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중국문명의 기원
중국은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공간이었으며, 이후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신석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 각지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신석기 농경문화는 황하 중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中原)에서, 앙소문화(仰韶文化)와 용산문화(龍山文化)를 거쳐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라고 하는 하(夏)의 실존 여부는 아직 명확치 않지만, 문명발달 이전의 단계를 문화창조의 영웅을 중심으로 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간직해 오고 있다. |
1.1. 중국의 고인류와 구석기 문화
인류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기록의 유무에 따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뉘고, 선사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나뉘며, 구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중국에서는 고고학적으로 구석기시대 전기의 인류를 원인(猿人), 중기의 인류를 고인(古人), 후기의 인류를 신인(新人) 즉 호모 사피엔스라 부르는데, 지금까지 이들을 중국의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표를 참조하라.
<중국의 구석기 인류>
시기구분 |
출현연대 |
문화 혹은 인류 |
발견지역 |
발견연대 |
전기구석기(猿人) (200-20만년 전) |
약 180만년 전 약 170만년 전 약 60-70만년 전 약 50만년 전 |
西侯度유적 元謀人 藍田人 北京人 |
山西省 芮縣 西侯度 雲南省 元謀縣 上那蚌村 陝西省 藍田縣 北京市 周口店 제1지점 |
1961,62 1965 1963,64 1927,37,49- |
중기구석기(古人) (20-10만년 전) |
북경원인 이후 약 10만년 전후
약 20만년 전 |
大여人 許家窯人 馬패人 長陽人 丁村人 桐梓人 |
陝西省 大여縣 山西省 陽高縣 廣東省 馬패鄕 湖北省 趙家堰 山西省 襄汾縣 丁村 貴州省 桐梓縣 雲峰岩 |
1974,76,77 1978 1958 1956 1954 1972 |
후기구석기(新人) (4-5만년 전) |
약 4-5만년 전 |
柳江人 資陽人 麒麟山人 오르도스(河套)인
山頂洞人 |
廣西省 柳江縣 四川省 資陽縣 廣西省 來賓縣 麒麟山 오르도스지역(수동구, 사라 오소강 유역) 北京 周口店 山頂洞 |
1958 1951 1956 1923,56,64
1933,34 |
중국에서 인류의 활동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170만년전이라 추정되는 운남성(雲南省)에서 발견된 원인 단계의 원모인(元謀人)이다. 이후 60만년전에서 50만년전까지 남전인(藍田人)과 북경인(北京人) 등이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인공적인 불과 간단한 타제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직립보행한 이들은 수렵과 어로를 위주로 생활하였고,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며,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였던 같다. 두개골의 뇌용량으로 판단컨대 이들의 진화과정은 매우 완만하였으며, 현대인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없다.
원인은 20만-10만년 정도에 이르러 점차 현생인류에 가까워졌다. 고인 단계의 마패인(馬패人), 장양인(長陽人), 정촌인(丁村人)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석기외에 골기와 목기를 사용하였으며, 잡혼상태를 벗어나 혈연혼인의 단계로 접어들어 이후 씨족제로 넘어가는 결절점이 되었다.
대략 4-5만년전이 되면 인류는 더욱 진화하여 현대인과 같은 단계인 호모 사피엔스가 된다. 이들은 원인이나 고인에 비해 대뇌가 발달하여 현대인의 뇌용량의 편차범위(1300-1500㏄)에 속한다. 대표적인 인류로는 오르도스인, 산정동인(山頂洞人), 기린산인(麒麟山人), 유강인(柳江人)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정교한 도구인 돌화살촉과 뼈바늘을 사용하였으며 석기의 가공능력도 한층 발달하였다. 보다 주목되는 점은 산정동인의 경우 인골 주위에 붉은 쇳가루가 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에 대한 종교적인 행위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구석기인들이 이제 삶과 죽음에 대한 초보적인 종교관념을 갖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구석기인들은 모두 수렵과 채집, 어로 위주로 생활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초기단계부터 상당한 규모의 집단을 형성해 지도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남녀의 분업이 행해졌다. 후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혈연혼인이 사라지고 족외혼(族外婚) 즉 한 씨족의 형제들이 다른 씨족의 자매들과 혼인하는 상호 군혼(群)婚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동일 씨족 내에서의 통혼은 금지되었다. 또한 후기 구석기 시대 말기가 되면 극히 초보적인 농경의 흔적이 확인되어 자신들의 손으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후 신석기시대의 식량생산기술이 여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과도기를 중석기시대라 하는데, 시베리아, 몽골리아, 중국의 동북부 등 북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에서 발견된 세석기(細石器)를 위주로 한 문화가 그것이다. 중국에서도 1955-56년 섬서성에서 발견된 사원문화(沙苑文化)와 1965년에 하남성에서 발견된 영정문화(靈井文化)가 이에 속한다고 추정된다. 시기적으로는 약 1년만전의 시대이다. 그런데 원래 중석기문화는 유목민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또 이들 문화와 이후 신석기 농경문화와의 관련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전후의 연관성 및 생활상태나 수준에 대해 자세히 확인할 수 없다.
