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감독직을 내놓고 모교인 아주대 감독으로 돌아간 하석주 감독. 전남을 떠나기까지 오랫동안 속앓이를 하며 고민했던 시간들을 끄집어 내는 순간, 그의 갈등과 번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사진=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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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사꾼’ 하석주 감독, 씨만 뿌려 놓고 물러 간다’ ‘하석주의 821일, 비참했고 또 아름다웠다’ ‘하석주 감독과 전남의 아름다운 이별’…. 하석주 전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 2년 5개월 만에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것과 관련해 언론에서 내놓은 기사 제목들이다.
성적 부진으로 감독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는 현실에서 하석주 감독은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노상래 수석코치를 후임 감독에 앉힌 뒤 구단에서 마련해준 이•취임식까지 참석하며 말 그대로 전남과 아름다운 이별을 경험했다.
구단에서 2년 재계약을 제안했지만 하 감독은 다리가 불편한 노모와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인 아내, 그리고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 참으로 어렵게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을 발표했다. 축구계에서는 하 감독이 전남에서 떠나는 이유를 전해 듣고도 그걸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프로 감독직을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가족 때문에 그만두겠다고 하는 하 감독의 입장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전남 광양을 떠나 현재 모교인 아주대 감독으로 복귀한 하석주 감독을 만나 그동안 그가 밝히 못했던 속사정에 대해 들어봤다. 하 감독은 지금도 자신이 전남을 떠나온 데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 것은 물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1. 프로 감독을 내놓고 대학 감독으로 돌아가기
하석주 감독은 얼마 전 친하게 지내는 이상윤 해설위원으로부터 자정을 넘긴 시각에 전화를 받게 된다. 잠을 자다 휴대폰 벨소리에 깜짝 놀라 깼던 하 감독.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더욱이 이상윤 위원이란 걸 알고 나선, “야 이 XX야, 지금 몇 신데 전활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그러자 이 위원은 “이거 방송이야!”라며 웃으며 대답했고, 하 감독은 “미친 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는 것. 그런데 그건 진짜 생방송이었다. 한 인터넷 축구 방송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이 위원이 방송 중에 갑자기 하 감독과 전화 연결을 했고, 미처 얘기를 듣지 못했던 하 감독은 방송을 통해 이 위원에게 욕을 해댄 상황이었다. 나중에서야 실제 방송이란 걸 알게 된 하 감독은 이 위원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다음날 상윤이가 그 시간에 또 전활했더라고. 받았냐고? 안 받았지. 내 입에서 욕 밖에 안 나갈 것 같아서.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게 방송해도 경고 안 먹나?”
참으로 오랜만에 하석주 감독과 ‘취중토크’ 자리에서 만났다. 프로 감독 자리를 놓고 대학 감독으로 돌아온 그의 생활이 궁금했고, 이 정도면 굳이 ‘각’ 세우면서 하는 인터뷰보다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눠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하 감독은 최근 겪었던 ‘생방송 욕설’ 사건을 고백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옆에 이상윤 위원이 있었더라면 제대로 된 ‘취중토크’가 될 뻔했다. 하 감독과의 인터뷰를 정리해 본다
지난 11월 29일, 인천유나이티드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전남 드래곤즈와는 이별을 고했다. 아직도 마음속에는 전남이란 팀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
“학교로 돌아오니까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정말 힘들었다. 그만 두기로 결정한 것보다 그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가족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 같고, 그 얘기를 감추자니, 그만두려는 명분이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가족들 얘길 꺼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감독직에서 물러날 결심은 언제부터 한 건가.
“지난 5월에 결정했다. 어머니가 강원도 양양에서 혼자 지내시는데, 다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하다. 이전에 어머님을 모셨던 큰형님 내외가 교통사고와 암으로 모두 돌아가셨다. 서울로 모시고 싶지만, 어머니는 절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으셨다. 광양에서 어머님이 계시는 양양까지 가려면 차로 5시간 30분이 걸린다.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것도 버거울 정도였다. 아내도 아파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지만,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다. 아들만 셋인데, 그중에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는 막내가 축구를 시작했고, 쫓아다니면서 챙겨줘야 한다. 아픈 아내가 아이들을 챙기며 멀리 계시는 어머니까지 돌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듯 가족들이 힘들게 생활하는 걸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아들이, 남편이, 아빠가 필요한 가족들에게 내가 함께 있어줘야 했다. 그래서 광양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 감독은 되기도 어렵지만, 그만두는 것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석주 감독은 프로에서 대학으로 가는 거꾸로 행보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사진=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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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억, 10억 원을 더 준다고 해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구단에 미리 얘기를 했었나. 시즌 마치고 그만두는 것과 관련해서.
“9월부터 사장님이 내년 준비 빨리 하자고 재촉하셨다. 그러면서 2년 재계약을 제안하셨고, 연봉도 지금 받고 있는 2억 5000만 원에서 1억 원을 더 인상해주겠다고 하시더라. 그렇게까지 배려하고 애써주시는데, 그만두겠다고 말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한테는 연봉 5억, 10억이 전혀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장님께 어렵게 사퇴 의사를 밝혔더니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아무리 집안 사정을 설명해드려도 쉽게 납득하지 못하셨다. 나 같아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웃음). 연봉을 1억이나 더 올리면서 2년 재계약하자고 나섰는데, 그걸 뿌리치고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보이겠나.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구단을 설득하고 있었다.”
