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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8,20-39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29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
32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34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35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36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내일 우리가 기념하게 될,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1요한 2,5)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없는 황홀경?>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1열왕 18,29)
오늘 독서는 카르멜산에서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누구의 신이 응답하는지 그것을 놓고 대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예언 황홀경에 빠지지만 신의 응답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
이것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과 같은 경험을 우리도 하거나 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황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없는 꽃 감상을 하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하느님 찬미는 없고 꽃 감탄만 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지요.
이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서 그리고 기도한다면서 하느님 없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부좌 틀고 관상 기도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명상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에 그치거나 하느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그 목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목적이 하느님 또는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라면, 그것은 재물을 많이 달라고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인 기도이기에 당연히 사랑의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시시하게 물질을 탐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탐욕인 황홀경을 기도 욕심으로 원할 수 있습니다.
황홀경을 다른 말로 하면 무아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약 중독자들도 원하는 황홀한 경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황홀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해야 할 것이고, 그랬을 경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아닌 크나큰 고통이 반대로 올 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의 경우, 특히 프란치스코의 오상의 경우와 같이 너무나 사랑하여 기도할 경우, 주님의 상처를 같이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도 사랑하면 똑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라고 알려진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이 황송하옵게도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달게 해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저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듯이 지극한 사랑으로 기도하면 그의 고통을 내가 대신 느끼는 일도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의 고통이 내게 옮겨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신체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이런 기도를 바치기까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 예언자들처럼 고차원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도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큰 사람이 되십시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여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 보다는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 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작은 것,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직은 것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들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십일조와 같은 계명들을 소홀히 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십일조가 구원의 핵심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며 구원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지만 닿으려고 해서는 작은 계명들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 참사(1986)를 생각해봅시다.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 씰 때문에 비행 73초 만에 부서져 탑승한 우주비행사 7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저온에서의 O-링 성능에 대한 공학자들의 경고를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작은 것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집에 못 가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타닉 침몰(1912)도 그렇습니다.
선박은 여러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지만 고속으로 계속 주행했습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강철 리벳의 품질이 표준 이하여서 충돌 시 선체가 더 쉽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치로 인해 ‘가라앉을 수 없는’ 선박이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고 이에 따라 1,5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목적지가 하늘나라여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계명들을 무시하다가 결국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이루어 낼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부자들이 해 놓은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영국에 “펜스를 관리하면 파운드가 스스로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Take care of the pence, and the pound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란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잘 관리하면 큰 돈은 저절로 관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승호 회장도 “자식(동전)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모(지폐)가 잘해줄 리 없다.”라고 말합니다.
김승호 회장이 자신의 회사 앞의 노숙자에게 지폐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놀라서 지폐와 큰 동전들만 가지고 작은 동전들은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동전들을 주워서 회사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작은 돈에 충실한 자신을 보며 큰돈들이 들어올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들이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그냥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커다란 부를 이루어내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계명을 지키게 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잔 다르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려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이 ‘세심증’을 겪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성인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사제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전사, 사제,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작은 존재여,
나는 선지자들과 박사들처럼 영혼들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온 땅을 여행하여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모든 땅의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소명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만 살았음에도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더 하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는 목적, 곧 위대한 성인·성녀가 되는 사명으로 살아갑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과 헌신은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서 사무직에 종사할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예초기를 돌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니, 그 안에 얼마나 ‘작은 것들’ ‘소중한 생명’들이 숨어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벌써 뭔지 모를 작은 알들이 우글우글거립니다.
적당히 부드러워진 땅속에는 새끼 지렁이들이 꿈틀꿈틀댑니다.
이웃 밭과의 경계선으로 심어놓은 나무 가지 마다에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보송보송 매달립니다.
바닥에는 아주 작은 노란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작은 것’들의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만 타고 다닐 때는,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눈부신 광경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개발 논리, 속도전에 젖어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 큰 것, 빠른 것, 대단한 것, 뛰어난 것, 앞서 가는 것만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 평범한 것, 소박한 것, 가족적인 것,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생활 안에도 많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 안에서도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특별한 분위기만 선호합니다.
