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171)] 돼지고기 이야기 동서양 돼지고기 널리 사용…이슬람은 금기
고려ㆍ조선시대에도 돼지고기 이용 기록 나와 한국 1970년대부터 삼겹살 우대 유별나 '더두툼생고기' '성산왕갈비' '탐라돈' 등 명성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돼지를 뜻하는 한자는 둘이다. '돈(豚)' 혹은 '저(猪)'다. '돈'은 주로 기르는 돼지를 말한다. '저'는 주로 멧돼지, 야생돼지를 이른다. '돈'과 '저'를 혼용한다. '하돈(河豚)'은 물에 있는 돼지라는 뜻인데 복어가 화가 나면 배가 볼록하고 마치 돼지처럼 통통해진다고 붙인 이름이다. 안동 장씨 할머니의 <음식디미방>에는 돼지고기 요리법이 나온다. '가제육(家?肉)' '야제육(野?肉)'이라고 표현했다. '저'가 멧돼지라면 '가제육'은 멧돼지 새끼를 집에서 길렀다는 뜻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집돼지, 사육돼지가 따로 있었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야생과 집에서 기른 고기와 조리법도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에는 개고기(狗肉, 구육)에 관해서는 10여 종류의 요리법이 나온다. 돼지고기 요리법은 2∼3가지에 불과하다. 돼지보다는 개고기가 보편적인, 상식(常食)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성산왕갈비 ![]() 정조 때의 북학파 학자이자 관리였던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도 "냉면과 찐 돼지고기(蒸豚, 熟肉, 수육)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蒸豚價始騰)"라는 표현이 나온다. 계절 상 돼지고기 값의 등락이 있었다는 뜻이다. 돼지고기가 일상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농촌의 현상은 아니고 도시(서경=평양)의 이야기다. 냉면 테이크아웃을 이야기하면 늘 등장하는 것이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냉면과 돼지고기다. 열 살 무렵의 어린 순조가 즉위 초기, 군직에게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자 궁중 밖에서 냉면을 사왔다. 이때 신하가 뭔가를 숨겼는데 바로 돼지고기였다. 어린 순조가 "저 사람은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냉면을 주지마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18∼19세기에는 이미 돼지고기가 비교적 흔하게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돼지고기 소비, 삼겹살 우대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유럽에서는 삼겹살 부위를 베이컨 혹은 육류 가공품 만드는데 사용한다. 가격은 낮다. 한국 삼겹살 가격이 유럽, 남미 등에 비하여 5배 높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가격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겹살을 좋아한다. 국내 식당들의 돼지고기 값은 삼겹살, 항정살, 목살, 갈비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 탐라돈
맛있는 돼지고기는 도축 후에도 적절한 손질이 필요하다. 도축장에서 피 빼기를 하고 사후경직을 풀어낸다. 업소에는 적정한 온도에 5∼10일 정도 '후 숙성'시킨다. 김치냉장고나 와인냉장고 등을 이용해 숙성된 맛을 얻어낸다. 서울 시내 몇몇 돼지고기 맛집을 소개한다. 상일동 '더두툼생고기'는 고기 전문가가 운영하는 집이다. 목살의 두께가 4.5cm 정도다. 무척 두꺼워서 주인이 일일이 손질해주기도 한다. 좋은 돼지고기를 구해서 잘 숙성시킨 고기다. 생고기도 좋지만 양념돼지갈비도 수준급이다. 고기 손질에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산동의 '성산왕갈비'는 돼지갈비가 주 종목이다. 돼지갈비는 뼈가 굵은 것이 비교적 맛있다. 4인분을 주문하면 굵은 뼈 부분을, 2∼3인분이면 비교적 가는 뼈가 나온다. 숙성이 잘된 고기라서 소금만 흩뿌려 구워도 맛있다. 목동 '안동돼지갈비'는 묵사발 등 곁들이는 음식들도 수준급이다. 시장 통의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짝퉁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전통 방식의 증류 소주도 내놓는다. 고기도 수준급이다. 홍대 철길 입구의 '탐라돈'은 젓갈로 유명해진 집이다. 원래 멸치젓갈을 사용하다가 최근 자리돔 젓갈로 바꿨다. 주인이 일일이 고기를 손질하여 내온다. 가격도 홍대임을 감안하면 싸다.
