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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나 강하다 엊그제 첫눈이 뿌리더니 오늘은 다시 맑은 가을날이다. 기온은 뚝 떨어져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가 바라보면 마을 뒷산의 단풍이 한뼘씩 산아래로 내 려와 있곤 했다. 하지만 한낮의 햇볕은 그런대로 따스해서 창가에 앉아있으면 등이 시리지 않는 그런 계절이었다. 이번 가을 월급을 탄 날 큰 마음을 먹고 산 큼직한 검정 스웨터를 회색빛 체크무늬 스커트 위에 걸쳐 입고 정인은 집을 나섰다. 코 끝에 스치는 짭짤한 냄새. 어디선가 볏짚을 태우는가 보았다. 지난 초여름 긴 단발이었던 정인의 머리는 퍼머넌트를 해서 가슴께 까지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 탓일까 그녀는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훨씬 성숙해보였다. 환절기 탓인지 까칠해진 피부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것이 눈가의 음영을 더욱 짙게 만들어서 가끔 그 녀가 고개를 들때면 검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무렵 누군가가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처녀 는 참 깊은 눈동자를 가졌구나 하고. 집 골목길을 나서는 길에 현준의 집앞을 지나면서 정인은 얼핏 고개를 든다. 낯선 차가, 서울의 번호판을 단 차가 보였던 것이다. 현준의 은색차는 아니었고 새로 나온 자동차였지만 정인의 눈에는 금방 겁이 더럭 실린다. 현준을 보지 못한 지 벌써 석 달째, 어젯밤 잠들면서 정인은 무심코 아마도 백일 쯤 되겠구 나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는데 막상 이렇게 기와집 앞에 서 있는 서울 번호판의 자동차를 보자 그녀의 얼굴은 금방 해쓱해지는 것이다. 울면서 그 집을 나오려던 정인을 붙든 것은 뜻밖에도 밤중에 찾아온 그 여자 였다. 여자는 처음에는 정인의 존재에 대해서 매우 놀란 표정이더니 곧 묻지 않아도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그래서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은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잠깐 앉으시죠, 뭐 저희집 은 아니지만... 전 유혜림이라고 해요... 현준이하고 대학동기고... 우린 그저 친 구일 뿐인데... 여자는 정인에게 어떻게든 자기 쪽에서 별 악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 어하는 듯 천천히 그리고 말의 뉘앙스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말을 꺼냈다. 맥주 캠 몇 개를 떨어뜨리고 엉엉울던 정인에게 휴지를 내밀어주며 혜림은 웃었다. 그녀는 정인이 행여라도 이 상황에 대해 오해라도 품을까 조심하면서 정인에게 캔맥주를 하나 내밀었다. 정인은 그것을 받아들면서 잠깐 생각했다. '만일 여기서 내가 뛰쳐나가 버린다면 저 여자가 어색해 할거야.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더구나 현준씨는 나한테 저렇게 미안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 그건 너무 유치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되겠지...' 만일 정인이 이런 경우 조금만 더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달라졌으리라. 그러나 정인은 오로지 그 두사람이 불편할까봐-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정인의 생각이었다.-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새벽 이 왔을 때 두사람은 제각이 곯아떨어졌고 정인 혼자 그 쓰레기통 같은 거실을 치웠다. 그러자 이른 여름 아침이 밝아왔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스윽스윽 비질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스윽스윽 비질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 려왔다. 그 소리가 뇌수를 할퀴는 것 처럼 머리가 아팠지만 정인은 유혜림이 잠 든 소파 한켠에 놓인 자신의 백을 집어 들었다. 유혜림은 피곤한 듯 엷은 분홍 의 립스틱 빛깔이 남아있는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정인이 보기에 도 고운 얼굴이었다. 현준과 동갑이라고 했으니 나이가 스물 여덟 쯤 되었을까. 그 밤 이야기 속에서 정인은 현준이 얼마나 그녀를 존중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물면 라이터를 켜주었고 그녀가 오징어를 집으려고 하면 마요네즈가 담긴 작은 종지를 그녀 앞으로 조금만 밀어주었다. -내가 예전에 현준씨를 혼자 좋아했거든요. 