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성경을 한번이라도 통독한 일 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인들한테서 들은 많은 키워드와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종합할 때 기독교의 기본적인 구조는 쉽게 알고는 있습니다.
종교는 마루 "종" 자와 가르칠 "교" 자로 써 "으뜸가는 가르침" 이라는 뜻 입니다,
어느 무리의 그 " 무리다운 격" 즉 사람이라는 무리에게는 사람다운 격(인격 교육) 에 대하여 으뜸가는 가르침 이 종교라는 말입니다.
유교에서는 이 교육이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전수되었고 (효의 사상) 기독교에서는 이 교육 내용이 주의 말씀으로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창조했다고 하니까 유교에서와 같이 하늘님이 낳고 하늘님이 가르친다고나 할까?
이 말은 지금의 의식 수준으로 말하면 고작 학교에서 흔히 말하는 전인 교육의 개념을 주의 말씀과 동일시하느냐?
말 같지 않은 소리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가 탄생할 그 당시의 미개한 시대 상황에서는 인간을 총체적이고 체계 있게 영원한 진리의 개념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선각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성업이었을 것이며 예수의 권위가 크게 인정받게 된 것은 이 때문 입니다.
기독교의 교육 이념이나 내용 을 모두 말하는 것은 전혀 나의 능력 밖의 일 입니다.
다만 기독교의 중요한 어휘가 어떻게 교육적인 의미를 갖는가를 좀더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과, 만민 평등의 박애주의 사상과 그리고 세계 평화주의를 교육 이념으로 하여 개인의 원만한 인격 형성과 건전한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구원" 의 뜻, -->김원웅 목사가 옥한음 목사와의 대담에서 개인의 "구원" 과 사회의 "구원" 을 언급했다 함).
이 가르침은 절대적 이어서 주를 절대자로 모시고 오로지 "찬송" 하여야 하며(찬송가의 의미) 가르침을 위반하면 "회개" 를 하여야 한다는 비논리 입니다.
같은 사안에 대하여 두번 이상 회개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기만 행위 이니 회개를 밥 먹 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를 밥 먹듯 하는 주요한 이유중에서 무의식적으로 또 그 범죄를 재발코져하는 잠재력이 있다는 반증으로서 이미 죄의 종노릇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집니다.
"성경" 에 쓰여 있는 주의 가르침은 삶의 "진리"요 "길" 이니라.
이를 완수하면 육체는 죽어서 썩어도 그 의 "삶의 가치" 는 영원한 것이니 "온전한 삶의 영 적 주체" 로 인정받아 곧 "영생" 을 누리 게 된다는 말이 성립 됩니다.
따라서 "내가 곧 생명" 이니라 이말을 다른 말로 연결시킨다면,
"축복을 받는다" 는 말도 같은 맥락이 됩니다.
"영생" 의 뜻이 이것이 아니라면 이는 "천당" 과 함께 "상상의 세계" 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의미를 왜곡시켜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의도로 비논리의 성경구절을 쉽게 변개시켜서 기복적인 미신종교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예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냐 말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고 저 몸부림치고 그의 실천 의지를 다짐하는 것이 "기도" 이거늘 " ........하게 하여 주소서, 또는......를 이루어 주소서" 라고 기도할 때 교인들이 쓰는 그 상투적인 말은 과연 그런 의미로 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여깁니다.
(이명박 서울 시장이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했다가 말썽이 생기니까 그 기도문을 써준 목사도 말하지 않았나? "봉헌" 이란 말은 서울을 발전시키겠다는 "강한 의지" 의 표현으로 썼다고).
기도가 그런 의미의 것이 아니라면 그 기도는 기복신앙 에서 무당들이 하는 짓과 조금도 다를 바 가 없게 됩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 이야기" 는 감정을 버리고 이성을 택하라는 말을 유치원생들에게 말하듯 한 것 입니다.
옛날 촌부 할머니들도 말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천당" 간다고! "천당" 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이성을 아는 올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씩 동경 해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이상의 세계 아니겠습니까
온갖 "기적" 과 "간증" 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유용한 교육 수단으로 썼을 법하다.
(교통과 정보의 소통이 거의 없는 원시적인 사회에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하는 모습을 봤다는 데는 어찌 하겠나?)