[이야기가 있는 맛집(172)] 돼지국밥
“한국전쟁 때 부산에 전래” 알려져
밀양 ‘단골집’, 부산 ‘할매국밥’ 등 유명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었다. 돼지고기는 잘 상한다. 따뜻한 곳에 조금만 두면 쉽게 상한다. 이젠 이런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냉장, 냉동기술이 발달했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다. 돼지고기가 상할 이유가 없다. 예전에도 돼지는 이래저래 찬밥신세였다. 인조 15년(1637년) 8월28일(음력) <승정원일기>의 기록이다. 지금으로서는 짐작키 어렵지만 국왕 인조와 영접도감(迎接都監) 사이에 “중국사신의 밥상에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로 대체한 일”로 약간은 심각한 이야기가 오간다. “왜 (중국 사신 접대에 있어 전례에 어긋나게)돼지고기(?肉, 저육, 제육) 대신 쇠고기[牛肉, 우육]를 마련했는가?”라고 묻는다. 대답이 이어진다. “청나라 사람들이 우육 먹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이번 칙사의 행차가 추운 계절을 당하였으므로 생선 따위의 물종을 구해 올 길이 없습니다. 매일 연향에 저육을 쓰는 곳이 매우 많아 부족할까 걱정되어 전날 반선에 우육을 마련하였는데 저육 두 근이 너무 소략한 것 같아서 우육을 한 근 더 마련한 것입니다. (중략) 혹 저육을 먹자고 청하거든 저육으로 바꾸어 주겠습니다.” 국왕 인조의 지시다. “이러한 때에 기르는 소를 허다하게 도살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고, 음식물을 더 주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한결같이 전일 천사(天使)의 예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우리나 중국 모두 쇠고기는 귀한 금육(禁肉)이었다. 소는 농사의 주요한 도구였다. 소의 도축은 엄히 금했다. 남는 것은 돼지, 양, 개, 닭 등인데 제사상 등에는 개를 사용하지 않았다. 양은 한반도에서는 귀했다. 그나마 만만한 것은 돼지, 닭 등이었다. 철종 9년(1858년) 11월에 중국인 21명이 풍랑을 만나 표류, 충남 태안군 의항에 입항했다. 비변사 조사 내용이 남아 있다. 조선 관리들과 선원들의 문답 중에 돼지고기가 나온다. 이들은 강남성 송강부 상해현 사람들로 봉천에서 곡물을 실어 강남으로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배에는 황두(黃豆, 노란콩=대두), 소미(小米=좁쌀)와 더불어 저육(?肉) 등이 있었으며 가격은 은으로 수천 냥에 달한다고 했다. 중국의 경우도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했다. 조선 영, 정조 이후 실학파들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많은 기록을 남긴다. 여기에도 식사 중에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내용이 자주 나타난다. 중국이나 조선 모두 “쇠고기는 금육이니 드물다. 그래서 비교적 흔한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식이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소 대신 돼지’인 셈이다. 중국 <북사(北史)> ‘고구려(高句麗)’ 편에는 좀 더 애틋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인에 있어서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 주는 예는 없다. 만일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오늘날 같은 개량종은 아니지만 고구려 시절부터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다. 애틋하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면 돼지고기와 술 정도만 보내고 결혼시킨다”는 글귀다. 결혼을 하면서 호화 혼수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우리 시대가 부끄럽다. 돼지고기는 비교적 쉽게 사용했지만 그래도 귀했다. 제사에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사용 희생(犧牲)에는 생 돼지고기도 사용되었다. 제사는 관청 혹은 궁궐에서 잦았다. 국가기관 등에 고기를 공급하는 이들이 희생용 생고기를 납품하면 머리, 내장, 발, 껍질. 뼈 등 허드레부분은 남는다. 도축하는 곳 인근에서 허드레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나온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전래되었다”고 전해지는 돼지국밥은 진주와 밀양 등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진주는 비빔밥, 진주냉면이 시작된 곳이다. 밀양의 돼지국밥 명가들은 ‘밀양 돼지국밥 기원설’을 뒷받침한다. 