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빈의 셋째 날 수업은 둘째 날과 마찬가지로 ‘리듬기타’였다.
“다양한 코드 폼을 익히는 게 중요해. 특히 밴드 합주를 할 때는 다른 악기와 충돌되어서
음악이 산만해지는 경우가 생기니까, 드럼이나 베이스 혹은 기타 파트를 줄이고
코드를 단순히 편곡하는데 대부분 기타 부분을 많이 다듬어.”
세빈은 기존 코드에 음을 한 가지만 더해도 음악이 한층 풍성해진다는 것 그리고
기타 현 위를 미끄러지듯 치는 슬라이딩 주법까지 간단히 보여주었다.
그는 설명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서서 일렉기타 스트랩을 목과 어깨에 두르고
케이블과 앰프를 연결해 자세를 잡았다.
그들에게는 백 마디 설명보다, 보고 듣고 직접 기타를 다루는 것이 더 필요할 것이었다.
세빈의 멋진 일렉기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네미시스 공연 때마다 항상 처음을 열어주는 연주곡 ‘레테의 강’이었다.
깁슨 레스폴 스튜디오 일렉기타를 치는 세빈의 눈빛이 평소 수업 때와는 달리,
몽환적인 새벽그림자처럼 신비롭게 빛났다.
교실 안의 학생들이 선생님의 그 멋진 모습을, 넋 나간 듯이 바라봤다.
세 번째 수업을 마치고 난 뒤, 세빈이 베이지색 롱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교실을 나서려고 할 때
그의 교실로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붉은 장미꽃다발과 사탕바구니와 손편지 따위의 깜찍한 선물을 품에 꼭 안고서.
“선생님,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요~”
“연기맛 막대사탕은 드릴 수가 없어서, 솜사탕맛 쿠키로 골랐어요~”
“수업 안하실 땐 오빠라고 해도 되나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세빈 오빠 짱! 네미시스 짱!”
“저, 여기 사인 한번만 해주세요!”
지금 고등학생이라면 우리가 데뷔할 때쯤 태어난 아이들일 텐데.
세빈은 말괄량이 여학생들이 귀여워서 핏, 웃었다. 그림을 전공하는 그 친구들은
가져온 스케치북을 펼쳐 순서대로 사인을 받았다.
마지막 순서의 여학생이 세빈에게 다가왔다. 세빈은 뚜껑을 연 펜을 들고 사인해줄 태세를 취했다.
그때, 그 여학생이 별안간 세빈의 앞에서 붉은 체크무늬 베스트를 훌러덩, 벗었다.
세빈은 그 친구의 돌발적인 행동에 흠칫, 놀라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그 여학생은 뒤돌아서서
그에게 등을 떡하니, 내밀었다.
“아, 여기다가? 여기다 사인해도 돼?”
“네! 괜찮으니까 여기다가 해주세요!”
“이름이……?”
“혜나에요! 꺄아아!”
훌러덩 벗은 붉은 체크무늬 베스트를, 물감이 알록달록 묻은 제 손에 꼭 쥔 혜나가
너무 좋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발을 동동거렸다.
“혜나야, 진정해. 가만히 서봐. 숨 천천히 쉬고. 그래야 내가 예쁘게 사인해주지.”
“네! 선생님! 꺄아아!”
세빈은 그 왈가닥 소녀들 중 가장 까불거리는 혜나의 교복 블라우스 등에 사인을
해주며 풋, 웃음을 터뜨렸다.
사인 맨 마지막에는 깜찍하게 하트도 그려주었다.
교복 블라우스 등에 사인이라니. 혜나는 나중에 집에 가서 엄마한테 얼마나 등짝을 맞을까.
“어머, 세상에! 이게 뭐야? 누가 네 교복 뒤에다 낙서했어?”
“낙서 아냐. 특강 쌤이 사인해준 거야.”
“도대체 특강하는 선생님이 누군데, 너한테 이런 짓을 해!