기독교의 교육적 명령은 절대적인 윤리관 이어서 무조건 적으로 복종해야지 앞에서 내가 말한 바와 같은 비판적이고 평가하는 말들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병폐적이고 부조리한 말로 점철 되어 버렸습니다.
여의도 s교회의 c목사와 잔당들 처럼 주의 머리 위에 올라가려는 교만이 되기 때문 입니다.
설교를 뜯어 놓고 분석을 해 보자.
(이젠 이단의 가르침을 한국 강토의 여러 기독교라는 포장의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목사의 화술은 어떻게 속임수와 최면으로 강한 암시로 사람들을 기망하는지를 말이다. 거의 한국강토가 순복음식의 메세지를 비판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절대성" 은 다양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운명적인 한계 에 직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력과 포용력과 도량이 함량미달의 융통성 없는 절대적인 윤리관을 끝까지 견지하는 젊은이들은 이 사회에서는 매우 무지하고 무능력 하고 쓸모없는 폐기처분만을 기다리는 수명다된 폐건전지 마냥 할수 없이 빌붙어 사는 무기력한 존재들로 전락 하였다.
성경의 내용이 비유화법과 추상적인 언어로 되어 있어서 어느 시대 어느 사안에도 적용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탄력적인 강론을 할 수는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럴 경우 오늘은 "진리" 라고 강론했든 사안이 내일은 진리가 아니라 고 하게 될 수도 있음). 하지만 그러한 능력을 가진 피를 토하고 순직할 성직자가 과연 있겠나?
현재의 모든 교회가 기복 신앙의 성격이 짙게 풍기는 것도 바로 이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한 데 대한 대안으로서의 피할수 없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무당, 무속과 잘 구별되지 않는 기독교가 1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기독교를 대표하는 잘 포장된 옵션이 아닌가 이말 이외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전도하는 말을 들어 보면 --- "예수 믿어 천당가세요"--- 라는 것 입니다. " 예수를 믿는다" 라는 말의 뜻을 "가르침" 과 관련지어 말하는 이는 거의 없고 그저 교회만 나가면 천당 간다는 것을 설득하느라 주의 전지 전능 한 권능과, 기적과 ,간증의 이야기들만 늘어 놓으면서 기복 신앙의 냄새를 확확 풍깁니다.
나는 우연히 신학대학교 교재 신학 개론의 앞부분 몇 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역사적으로 온갖 잡탕 신앙이 뒤섞인 나라에서는 이의 영향을 받아 교리가 크게 왜곡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딱 맞는 말이다.
기도하는 말을 들어 보라. 온통 ".....하여주소서" ".....을 이루어 주소서" 하는 말이 기도 내용의 전부다.
교회에 가서 설교하는 내용을 들어 보시요.
온통 주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주에 대한 찬양으로 끝납니다.
찬양은 한 두 번으로 끝나고 가르침을 현실 생활에 조명하고 가르침을 전하는 설교가 주를 이루어야 되는 것 아닌가?.
(김원응 목사가 "오늘날 성경의 재해석" 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는데 이 말은 결국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것이 교인 한사람 더 늘이는 것보다 더 참된 의미의 " 전도" 행위 가 아닌가?
얼마 전 청주 의 한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퇴직한 내가 잘 아는 L 씨는 장로이고 처녀 총각 때부터 교회를 다니던 사람인데 퇴직 후 체면과 권위가 도전받을까봐 걱정했는지 다니든 교회를 저버리고 나온 것도 문제려니와 지금은 여자 측에서 혼자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심받는 이단교회" 로 나가고 있다니 과연 "이단" 을 가려 낼 수 있을 만큼 의 기독교 기본교리를 아직도 터득하지 못했단 말인가?,
"기복" 만을 일삼아 왔으니 터득했을 리가 없었겠지요.
우리집 사람도 그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를 못나가게 했는데 아마도 속으로는 내가 빨리 죽기를 기도하고 있으리라.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 남편과 가정을 떠난 신앙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단적인 예를 들었고 어떤 기독교인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난 극단적이라고 자신이 신봉하는 차원의 신께 기도할런지 모르나 이것이 현실이고 현실을 무시한 처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부작용을 양산해 내지 않았겠는가?
빗나간 교회를 목사들은 알고 있을 것 입니다.