대구나 부산의 돼지국밥집들 주인 중에는 밀양 출신들이 많고 가게 이름도 ‘밀양’ ‘밀양할매’ ‘밀양 아지매’를 붙인 곳이 많다. 영남지방에서는 어디나 흔하게 있었던 돼지국밥이지만 영남루가 있고 고기를 먹던 관청, 반가가 있었던 밀양이 비교적 돼지국밥을 깊고 널리 계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밀양에는 ‘단골집’이 있다. 시장 통에 있어서 네비게이션도 길을 찾기 힘들다. 물어물어 찾아가서 만나는 작고 허름한 음식점. 밀양사람들이 인정하는 오래된 돼지국밥집이다. 가격이 싸고 분위기에 비하면 음식이 정갈하다. 정식을 주문하면 돼지수육과 국물을 같이 받는다. 상당히 깔끔한 음식이다. 밀양 무안면에는 ‘동부식육식당’이 있다. 역시 전통을 잇는 오래된 맛집이다. 100년의 역사, 돼지국밥의 원조로 손꼽힌다. 돼지고기와 쇠고기 뼈를 동시에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국물이 비교적 맑은 곰탕 느낌도 든다. 인근에 3형제가 운영하는 돼지국밥집이 몰려 있다. 부산에서는 60년 전통의 ‘할매국밥’과 초량의 ‘대건명가돼지국밥’을 추천할 만하다. ‘할매국밥’은 수육도 수준급. 어슷하게 썬 정갈한 수육이다. 국물도 툽툽하고 좋다. 고기 양도 많은 편. ‘대건명가돼지국밥’은 조미료와 첨가물이 절제되어 있다. 맑으면서도 뽀얀 색깔의 돼지국밥이다. 뼈를 오래 곤 경우나 머리뼈를 사용하면 국물색깔이 뽀얗게 된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이야기가 있는 맛집(173)] 비빔밥 이야기(1)
‘다양함, 비빔, 섞임, 융합’의 음식 옛 ‘부?」?비빔밥’기록…조선 ‘골동반’ 표기 백남준 “내 예술세계는 비빔밥 정신” 비빔밥 고유의 다양함, 검소, 단백함 잊혀져 진주 ‘천황식당’, 울산 ‘함양집’ 등 유명 비빔밥은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처음으로 정확한 모습을 드러낸다. ‘부?」沈?繭遮?이름이다. <시의전서>에 “골동반(骨董飯)이 곧 부?」嶽甄蔑굔?한글 표기가 처음 나왔다는 이야기다. <시의전서>는 19세기 말에 출간된 것으로 추측한다. 필자와 출간 연대 모두 불분명하다. 20세기 초반에 발견되었다. ‘부?」沈??어떻게 만드는지 방법도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에 다시 비빔밥이 나타난다.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진주(晉州)비빔밥’이 나타난다. ‘팔도 명식(名食)’을 이야기하면서 경남 진주의 비빔밥을 설명한다. <시의전서>는 한글 ‘부?」?비빔밥’을 처음 설명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게 모두다. <시의전서>의 비빔밥이 비빔밥의 시작은 아니다. “별건곤”의 진주비빔밥도 마찬가지다. 진주비빔밥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고 해서 곧 진주가 비빔밥의 시작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한반도 전체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다만 진주비빔밥이 맛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시의전서>에서 비빔밥을 설명하면서, 그리고 진주비빔밥이 등장하면서 오늘날 비빔밥이 ‘하향평준화’ 되었다. 채소 몇 가지를 넣고 육회 혹은 구운 고기 몇 점을 올리고 비빔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비빔밥이 한두 가지 모습으로 틀에 갇힌 것이다. 그 이전에도 비빔밥은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흔한 음식이니 별 설명도 없이 ‘비빔밥 먹었다’고 표현한다.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비빔밥은 나타난다. 이름은 비빔밥이 아니라 ‘골동반(骨董飯)’일 뿐이다. 이덕무가 박재선(朴在先)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친척의 제사에 참석하였다가 새벽에 비빔밥을 먹고 7~8차례나 변소를 드나들었소. 낮에 조금 그치면 그대의 집을 찾을까 하오”라는 문장이 나타난다. 제사를 모신 후 자연스럽게 제사 음식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제사상 나물을 얹은 비빔밥이나 경북 지방의 헛 제삿밥과도 닮아 있다. 오주 이규경이 편찬한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닮아 있다. 수많은 비빔밥이 나타난다. 물론 한글로 비빔밥이라고 하지 않고 골동반이라고 표기했다. “골동반은 평양의 진품 채소골동반이 있고”라고 했다. 북한 전통음식이라고 소개하면서 엉뚱한 육회와 고기 올리는 걸 북한식 비빔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엉터리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비빔밥(골동반)이 있다. 