말씀 좋고 ‘기도빨’ 세다는 곳만 순례합니다.
본당이나 단체들 강의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특강은 한 번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외식이나 간식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명강사라 할지라도 반짝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특강 한번 듣는다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 간식이나 외식이 아닌 주식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미사입니다.
매일의 아침 저녁기도, 이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 습관처럼 드리는 묵주기도, 수시로 바치는 화살기도,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 일상적인 십가가의 수용, 이런 것들이 사실 신앙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여기저기 특별한 곳, 대단한 곳, 신기한 곳, 줄기차게 찾아 다녀봐야 그 끝은 언제나 허탈함이며 공허함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작은 것, 일상적인 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문제로 충돌한 일이 많았는데, 그런 일들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감히 폐지하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의 실천이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완전한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입니다.
실천이 불완전하고 부족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고(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10,19).
그런데 그는 십계명만으로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예수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 10,20-22)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고, 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지향으로 계명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긴 했는데, 그에게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는 하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심에 막혀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부족해지고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경우에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방법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2)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를 해설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8-10)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산상설교’ 전체가 ‘율법 실천의 완성’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산상설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은, 또는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바로 ‘사랑’입니다.
3)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입니다.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입니다.
한 자 한 획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계명들과 율법들은 없어지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명들과 율법들의 역할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계명들과 율법들을 의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떻든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는 “자기 마음대로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시하거나 안 지키고”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리사이들은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키기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라고 가르치셨고, 그렇게 실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안식일을 원래의 정신대로 지키신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자들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전사(戰士) - “더불어(together) 영적승리의 삶”>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시편 25;4.5)
오늘 복음 환호송 시편이 맘에 듭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참으로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모두가 제대가 없는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이 됩니다.
이 주제는 수도사제생활 만35년 동안 강론시 계속되는 주제가 되었고, 되고 있으며 사는 날 동안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빛나는 불굴의 전사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 450명과의 대회전, 1:450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승리로 끝나는 신바람 나는 긴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 착안한 오늘의 강론 제목이 “주님의 전사, 더불어(together)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겠고, 영적승리의 삶에 앞에 반드시 붙어야 할 ‘더불어(together)’란 말마디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은 혼자가 아닌 주님과 더불어의 삶, 영적전우들과 더불어의 삶을 통해 쟁취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과 맹자의 말씀도 오늘 강론 주제와 일치합니다.
“시련이 나를 태우는 불이라면, 노력은 나를 깨우는 망치다.
불굴을 품은 강철은 수없이 두드려져야 완성된다.”
<다산>
“하늘이 큰 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뜻을 세우기까지 괴로움을 주고 피곤케하며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한다.”
<맹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다산과 맹자는 주님의 빛나는, 불굴의 전사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습니다.
저보다 11세 연상의 87세 노시인이 출간한 시집이 흥미로워 구입했습니다.
유명한 단편소설 <소나기>의 저자 황순원의 큰 아들인 황동규 시인이 그 주인공입니다.
앞머리에 소개된 이채로운 말마디를 통해서도 이 시인 역시 불굴의 전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인 황동규는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하루하루 전력투구하고 있다.”
얼마전 “그냥 살라” 제 강론에 항의성 비슷한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정말 치열히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레지나 자매와 오고 간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정말 그냥 살아요.
눈뜨면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면 졸고 성체조배 가면(21시-22시) 그냥 자고 자다가 집에 오면 또 자고 새벽부터 다시 시작... 그래도 행복합니다.
졸지도 잠도 주무시지 않는 주님이 계시니까요.”
“자매님은 그렇게 치열히 사는 것이 아름답고 맞습니다.
