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성공신화를 이룩하였다. 물론 결혼 한지 6개월만에 우리 가족은 지상계 인간과 지하계 오크의 외모가 적절히 섞인 귀여운 조카를
보게 되었다. 뽀로로 드럼 세트를 두들기는 조카를 보면 가끔 스페이스 오딧세이 에서 처음 도구를 발견한 유인원의 모습이 보이기도
매년 마을에 고추 축제가 열릴 때 쯤이면 밭으로 달려가 바람에 외로움을 섞어 간접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아마도 내년쯤 작은형도 동남아 또는 우즈벡으로 결혼반지 원정대를 꾸려서 떠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우즈벡의 늘씬한
백인 여성보다 농사일을 잘할 거 같은 작고 단단한 체형의 동남아 형수님이 생겼으면 좋겠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유일한 연애는 제대하고 소개팅으로 만난 음대생이었는데, 만날 때마다
습하고 어두운 키스의 성지 비디오방으로 데려가 키스하자고 징징거린 기억 밖에 없다. 하긴 성악을 전공해서 노래할 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는 그녀의 입에서 노래를 들은 기억보다 그녀의 입을 나의 입으로 틀어막은 기억밖에 없다.
아무튼.... 매년 여름 휴가때마다 남들은 여자친구와 휴양지 또는 해외여행을 떠날 떄 나는 집으로 내려가 작은 형과 간접 자살을
시도한 기억 밖에 없다. 아... 총각 시절 유일하게 떠난 여행은 친구들 커플과 함께 떠났던 여행인데.....
그렇게 외로운 20대를 보내고 30대 그것도 정확히 32살이 되던 해 운명의 7살 차이 나는 부인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아.. 출근할 시간이네..
하아..
2편
32살이 되던 해까지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장님의 지시로 거래처 직원을 만나
이게 소개팅인지 업무의 연장인지 분간할 수 없는 영업적인 소개팅도 했었고, "여자를 만나고 싶은가? 그러면 동호회를
가입하라!" 라고 충고해준 친구의 말대로 큰 맘먹고 카메라를 장만한 뒤 가입한 DSLR 카메라 동호회는 사진보다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들어온 발정난 수컷들로만 가득했다. 물론 그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내가 봐도 못나고 남이 봐도 못난
나는 여자 회원에게 말 한번 제대로 섞지도 못하고, 오빠라는 말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지갑의 현금과 카드를 탈탈 털어서
술과 안주를 제공해주는 호구 오빠로 전락했다.
동호회에서 맘에 들던 여동생들에게 고백하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들도 비슷한 경험을 아주 많이 하거나 지금도 하고 있겠지만
"그냥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고 싶어요."라는 말을 매번 들었다. 저 멘트와 "오빠같이 착한 남자가 왜 여자친구가 없어요?
라는 구태의연한 5년전 담근 묵은지 같은 멘트는 지겹게 들었다. 그럼 니가 사겨주시던지.....
그러던 중.....
그녀를 만나게 된 운명적인 32살이 되던 해, 연륜과 노련미가 최고의 장점이라 생각하며 풋내기 애송이 신입사원 따위에게 회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던 우리 사장이 실성했는지 그 해 신입사원을 무려 세 명이나 뽑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는 그 세 명 중의 한 명이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펀치드렁크 러브의 아담 샌들러처럼 한대 제대로 맞은 듯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는 커녕 "무슨 여자가 저렇게 떡대가 좋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녀는 평생 농사를 지으신 우리 어머니께서 며느리감 (며느리라 말하셨지만 고추농사 부사수 정도로만 생각하셨던 것
같았다.) 1순위로 꼽던 등에 애를 업고도 괭이질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잠재력을 지닌 떡대를 자랑하고 있었다.
(절대 여성 비하로 생각해 주시지 않길 바란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들에게 한 명씩 사수와 부사수로 엮어 주었는데, 다들 예상은 했겠지만 그녀는 나의 부사수였다.
나는 그녀에게 능력있는 선배로 보이기 위해 그동안 내가 갈고 닦은 모든 것들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회사 업무적인 스킬은 물론이고, 부장님에게 잘 보이는 법 (아주 간단하다. 회식 때 노래방에 가게 되면 부장님 어깨동무하고
낭만에 대하여를 불러 드리면 된다.) 사장님 눈에 띄지 않는 닌자가 되는 법, 커피믹스의 적절한 물배합과 눈치 보지 않고
칼퇴근 하는 방법까지....