겨자를 올린 숭어비빔밥, 갈치비빔밥, 준치비빔밥, 새로 나온 구운 전어비빔밥, 마른 새우를 곱게 갈아서 만든 비빔밥, 황주(黃州)의 가는 새우를 염장한(젓갈)비빔밥, 새우알비빔밥, 게장비빔밥, 마늘비빔밥, 생오이비빔밥, 기름소금에 군 김을 곱게 부숴 넣은 비빔밥, 산초비빔밥, 볶은콩비빔밥 등인데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진미다.” 오늘날 우리는 이 진미를 다 만나지 못한다. 볶은 콩을 갈아서 콩가루를 만든다. 불과 30년 전에는 밥과 더불어 비벼 먹었다. 도시락으로도 좋았지만 이제는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라고만 생각한다. 비빔밥은 조선시대에 오히려 더 풍부했다. 우리는 신선한 육회를 올렸다고 혹은 좋은 식재료를 사용했다고 자랑할 뿐 비빔밥의 ‘정신’인 다양함은 모두 잊었다. 오이, 마늘, 산초 등을 넣은 담백, 검소한 비빔밥은 잊었다. 고 백남준 선생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비빔밥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외국의 비평가들도 백남준의 예술은 ‘비빔밥’이라고 설명한다. “동양과 서양이 하나의 그릇에서 만난다.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여 제3의 융합된 맛을 드러낸다. 백남준의 예술세계다”라고 표현한다. 오늘날에도 백남준을 기리는 전시회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비빔밥을 제공하는 이유다. 마이클 잭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빔밥을 여러 차례 찾았다. 잊고 있었던 비빔밥을 다시 상기했다. 어느 항공사에서 비빔밥을 기내식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어느 핸가는 비빔밥이 최고의 기내식으로 손꼽혔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뿐이었다. 고 백남준 선생은 비빔밥이 “다양함, 비빔, 섞임, 융합”의 음식이라고 이야기했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나물을 차려놓으면 먹는 이들이 자신들이 편한 대로 고명을 넣고 자신들이 원하는 장류를 선택하여 스스로 비벼먹는 음식이다. 비빔밥은 오늘날의 스마트폰과 닮았다. 같은 종류의 스마트폰이라도 원하는 앱(APP)에 따라 그 내용은 전혀 달라진다. 비빔밥도 같은 고명을 두고 선택에 따라 그 내용물이 달라진다. 물론 모두 비빔밥이라 부른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 앱에 따라 그 내용은 전혀 달라진다. 비빔밥과 동일하다. 진주, 울산의 진주비빔밥을 몇집 소개한다. 진주 ‘천황식당’은 노포다. 원형 진주비빔밥을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국물로 나오는 탕이 제사상의 탕과 닮았다. 선지해장국 스타일이다. ‘천수식당’은 ‘천황식당’에서 일하던 주방인력이 개업했다, 친척이 개업했다는 말이 있다. 음식은 비슷하지만 간이 조금 더 세다. 가격은 ‘천황식당’에 비하면 낮다. 진주 시장 통의 ‘제일식당’도 오래된 집이다. 비빔밥과 더불어 해장국 류, 술 안주거리도 좋은 집이다. 시장 통임에도 음식은 정갈하다. 울산 ‘함양집’은 지방에서는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집 중 하나다. 업력 80년을 넘겼다. 비빔밥 위에 생전복을 얹었다. 깔끔하고 유기그릇 등도 볼 만하다. ‘보탕국’이라고 부르는 국물도 맛있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이야기가 있는 맛집(174)] 비빔밥 이야기(2) 우리 고유의 '열려 있는 음식'
비빔밥 기원 혼란은 '우리 고유 음식' 때문 비빔밥 형태 먹는 사람이 결정… '열려 있는' 음식 中 골동반, 日 가마메시 '솥밥' 개념…비빔밥과 차이 강남 '부옥당', 성북동 '선동', 양평 '지평보리밥' 등 특색
'비빔밥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돈다. 인터넷에도 근거 없는 여러가지 '설'들이 떠돈다. "병영에서 기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군대에서 여러 명의 군인들이 동시에 밥을 먹는다. 그릇도 부족하던 시절이다. 조선후기의 기록에는 궁중에서 연회를 할 때 그릇이 부족해서 민간의 '그릇 대여점'에서 그릇을 빌려서 궁중으로 날랐다는 내용도 있다. 당연히 민간이나 병영 모두 그릇이 부족했다. 비빔밥은 '나만의 그릇'은 하나면 가능하다. 밥을 비빌 큰 그릇 하나에 국 그릇 하나면 된다. 나머지 반찬들은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가능성은 있는 '설'이지만 콕 집어 "비빔밥이 병영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제사 기원설'도 있다. 제사를 모신 후 모두 둘러 앉아 비빔밥을 먹었고 그게 바로 비빔밥의 기원이라는 '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제사를 모시는 집에서는 늦은 밤 제사상에 올랐던 나물반찬 등을 넣고 밥을 비벼 먹는다. 하지만 이 역시 "언제, 누구의 제사를 지낸 후 먹었던 비빔밥이 기원이 된다"는 명시적인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비빔밥 제사 기원설' 역시 무리는 있다. 