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단지 답십리 초등학교떄 남들보다 키가크단 이유하나로
농구부 감독에게 발탁되었고 단지 공부보단 낫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게 농구라고 한다...
그가 광신중에 재학중이던해에 우리나라엔 드디어 3점 라인이라는게
생겼다..당시만 해도 비교적 큰키 때문에 센터를 주로 보던 문경은이
었지만 재미삼아 몇번 3점 라인에서 슛을 하곤 했는데, 중학생이면서도
상당한 슛비거리가 가능함을 눈여겨본 코치가 그를 본격적으로 포지션
변경 시켜 슛터로서의 훈련을 시키게 했다고 한다.......
한국농구사의 한페이지가 뒤바뀌는 순간 이었다..
광신상고에 진학한 그는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당시로서는 여전히 큰키와 탄력을 이용한 리바운드 능력은 물론,
매경기 40점대의 초고교급 득점력을 보임으로서 그는 이때부터
이미 당대 최고의 스타 이충희-김현준의 뒤를이을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당시만해도 대학농구는 중앙대의 잔치였다.
한기범,김유택의 막강 포스트진과 더불어 이미 당시부터 농구천재로 주목받던
허재가 가세하고 여기에 역대 최고의 포가 강동희마저 겯들여 지면서
그야말로 중앙대는 철옹성같은 전력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대학농구판을 호령하던 중앙대의 독주가 깨지기 시작한건
문경은이 연대에 입학하기 시작한 부터이다. 이윽고 연대는 탄력적인 스카웃을 통해
고교 대어급들인 이상민,서장훈,우지원등을 연속 영입하여
비로서 중앙대가 쥐고있던 대학농구의 패권을 거머지게 되었고, 급기야
문경은이 4학년이 되던해에 농구대잔치에서 기존의 왕자인 기아자동차를 무너뜨리며
역대 최초로 대학팀의 농대 제패를 이루어내는 황금기를 맞는다..
이미 대학시절 문경은의 명성은 절정을 이루었다.
대학농구에 오빠부대란 신조어를 창시해 낼만큼 인기를 끌었고
언론은 앞다투어 그를 이충희-김현준의 계보를 잊는 특급스타로,
그리고 미래의 한국농구를 이끌 차세대 에이스로 부각시키기에 이른다..
대학시절 평균 30점대를 폭발시키며 득점왕을 거뭐 쥐었고
떄로 돌고래같은 탄력을 이용해 경기중에도 슬램덩크를 작렬하는 그의
모습은 팬들에게 어필하기 충분한 ''스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이충희,김현준과는 다른 장신 슛터이기에 중국을 꺨수있는
대안으로 기대하며 들떠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해 삼성과 현대는 문경은을 두고 이른바 스카웃전쟁
을 방불케하는 영입작전을 펼친다.. 이떄 문경은은 현대쪽으로 마음을 정했지만
김현준이 버티고 있는 삼성쪽으로 마지막에서야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삼성의 문경은 영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삼성이 김현준-문경은쌍포로 거함 기아를
물리치고 농대의 패권을 잡을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실업농구대뷔 첫해.. 문경은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학시절 최희암 감독의 완벽한 분업농구 체제 하에서 각 포지션의 스페셜리스트들과
편하게 농구할수 있었던 상황과는 달리 실업무대는 훨씬 혹독했고
삼성팀엔 연대에서 처럼 문경은을 바쳐줄 선수가 없었다.
그는 연대때와는 달리 많은 역할을 책임져야했고 또 그에게 부과되는 심적 부담감도
상당한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버거웠던 것이다.
국제대회에서의 보여준 문경은의 모습도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만큼은
아니었다... 93년도에 열린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그는 대회 득점 5위와
3점슛 1위를 기록하지만 과거 팀을 강력하게 휘어잡던 이충희,허재같은 특급에이스들의
모습과 견줄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윽고 열린 국제대회또한 연대시절 폭발력에 가리워져 잘 들어나지 않던 수비미스 문제와
단순한 공격패턴등이 지적되며 잘나가던 그의 명성이 점차 위기를 맞게 된다.
이떄부터 일부에선''반쪽짜리 선수"라는 비아냥마저....
대학농구의 열렬한 인기와 함성속에서 문경은에게 부여되었던 명성의
거품이 점차 빠져나가기 시작한 시절이었으며 문경은 스스로도 자신의 농구인생을
한번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는, 그에겐 시련의 시기였던 셈이다.
