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동안 전북 김제金堤에 다녀 왔습니다. 제가 둘러본 곳은 성모암 - 조앙사 - 진묵대사조사전祖師殿 - 망해사 - 학성강당學聖講堂 - 해학 이기 선생 생가 - 구. 하시모토 농장사무실 - 아리랑 문학관 - 벽골제 - 장화쌀 뒤주 - 정화암 생가 - 금산사(혜덕왕사탑비慧德王師塔碑, 소요대사비逍遙大師碑, 심원암 삼층석탑) - 귀신사歸信寺 - 청도리 삼층석탑 - 금산교회 - 동곡약방 - 증산법종교본부 - 원평집강소執綱所 - 수류성당 - 김제향교 - 김제동헌ㆍ내아(관아) - 신풍동 아리따 설계 가옥 - 죽산면 한.일 절충식 가옥 - 김제 전교비傳敎碑 - 서강사西岡祠 - 남강정사南崗精舍 - 금구향교 - 탄허 스님 생가 - 석정 이정직 선생 생가 - 구. 백구금융조합 등 입니다. 짧은 답사 후기를 소개합니다
■ 진표율사와 변산 불사의방
진표율사(眞表律師, 718~?)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方에서 피를 토하는 수행 끝에 미륵불을 친견하고 돌아와 세운 한국 미륵신앙의 본부이다.
진표율사가 보여 준 '참회'와 '권능'은 미륵 신앙을 한국의 토양에 깊고 넓게 뿌리내리도록 하였다. 참회가 없는 권능은 괴력난신으로 흐를 수 있고, 참회만 있고 권능이 없으면 다이내믹한 힘이 나오지 않는다. 다이내믹한 힘이 없으면 종교로 성립할 수 없다.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스타급 고승들만 나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저술 하나 남기지 않은 변두리 국가 출신의 진표가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초인적인 신통력 권능과 관련 있다.
『삼국유사』에는 현대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신이한 내용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진표율사의 신이한 행적 부분은 단연 압권이다. 한국 불교사에서 이처럼 엄청난 신이함을 보여 준 고승은 찾아볼 수 없다. 소가 감동하여 울고, 물고기와 자라들이 스스로 다리를 만들어 율사로 하여금 지르밟고 가도록 했다는 기록은 다른 데서 발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초인적인 신통력이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신라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나아가 그 소문이 중국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던 것이 아닐까!
불가사의한 불사의방
한국의 불교 유적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변산의 불사의방不思義房이라고 답하고 싶다. 한국 미륵 신앙의 개창조開創祖인 진표율사(眞表律師, 718~?)가 망해 버린 나라 백제의 유민으로 태어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고행 끝에 마침내 도를 통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불사의방으로부터 한국의 미륵 신앙이 발원하여 장강이 되고 대하가 되어 1,200년의 시공을 관통하면서 현재까지 흘러와 우리의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불사의방의 위치는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에 있다.
▲ 오른쪽 바위 중간쯤 우묵하게 들어간 곳이 암자터다. 진표율사는 이곳 불사의방에서 만 3년을 살았다. ⓒ 이지누
진표율사는 실제로 불사의방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진표는 이곳에서 엄청난 고행을 하였다. 그는 매일 꺼칠꺼칠한 돌바닥에다 수천 번의 절을 해서 팔꿈치와 무릎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고행과 참회를 계속하였다. 그런데도 불보살의 감응이 없자 죽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때 지장보살이 나타나 떨어지는 진표의 몸을 절벽에서 받아 올렸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만난 뒤에도 정진을 계속하자 이번에는 미륵보살이 나타나 진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계시와 권능을 준다. 이후로 진표는 자애로운 미륵불의 화신이 되어 백제 유민들의 한恨을 어루만진다. 당시 갈 곳 없이 방황하던 백제 사람들에게 진표는 구세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진표는 백제의 예수였던 것이다.
출처:
1. 『조용헌의 사찰기행』, 조용헌, 2005, 32~47쪽
2.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이지누, 2005, 249~282쪽
■ 진묵대사(震黙大師: 1562~1633)
진묵대사는 김제시 만경면 화포리 태생이고 그가 수도한 사찰들이 대개 호남권에 있었기 때문에 전라남북도에는 진묵에 관한 민간 전설들이 전해진다.