엉뚱한 이야기도 있다. 조선 왕실에서 종친들이 궁중으로 입궁하면 비빔밥을 대접했고 그게 바로 비빔밥의 시작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에는 수도 없이 많은 종친들이 있었다. 그들 중 누가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는지 어떤 형태의 음식이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추정할 수 있는 자료도 없다. 숱한 종친들 중 비빔밥을 유달리 좋아했던 이는 있었겠지만 느닷없이 "왕실 종친 접대 비빔밥이 비빔밥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생뚱맞다. <시의전서>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한글로 비빔밥이 처음 등장한다는 뜻이지 이 무렵 비빔밥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조선시대 초, 중기 기록에도 '골동반'이라는 이름으로 비빔밥은 등장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빗대어 '골동(骨董) 같은 세상'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비빔밥의 기원이 혼란스러운 것은 비빔밥이 우리 고유의 음식 형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비빔밥은 우리만 먹는 음식이지 외국 어디에서도 상식(常食)하지 않는다. 중국 명나라의 '골동반' '반유반' 등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 비빔밥과는 거리가 있다. 밥을 지을 때 고기, 생선, 채소 등을 쌀과 더불어 넣고 만들어내는 '솥밥' 같은 개념이다. 일본인들의 가마메시(釜飯)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의 골동반이나 일본 가마메시는 모두 미리 쌀, 채소, 고기, 생선 등을 솥에 같이 넣고 밥을 짓는다. 큰 그릇에 밥을 미리 넣고 그 다음 각자 원하는 나물, 채소, 장류, 고기 등을 선택할 수 있는 비빔밥과는 거리가 있다. 비빔밥의 경우, 특별한 전래의 흔적이 없다. 외부에서 들여온 흔적도 없고, 한편으로 우리 역사상에도 '비빔밥 기원'에 대한 특정한 기록은 없다. 그저 누구나 흔하게 먹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비빔밥의 기원이 혼란스러운 이유다. 마이클 잭슨이 한국 방문 시, 호텔에서 여러 차례 비빔밥을 먹었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빔밥이 그렇게 대단한 음식이야?"라고 생각했지만 곧 잊었다. 비빔밥은 한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음식이자 별다른 의미를 지닌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빔밥은 '열려 있는' 음식이다. 들판에서 비빔밥을 먹을 때 아무도 나물의 종류와 양을 특정하지 않는다. 먹는 이,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내용물을 적절하게 정하고 선택한다. 몇 가지나물을 선택할 것인지, 각 나물마다 어느 정도의 양을 선택할는지 모두 먹는 이가 결정할 일이다. 장류도 마찬가지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또 그 사용량도 소비자가 정한다. 비빔밥을 스마트폰과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스마트폰 역시 숱한 어플리케이션(APP)이 있고 어떤 앱을 사용할는지는 소비자에게 달려 있다. 스마트폰이나 비빔밥 모두 열려 있다. 서울, 서울 근교에서 편하게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 곳들을 몇 곳 소개한다. 특별할 것도 별난 것도 없지만 '열려 있는 음식' 비빔밥을 만날 있는 곳이다. 강남구 삼성동의 '부옥당'은 편한 밥집이다. 점심시간이면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이래저래 불평들도 있다. 혼잡스럽고 서비스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 자리에 앉으면 그릇을 하나씩 준다. 기본적인 나물들이 놓인다. 반찬 중 일부를 비빔용 나물로 더해도 좋다. 된장, 고추장을 얹어서 비벼먹는다. 성북동의 '선동'도 마찬가지다. 미리 나물과 더불어 밥을 비벼먹을 수 있도록 그릇, 장 등을 준비해준다. 음식이 정갈한 편이다. 경기도 양평의 '지평보리밥'은 전형적인 '열려 있는 비빔밥집'이다. 나물양도 푸근하다. 식당공간은 지금도 주인 가족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이다. 방 한 켠에 앉아 비빔밥을 먹으면 마치 내 집에서 밥 먹는 기분이 든다. 음식은 시골 음식으로 간이 강한 편이다. 경기도 일산의 '초성공원'은 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탐나는 집이다. 음식도 보리밥, 나물 모두 푸근한 예전의 형태다.