1.2. 신석기 농경문화의 다양성과 독자성
1.2.1. 신석기문화 계통의 인식 변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석기의 제조기술이 타제에서 마제로 변한 것과 토기의 등장을 들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구분점은 식량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함으로써 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인류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여 불과 1만년이 되는 동안 현대의 최첨단의 현대문명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신석기문화는 앙소(仰韶)문화인데, 1920년대 하남성 낙양 서쪽 신안현(新安縣) 민지현에서 발견되어 알려졌다. 이를 발견한 스웨덴의 지질학자 엔더슨(Andersson)은 여기서 출토된 채색(彩色)토기를 근거로 하여 중국문명의 서아시아에서 전래되었다는 서방기원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중국인 배문중(裴文中)이 산동성 역성현(歷城縣) 용산진(龍山鎭) 성자애(城子崖) 유적에서 흑도가 중심이 된 용산(龍山)문화를 발견하여,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는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황하문명의 대표로 여겨졌다. 이후 지금까지 중국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의 제기로부터 시작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을 계기로 수차례의 수정이 가해져 현재 중국문명의 다원적 발전과 독자성이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이란 1930년대 부사년(傅斯年)이 주장하였던 견해로서,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를 황하의 동·서에서 동시에 병존·대립하던 문화유형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화하(華夏)족은 서쪽 섬서성을 기반으로 하여 앙소문화를 바탕으로 주를 건설하였고, 동이(東夷)족은 동쪽 산동성을 기반으로 하여 용산문화를 바탕으로 은(상)을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앙소문화가 B.C. 2000년경의 것이고 용산문화가 B.C. 1500년경의 것이라는 연대를 근거로 하여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상과 주의 민족의 기원을 달리 봄으로써 토기유형의 차이와 문화의 주인공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당시 대내외에 커다란 반향과 긍정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이후의 고고학 연구 성과에 의해 두가지 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되었다. 첫째는 앙소문화는 이후 B.C. 5000-3000년 경의 문화라는 것이 확인되지만, 용산문화는 아무리 해도 B.C. 25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두 문화가 대립·병존하였다는 견해는 무리였다. 더욱이 1974년에 발표된 대문구(大汶口)문화(B.C. 4500-2300)가 산동용산문화에 선행하는 문화유형이라는 것이 확인 된 후에는, 오히려 앙소문화와 대립했던 것은 대문구문화라는 것이 확인되어, 이하동서설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 두 문화의 관계는 이후 하남성 섬현(陝縣) 묘저구(廟底溝) 2기 문화에서 확인된 대로 앙소문화에서 용산문화로 계층적으로 발전되었다. 결국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의 계층적 발전설의 받아들여졌다. 즉 황하 중유역이 초기 국가를 성립시킨 지역으로서, 앙소문화에 속하는 반파(半坡)문화가 산동지역의 대문구문화와 대립·병존하다가 묘저구 2기 문화 단계에서 두 문화가 합류되어 하남용산문화가 성립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이후 상·주의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견해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이 황하유역만을 중심으로 한 황하문명설도 곧 양자강 유역에서 황하유역의 앙소문화나 용산문화에 뒤떨어지지 않는 다양한 문화가 발표됨으로써 수정되어야 했다. 절강성 여요현(餘姚縣)에서 발견된 하모도(河姆渡)문화는 시기가 앙소문화보다도 앞서며, 수도(水稻)를 재배하고 대형 목조건축물을 축조하는 등 앙소문화보다 수준이 높은 것이 현재 확인되었다. 이후 B.C. 4500-3000년에 이르는 수도작(水稻作)을 위주로 한 다양한 양자강 유역의 문화가 잇달아 발견되었다. 양자강 하유역 강소성을 중심으로 한 청련강(靑蓮崗)문화,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 양저(良渚)문화(B.C. 3000-1000)와 마가병(馬家浜)문화 (하모도문화와 비슷한 시기), 양자강 중유역 호북성 중심의 굴가령(屈家嶺)문화(B.C. 3300-2000), 양자강 상류 사천성을 중심으로 한 대계(大溪)문화(B.C. 4400- 3300)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중국문명의 형성을 반드시 황화유역으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게 되었기 때문에, '황하문명'이라는 용어보다는 양자강과 황하를 중심으로 한 '하강(河江)문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만 황하유역과는 달리 양자강 유역의 문화들을 그 계통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형편이다.