그것은 유혜림의 말이었지만 정인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현준 자신의 말대 로 그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다는 여자들 중에 그녀도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 이다. 현준의 태도를 보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건 그가 정인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태도였다. 그녀는 바람이 아니라 그 바람속에서도 혼자 날아온 씨앗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날아와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지금 껏 커가는 나무 같았다. 그런데 그건 정인이 현준에게 되고 싶었던 의미였던 것 이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홀짝홀짝거리면서 그래서 정인은 조금씩 깊이 어떤 느낌에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비참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혼요? 그런거 왜해요? 난 완전주의자거든요. 전부가 아니면 전무, 올 오아 났씽 유 노우 댓? 일상용어에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그녀는 멋있어 보였다. 무 엇보다 자신에 넘쳤던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나 자신있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인에 그때는 몰랐었다. 정인은 백을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이른 새벽, 사방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멀 리서 청소부가 비질을 하는 소리 그리고 간간히 달려가는 빠른 자동차의 소리... 백을 헐겁게 들고 정인은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정인이 타야 할 터미널 행 버스가 휑하니 정류장을 스쳐 지나가버렸다. 그 서슬에 길가에 심어진 어린 은행나무들이 받침대를 곁에 두고도 흔들거렸다. 머릿속에 솜뭉치라도 들어찬 것처럼 멍한 기분이었다. '무엇 하러 왔을까... 대체 무엇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하지만 생각은 솜방망이처럼 무뎠고 정인은 눈을 꿈뻑였다. 현준은 그녀를 사 랑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자 솜방망이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송곳 으로 머리를 찌르는 것처럼 온몸이 바들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그 생각만이 그 녀를 예민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정인은 현준의 집앞을 지나 빠르게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정인은 보 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동차 안을 확인했고 앞 유리창에 현준의 은빛 라이터가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새 차를 바꾸었구나.' 정인의 심장은 이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은 그를 만날 수 있다 는 희망의 독이 정인의 몸속을 빠르게 펴져나갔다. 정인에게 내내 전화 한 번 없는 현준이었지만, 한 번 어렵게 통화를 했을 때 아주 어색한 목소리로 내가 나중에 연락을 할게 하고 말하던 그를, 그것이 사실은 너와 만날 생각이 없다, 라는 말인 줄도 모르고 혹시나 그가 전화를 할까봐 점심을 먹으러 나가지도 못했던 그녀에게 끝내 전화하지 않았던 그를, 이제 돌아와 정인의 집을 지척에 두고 저기에 저렇게 자동차를 둔채로 제 집에 들어가 박힌 그를 ... 두고 정인 은 또다시 희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혹시나 내게 일어났던 나쁜 모든 일들은 그저 꿈이 아니었을까 하고. 정인은 빠르게 걸었다. 정인과 첫정사를 치르고 현준이 우체국 네길거리에 그녀를 내려주고 떠나던 날, 멍청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술먹으러 가자고 시비 조로 말을 걸었던 집배원 최씨가 따르릉 자전거를 울리며 정인에게 인사를 해댔다. 최씨는 그날 밤 일을 전혀 기억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정인도 이제껏 아무 내색 없이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니 저 남자처럼, 참담했던 정인의 그날 밤 이 아니라 저 남자의 그날 밤 처럼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이기를 정인은 헛되이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이 있다는 것은 이런 때 참으로 복된 일이었 다. 