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1,21ㄴ-26; 13,1-3
그 무렵
21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마당발 봉사자>
요즘 개인과 인권이 중시되면서 말의 사용도 바뀝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많이 쓰던 ‘불구자’니 ‘운전사’니 ‘간호원’ 같은 말을 요즘은 쓰지 않지요.
같은 맥락에서 ‘가용인원’ 같은 말도 논란입니다.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런 면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썼다가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허투루마투루 쓰이는 것을 싫어하고, 여기저기 자기를 내어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좋아하는 일 한 가지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도 모 형제회 평의원들과 평의회를 하는데 공석이 된 평의원을 대신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걱정의 마음이 있었는데 식당 봉사자들이 또 몇 분 못 오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제도 손님이 많아 바빴는데 봉사자가 없어서 연세 드신 봉사자 한 분이 너무 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지금 교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제일 큰 이유는 웬만큼 젊은 분들은 다 직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봉사하시는데, 너무 힘들어 못하시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유지만 그러나 앞에서 얘기한 대로 자기를 내어주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내어주는 분들은 이미 바쁜데도 여기저기 뽑혀 더 바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는 그 반대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준 분입니다.
초기 공동체 모습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사도 4,34-35)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부터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었고,
타루스스로 가서는 바오로 사도를 데리고 와 같이 열심히 선교하여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바르나바를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도 11,24)
먼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순종 잘하는 사람,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서 후뚜루마뚜루 쓰이는 가용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해서는 교회 안에서 이렇게 가용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도 교회 밖에서는 마당발로 불리며 왕성히 활동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필수적이고 성령 충만은 마당발 봉사의 완성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소임이라고 믿는 사람, 더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만이
그 소임이 맡겨졌을 때 거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치지 않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교회 봉사자가 점점 줄어들어서 걱정하는 오늘 저이고, 바르나바와 같이 자기를 내어주는 마당발 봉사자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매이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을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때 물질도 가치를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0-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 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가 다시 사람이 넘치게 할 유일한 길>
현재 수치상이나 느끼는 바로는 교회가 점점 비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 변하지 않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르나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 바르나바의 성품과 그 열매가 잘 드러납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의 두 기둥처럼 함께 다니며 큰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씨를 뿌리는 역할이었다면 바르나바 사도는 키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착하고 신심 깊은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오늘 복음의 이 말씀과 같겠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대전의 명물 ‘성심당’의 임영진 대표가 성 바르나바를 닮은 분 같습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버님인 고 임길순 창업주는 성 바오로를 닮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흥남 철수 때 수많은 사람이 배를 타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직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만 남아 있었습니다.
임길순 씨는 묵주를 들고 “만약 이번에 살게 된다면 그건 하느님이 살려주신 것일 테니, 남은 평생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때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미군이 보았고 선장에게 알렸습니다.
선장은 ‘레너드 라루’로 후에 수도원에 들어가 현재는 시복 추진 중인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선장은 어째서인지 무기와 차량 등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대전에서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을 만들어 팔며 그날 안 팔린 것은 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내기로 합니다.
먹고살 것도 없는 형편에서 아내는 “너희 아버지만 천당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갈 거다!”라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가게를 성당 가까운 곳으로 옮겼고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종교가 싫었지만, 지금은 손주들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아들 임영진 대표가 빵집을 잘 운영하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연령회와 같은 봉사만 하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임영진 대표가 “주면 반드시 받게 된다.”라는 아버지의 신념이 열매를 본 것은 철거반이 왔을 때입니다.
당시 성심당은 위반 건축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철거반장은 왔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임 대표가 말합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철거반장이 어렸을 적에 그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봐요.
그때 저희 아버지가 그분 염부터 입관까지 장례를 치러주는 봉사를 했다는 사실을요.
철거반장이 그런 우리 아버지를 기억해내고는 그냥 돌아간 거죠.”
임 대표는 지금도 매달 3,000만 원어치의 빵을 기부하고, 회사 수익의 15%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직원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2005년에 빵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미 동생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빚더미에 앉아있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임 대표의 아내 김미진 이사는 어차피 불을 끄러 가봐야 너무 늦은 상태기 때문에 그냥 성당에 돌아와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빵을 많이 팔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족회의를 하는데 큰딸 임선은 피식 웃으며 “전, 학교 휴학할래요.”라고 했고, 아들은 “전 어차피 입대하려고 했잖아요. 날짜를 앞당겨볼게요.” 라고 했습니다.
다들 착한 가족입니다.
임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았으니 다들 그런 큰일을 겪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임 대표는 가게를 부동산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만이 많던 직원들은 다 나가버렸고 착한 직원들이 모여 “잿더미 속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고 하며 공장을 1월 추운 날씨 속에서 6일 만에 어느 정도 정상화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로 일궈낸 성심당에서 나오는 빵은 왠지 더 맛있었습니다.
임 대표는 말합니다.
“우리는 화재를 겪으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답이 무엇인지 한 번 봤어요.
답안지를 본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죠.
위기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죠.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똑같은 방황을 되풀이하진 않을 거예요.”
이 회사는 인사고과에 사랑에 대한 평가가 40%입니다.