신학대학교 교재에 나오는 중요한 몇 가지 명제들과 교회 현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 입니다.
종교를 제대로 알려면 높은 철학적 지식이 요구 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나이 많은 늙은이 들이고 안 여자 들 이어서 하나님의 심오한 생활 철학을 늘어놓으면 교인들 이 다 떨어 저 나가기 때문에 목사들로서도 어쩔 수 가 없으리라.
또 모든 삶을 커버하는 철학을 강론할 능력도 없으니 차라리 기복신앙을 그대로 방치하고 동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의 "religion " 도 생활의 길잡이로서의 "신조" 라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는데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 의 정신문화의 큰 축을 이룬다는 기독교가 과연 기복신앙으로 이대로 방치 돼 있어도 되는 것인지 한심스러워서 목사들에게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아마도 대답은 이러할 것이다.
"오!!! 잃어버린 양 이여!!"
그러나 그 잃어버린 양은 이 사람 "나" 가 아니라 전국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복을 빌고 주를 우상 섬기듯 하는 빗나간 신앙인 들일 것이고 신병을 고쳐준다고 일반 교인들을 현혹하는 먹사와 썩을 대로 썩은 부흥강사 들일 것이다.
기독교 성직자 어느 분 !
나는 기독교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종교로서 위치도 인정을 합니다.
나에게 설교나 설득할 생각은 마시고 기도교의 현주소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들려주실 분은 없는지요?
"모든 교인들의 바라는것이 "기복"그 것 뿐이니 할 수 없다고"
할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로또나 불로장수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첫댓글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학대학 수료자들 인걸로 알고 있고, 신학대학에서는 성경과 기독교의 일반적 문제성마저 교육받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사회에 나와 직분을 행할때 신도들의 의향에 따라줘야만 개인도 인정받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교회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더군요. 변명인지는 몰라도 이것은 분명 직무유기
직무유기가 아닐까요? 이미 기복신앙으로 자리잡아버린 한국의 기독교체제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거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의 의식이 바뀌면 교회의 의식도 바뀝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목사들의 이권에 대한 욕심이 한국교회를 망치는 근본입니다. 장문의 글을 쓰시느라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은 앞으로는 없답니다... 신의 모습을 이런 형상에서 저런 형상으로 수정해서 사람들에게 권할수 는 없다는 뜻이죠.. 어떤 형상도 안됩니다,,, 여러분이 섬겨야할 신은 본래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야 합니다,, 그분의 거룩함에 존경하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거룩함은 더할수 없이 커다람을 뜻함니다
우리가 큰자도 존경합니다 .그까닭은 그에게 얻는것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섬김은 그분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뜻으로 난 어떤 형상도 짓거나 섬기지 맙시다,,,그 분을 닮도록 깨달을 뿐입니다,,,
이땅에 신전은 그 어떤 형상이든 없애야 합니다,,, 그 이름이 교회가 됬든 사찰이 됬든,,, 우리가 마음속에서 없애야 합니다.... 그 닮고자 하는자들이 진정으로 기도하는 집이 되었으면 합니다..아마 하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것은 참된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 입니다.... 그분도 그런 세상을 도우실것입니다,,,
너는 나위하여 어떤 형상에게도 절하지 말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에게도 절하지 마라고 했는데, 스스로 계율을 범한 종교인은 항시 그 문장에 굴레 씌여져서 스스로의 자유와 본인의 의지를 박탈당한채 종교우상에 절하고 있고 먹사우상에 절하고 있고, 학벌우상과 외모우상에 절하고 있으면서도
헌금우상이라는 신조어우상에 스스로 마음의 감옥에 감금당한채 자신의 명예라는 바벨탑공사를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우상이 서로를 미워하고 다투게 만드는지 말못하는 우상에 끌려가서는 결국에는 폐가망신 당하는 위기에서도 우상의 미련을 못버리고 멸망길로 가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가만 있어도 마음의 참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 할 교회의 거룩한 분위기는 이미 우상화된 종교생활로 회칠한 무덤에서 나는 음산한 시체썩는 냄새로 점점 불신의 골이 깊어지는 마른 뼈다귀와 같은 냉냉한 마음 닫힌 생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들 뿐 더 이상의 빛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