코치나 선수들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김병지, 스테보, 현영민 등은 내가 데려온 선수들이다. 날 믿고 전남에 왔더니 감독이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내가 그만두면 자기들도 축구 그만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코치들의 반응은 더 했다. 행복한 고민이었지만, 그만두는 게 이토록 어려운 건지 처음 느꼈다.”
가족들이 광양으로 이사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둘째가 내년이면 고3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 학교만 4번이나 옮겨 다녔다. 만약 광양에 왔다가 감독직에서 잘리면 또 이사해야 하는 처지다. 아빠의 잦은 이동으로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은 분당에서 살고, 내가 옮겨 다녔다. 광양으로 오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012년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팀을 맡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슈퍼스타도 없고, 베테랑 선수도 없었다. 구단 사정이 열악해지면서 선수단 지원이 대폭 줄어들었을 때 팀을 떠안으면서 말로 표현 못할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전남으로부터 처음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당시 아주대와 3년 계약 후 1년 8개월을 보냈고, 2011년 모교 부임하자마자 11년 만에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시키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프로 감독이 되는 걸 꿈꾸고 있었고, 정말 기다렸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대학 측에서 내 입장을 이해해줬고, 부푼 마음을 안고 광양으로 향한 것이다. 광양에서 척박한 현실을 인지하기까지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선수도 데려 올 수 없었고, 나이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서든 성적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하석주 유치원’이라고 불렸을까. 무엇보다 내가 팀을 맡을 때부터 시작된 승강제로 인해 늘 강등과 성적 부담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좋아했던 골프도 끊고, 사람들과의 연락도 단절한 채 광양에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했다. 성적이 안 좋을 때는 외출도 자제했다. 나랑 같이 대표팀이나 일본에서 함께 뛰었던 황선홍, 최용수는 우승을 놓고 고민했지만, 난 강등에서 탈출하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자존심도 상했고, 열도 받고, 정말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3. ‘정치’를 등에 업고 감독 되는 건 싫었다!
감독은 되기도 힘들지만, 그걸 지켜나가기도 어려운 자리인 것 같다.
“난 순진해서 열심히만 하면 (프로)감독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이 바닥은 실력 외에 ‘끈’이 중요하다. 즉 정치적인 힘이 있어야 감독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난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원칙을 세웠었다. 정치를 타고 감독은 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줄곧 코치만 하다가 감독이 되지 못하고 아주대 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전남에서의 감독 제의는 정치가 배제된 순수한 제안이었다. 그들의 부름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팀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불러주는 바람에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 기회를 준 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체중이 8kg이나 빠질 만큼 팀에 몰두했다. 그러다 조금씩 성적을 내고, 올시즌에는 베테랑 선수들도 데려오면서 울산 현대와 상위 스플릿 경쟁을 벌일 정도의 전력을 만들었다. 한 가지 더! 팀 전력 이탈에도 불구하고 이종호, 안용우, 김영욱 등 3명의 전남 선수가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발탁,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만약 팀 성적이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고,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면, 팀을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2년 5개월 동안 어느 정도 팀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상래 선생(현 전남 감독)에게 팀을 맡기고, 미련 없이 나올 수 있었다.”
축구인들도 하석주 감독의 선택을 지지하기 보다는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문자와 전화를 통해 안타까움을 표현해주셨다. 그중에서 홍명보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도 힘든 처지인데, 오히려 날 더 걱정하더라. 그러면서 ‘형, 나도 어려운 일을 겪다보니까 가족이 최고의 위안이 된다는 걸 느꼈다. 형이 힘들게 결정한 만큼 뒤돌아보지 말고 가족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고 가길 바란다’라고 얘길 해주더라. 최용수는 내가 전남에 있을 때 선수 좀 달라고 하면 절대 내주지 않았던 나쁜 X였다(웃음). 그러면서 내가 떠난다고 하니까 기자들에게 형님 그만두면 안 된다며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있을 때 좀 잘하지(폭소). (황)선홍이, 최강희 감독님, 모두 마음 아파하셨다. 올시즌 전남과 마지막 경기를 치른 인천유나이티드의 김봉길 감독은 경기 후 꽃다발을 전해주더라. 모두 감사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학 감독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텐데, 언제쯤 다시 프로에 돌아올 생각인가.
“프로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만, 감독으로 다시 가게 된다면 좀 더 나이 먹어서 도전해 보고 싶다. 당분간은 대학에서 어린 선수들 육성에 주력하겠다. 어쩌면 프로 지도자보다 학원 축구를 가르치며 선수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석주 감독은 출퇴근이 가능한 아주대에서 다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은 웃음을 되찾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뷰 인저리 타임>
올스타전에서 생긴 일
![]() 올스타전에서 주심을 맡았던 하석주 감독. 박지성에게 경고를 주려다 박지성의 강한 저항을 받았다.(사진=연합뉴스) |
지난 7월 25일 펼쳐진 2014 K리그 올스타전은 K리그 올스타 팀과 은퇴식을 겸한 박지성 팀의 맞대결로 진행됐다. 이날 주심과 부심은 K리그 감독들이 맡았는데 하석주 감독은 전반전 주심으로 활약했다. 전반전 부심은 이상윤 당시 성남FC 감독대행.