그녀와 함께 외근을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남들보다 늦은 25살에
대학을 졸업한 이야기와 학창시절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이야기. 그리고 그녀와 나의 첫 번째 발견한 공통점인 고향이
시골이라는 점까지.. (그렇다 우리는 촌놈과 촌년이었다.)
그녀와 함께 옆자리에서 일을 하고 함께 외근을 다니면서 점점 그녀의 넓은 어깨에 나의 손으로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난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어깨가 넓은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많은 고민에 빠졌다. 우린 나이 차이도 있고, 그녀의 이상형은 나와 정반대의 스타일 (아메리카노
커피를 좋아하며 폴로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 하얀 남자..)이었다. (물론 내 스타일은 소주를 좋아하며, 농약회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가 더 잘 어울리는 가끔은 전설의 3모작도 한다는 태국 농부 스타일이었다.)
난 내 고민을 친 형처럼 지내던 팀장님에게 단 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떡대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고백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털어 놓았다. 팀장님은 내게 눈에 힘을 퐉 주고 자신있게 너를 좋아한다 너와 사귀고 싶다고 고백하라고 하셨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떡대에게 회사 앞 민속주점에서 퇴근 후 보자고 약속을 했다. 떡대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드디어 운명의 고백의 시간 난 팀장님의 지시대로 장난기를 삭제한 뒤 진지하게 눈에 힘을 퐉 주고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 한 번 진지하게 만나보자" 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떡대는 "대리님 장난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싸이클롭스도 아니면서 눈에 진지 레이저를 쏴대는 나를 보더니
떡대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게 걸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리님, 저 한테 왜 이러세요. 저 회사 나가라는 건가요?" 라고 물었다.
"아니... 그냥 나와 회사 선후배가 아닌 남녀로 만나보자는 거지..." 단호박 아니 단호하게 말했다.
"대리님 저는 아직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 세 번만 만나봐." 이 부분은 단호하게 말하기는 커녕 술에 취해 거의 사정조로 말했다.
그녀는 그 뒤 한숨만 몇 번 쉬고 아무말도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내가 별로 였던 것이었다. 훗날 그녀는 그 당시 내가 싫었던
이유가 입냄새가 너무나서 내가 하는 어떤 말도 듣기 싫었다고 한다. 왜 나는 그 당시 막걸리에 홍어를 시켰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내게 3번의 기회를 주었다. 첫 번째 데이트 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병신같은 내가 예매한 영화는 티라노의 발톱의 아성에
도전하는 명작 10,000bc 였다. 두 번째 데이트 떄는 4B연필보다 더 진한 흑심을 품고 멀리 안면도 까지 갔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호위무사
자취방 친구를 데려와 난 두 여자에게 조개와 고기만 구워주고 그녀를 위해 예약한 푹신한 침대가 있는 펜션방의 화장실 앞에서
웅크리고 혼자 잤다. 지금도 난 그 친구가 가장 싫다. 하지만 요즘은 우리 아들을 너무 잘봐주고 있어 그녀가 그 당시 저지른 만행을
조금씩 용서해주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데이트 이번에는 반드시 단 둘이, 창고 어딘가 고가의 미술작품이 숨어있다는 꿈과 비리의 세계
에버랜드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당일 갑자기 그녀의 집에 일이 생겨 에버랜드를 가는 도중 함께 그녀의 집으로 내려 가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혹시 나를 부모님께 소개해주려나?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녀 집에 발생한 큰 일은 바로 아버님 아니 장인 어른께서 밭을 갈으시다
튀는 돌에 맞아 부상을 입으셨다는 것이었다. 장인 어른이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나는 속으로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
했다. 난 우리 고향에서 알아주는 농업 신동이었고, 심지어 전공도 농업 관련학과 였다. 난 그날 장인 어른이 갈다가만 밭을 소처럼 갈았다.
훗날 장모님이 되신 그녀의 어머님은 그녀가 아버지께서 다치셨다고 하니 서울에서 농사일을 대신할 외국인 노동자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
하셨다고 한다. 그 뒤 난 미래의 장인 어른과 장모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매주 주말이면 내려가서 열심히 두 분의 일을 도와 드렸다.
내 고향의 모내기와 고추농사 따위는 관심 조차 없었다. 밭의 고추 챙길 정신보다 어떤 가련한 고추를 챙겨줄 생각밖에 없었다.