둘이 싸우다가 서로 화해했다면 진급 대상자가 됩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직원들은 이렇게 선서한다고 합니다.
“하나,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하나, 우리는 사랑의 문화를 이룬다. 하나, 우리는 가치 있는 기업이 된다.”
이들은 포콜라레 정신에 의거하여 수입의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3분의 1은 재투자로, 3분의 1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보다 수천 배나 매장이 많은 커다란 프렌차이즈 빵집들보다 수익이 많이 납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재정의 10%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 가을부터는 소공동체 시스템 변화를 통해 최대한 가난한 이들에게 자동으로 재정이 흘러가게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돈도 사람도 부족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것이 창업주의 정신입니다.
“주어라, 받을 것이다!”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을 둔 채로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정말이지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주말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오십니다.
한두 분이 아니라 70명, 80명입니다.
식사도 하시고 주무시고 가시니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도착하신 지가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할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떠나실 때는 대절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피정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다음에 꼭 오세요!” 하고 인사드립니다.
별것 아닌 노력이지만 형제자매들이 받은 감동이 큰 것 같습니다.
다들 하시는 말씀,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환대받고 배웅까지 받은 적은 없습니다. 촌각의 순간이었지만 작은 천국 체험을 하고 갑니다. 신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저희 훌륭한 형제들이 각자 자리에서 잘 도와주셔서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어떤 형제는 침구 세탁소에서, 어떤 형제는 강의로, 다들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피정이 잘 되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 형제들 덕분입니다.”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부르심'과 '응답' -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
1)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하셨습니다(루카 1,38).
이 말씀에서 ‘바랍니다.’(‘저는 원합니다.’) 라는 말은 성모님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순종하셨고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뜻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천사는 성모님께,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자, 너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거부할 수 없어서 복종한 것이라면, 그것은 순종도 응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를 원한다. 너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원한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도들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그렇게 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이고,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주님의 희망에 나의 희망을 일치시키는 일, 즉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식 때의 ‘서약’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구장이 “......을 하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으면, 서품 대상자들은 “예, 원합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을 하겠다고 서약(맹세)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 또는 ‘서약한다.’ 라는 말보다 ‘나는 원한다.’라는 말이 더 강력한 ‘서원(誓願)’이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도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한다. 너희도 원하느냐? 원한다면 가라.”
역시 실제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파견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그들 자신들도 원했기 때문에, 파견 명령에 기꺼이 응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간 것이 아니라, 가고 싶어서, 정말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선교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에 넘쳐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데도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한다면,그 소식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될 수 없고, ‘전해 주기 싫은 소식’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3)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슨 대가를 바라지 말고 오직 ‘기쁨으로’ 하여라.”가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수당을 많이 준다니까 한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돈 소식’을 전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금, 은, 구리돈, 여행 보따리, 여벌옷, 신발, 지팡이를 지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불편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고(마태 6,32), 그것을, 즉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 6,33-34)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참 좋은 제자들이자 선교사들 - 성 바르나바 사도>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
(시편 37,5)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 믿는 이들의 이중 신원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 역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바로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러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지난 주일 가톨릭신문 20면은 성미술 작가 조광호 신부의 고백과 같은 진솔한 글이었고 일부 소개합니다.
“저도 교회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했어요.
회화 외에도 조각과 판화, 스테인글라스 등 필요한 것들을 배우면서 작업을 해요.
컴퓨터 그래픽도 배웠어요.
특히 스테인글라스의 경우는 당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동검도 채플’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제가 받은 은총을 내놓기 위해서 만들었죠.
교회에 봉헌한 제 삶을 모두 모아 작은 경당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놓기 위한 곳이에요.
24시간 열려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로, 누구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울 때,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성 바르나바 사도처럼, 역시 교회와 주님을 사랑한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인 사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볼 때 다산 정약용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의 사람, 주님의 사람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도 공감합니다.
한결같이 진리를 깨달은, 삶의 지혜가 농축된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라 해도 좋을 다산입니다.
“비범한 진리는 찰나의 깨달음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축적된다.
궁리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며 만가지 변화를 섭렵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행하는 도리를 헤아려 말없이 마음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생을 노력으로 착각하지 말라.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거친 돌길이나 우거진 덤불속을 헤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특정 지역에 그리그도교를 전한 대표 선교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사도라 부르고,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슬라브 민족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를 아일랜드의 사도라 부릅니다.
또 더 넑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우리를 주님의 사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바르나바가 ‘격려 또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 뜻대로 얼마나 신도들을 잘 격려하고 위로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어지는 내용도 그가 얼마나 교회에 충실한 인물인지, 또 사울에 대한 최선을 다한 노력에서 얼마나 좋은 배려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고, 바르나바의 편지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사도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5세기에 쓰여진 ‘바르나바의 전도 여행과 순교’에서는 키프러스 섬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우선적 목표가 하늘나라의 선포요 이와 더불어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입니다.
이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명합니다.
이미 예수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이 각처에 있어 제자들을 영접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흔연히 나그네를 환대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무소유의 자유롭고 홀가분한 선교 여행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참 좋은 보답은 주님 평화의 선물입니다.