여기에 최근의 고고학 발굴에 따라 중국의 거의 각지에서 앙소문화나 하모도문화보다 선행하는 다양한 신석기 문화가 발견됨에 따라, 중국 전역에서 거의 동시에 신석기문화로 진입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동북지역과 북방초원지역(내몽골)에서는 B.C. 6000년을 상회하는 흥륭와(興隆窪)문화가 발견되었고, 이후 5000-4000 사이에 신락(新樂)문화와 소주산(小珠山)문화가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B.C. 3000년경에는 홍산(紅山)문화가 발전하여, 이후 소하연(小河沿)문화-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의 계기적인 발전이 확인되었다. 또한 황하 상유역에도 B.C. 7800-7300까지 소급되는 대지만(大(地灣) Ⅰ기문화가 존재하였고, 이후 앙소문화와의 영향하에 B.C. 3500년경부터 마가요(馬家窯)문화가, 용산문화의 영향하에 제가(齊家)문화가 발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제가문화는 이후 주(周)왕조에 선행하는 문화로서 최근 주목받고 있다. 한편 양자강 남쪽인 화남지역에서도 복건성 민후현의 담석산(曇石山)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는 앙소문화의 것과 매우 흡사하며, B.C. 5600년까지 올라가는 광동성 남해현(南海縣) 서초산(西樵山)유적에서도 도편(陶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 역시 여타지역에 비해 늦은 것은 아니며, 이후 인문도(印文陶)문화라는 독자유형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중원지역에서도 앙소문화보다 앞서 B.C. 6000년을 상회하는 자산(磁山)문화나 배리강(裴李崗)문화 등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결국 ① 동북·내몽고지역, ② 황하 상유역(甘靑지역), ③ 황하 중유역(중원지역), ④ 황하 하유역, ⑤ 양자강 유역, ⑥ 화남지역 등에서 모두 비슷한 시기에 신석기시대로 진입하였고 이후 이들이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상이라는 고대국가를 탄생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은 하남용산문화 계통에서 나왔다고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문구문화에서 발전한 산동용산문화, 내몽고의 홍산문화, 하모도문화와 마가병문화에서 발전한 양저문화 등 역시 크게 기여하였다. 따라서 '중국문명'이라는 용어가 보다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고, 중국 신석기문화의 다원성이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신석기문화의의 초입연대는 현재 B.C. 9500년까지 소급되고 있다. 이는 서아시아에서의 신석기문화와 거의 비슷하며 따라서 신석기문화의 서방전래설 역시 설득력이 없게 되었고, 중국 신석기문화의 독자성과 자생성은 이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중국 한자의 기원도 기존 갑골문에서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약 3000년경에 이미 한자의 원형이라고 생각되는 문양들이 발견되고 있다.
1.2.2. 신석기문화의 전통과 특징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가축의 사육에 의한 생산기술이 발달하여 각 유적지에서는 돌과 뼈, 나무, 조개껍질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농기구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재배작물은 자연환경의 차이에 따라 화북과 강남의 신석기문화가 차이를 보이는데, 화북지역에서는 조와 피, 수수 등을, 강남지역에서는 벼 등이 확인되며, 가축의 종류는 말을 제외하고 개, 돼지, 소, 양 등이 있었다. 농업 발달과 함께 수공업도 발달하여 각종의 생산도구만이 아니라 저장용, 취사용, 제사용의 갖가지 형태의 토기가 제작되었으며, 장식용의 정교한 옥기와 상아제품이 생산되었다. 또한 의류로서는 마와 견직물의 생산이 확인된다.