[이야기가 있는 맛집(175)] 막국수
서민 음식에서 귀한 식품 대접받아
'막국수=서민, 냉면=반가' 위상 역전 밀가루·전분 싸지고 메밀 가격 급등 '100% 메밀 막국수' 등장 인기몰이 '춘천산골막국수' '양양막국수' 명성
막국수는 서민의 음식이다.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다. 냉면이나 막국수나 모두 메밀을 주재료로 삼는다. 같은 재료를 사용하니 비슷한 음식이 나온다. 그러나 두 음식은 출발부터 다르다. 막국수의 메밀 함량은 냉면보다 더 높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메밀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100% 메밀로 만든 막국수'는 이제 흔해졌다. "채널A_착한식당"에서 강원도 횡성군의 '삼군리메밀촌'을 찾아냈다. 그 후 불과 몇 년 사이 숱한 '100% 막국수 식당'들이 나타났다. 음식전문가들도 "100% 막국수라고 해서 반드시 맛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막국수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들도 "메밀함량 70% 정도의 막국수가 맛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맛', 막국수의 '맛'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입안에서 씹는 맛이 좋고 메밀 고유의 향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메밀 고유의 향이야 아무래도 메밀 100%가 낫다. 메밀은 가장 극적으로 변한 식재료다. 조선시대 가뭄, 홍수 등으로 흉년이 들고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나면 궁중에서는 바로 '구황경차관(救荒敬差官)'을 파견했다. 우선 현지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때로는 지역 관아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내놓기도 한다. 제일 중요한 업무는 '현장 파악'이다. 현장의 이야기를 그대로 중앙으로 보낸다. 중앙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하고 시행한다. 구황경차관의 보고서에 메밀은 단골로 등장한다. "메밀이 익고 있어서 추석 무렵에는 먹을 수 있다. 도토리도 아직 흔하고 가을에는 식용으로 사용할 만한다"는 식이다. '맥(麥)'은 3종류다. 대맥(大麥), 소맥(小麥), 그리고 교맥(蕎麥)이다. 교맥이 우리가 말하는 메밀이다. 목맥(木麥)이라고도 한다. 대맥은 보리고 소맥은 밀이다. '맥'은 모두 주요한 식량자원인데 그중 교맥, 메밀의 용도가 좀 떨어진다. 식량으로 삼기도 어중간하다. 그러나 주요한 구황식물이다. 한해 여러 차례 수확이 가능하고 거친 밭에서도 자라고 웬만한 가뭄은 이겨낸다. 이정도로 기특한 식물도 없다. 문제는 귀한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은 껍질이 있고 그 껍질을 까내도 먹을 만한 분량의 가루가 나오진 않는다. 죽지 못해 먹긴 하되, 늘 먹고 싶은 음식은 아니라는 뜻이다. 냉면과 메밀을 갈랐던 것은 엉뚱하게도 국수를 만들 때 넣었던 밀가루 혹은 전분 때문이다. 냉면이 반가의 음식인 이유도 바로 전분이나 밀가루 때문이다. 밀가루는 귀했다. 서민들은 사용하기 힘든 식재료다. 전분은 더 귀한 식재료다. 곡물을 곱게 갈아서 물을 섞어서 오랫동안 둔다. 전분 성분이 아래로 가라앉으면 곱게 물을 따라내고 아래에 가라앉은 고운 가루를 모은다. 전분(澱粉)이다. 녹말분이라고도 한다. 메밀의 위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귀했던 밀가루나 전분은 비교적 가격이 싸졌다. 메밀은 거꾸로다. 메밀가루의 가격이 밀가루에 비해서 두 배, 세 배, 다섯 배를 부르기도 한다. 국산 메밀을 기준으로 밀가루 가격의 8배를 넘긴 적도 있다. 메밀가루가 아니라 금가루인 셈이다. 밀가루의 가격은 낮아지고 메밀가루의 가격은 높아졌다. 메밀 100%로 만든 메밀막국수가 구황식품이고, 죽지 못해서 먹었던 음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이어트에 좋고 소화도 잘 되는 귀한 식품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냉면은 그동안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귀한 밀가루와 전분을 사용한 반가의 음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메밀 100%가 아닌 메밀음식'이 되어 버렸다. 육수도 마찬가지다. 