월요일 아침이어서였을까, 여느 때보다 소포가 많았고 등기가 많아서 정인은 자신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다 되어갈 무 렵 뜻밖의 손님이 정인의 앞에 나타났다. 명수의 아버지 정씨였다. 약간 작은 키에 강마른 체격, 그는 여느 때 처럼 조용조용하게 들어와 정인에 게 미소를 보냈다. 만일 명수에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 있다면 그건 다분히 아버지 쪽의 핏줄을 타고난 것이리라. "어머 아저씨 웬일이세요? 뭘 해드릴까요?" 읍내 우체국에 앉아 있었지만 그와 마주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예전에 명수 가 의대에 다니던 시절 혹시 돈을 부칠 일이 있어도 정씨댁이 다녀가는 일이 예사였기 때문이다. 정씨는 웃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몹시 겸연쩍은 얼굴이었다. 정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씨를 바라본다. 열 살 때 였던가, 어머니가 저수지에 빠져서 자살을 기도하던 날, 그날 매맞는 어머니를 구해주던 사람, 그의 말이라 면 마을의 누구도 심지어 술만 먹으면 개대엽이라고 사람들이 비웃던 그녀의 아버지 오대엽까지도 함부로 말대구를 하지 못했던 사람. ...어린 시절 명수와 함께 정인이를 극장에 데려가주었던 사람 그리고 비가 내리던 그 읍내에서 그는 정인과 명수에게 짜장면을 사주었었다. 정인으로서는 처음 먹어 보는 짜장면이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는 것인지, 그 읍내에서 이제 정인은 주름이 가득한 정씨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잘 지냈니?" 정씨는 계속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인은 문득 명수와 관계된 일이구나 짐작 한다. 생각 탓이었을까, 정인을 향해 애매하게 웃고 있었지만 정씨의 얼굴은 힘겨워보였다. 정인은 얼른 말을 받았다. "아저씨 잠깐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 하실래요?" "...그래? 아 그래... 그게 좋겠구나." 옆 직원에게 조금 이르게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서 정인은 정씨와 함께 길을 걸었다. 햇볕이 따사로운 한낮이었다. 가을날 특유의 긴 유리같이 투명하고 꼿꼿한 햇살이 멍석에 깔아 놓은 붉은 고추 위에서 머물고 있다. 정인은 문득 창살 곁에 서 있을 명수를 생각했다. 감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녀 자신은 본적이 없지만, 명수가 이 햇살을 우러르며 서있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투명하고 뽀족한 햇살이 투명한 명수의 얼굴을, 정식 재판에서 삼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는 명수의 얼굴을 비추는 광경... 명수는 아마도 어떤 표정 을 하고 있을까... 가는 바람결에도 그 가는 바람의 결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명수 를 정인은 연민의 마음 없이 떠올리지 못했다. 정인은 살며시 정씨의 팔짱을 끼었다. 생각에 잠겨 걷던 정씨가 겸연쩍은 얼 굴로 정인을 바라본다. 아무리 어린 아이부터 딸처럼 보아온 아이였지만 다 큰 처녀가... 하는 얼굴, 막상 그도 당황한다. 정인은 더욱 힘주어 그의 팔짱을 끼며 생굿 웃었다. "아저씨, 급한 일 때문에 오신거 아니라면 제가 점심 사드리고 싶어요." "점심을?" "...저도 어차피 먹어야 하거든요. 아저씨 곰탕 드실래요? 요기 근처에 잘 하는 집이 생겼는데..." "...그러자." 두사람은 사이좋은 부녀지간처럼 팔짱을 끼고 '한주옥'이라는 간판이 붙은 기 와집으로 들어섰다. 햇볕이 따뜻하다고는 해도 싸늘한 공기 때문일까, 곰탕의 냄새만 맡아소 벌써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김치의 새콤하고 매콤한 맛과 곰 탕의 냄새. 두사람은 말없이 곰탕을 먹었다. 정씨는 뚝배기에 얼굴을 박고 국물을 들이 켰다. 나중에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검은 그의 얼굴에서 무수히 많이 땀방울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느 중년의 남성처럼 정씨는 호주머니에서 낡은 손수 건을 꺼내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 천천히 닦았다. 너무나 잘난 아들이었기에, 너무 잘나서 가끔 무슨 탈은 없을까, 이렇게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병 한 번 앓지 않고, 말썽 한 번 피우지 않 고, 말썽을 피우다가 부러진 팔 다리 하나 없이 키운 아들이었기 때문에, 하늘이 이런 복을 내게도 주시는구나, 온 대한민국 국민이 그토록 선망하는 대학에 합 격했을 때 그렇게 감사했을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절망은 깊었다. 