어린 진묵이 봉서사鳳捿寺의 사미승으로 있었을 때의 소임은 매일 나한전羅漢殿에 공양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주지의 꿈에 절의 신중神衆들이 나타나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올리는 공양을 어찌 우리가 황송하게 받을 수 있겠느냐? 받을 수 없다.”
잠에서 깬 주지는 당장 나한전의 공양 소임을 다른 스님으로 교체하였다. 주지는 진묵 스님이 부처의 후신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던 것이다.
진묵 대사는 술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술' 이라고 주면 먹지않고, '곡차'라고 말해야만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차는 마실 수 있지만 어떻게 술을 마시겠는가. 술은 곡식에서 우려낸 물이니까 '곡식 곡穀' 자를 써서 곡차라고 한 말이 틀리지 않다. 어느 날 아들을 낳지 못한 인근의 여자신도가 진묵 스님을 찾아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공양을 올려야 할 것 아닌가?"
"무슨 공양을 올릴까요?”
"곡차를 가져와야지."
이 말을 듣고 보살은 며칠 있다가 술을 담가 가져왔는데, 곡차를 마시려고 보니 그 곡차 속에 쌀겨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스님이 술을 먹는 데 대한 반감으로 보살이 일부러 쌀겨를 띄워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진묵 스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훌훌 마셔 버렸다. 1년 후에 과연 그 보살은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눈동자에 쌀겨 크기만 한 흰 점이 박혀 있었다. “아들을 주시려면 제대로 된 아들을 주셔야지 왜 눈에 점이 박혀 있는 아들을 주셨나요?”
"보살이 곡차를 가져올 때 거기에다 쌀겨를 띄워서 가져오지 않았느냐. 곡차를 가져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아들을 점지해 주었고, 곡차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와야지 쌀겨를 띄워서 왔으니까 그에 대한 과보로 눈이 그렇게 되었느니라
출처: 『조용헌의 사찰기행』, 조용헌, 2005, 80~93쪽
■ 서해 망해사와 부설거사 그리고 진묵대사
망해사望海寺는 642년(의자왕 2년) 부설 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부설 거사는 인도의 유마 거사, 중국의 방 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에 드는 대단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비롯하여 부인인 묘화 부인妙花夫人, 아들인 등운登雲, 딸인 월명月明이 모두 성불한 '패밀리도통'이라는 희귀한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부설 거사 가족이 모두 성불한 도량은 변산의 월명암이다. 성불한 뒤로 묘화 부인은 장흥의 보림사를 창건했고, 아들 등운은 계룡산의 등운암을, 딸 월명은 월명암을 그리고 부설은 이 망해사를 창건하고 여기서 나머지 여생을 보냈다.
부설 거사가 지은 「팔죽시八竹詩」를 소개한다.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 가는 대로此竹彼竹化去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風打之竹浪打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粥粥飯飯生此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是是非非看彼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賓客接待家勢竹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市井賣買歲月竹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萬事不如吾心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然然然世過然竹"
또한 서해 망해사의 낙서전樂西殿 기둥에는 진묵대사의 시詩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로 산은 베개로 삼았도다. 달은 촛불이요 구름잡아 병풍치고 바닷물로 술잔 기울여, 크게 취하여 한바탕 멋진 춤가락 추고 싶은데 이 금의장삼이 곤륜산에 걸쳐 거추장스럽구나."
출처:
1. 『2008 기획특별전, 전북의 역사문물전 VIII』, 조용헌, 2008.