“처음에는 심판을 맡으라고 하기에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무 준비 없이 경기 시작 2시간 전에 와서 간단히 설명 듣고 몸 푼 것 외엔 없었다. 올스타전은 재미있게 해야 팬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하는데, 사전에 시나리오도 짜지 못하고 경기에 들어가는 바람에 조금 긴장도 되고,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선수들이 워낙 치열하게 맞붙으니까 다른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박지성 팀에서 반칙이 나왔다. 휘슬을 불고 옐로우 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뒷주머니 양쪽에 넣어둔 레드와 옐로우 카드 중 어느 주머니에 노란색 카드가 있는지 모르겠더라. 급한 마음에 한 장을 꺼내 들었는데, 하필이면 레드 카드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옆에 있던 이근호가 ‘감독님, 그게 아닌데요?’라며 놀라는 표정을 짓기에 다른 주머니에서 다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옐로우 카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에게 반칙을 줘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가까이 서 있는 박지성에게 카드를 내미니까 선수들이 거칠게 항의를 했다. 은퇴식하는 선수에게 경고가 웬 말이냐며 난리가 아니었다. 나로선 박지성이 은퇴하든 말든 심판을 잘 보는 게 더 중요했다. 흔들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공이 놓일 위치에 스프레이를 뿌리려 하는데, 이번에는 스프레이가 나오지 않더라. 웃음은 나오고, 스프레이는 작동이 안 되고,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 하석주 감독은 판정에 불만을 품은 선수들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며 웃음을 터트린다.(사진=연합뉴스) |
부심으로 나선 이상윤 전 감독대행은 하 감독의 판정을 자꾸 방해했다고 한다.
“상윤이가 무선 마이크에 대고 자꾸 장난을 쳤다. 난 뛰어다니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마이크로 ‘이따 끝나고 술 한 잔 먹자’라고 하질 않나, ‘술집은 어디로 할까’ 등등 딴소리를 했다. 난 또 욕을 해대며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올스타전이니까 가능한 상황이었다.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지만, K리그 감독의 심판 경험은 이후 경기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항의가 많이 줄었으니까. 나 말고 다른 감독들 말이다(웃음).”
하석주 감독의 ‘코치론’
2003년부터 포항 스틸러스에서 코치를 시작했던 하석주 감독. 이후 경남 FC와 전남 드래곤즈 수석코치를 거친 그는 7년 넘게 감독을 ‘모시는’ 코치를 역임했다.
“포항에선 최순호 감독님과, 경남에선 조광래 감독님, 그리고 전남에선 박항서 감독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지금도 자신있는 부분은 내가 감독님을 모시는 동안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코치 임무에 충실했다는 사실이다. 코치는 자신의 욕심을, 야망을 드러내는 순간 끝이다. 물론 모든 코치의 마음 속에는 ‘나도 언젠가는 감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내재돼 있지만, 감독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그걸 꼭꼭 숨기고, 감독님을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감독님과 코치의 경계는 분명하다. 코치가 그 경계를 넘으려면 탈이 난다. 한 마디로 ‘오바’하면 안 된다. 난 7년의 코치 생활 동안 그걸 신념처럼 품고 지냈다.”
김병지의 의리와 은퇴식
하석주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이 얘기를 꼭 기사화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내가 전남을 떠나올 때 (김)병지랑 스테보가 약속한 게 있다. 동계 합숙훈련 때 우리 선수들(아주대)에게 고기 사주러 오겠다고. 감독인 내겐 소고기 사주겠다고 손가락까지 걸었다. 애들이 나이를 먹어 깜빡할 수도 있으니, 기사로 꼭 써 달라. 내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 고기 사주러 와야 한다고(웃음). 그리고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병지가 은퇴식을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은퇴식에 참석해서 직접 축하와 위로를 해주고 싶다. 은퇴식을 기념할 만한 좋은 선물도 해주고 싶고.”
어떤 선물이냐고 묻자, 하 감독은 “돈 안 들어가는 걸로. 뽀뽀가 좋을 것 같다”라며 폭소를 터트린다. 그는 광양에서의 마지막 날, 전남의 베테랑 선수들 몇 명과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김병지에게 얼음에 양주를 따라 ‘원샷’시킨 것을 엄청난 위안으로 삼았다. 김병지의 축구인생에 알코올은 흔적조차 없다는 걸 잘 아는 터라 김병지가 ‘한잔’이라도 마셨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좋아한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술자리를 겸한 인터뷰였지만, 하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웃음과 폭소가 끊이질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그이지만, 그가 걸어가는 길이 추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는 잘 살고 있었다. 대학 선수들과 함께.
![]() 11월 29일 인천과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마친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하석주 감독.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뛴 마지막 경기였다.(사진=전남드래곤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