무소유와 무욕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그대로 주님 평화의 통로가 됐던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두 연설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제6차 국제 젊음이들의 성가대들 모임에서 성가대원들에게 한 연설로, 그들의 섬김의 활동에서 세가지 본질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형성에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첫째, 조화(harmony)입니다.
교황님은 “음악은 조화를 창조한다. 그것은 누구에나 전달되어 고통중인 이들을 위로하고, 좌절한 이들의 마음에 열정의 불을 붙인다. 음악은 하느님의 조화로운 빛을 반영하는 아름다움과 시같은 경이로운 가치들을 사람들 마음에 가져다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친교(communion)입니다.
교황님은 “합창은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와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여정은 위대한 '연주회(concert)'의 향기가 될 수 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면서 ‘친교의 교향곡(thy symphony of communion)’ 안에서 각자 고유한 풍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강조했습니다.
셋째, 기쁨(joy)입니다.
교황님은 “여러분은 예술, 아름다움, 영성의 오랜 보물의 관리인들이다. 이기심, 야망, 질투, 분열로 더러워진 세상적 정신상태가 너희들 안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라. 너희 음악은 점차 하느님께 자기 증여의 기쁨이 될 수 있고, 그분의 사랑과 더불어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밝히고 모든 것을 변모시킬 것이다. 너희는 성 아우구스티누의 권고를 채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혀로,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우리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자.' ”
새삼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조화, 친교, 기쁨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는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는 교황청의 대사들 모임에서 한 연설인데 세부분으로 된 명연설로 오늘 복음과도 일치합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첫째, 가정(family)입니다.
교황님은 “교황대사들은 인류가정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 우선적 자리에 사랑과 형제애, 함께와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고 이를 살아내고 전수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늘나라 가정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분열과 전쟁으로 파괴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둘째, 희망(hope)입니다.
교황(pope)이란 단어가 흡사 희망(hope)처럼 들립니다.
교황님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우리는 좌절하거나 비관적이 냉소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은 우리 세상 안에 현존하는 좋음을 인정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에 직면할 힘을 마련해 준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들은 희망의 표징들이 되어 달라.”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활동에 참여하는 사도들 역시 희망의 표징들입니다.
셋째, 평화(peace)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 안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관계의 열매다. 우리가 무관심과 두려움을 제쳐놓을 때, 성장하고 번영하는 영구한 일치로 이끄는 상호 존경의 진정한 분위기도 피어날 수 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peacemakers)이 되도록 노력해 달라. 전능하신 분이 축복하신다” 라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형제애, 희망, 평화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 역시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로, 즉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 그리고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점차적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여, 당신이 내리신 빛과 진리가 저를 이끌게 하소서."
(시편 43,3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
언론사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부탁을 자주 했었습니다.
인터뷰는 ‘약속 대련’처럼 미리 질문지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인지 질문지를 미처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 메일로 보냈는데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1시간 남짓 인터뷰는 잘 끝냈습니다.
기자는 익숙하게 핸드폰을 녹음으로 해놓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인터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는 먼저 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저의 호적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가브리엘의 방문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욕에서는 신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다면, 이곳 댈러스에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자는 ‘성당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방과 비난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가톨릭은 큰 집, 개신교회는 작은 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교회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톨릭교회에서 작은 집인 개신교회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개신교회의 장점은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교계제도를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그 조직이 자유롭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고, 간단한 쇼핑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있고, 샤워 시설도 있고, 주유소의 기름값이 저렴한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음식도 맛이 없고,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물건값이 비싼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입소문이 나서 파리만 날릴 것입니다.
휴게소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지면 미련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합니다.
종교는 깨달음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휴게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찾을까요?
종교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때입니다.
종교가 지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줄 때입니다.
종교가 불의한 세상에 희망을 줄 때입니다.
종교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외면할까요?
종교가 속 빈 강정일 때입니다.
종교가 권력에 야합할 때입니다.
종교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갈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외면할 때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자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였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제가 이곳 댈러스에서 해야 할 소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나라는 세계사 안에서도 유례없는 대단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도 그리 풍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가,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놀라운 변화의 속도와 규모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듭니다.
1970년대만 해도 전화나 텔레비전 없는 집도 꽤 많았는데 이제는 전화는 개인 필수품이 되었고, 텔레비전은 극장을 방불케 할 만큼 큼지막합니다.
이런 빠른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만져서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 없었던 저 역시 빠른 변화에 혼란을 느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OECD 국가 중에 가장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도 뚝뚝 떨어지고 있음 역시 개인의 행복도의 하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정신적 빈곤은 지금의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외적 풍요로움이 실제 행복과는 전혀 다름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장을 위해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정신적 성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들 수 있지만, 외적 성장을 멋지게 이룬 우리의 모습은 내적 성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또 다른 나의 성장을 위해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또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또한 등불을 함지 속에 놓아서 비추지 못하는 것 역시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이렇게 짠맛과 밝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부족한 존재이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실수로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우리를 통해서 높이 드러내십니다.
이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 풍요로움을 넘어서 내적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