처음에 장인 장모님은 내가 1~2주 오고 일이 힘들어서 포기할 줄 알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 내가 심은 농작물을
수확하는 결실의 계절이 온 가을 드디어 잘 익은 벼 마냥 그녀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뭐...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빠르게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상견례 자리에서 인사보다 더 빠르게 나온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결혼식 날짜에 대한
이야기 였다.)난 처가의 머슴이 되었다. 지금은 내 옆에서 아들에게 지친 하루를 보내고 잠들어 있는 떡대 좋은 하지만 전혀 농사에
도움이 안되는 아내지만 그떄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삭신이 쑤신다.
물론 난 연애할 때부터 지금 까지 처가집의 일 잘하는 검은소로 잘 지내고 있다.
특히 일을 열심히 한 날은
여물 아니,, ,밥도 많이 주신다, 닭도 잡아주신다
3편
노총각의 갈림길에 서있던 제가 7세 연하의 부인과 결혼한 이야기 입니다. 쓰다보니 옛 연애할 때부터 어렵게(?) 결혼 승낙을 받아낸
추억부터 신혼때 여러 추억이 떠오릅니다. 저에게는 행복한 추억이지만 부인에게는 일부는 악몽이겠지만요.
나도 막내, 떡대 아니 부인도 집안의 막내였다. 양쪽 집의 어른들은 일사천리로 상견례를 치르고 결혼식 날짜와 장소까지 결정 되었다.
물론 나와 부인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사실 양쪽 집안이 서로 윈-윈 하는 계약이었는데, 처가집은 여물만 제때 제때 챙겨주면 논이건
밭이건 가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지치지 않는 가진 검은소와 장기 FA계약을 그리고 우리 집에 그녀는 아직은 사람같지만 점점 못생겨지는
아들이 대머리 되기전에 구제해 준 성녀 마리아, 마더 테레사 같은 존재였다.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내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는 떡대 아니 부인은 참한 예비 신부 코스프레를 하며
"호호호 저는 술 잘 못마셔요.." 라는 정치인이 "저는 자나깨나 조국만 생각합니다"와 비슷한 사기성 멘트를 남긴채 친구 넷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지금이야 육아때문에 좋아하는 술을 전면 끊었지만, 난 아직도 그녀가 취한적을 본 적 이 없다. 여자들이 술을 마시면 이뻐 보인다고 하는데,
항상 내가 먼저 쓰러져서 그녀의 볼이 새초롬하게 붉어진 것을 본 적이 없다. . 만일 금주령이 내렸던 시대에 살았다면 그녀는 술의 대부
알 카포네를 때려 잡아서라도 술을 빼앗아 마셨을거라 생각이 든다.)
훗날 나의 친구들이 그녀를 평가하기를 "인사는 했던거 같은데, 인사불성 상태로 만들어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 나는 호기롭게 서울시 중곡동에 위치한 **갈비에서 갈비를 사주겠다고 했다. 부인은 결혼 전 성대하게 빚잔치부터
할 생각 이냐며 나를 말렸다. 결국 우리는 먹은 만큼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브이아이피에스를 방문했는데, 부인 친구들의 먹는 모습을 보고 쓰러진
얼룩말을 달려들어 먹고 있는 하이에나의 모습부터, 건기에 무사히 살아남은 갈증난 하마가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 등 한편의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외모로만 평가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받았다. 그리고 절대 먹은만큼 돈 내는 식당은 함께 가지 않게 되었다.
부인의 친구들이 그 당시 나를 평가하기를 "얼굴 시커멓고, 머리숱이 조금 없는 거랑 입술 두꺼운 거 빼면 봐줄만 하네" 라고 했다.
그냥 못 생겼다고 하면 되는 걸 왜 저리도 돌려서 표현하는지.. .쩝...
결혼 후 나는 살이 점점 빠져갔다. 마른 체형 때문에 회사에서 간디라고 불렸는데, 결혼 후 단식 투쟁하는 간디가 되어 갔다.
그 원인은 부인은 요리를 못했다. 정말 못했다. 아주 못했다. 심하게 못했다. 미안해 부인..
결혼 전 장모님께서 "우리 애가 학교만 다니고 살림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 잘하는게 별로 없어요"라는 멘트를 간과했던게 나의 큰 실수 였다.