감옥에 간 다는 것은 이제 이 사회가 약속한 모든 기득권을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식 덕에 무슨 기득권을 누려 보고 싶은 생각을 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무슨 기득권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물려줄 재산 하나 없는 데 이제 저 혼자 저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정인이 니한테 부탁이 있어서 왔다." 손수건으로 한참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은 후, 정씨는 말을 꺼냈다. "명수 녀석이 이달초에 전주로 갔다... 너무 멀어서 그렇고, 지도 오지 말라고 해서 한달에 한 번 정도만 가 볼려고 했는데... 내가 처음 편지를 썼구나... 대체 얼마 만에 편지를 써 보는지..." 정씨는 정인 앞으로 흰 봉투를 내밀었다. 평화동이라는 글씨가 얼핏 정인의 눈에 띄었다. 정인은 그 편지를 받아 들었다. 머뭇거리던 정씨가 맨손으로 턱을 쓰윽쓰윽 닦았다. 명수 오빠가 잡혀가던 날 사실은 저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지요, 마치 이렇 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제게 인사를 건넸어요, 정인 난 갈게, 라고요.... 하지만 정인은 입을 열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아저씨. 제가 부쳐드릴게요. 그리고... 앞으로 우체국 오시기 좀 뭐하시면 거기 가게 박군 편에 집으로 편지를 보내세요. 그러면 제가 알아서 부쳐드릴게요." "그래 정말 고맙구나..." 정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십 년 전인가 끊었던 담배였다. 그런 데 명수가 잡혀간 그날부터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내뿜고 나서 그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저기 가족들 외에는 편지가 안된다고 허든데... 그 편지 속에... 니가 여동생인 것처럼 허구서는... 그러니까 굳이 정리를 따지자면 니가 여동생뻘인 건 온 동네가 다 아는 거니께... 그저 몇 마디... 딴 생각 말구... 좋은 날까지 그 저 딴 생각 말구 거기서 허라는 데루다 하믄서 건강을 잘 돌보라구... 니가 그래 주면... 명수 지두 힘이 좀 날것두 같구..." 정씨는 말을 이어가기가 힘든 것 같았다. 정인이가 눈치가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 -물론 그것은 정씨댁의 말이 었다. 아들을 가진 어머니들은 대개 여자가 제 아들에게 먼저 추파를 던지는 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니, 신경을 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지들이 굳이 그렇 게 좋다면 하는 수 없겠지만 이왕이면 이쪽 집안에서 정말로 아무도 없으니 그 쪽 집안이라도 명수를 좀 밀어줄 그런 여자를 만나면 더 좋지 않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는 정인이마저 명수 를 멸시하게 될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전과자인 아들이 취직도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하고 늙는다면.... 설마, 하는 생각에 상상을 멈추었지만 그래도 그는 참 담한 심정이었다. 두사람은 곰탕집을 나왔다. 헤어지는 길에 정씨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정인을 정인을 향해 다시 말했다. "아까 내가 부탁한 것이 마음에 부담스럽지 않겠니?" 그는 참으로 조용하고 섬세하고 그리고 순박하고 겁많은 사람이었다. 정인이 혹시라도 그 부탁 때문에 부담스러워할까봐 그게 걱정이었던 것이다. 정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밝게 웃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인이 넌 언제나 내 딸 같았다... 알지?" 그리고 그는 구부정하게 길을 건너갔다. 그날 물건을 배달할 때 필요한 오토 바이를 새로 산다고, 수원으로 나간다고 했던 것이다. 그 햇살, 그 가을날 짙 푸른 하늘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던 구부정한 그의 쥐색 점퍼... 정인은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 그날 수원에서 오토바이를 인도받아 저녁에 읍내에 당도에 점박이 김씨와 대 포를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그는 죽었던 것이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논바 닥으로 거꾸로 처박힌 오토바이는 그의 목을 부러뜨렸고, 경찰에 따르면 그는 거기서 그렇게 여섯 시간쯤 버티다가 죽은 것 같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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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너무나 잘보았습니다ㅡ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