실업무대를 1년뛰고 상무에 입대하여 이상민,조성원등과 더불어 농대 우승에 도전하지만
그떄마다 번번히 기아왕조에 무릅을 꿀어야 했다.
그는 상무시절 여전한 수비부족 문제와 더불어 기복심한 플래이까지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며 그의 농구인생을 통털어 최초의 슬럼프기를 격게된다.
하지만 97abc대회에 국가 대표로 뽑혀 나가면서 그는 다소 침체된 시절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abc대회에서 그는 한층 성숙해진 노련미와 패싱센스를 바탕으로한 팀플래이,
그리고 기복없는 득점력과 승부처마다 폭발하는 3점슛을 압세워
한국이 결승에 진출하는데 1등공신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카자흐전과 키르기스탄,일본전에서 연이어 보여준 그의 클러치 능력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매개임 평균 25점가량씩 퍼부으며 경기흐름의 추를 완전히 한국팀으로..)
결국 결승전에선 중국에 무릅을 꿀고 말았지만 사실 결승전에서도 한국팀내 최고의 활약
을 펼친건 문경은이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불식시키고 싶어서였을까..
abc대회는 물론 97-98시즌의 프로농구에서도 그는 농구인생중 유독 빛나는 플래이를 펼쳐
보이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그의 당시의 플래이는 득점 머신이었다.
골및이면 골및,외곽이면외곽 할것없이 쉴세없이 상대를 폭격해댔고 상대팀에서 문경은을
막기위해 전담수비를 연속적으로 붙이는등 총력을 기울였지만 문경은을 도저히 틀어
막을수는 없었다. 탄력을 이용한 고타점의 외곽슛과 순간스피드를 이용한완벽한 공간돌파..
용병을 앞에두고도 개의치않고 펼치는 더블클러치와 적중률높은 페이드어웨이 샷까지...
그는 경기에 나오면 오직 상대의 림만을 쳐다보며 정말 쉴세없이 코트를 휘저었다.
(간혹 문경은이 골및돌파가 어떻다는둥, 스피드가 느리다는둥 하는 말을 들을떄가있는데
그떄마다 당시의 문경은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정말 기도차지 않는게 사실이다..^ ^)
더군다나 당시 삼성의 포가는 노기석이었는데 문경은의 득점은 거의대부분이
다른 선수들의 지원보다는 스스로의 개인기에 의한 것들 이었다..
한떄 2라운드까지느 그의 평균 득점이 29점에 육박했는데 과연 현재의 우리나라 스코어러중
이런 득점 스케일을 가진 선수가 또 있을까?
허나 화려한 순간후에 그에게 또다시 커다란 시련이 찿아왔다.
99-2000시즌에 아킬레스건을 다쳐버린 것이다.
팬으로선 더이상은 문경은의 백덩크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아쉬운 순간 이었다..ㅜㅡ
이는 점차 그의 플래이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99-2000시즌의악재가 이뿐만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한번 여론의 질타에 시잘리게 되는
것이다.. 연속으로 평균 20득점이상을 마크한 종전의 두시즌과는 달리
2000시즌에서의 그의 득점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기복또한 잦았다..
어떤 경기에서 20점을 올리는가 하면 그 바로 담경기에선 무득점을 기록하기도 할정도로
그의 기복심함은 실업삼성 입단시에 이어서 다시한번 도바위에 오르게 된다.
또한 수비부재 문제가 계속 지적되면서 점차 평가 절하되기 시작하였고 이떄부터 조직농구
,수비농구를 중시하는 김동광 감독에 의해 잦은 트래이드설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문경은의 이런 수비부재의 문제는 연대시절 분업농구의 패해라고도 볼수 있다
분업농구는 포지션별로 특별한 역할을 철저히 한정하고 분업화 함으로서 팀조직력
극대화와 효율적인 전술 운용을 가능하게 하는등, 팀 전체적으로는 기여하였으나
선수 개개인에 있어서는 그들의 재능을 몇몇군대에 한정시키고 잠재 능력 발전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림 으로써 부분적인 선수를 키워낼수 있다는 것이 맹점이다.
실제로 문경은은 연대당시 든든한 버팀목 서장훈이 있었기에 본연의 임무인 외곽슛만
펑펑터뜨리면 되었지 수비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점에서 그는 어쩌면 불행한 선수일수도 있다.
화려한 대학시절의 이면에는 그의 재능을 갈가먹는 보이지않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문경은이 자신의 이러한 단점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맞이한 시즌이
바로 00-01시즌이다. 00-01시즌에서 그는 확실히 ''다른 문경은''으로 거듭나 있었다.