2. 『조용헌의 사찰기행』, 조용헌, 2005, 266~279쪽
■ 서도장씨의 과객 대접
조선시대 부자들은 돈을 받지 않고 자기 집을 찾아오는 과객過客들을 잠 재워주고, 밥 주고, 때로는 여비까지 챙겨주는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
김제 금구면 서도리(西道里)의 '서도장씨(西道張氏)' 집안은 김제평야 최고의 부자였고, 과객 대접 잘한다는 소문이 19세기 중반부터 해방 무렵에 이르기까지 호남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서도리에 모여 살았던 장씨 아홉 가구가 가진 재산을 합치면 약 4 만석에 달하였다. 만석꾼이 두 집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오천석ㆍ삼천석을 고루 하고 있었다. 해남ㆍ목포ㆍ나주ㆍ장성 쪽에서 한양을 가기 위하여 올라오는 여행객들은 전라도의 '서쪽길'인 금구면의 서도장씨 집에서 일단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전주를 거쳐 삼례, 함열로 올라갔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장씨들의 기와집 구조이다. 집집마다 모두 '샛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문을 통하지 않고서도 서로 이동이 자유로웠다. 예를 들면 한꺼번에 과객 100여명이 들이닥치더라도 샛문을 통하여 아홉 집이 나누어 분산 수용하면 별문제가 없었다. 손님 접대를 위하여 1주일에 소 한 마리씩을 잡았다는 구전도 전해온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동단(大同團) 사건으로 함흥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각각 감옥살이를 한 장현식(張鉉植·1896~?)이 바로 서도장씨 종갓집 후손이다. 장현식은 자신의 만석 재산을 일제 강점기 때 민족운동에 거의 다 써버려서 해방 후 토지개혁을 할 때는 가진 땅이 별로 없었다. 서도리의 퇴락해 가던 장현식의 고택을 전주 한옥마을로 옮겨서 깔끔하게 정비하여 복원해 놓았다.
출처: [조용헌 살롱] (835) 西道張氏의 過客 대접 - https://v.daum.net/v/20120506232006308
■ 김제의 일제수탈
군산개항(1899년 5월 1일) 후 김제지역의 일본인 토지매수는 어느 지역 보다 빠르고 대규모적이었다. 1916년 경지면적에 대한 일본인 소유경지비율은 무려 56.2%에 달한다. 대략 전체 조선에서 일본인 소유경지 등이 5% 내외임을 감안한다면 김제지역에서 일본인 토지소유는 조선 최고 수준이다.
1912년 호남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김제역이 설치되자 일본인 이주자도 점차 증가하여 김제역 앞에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해말 일본인은 48명이었으나 1923년에는 998명, 1935년이 되면 1,527 명이 되어 김제군 전체인구 10 명 가운데 1명이 일본인이었다
경제활동의 정점에는 일본인 지주가 존재하였다. 김제군에 사무소를 둔 100정보 이상 대지주는 김제읍의 이시카와 농장石川農場, 아베 농장阿部農場, 미조데 농장溝手農場, 죽산면의 하시모토 농장橋本農場과 진봉면의 동진농업주식회사, 월촌면의 마스도미 농장榤富農場, 청하의 나카시바 농장中柴農場 총 7명이었다. 이외 김제군내 사무소를 안 두었지만 김제내에 많은 소작지를 가진 지주로서는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 구마모토熊本利平 등이 있었다.
▲ 김제군 내 100정보 이상 지주(1936년)
소작료는 대개 수확량의 50~80% 내지 못할 때는 년 20%의 연체율을 지불했다.
▲ 김제시 죽산면의 구. 하시모토橋本 농장사무실
일본인 지주가 거두어들인 소작미는 김제역, 부용역 근방의 정미공장에서 정미로 만들어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1932년 김제가 생산했던 쌀 25만석의 대부분이 일본(특히 간사이 지방)에 김제미라는 브랜드로 실려갔다.
전북전체의 통계를 보면 1910~1914년 전북 쌀 생산량은 연평균 1,126천석이었던 것이 1930~1940년은 연평균 2,047천석으로 82%나 증가하였다. 쌀 생산량은 두 배로 증가했지만 일본으로 실어 나른 쌀은 4배로 늘어났다.
김제는 조선제일의 미곡 수출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국경제에 편입됨에 따라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출처: 『2008 기획특별전, 전북의 역사문물전 VIII』, 조용헌, 2008, 240~242쪽
첫댓글 김제는 무심코 지나쳤던 지역인데 이런 역사들이 숨어있었군요.
덕분에 애착 가는 곳 또 한 곳이 생겼네요.
네, 감사합니다. 후기에 올리지 못한 내용들도 많습니다. 탄허 스님. 해학 이기 선생. 학성강당...
금산사는 열 번도 넘게 갔었는데, 이번에 진짜 제대로 둘러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