하지만 부인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한식대첩에서 자존심을 걸고 요리하는 분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부족한 요리 스킬을 향상 시키기
위해 책장을 요리책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 책을 버려본 경험이 있는가? 나는 살고 싶어서 요리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
몰래 갖다 팔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인터넷이라는 제 2의 살상 레시피가 있었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요리하는 부인 앞에서 맛없다는 표현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생존을 위해 몰래 3분 카레를 먹다 걸린 날 "오빠 카레 좋아하는구나"
하면서 주말에 곰솥 가득 카레국을 만들어 놓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 먹길 바랬다. 사극에 나오는 역적 죄인들이 사약을 먹기 전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싶었다. 문제는 자기도 맛없어서 안먹으면서 나보고 죄다 먹으라고 한다. 심지어 삼키라고 강요까지 한다.
나는 비폭력 무저항의 상징 간디이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고 항상 먹는다. 그것도 부인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웃으면서 먹는다.
심지어 마음속에는 절대 없는 "좀 더 줄래?" 라는 멘트도 한다. 그리고 그런 쓸데 없는 멘트를 날린 나의 입을 그녀가 만든 음식으로 고문한다.
지금도 매주 주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그녀가 인터넷을 보고 요리를 하는 것이 두렵다. 지난 주는 닭도리탕을 했는데
한 입 맛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가 장도리로 맞을 뻔 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게 우리 부인은 계란으로 하는 요리인 계란찜과
계란 후라이는 정말 잘한다. 만일 그것 마저 못했다면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에 살려다고 제보했을 것이다.
결혼 한지 4년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우리 부인은 요리를 못한다. 정말 못한다. 아주 못한다. 심하게 못한다.
4편
헐... 부인 덕분에 베오베를 2번이나 갔네요.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부인은 오유를 하지 않습니다.
7살 어린 부인과 결혼했는데, 몇몇 분들 상상하는 것 처럼 어린 동생과 사는 느낌은 절대 아닙니다. 세대차이라는 것도 별로 느껴지지 않구요.
굳이 세대차이를 느낀다면 노노노 라는 노래 제목을 들으면 저는 하수빈을 부인은 에이핑크를 먼저 생각하는 정도랄까요.
부인과 제가 세대차이를 서로 느끼지 않는 이유는 제가 심각한 동안이라 말하지만 남들은 추남이라 하는 점도 있지만, 둘 다 책을 좋아하고
같이 책 이야기하며 토론하다 가끔은 폭력이 오가는 같은 취미가 있어서 그런거 같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부인은 키도 큰 편이지만 떡대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연애할 때 조심스럽게 과거 운동을 한 적이 있냐고 물으니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중학교 때 축구하는 모습을 본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테니스를 했었다고 했다. (축구를 잘했는데 왜.. 테니스를....)
참고로 나는 생긴 건 NBA출신 특급 흑인 용병인데, 운동 능력과 감각은 흑인 신생아 수준이다.
그녀는 크게 웃을 때, 혹성탈출의 분노한 시저처럼 잇몸을 들어내며 웃을 때 내 등짝을 때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발끝까지 저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부인은 나서거나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신체를 활용하는 스포츠나 게임 등을 할 때는 180도 돌변해서 승부사 다운 승부욕을
보였다. 그녀의 승부사 기질과 타고난 체력을 온가족 앞에서 증명한 일이 있었는데, 올 해 추석 우리 고향의 시장에서 추최한 아줌마 팔씨름
대회에 출전하였을 때 였다.
그 발단은 온가족이 함께 장구경을 갔었는데,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 중 누구든 시장에서 열리는 대회에 1등을 하면 100만원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진심은 아니셨다.)
첫째 날은 노래 자랑, 둘째 날(이 날이 추석 당일 메인 이벤트 였다)은 아줌마 팔씨름 대회와 남자 씨름대회가 열렸다.
첫날 노래 자랑 대회에 출전한 자칭 고추밭 에미넴이라 불리는 작은 형은 시골 할머니들 앞에서 에픽하이 노래를 부르며
현란한 랩과 삿대질 퍼포맨스를 선보였지만 "저 새파랗게 젊은놈이 시방 뭐라고 하는겨," 라는 평가와 함께 철저한 외면을 받은 채 탈락했다.
그리고 둘째 날 과감하게 씨름대회에 출전한 나는 1차전에서 흑인 신생아 다운 운동 감각을 뽐내며 시작과 동시에 바닥에 누웠다.
신생아는 절대 혼자의 힘으로 서있지 못한다.