신석기인들은 정주취락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는데, 가장 잘 알려진 취락지는 앙소문화에 속하는 섬서성 서안시 근교의 반파(半坡)유적이다. 이 유적지는 1952년 발견되었는데, 초기 앙소문화의 대표적인 원형 취락이다. 약 5만 ㎡의 유적 중 현재 1만 ㎡가 발굴되어 취락의 전체 구조가 분명치는 않다. 다수의 반지하식(竪穴式)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고 취락 전체를 방어용 호(濠)가 둘러싸고 있었다. 직경 200-300m의 원형 취락유적에 2-300개의 주거지가 있어며, 수백 명에서 천명 정도가 취락을 구성했다고 생각된다. 시기는 대략 B.C. 5000년 전으오 채로와 함께 식량용 밀 종자용 조가 출토되었고, 채소를 재배하였으며, 돼지와 개를 사육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동북쪽으로 약 20㎞ 지점에 위치한 강채(姜寨)유적은 일부를 빼고는 취락 전체의 구조가 밝혀져 앙소문화기 취락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B.C. 4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취락의 주위에는 방어용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의 안쪽은 목책을 둘렀다. 주거지는 중앙광장을 중심으로하여 5개 무리를 지어 형성되었다. 각 무리는 대형주거지와 중형주거지가 하나씩 발견되었고 소형주거지가 약 20호(戶) 정도 발견되어 전체적으로 100호 정도 된다. 300-400명 정도가 모여 살았던 이 유적의 신석기인들은 원형과 방형의 반지하식 가옥에서 거주하였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별개의 집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부장품을 보면 청소년과 유아를 제외하면 거의 차이가 없어 아직은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취락의 운영은 씨족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씨족의 장로들에 의해 운영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묘에 부장된 부장품에 의해 확인된다. 이는 빈부의 차이가 확대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와 아울러 남녀의 분업과 차별, 단혼가정의 독립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농경에서의 잉여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농기구의 발전상과 다양한 품종의 재배 등을 고려하면 신석기 후기에는 향상된 농업생산의 기반 위에서 사회내부의 계층화, 인구의 증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 등을 보이면서, 이후 청동기시대에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를 출현시킬 대부분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3. 중국 신화의 세계와 하왕조의 실재
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문명발달 이전의 단계를 문화창조의 영웅을 중심으로 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간직해왔다. 청대의 고증학과 근대 역사학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고전승에 대한 일대 비판이 일어나 상고사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되어 그 허구성이 지적된 바 있지만, 최근까지의 고고학 성과와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의 발견 등으로 인해 역사 초기단계의 상황을 모색하는 연구도 진행되었다.
중국에서 최초의 국가형성과 출현을 암시하는 고전승의 주인공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이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여러 계통이 있어 삼황과 오제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있지만 『사기』의 기술에 따라 대체로 신농씨(神農氏), 복희씨(伏羲氏), 여와씨(女 氏)를 삼황으로, 황제(黃帝), 전욱( 頊), 제곡(帝 ), 요(堯), 순(舜)을 오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복희와 여와는 뱀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인류에게 문자와 불 및 혼인제도를 가르쳐준 주인공이다. 신농은 사람의 몸뚱이에 소의 얼굴이라고 하며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어 농업과 관련된 태양신으로 추앙된다. 황제는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군주이자 여러 문물을 창안한 창시자로서 숭배되고 있고, 전욱과 제곡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에 비해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앙받는 것은 요와 순이다.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태평시대를 열었다는 요·순시대는 치자의 능력이 개인적인 능력보다 도덕적인 덕목을 중시했고, 따라서 지배자는 문화와 도덕의 체현자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또한 후대에 가장 이상적인 왕위계승의 형태인 선양(禪讓)의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고전승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 불의 사용, 농경의 발명, 제위의 계승방식 등은 대략 신석기시대 혹은 그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일어났음직한 인류문물의 발전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오제의 전설에 뒤이어 나타난 우(禹)의 치수전설과 하왕조의 건국에 대한 전설은 중국 최초의 국가출현을 시사하고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하는 우에서 걸(桀)에 이르기까지 17왕 472여년간(B.C. 1650경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후술하겠지만 하의 뒤를 이었다는 상에 대해서는 이미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고, 근년에는 전설상의 시대라고 추정했던 하왕조의 실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하남용산문화 중·후기에서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기에 이르는 기시가 하문화와 관련된 시기라고 추정되는데, 현재 이 시기의 성벽유적과 왕궁유적에 관한 출토 및 고찰에 의하면 크게 네 의견에 제기되어 있다. 첫째는 거대한 궁전터와 초기 청동문화가 발견된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문화에서 발견된 이리두문화(B.C. 1900-1600) 2기, 둘째는 하남성 왕성강(王城崗)유적인데, B.C. 2000년을 상회하는 2개의 고성(古城)이 발견되었다. 셋째는 하남용산문화에 속하는 낙양시의 왕만(王灣)유형 3기(B.C. 2300년경) 이고, 넷째는 하남이 아닌 산서의 도사(陶寺)유형문화(B.C. 2400-1600)와 동하풍(東下馮)유적이 그 대상이다. 이중 유적과 전설로 말하면 이리두문화와 왕성강유적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상대보다 앞서는 국가의 유적이라고 볼 수 있는 유적은 있지만 그것이 하왕조라는 결정적인 단서(문자, 왕궁, 왕묘)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지속적인 발굴성과에 힘입어 상왕조과는 문화유형을 달리하는 선행문화유형에서 꿈의 하왕조가 조만간 실재했던 왕조가 될 가능성은 크다. |
첫댓글 물건님의 반론을 위 584, 585 번에 올려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