누구야. 어떤 선생이 귀한 남의 딸 등짝에다가
이렇게 크게 사인을 하고 하트를 그려!
유성이라 잘 지워지지도 않잖아, 이것 어쩔 거야!”
“하세빈 선생님이라고…… 네미시스, 솜사탕…….”
“하세빈, 여선생이야? 솜사탕은 뭐야. 그 선생이 너한테 솜사탕도
사줬어? 학교가 무슨 놀이공원인 줄 알아!”
“자꾸 등 때리지 마! 오빠 사인 번진단 말이야!”
세빈은 말괄량이 여학생들이 웃음을 깔깔 터뜨리며 문밖으로 우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도
그들의 발랄한 뒤통수를 보며 생긋, 웃었다.
맨 마지막으로 문을 나간 혜나의 하얀 블라우스 뒤에 대문짝만하게 휘갈겨 쓴 그의 사인이 비쳤다.
세빈이 일렉기타 특강을 마치고 교실을 나선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이 복도를 따라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이 학교는 방음시설이 철저하게 되어있어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 리가 없는데.
세빈은 그 멜로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연습실 안에는
검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고, 그 앞에는 예린이가 앉아 있었다.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였다.
손가락 테크닉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야 감히 도전할 엄두조차 못내는 곡이었다.
예린의 열 손가락은 망치로 건반을 두드리듯, 강하고 빠른 속도로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고 있었다.
어려운 곡이었고, 유명 피아니스트가 치는 연주보다는 물론 서툰 면이 없지 않았지만
분명 그 ‘이슬라메이’는 그 친구만이 갖고 있는 매력과 가능성이 담겨져 있었다.
이 아이의 손은 피아노가 운명이겠구나. 세빈은 복도에 팔짱을 끼고 서서
예린의 연주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곡이 끝나갈 즈음, 그는 문틈 사이로 예린과 서로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당황한 세빈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휘청거렸다.
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빈이 서 있는 문을 향해 걸어왔다. 예린이, 살짝 열려있던
문을 휙, 열어젖혔다.
“선생님.”
“어, 예린아. 지나가다가 문이 조금 열려있기에…… 예린아, 피아노 진짜 잘 친다.”
“감사합니다.”
세빈이 아는 바로는, 그 연습실은 큰 콩쿠르나 해외 유명음대 실기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비밀의 공간이었다.
“아까 그 곡, 엄청 어려운 곡인데.”
“저도 아직 잘 못해요.”
“아냐,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예린이 지금 피아노 연습하고 있었던 거지? 선생님, 갈게.”
세빈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시선은 연습실 안의
검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그 피아노는
잔잔한 호수 위에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는 까만 백조 한 마리를 연상시켰다.
세빈은 멍하니, 그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저 피아노, 1억원이 넘는 무지 비싼 악긴데…… 진짜 좋은 피아노인데…….
연주하는 느낌이 어떨까. 나도 쳐보고 싶다.’
예린이 세빈의 시선을 따라가, 그가 연습실 안의 검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선생님도 피아노 잘 치시잖아요. 한 곡만 들려주시면 안돼요?”
“지금?”
“네, 지금요.”
예린이 두 손으로 세빈의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예린에게 못 이기는 척 연습실로 들어와
잠시 망설이던 세빈은, 그 피아노 앞에 자세를 잡고 앉았다.
세빈의 앞에 검은 백조 한 마리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길고 가지런한 열 손가락을 검은 스타인웨이 피아노 건반 위에 조심스럽게 얹고
호흡을 크게 한번 고른 뒤,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 OST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였다.
세빈은 자신이 두드리는 건반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피아노 선율과 함께 손가락으로 하여금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그의 피부를 적시고 몸속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세빈의 눈앞에 검은 백조가 크고 멋진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그려내는 멜로디가 연습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의 몸을 둥그렇게 감싸 안았다.
할 수만 있다면, 훔치고 싶을 정도로 근사한 악기였다.
