족의 복음화를 위해 그를 선교사로 파견합니다.
교황은 이때 그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보니파시오 이름도 주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정말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불가사의의 정력적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풀다 수도원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교구들을, 수도원들을 설립합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그는 마침내 프랑스에까지 진출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던 중 755년 6월5일 오순절에 현재 네델란드 도쿰 근처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52명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고 풀다 수도원에 묻힙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기립니다.
“독일에서 정치, 교회, 영성의 영역에서 발전한 모든 것은 보니파시오가 놓은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후계자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황제와 왕들이 기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성인이 편지 다음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합시다.”
정말 부활의 희망으로 무장된 ‘주님의 불퇴전의 용사'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였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백절불굴, 주님의 희망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2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새로운 차원의 삶>
‘십시일반(十匙一飯),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주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쉬운 일일지라도 함께 하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저는 십시일반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본당에 청년 성가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주임 신부님이 오면서 청년들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한주는 성경 공부, 한주는 친교를 하면서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성가대가 출범했습니다.
청년 성가대에서 ‘단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마침 본당에서는 한국에 성가책 300권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택배를 부치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처럼 택배 비용이 성가책 구매 비용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10 미사 성가 단장이 한 가지 제안했습니다.
올여름에 성가대원들 중에 한국 가는 단원들이 있는데 미국 오는 길에 한 박스씩 가져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택배 비용을 줄이고, 그 비용으로 청년 성가대 단복을 사오겠다고 하였습니다.
10박스면 부피도 크고, 무게도 150킬로로 부담되지만, 1박스는 큰 부담 없이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청년 성가대를 아껴주는 어른 성가대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멀리 한국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음서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지붕을 들어내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많아서 어렵겠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많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먹을 것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중물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힘껏 펌프를 움직이면 한 바가지의 물로 5천 바가지의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하에는 많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보리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십시일반과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만나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동의 문제였습니다.
천국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지 않고, 이웃에게 음식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흘리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옥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으려 하니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음식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십시일반으로, 백지장도 서로 맞드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애벌레는 땅 위를 기어 다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천사가 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날개 잃어버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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