종래의 수비는 돌보지 않고 공격만 치중하던 자세에서 벋어나
철저히 팀플래이에 자신을 맞춰가기 시작했고, 개인득점 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했다.
취약하던 수비도 프리시즌에 집중 보강한 끝에 많이 개선된 상태였다.
당시의 그의 마음속엔 다른 어떤가치 보다도 대학졸업후 경험해 보지 못한 우승이라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가장 컷기에 그는 과거처럼 자신이 팀의 중심이 되기보단, 한명의 일원
으로서 팀에 공헌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마음을 비운 태도가 그를 승부처가 될수록 더욱 집중력을 발휘하게 만들어
숟한 클러치 샷을 보여 주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철저히 팀플래이에 주력한 결과는 시즌후 팀 우승이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허나 그 우승의 영광의 중심에 있었던건 오랬동안 삼성의 간판이었던 문경은이 아니라
기량이 일취월장한 주희정이었다.
김동광 감독의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종래의 자신의 플래이 스타일을 개혁하면서까지
삼성을 우승시키고 싶었던 오랜 한을 드디어 풀었음에도 그 중심에 자신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문경은으로선 커다란 회의로 다가왔을지 모르 일이다..
그는 시즌후 곧바로 김동광 감독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자신을 트래이드 시켜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실로 30대에 접어든 그로서는 오랬동안 머물러온 안정된 보금자리를
떠난다는게 쉬운 선택이 아니었으리라..
허나 그는 평탄의 길이 아니라 도전의 길을 택했다.
처음에는 김동광 감독과 삼성 고위 프런트모두 트래이드는 불가하다고 못박았지만
문경은의 마음은 이미 삼성으로부터 떠나 있었고, 감독도 더이상은 그를 붙잡아 둘수
없음을 알았다...
결국 문경은:우지원의 트래이드가 이루어졌다.
영원한 삼성맨일것같았던 문경은이 마침내 스스로 삼성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빅스에서 맞은 첫시즌..
그는 빅스로 올당시 ''반드시 빅스를 우승시키겠다''고 했던 다짐을 정말로 실현시키는듯 했다.
초반부터 빅스는 선두권을 치고 나갔고 여기에 있어서의 문경은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포가불안의 악재 때문에 매경기 시소게임을 펼치던 빅스는 승부의 고비때마다 문경은에
게 의지했으며 문경은은 한결같이 그 믿음에 부응했다..정말 한결같이 말이다.
신기에 가까운 클러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시즌에 용병선수 국내선수 통털어
player of the game 선정수에서 1위를 기록한다.
결국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팀을 우승시키고 싶다던 문경은의 의지와 확실한 해결사를 원했던
유재학감독의 요청이 매우 잘 맞아 떨어진 시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은 빅스의 우승을 허락치 않았고 엘지와의 플래이오프후 문경은은
참았던 눈물을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국대전에 당골로 뽑혀온 문경은이지만 지난해 부산 아시안게임 국대에 선발된 그의 감회는
종전과 남달랐을 것이다. 바로 어느덧 고참이 되어 주장완장을 차고 참가하는 대회였기
떄문이다.. 그는 대회 초반부터 선풍을 일으켰다.
주장으로서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맏형역할은 물론 고비떄마다 신기에 가까운
3점 적중률을 보여주며 kbl최고의 클러치 플래이어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뿐만아니라 적소에 찔러주는 어시스트와 몰라보게 달라진 수비에 있어서도 그 어느
국제대회떄 보다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균 득점은 20점(팀내1위)..3점슛은 1위, 3점 성공률 1위(그의 3점 %는 야오밍의 야투율보다도 높았다) 또한 자유투+2점슛+3점슛을 합친 성공률은 무려 210%를 넘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국가대표로서의 경력을 화려하게 장식한 셈이었다.
작년시즌의 문경은..
작년시즌의 문경은의 플래이로부터 느끼는 점은 이미 30중반을 향하는 나이긴 하지만
아직 그의 위력이 사그라 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작년과 올시즌까지는 그가 나이에 구애받지않고 최고의 포워드로서 활약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이면에 나타나는 기록의 화려함과는 별개로
작년의 그의 모습에서 확실히 점점 쇠퇴해가고 있음을 볼수 있었다,
체력적인 문제가 겯들여 지면서 한동안 많이 보강된듯 보였던 수비문제가
다시금 재발했고 확실히 과거 어느때보다도 3점슛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했을을
보았다. 3점슛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했다는 것은 문경은 스스로가 과거에비해 확실히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그의 운동반발력도 많이 무뎌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떄문에 공격루트가 단조롭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그도 이제 세월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
그의 모습을 예전부터 쭉 돌이며 보다 보니 글이 매우 길어졌다..