소나 끌고 다니던 쟁기를 내 몸에 부착하고 밭을 갈던 모습을 기억하시던 아버지는 내심 나에게 우승은 못하더라도 집안 망신은 시키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셨는데, 모래를 털며 "헤헤 발이 미끄러졌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씨름장을 나오는 내게 "네놈에게 그동안 먹인 쌀밥이 아깝다" 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이제 마지막 남은 건 여자 팔씨름에 출전한 막내 며느리, 바로 부인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봐도 부인은 우승 후보감 이었다.
함께 출전한 아줌마, 할머니들은 "저것은 반칙이여, 왜 아마추어 노는데 프로가 와" 하는 표정이었다.
예상대로 조조를 떠나는 관우가 여섯 명의 장수 목을 거침없이 베어 나가듯, 10년 넘게 가위질로 단련된 손목힘의 달인 미용실 아줌마도,
20년 고추농사로 단련된 고추근육을 가진 아줌마도 부인 앞에서는 맥없이 쓰러졌다.
드디어 결승전, 결승전에는 최근 몇년간 장터 팔씨름 대회의 맹주로 군림하였던 떡집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남자도 들기 힘들다는 쌀 한가마 정도는 가뿐하게 지고 다니신다는 읍내에 소문이 자자한 괴력의 소유자 였다.
그동안 미소를 지으면서 여유있게 손목 스냅만으로 부드럽게 상대를 제압하던 부인도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첫 판부터 다른 경기와 다른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그동안 조용히 상대를 제압했던 부인은 그동안 외치지 않던 사자후를 시골 장터가 떠나가라
크게 외치며 힘을 집중하였고, 상대하는 떡집 아줌마도 "젊은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구나"라는 표정과 함께 얼굴에 핏줄을 세우며
힘을 집중하였다. 첫 판은 젊은 패기를 앞세운 부인이 힘겹게 이겼다.
나는 승리한 부인을 보며 흥분해서어깨를 주무르며, "**아 몸을 너무 이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렇게.."라고 훈수하자
부인은 다정하게 "닥쳐, 말할 힘도 없어" 라며 화답하였다.
하지만, 북산이 산왕에게 어렵게 승리한 뒤 거짓말처럼 나머지 경기를 져서 탈락했듯이, 부인은 3판 2선승제 경기에서 내리 2패를 하였고
우승은 떡집 아줌마에게 돌아갔다.
나는 아쉬었지만, 아버지는 2등한 부인을 보며 매우 자랑스러운 표정이셨다.
그렇게 명절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팔씨름에서 준우승해서 아깝다라고 말했다. 부인은 휴게소에서 산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아.. 그거 내가 일부러 진거야.. 첫 판 이기고 잠깐 쉴때 아버님 표정 봤는데, 식은 땀 흘리시더라고.. 우승해서 백만원 달라고
하기도 그렇잖아. 뭐.. 집에 쌀도 없고 해서 쌀이나 받자 하는 마음에 그냥 진거야" (참고로 1등은 시장 상품권, 2등은 쌀 햅쌀 20KG였다.)
부인이 강철 체력에 배려심까지 갖춘 대인배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는 동안 함부로 깝치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신혼 초 부터 그랬지만 아무리 맛이 없는 음식을 먹여도, 나 몰래 홈쇼핑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을 24개월 할부로 질러도 난
살기 위해 절대 불평 불만을 하지 않는다.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
아직 9개월밖에 안된 아들은 자기 엄마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고 겁없이 가끔 땡깡을 부리는데
아마 아들도 걷기 시작할 무렵이면 얼마나 자기 엄마가 대단한 다스베이더같은 존재인지 깨닫게 될거라 생각된다.
**아.. 마지막으로 어제 부인에게 맞아 죽을뻔한 이야기..
집에 놀러온 부인 친구(물론 여자/솔로)가 아들을 안았는데, 아들이 그 친구의 가슴을 본능적으로 만졌다고 함.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부인에게 나도 모르게 "서로 윈윈했네" 이랬다가 청소기로 맞아 죽을뻔..
주말이라 글유머를 선택합니다
가족에서 나오는 훈훈함. 좋아요.
출처 : 오늘의 유머
작성자 : 성성2
http://todayhumor.com/?humorstory_428293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부럽부럽 ㅠㅠ
ㅋㅋㅋ
글을 재미있게 잘 풀어쓴 것 같습니다.^^*
와
ㅋㅋ재밌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꽁트인거 같네요. 잼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