고기가 귀한 시절, 고기국물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순조임금 시절에 이미 돼지고기를 냉면과 같이 먹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조 시절 유득공의 <서경잡절>에 돼지고기와 냉면이 같이 등장한다. 길거리의 매식상품으로 냉면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가의 음식이고 시장에 내다파는 음식이니 귀한 냉면에는 돼지고기를 사용했다. 가난한 산골의 막국수는 고기국물이 불가능하다. 결국 가까이서 쉽게 구하여 먹을 수 있는 동치미 국물, 백김치 국물을 얹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도 '백김치 국물과 더불어 냉면'을 먹었던 기억은 있지만 역시 돼지고기 국물이라도 얹어서 먹는 것이 제격이다. 돼지고기는 꿩고기로, 쇠고기로 바뀐다. 오늘날 많은 냉면집들이 쇠고기+돼지고기로 국물을 내고 그 수육을 얹는 이유다. 동치미국물, 백김치국물이 귀해졌으니 오히려 막국수 전문점들은 속을 썩인다. 아이러니하다. 서울의 메밀전문점을 몇 곳 소개한다. 을지로4가 전철역 부근의 '춘천산골막국수'는 막국수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공로가 있다. 재개발 대상지역이라서 내부는 어수선하다. 나이든 단골들이 손님의 주류다. 동치미국물을 내놓는데 대중적인 맛이다. 달착지근한 맛을 좋아하면 권한다. 막국수의 메밀함량은 여름철 기준 대략 50% 선이다. 방배본동의 '양양메밀막국수'는 100% 메밀 면을 내놓는 집이다. 면 하나만 보자면 최고 수준급의 대단한 집이다. 곁들여서 내놓는 음식들도 괜찮다. 수수하지만 단아한 음식이다. 저녁에 가볍게 술 한 잔 해도 좋을 집. 서초동의 '샘밭막국수'는 메밀 70∼80%의 막국수를 꾸준하게 내놓는다. 수육 몇 점과 빈대떡 등을 세트로 내놓는다. 막국수를 먹으면서 기품을 느낄 수 있는 괜찮은 곳이다. 방화동 '고성막국수'도 권할 만한 집이다. 면은 아주 좋은데 육수가 대중적으로 달다. 시내에서는 거리가 제법 멀다는 것도 단점.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176)] 막국수(2) 허기 채운 '슬픈 음식'… 대중화 늦어 막국수 계절 따로 없어… 구황 식품 주로 강원도에서 널리 먹어… 상품화 동기 없고 산골 음식으로 냉면에 비해 덜 알려져 '남북면옥' '전씨네 막국수' 등 유명
막국수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이야기한다.
[주간한국][이야기가 있는맛집(177)] 냉면
정약용 시대 이미 널리 알려지고 즐겨
다산 땐 배추김치 곁들인 냉면 순조 때 ‘테이크아웃’ 냉면도 우래옥ㆍ평양면옥 서울서 유명세
밤에는 숙직하는 군사가 있을 뿐이다. 궁궐 뜰로 산책을 나선다. 나는 조선의 23대 국왕 순조다. ‘순조’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 올해 열한 살. 국왕 즉, ‘상(上)’이 되었다. 내 아버지는 정조대왕, 어머니는 후궁 수빈 박 씨다. 노론, 소론 따지는 양반네들 일은 어차피 알지 못할 노릇이다. 안동 김문들은 증조모 정순왕후와 늘 뭔가를 의논하고 있다. 정치니 국사는 그들의 일이다. 궁궐은 따분하다. 할 일도 없고 밤이 되면 입이 심심해진다. 남자인 숙수(熟手)들은 모두 퇴근했다. 냉면을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군직(軍職)에게 냉면을 먹자고 했더니 당연히 “마련할 수 없다”고 한다. 궁궐 밖 민가에서 냉면을 사다 먹기로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가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냉면을 사러 사람을 보냈는데 뒤에 시립한 사람이 뭔가를 꾸물거리며 숨기고 있다. 삶은 돼지고기다. 그이에게는 냉면을 주지마라 했다. 그이는 돼지고기를 먹을 일이다.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순조 원년 ‘냉면과 삶은 수육’ 이야기다. 달구경 하던 순조가 냉면을 사다 먹는데 신하 중 하나가 돼지고기 수육을 숨겼더라는 이야기다. 순조는 그이에게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냉면을 주지마라고 했다는데 이건 너무 옹졸하다고 이유원은 지적한다. 불과 11세의 어린 국왕이다. 속 좁다고 표현한 이유원이 오히려 옹졸하다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것은 궁궐 밖에 냉면을 파는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순조 원년은 1800년이다. 이미 200여 년 전에 냉면을 테이크아웃 해줬다니 놀랍다. 그것도 한밤중에. 냉면 고명으로 돼지고기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다. 물론 고종 때 기록한 이유원의 <임하필기>가 정확하다는 전제 아래의 이야기다. 