하여간 나는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허재같은 올라운더 플래이어도 아니다.
그는 다만 포워드라는 포지션의 스페셜 리스트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포워드라는 포지션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큰 스케일과 확실성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나는 그를 오랬동안 좋아했다.
그의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과 진정한 실력자의 위용이 나는 좋다
그는 쪼잔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환경이나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떠한 상황이나 열악한 속에서도 늘 한결같이 자신이 할수 있는 최고의
플래이를 선보이며 실력으로 모든것을 증명하는 진정한 프로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찬사도 많이 듣고 누구보다도 구설수에도 많이 오르며 농구인생을 보
내 왔다.. 떄로는 필요이상의 과민한 평가들조차 들어왔다
모든것은 그가 예전부터 이충희,김현준 허재같은 대 선수들과 비교될정도로 관심의 대상이었
고 큰 기대를 갖게한 선수였었기에 감수해야할 부분이다..
어차피 그들과의 비교는 문경은으로서는 큰 영광임과도 동시에 과분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필요이상의 비난이 생겨나는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그에겐 아직 못이룬 꿈이 몇가지 있다..
바로 빅스로의 이적후에 우승달성과 프로대뷔후 한번도 타보지 못한
mvp에 등극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아직 최고의 자리를 위한 도전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디 그가 올시즌 모든 열정을 폭발시켜 진정 자신의 오랜 도전을
성취할수 있도록 바라며 나도 그의 골수팬으로서 그 어느때보다도 열열한 응원을
보낼 것이다~
@주요 기록
광신상고시절: 득점왕
연대시절: 득점왕, 3점슛1위, 신인상, 93-94농구대잔치 우승, 한경기 최다3점 신기록(14개)
94세계선수권대회: 득점 5위, 3점슛1위
실업농구시절: 득점상, 3점슛1위
97-98프로농구: 국내 득점왕(25점), 3점슛 1위(42%), 리바운드 3.6
한경기프로최다3점신기록(12개),
한쿼터 최다득점 신기록(22점), 베스트 5
97ABC 농구대회: 3점슛 1위
98-99시즌: 국내득점 3위(22점), 3점슛 1위(43%)
99-2000시즌: 평균17.4점, 3점슛 2위
2000-2001시즌: 평균18.8점, 3점슛 4위(44%), 평균어시스트 3.4, 우승
2001-2002시즌: 평균 17.1점, 3점슛 2위(38%), 평균어시스트 3.4,베스트5
2002-2003시즌: 국내득점2위 (평균 19.1점) 3점슛1위(39%), 자유투%1위(89%)
아시안게임: 국내득점1위(20.3점) 3점슛1위(68%), 우승
종합기록
-역대 국내선수 최다득점 2위
-역대 최다 3점 1위
-역대 국내선수 최다 20p이상 경기 1위
-역대 국내선수 최다 player of the game 1위
나도 이 글 보면서...저는 첫 삼성전자에 있을때부터...그리구 부진해서 바로 상무 입대 할때도..봤었고 제대하고 다시 삼성...글고 이제 프로농구로해서..삼성 썬더스..아무튼 진짜 내기억속에 그대로 있네..프로농구 데뷔부터 은퇴기까지 좋아하는 선수는 문경은선수박에 없다..진짜 한번 뵙고 싶네요
첫댓글 찡하네요..경은님의 화려한 플레이를 기대합니다..늘상 화려하셨지만..유후+_+/
끝장이다.. 문경은 화이팅..................
제가 91년부터 오빠를 좋아했는데요.. 이 글 읽으니 머릿속에 지난 시절 오빠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이번 시즌도 오빠의 멋진 모습 볼수 있길 바라며... 오빠는 우리의 영원한 영웅이예요.. 화이팅!!!!
나도 이 글 보면서...저는 첫 삼성전자에 있을때부터...그리구 부진해서 바로 상무 입대 할때도..봤었고 제대하고 다시 삼성...글고 이제 프로농구로해서..삼성 썬더스..아무튼 진짜 내기억속에 그대로 있네..프로농구 데뷔부터 은퇴기까지 좋아하는 선수는 문경은선수박에 없다..진짜 한번 뵙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