피아노 연주를 마친 뒤, 세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에 서있던 예린이 박수를 짝짝, 쳤다.
“선생님, 짱 멋있어요.”
“고마워. 쌤이 원래 피아노 좀 쳐.”
세빈이 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수줍게 웃었다. 세빈이 일어난 피아노 의자에
예린이 다시 앉았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세빈이 예린에게 물었다.
“예린이는 복수전공으로 일렉기타는 왜 배우는 거야? 피아노 이렇게 잘 치는데.”
“그게…… 제가 피아노를 10년 넘게 치다보니까, 지루해져서요.”
예린은 피아노 건반을 누르지 않고 손을 자기 무릎께에 내렸다.
“음악은 그만 두고 싶지 않은데, 피아노가 정말 내 길인지…… 요즘 좀 휘청거려요.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다…… 일렉기타가 그냥, 눈에 띄었어요.”
연습실 안에 돌연 침묵이 흘렀다.
검은 백조를 닮은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만이 숨죽여 그들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예린아.”
“네.”
“오래 뭔가를 하다보면 누구나 다 그렇게 휘청거릴 때가 와.
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앞질러 가는 것 같고…… 나는 여전히
혼자 불안하게 휘청거리는데, 다른 이들은 모두 단단하고 강해보이고.
누구나 다 그래. 선생님도 예린이 나이 때 그랬어. 그런데 그런 것도, 다 지나가.
그저 묵묵히 그 시간을 견디다 보면, 어느덧 손안에 쥐고 있는 것도 있을 거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도 스스로 당당해질 때가 올 거야.”
예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갈게. 쌤이 괜히 예린이 연습시간 뺏어먹었네. 내일 보자.”
세빈은 예린의 연습실을 빠져나와 문을 야무지게 닫아주었다.
첫댓글 여왕님 피아노씬 (철푸덕) 넘 조코요...블라우스에 싸인받는거 넘 웃기곸ㅋㅋㅋㅋ오빠ㅜ다정해서ㅜ너무좋다ㅜ♥️
세빈오빠가 피아노, 기타 다 다룰 줄 아시니까... 그 멋진 모습을 근사하게 묘사해보고 싶었어요^^ 넘나 멋진, 다정한 세빈오빠~*^^* 소설 전개상, 왈가닥 팬들도 나와야 할 거 같아 그 부분도 넣어봤어요^^
천공의 성 라퓨타 OST는 많이 들어본거라 기억이 나지만 이슬라메이라는 곡은 생소해서 꼭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워낙 편식 심한 편이라ㅋ)이렇게 또 좋은 곡 알아갑니다! ㅋㅋ내용도 재밌구요! 꼭 저한테 하는 얘기같기도 했어요..이 길이 맞나...휘청거릴 때가 누구나 있다는 거...
저도 팬픽 쓰느라 자료 찾아보면서 좋은 연주곡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세빈오빠가 예린이에게 하는 이야기는.. 저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었던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해줬으면 하는 이야기에요^^ 달님에게도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어요^^
세빈 오빠 짱! 네미시스 짱!!
ㅋㅋㅋㅋㅋ
잼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당^^*
피아노 치는 사람들한테 스타인웨이는 로망이고...
음악인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로망인 악기!
(작은 평수 집 전셋값과 맞먹는?)
원곡들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니까 예린이와 오빠의 선율이.....
어떨지 상상해봅니다 ㅎㅎ
공연 가면 안 입는 네미시스 티셔츠에 사인 받을까?
이러는 저.... 순간 예린이가 부러웠나봐요 ㅋㅋ
가격 보고 허걱! 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ㅋㅋ 원곡까지 찾아들어주시고.. 고마워요^^ 기타와 피아노 사이를 넘나드는 예린과 오빠의 멜로디를 저도 듣고 싶네요^^ 리아님 다음에 오빠 사인, 티셔츠에 받으시면 인증샷 자랑해주셔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