냉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이보다 앞선 <다산시문집> 제3권에 나타난다. 다산 정약용은 황해도 해주에 고시관(考試館)으로 왔다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시를 써준다. ‘냉면’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있는 그 시가 <다산시문집>에 남아 있다. “시월이 되어 서관에 눈이 한자 되게 쌓이면(중략) 손으로 뽑은 냉면에다 시퍼런 배추김치라”라는 구절이다. 시월은 음력이다. 대략 11월이나 12월쯤 된다. 서관은 황해도 해주, 평안도 평양, 의주를 잇는 선이다. 그중 평양과 해주 등 주요한 거점도시를 서관이라 했으니 해주도 무방하다. 이 계절이면 눈이 많이 내린다. 문제는 ‘납조냉면(拉條冷?)’이란 구절이다. ‘납면(拉麵=라면)’은 국수다. 우리가 ‘라면’이라고 부르지만 중국, 일본인들에게는 라면은 곧 국수다. 우리의 ‘라면’은 기름에 튀긴 ‘유탕라면’이라 해야 마땅하다. 국수는 손으로 길게 뽑는 것이다. ‘납(拉)’은 길게 뽑는다는 뜻이 있다. ‘조(條)’ 흔히 ‘길다’고 해석하는데 ‘끈’ 등을 의미한다. 결국 ‘납조’는 손으로 길게 뽑은 끈 같은 것‘을 말한다. 냉면이되 손으로 길게 늘인 것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조선후기의 그림에도 국수 뽑는 기계가 나온다는 점이다.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에는 국수를 눌러서 뽑는 기계가 나온다. 반죽을 얹고 사내가 몸무게 전체를 막대에 의지하고 벽에 발을 걸고 힘들게 국수를 뽑는 장면이다. 손으로 뽑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다산의 시대에도 이미 냉면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민가에서도 심심치 않게 해먹었던 음식이었다. 물론 길거리보다는 서흥도호부사 정도의 고위 공직자 집에서 노루고기와 더불어 먹었던 음식이었다. 이 음식이 바로 20년 후면 순조의 ‘테이크아웃’ 냉면으로 나타난다. 냉면의 고명으로 보이는 ‘숭저벽(?菹碧)’도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숭저(?菹)’의 ‘숭(?)’은 배추다. ‘저(菹)’는 김치나 절임, 젓갈 등을 뜻하니 ‘숭저’는 배추김치다. 이때의 배추는 우리가 만나는 배추와 다르다. 오늘날의 개량종 배추는 녹색 잎사귀와 흰색의 대궁이다. 이때의 배추는 속이 차지 않은 얼갈이배추 정도다. 푸르다. 늦가을 얼갈이배추를 수확한 다음 저장한 배추김치는 ‘서관의 시월’ 정도면 시퍼렇게 익었을 것이다. 그래서 푸르다는 뜻의 ‘벽(碧)’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고춧가루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배추김치가 푸르다. 오늘날 동치미 정도를 얹고 ‘제대로 된 예전 냉면’이라고 주장하는데 틀렸다. 무김치가 아니라 고춧가루를 얹지 않은 배추김치가 맞다. 물론 백김치는 아니다. 푸른 백김치는 없다. 푸르다는 것은 고춧가루를 얹지 않고 별다른 고명을 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전통, 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평양냉면을 내고 있는 집들을 몇 집 소개한다. 서울에서 비교적 평양냉면에 가까운 냉면을 내고 있는 전통 있는 집은 세 종류다. 하나는 ‘우래옥’이다. 한국전쟁 전에 문을 열었다가 전쟁 통에 문을 닫았다. 곧 다시 개업을 하면서 원래 이름 ‘서북관’을 ‘우래옥’으로 바꿨다. 냉면 값이 비싸다는 평가도 있지만 인기는 꾸준하다. 을지로 통의 ‘우래옥’이 본점이다. 음식 맛은 분점과 다르다. 이른바 ‘장충동 평양면옥’도 평양의 맛을 주장한다. 장충동과 논현동의 두 가게와 분당의 ‘평양면옥’을 맏아들, 원 창업주인 어머니, 그리고 딸이 각각 운영한다. 맛은 일정부분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평양냉면 마니아들은 이 세 가게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주간한국> [이야기가 있는 맛집(178)] 냉면(2) 냉면 맛은 메밀함량과 육수가 결정
70% 메밀함량이 맛있다는 이유… 발효·숙성시킨 육수 결합돼야 제맛 요즘 냉면 '메밀+밀가루+전분' 구성… '을지면옥' '평양면옥' '능라' 유명
제대로 된 냉면, 착한 냉면, 바른 냉면을 알려 달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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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성산의 행복찾기 원문보기 글쓴이: 학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