그냥 주님의 전사로 치열히 사시다가 때로 주님 앞에서 그냥 쉬기도 하시구요”
어제 오후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이런 축제와 같은 장례미사를 장례예식장에서 봉헌하기도 처음입니다.
포크레인 요한 형제의 모친 이순금 마르타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입니다.
수도원 초창기부터 한결같이 성실히 수도원 공사시나 온갖 허드렛일 봉사를 해준 포크레인 세례자 요한 형제를 통해 만나뵙지 못했지만 그 어머니의 인품과 신앙을 짐작할 수 있었고 적중했습니다.
장례미사 시 30여명이 성체를 모셨고, 미사 전에는 10여명 젊은 자손들이 고백성사를 봤고, 유가족들이나 참석한 분들의 모습이 즐거워보이고 착해 보였습니다.
요한 형제가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당시 12살의 큰 형에 동생이 셋이니 어린 자식들 5명을 젊은 과부가 되어 산전수전 다 겪으며 훌륭히 키워냈고, 끝까지 충실히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90세로 선종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더불어의 평생 영적전쟁을 승리로 끝낸 죽음으로 마침내 천국에 입장하셨다고 강론중 전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장례미사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축하합니다! 주님의 전사, 마르타 자매님, 복된 선종의 죽음을!”으로 정했습니다.
미사 후 수도형제의 “지난 주일미사 강론시 ‘생명선’(lifeline)이란 말마디가 무슨 뜻인가요?” 질문이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공동체 울타리가 바로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보호해주는 생명선입니다.
공동체 울타리 생명선이 없은 노숙자나 행려자들 얼마나 위태한 삶을 살아갑니까?
더불어의 울타리 생명선이 무너져 혼자될 때 절망과 좌절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우리 수도형제들 수도원의 울타리 생명선에서 벗어나 세상 한복판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얼마전 어느 선배가 후배에게 주었다는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직장이 전쟁터라고? 밀어내기 전까지는 살아 남으라. 밖은 지옥이다!’”
영적전투의 승리에 공동체 더불어의 품 울타리, 생명선(lifeline) 안에 머무름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천하무적, 하느님의 전사 엘리야가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믿음 충만한 언행을 소개합니다.
흡사 다윗과 거인 골리앗의 전투를 연상케 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됩니다.”
최선을 다한후 생사가 달린 절박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전투에서 만반의 준비를 다한후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주님의 전사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에 이어 지체없는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리니, 엘리야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 정말 통쾌한, 유쾌한, 상쾌한 삼쾌의 빛나는 승리입니다.
그대로 빛나는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이 친히 배경이, 동반자가 되어 주시는 더불어의 영적전투일 때,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엘리야를 훨씬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한 철저한 주님의 전사 예수님인지 다음 대목에서 확인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율법이나 예언서들 모두에 대한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예수님의 확신이 단호한지요!
모세의 십계명을 업그레이드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선보인 주님께서는 이어 참으로 모든 율법을 포괄하면서도 그들을 훨씬 업그레이드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합니다.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 완전한 영적승리를 위한 최고의 처방을 제시하십니다.
내일부터의 복음이 소상하게 이를 밝히 보여줄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살아 계신 하느님과 함께 할 때, 공동체의 영적전우들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로써 영적승리의 삶이 뒤따를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끝으로 읽을 때 마다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는 제 좋아하는 담쟁이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26년전 1998년 나이 50에 쓴 시이지만 여전히 새롭게 읽혀지는 제 좋아하는 자작시 중 하나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일이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요 구원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 주님의 전사이다”
<1998.6.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
요한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그러자 나타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자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
2달 전쯤에 봉사자 한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본당에서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해서 성령의 밤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댈러스에서 그게 가능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번 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성령 기도회를 보았습니다.
지구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당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봉사자는 찬양 팀을 만들었고, 악기 봉사자들로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찬양 팀의 이름을 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라우다떼(찬양하다)’로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었고, 봉사자는 찬양 팀과 음악 밴드와 함께 멋진 찬양의 밤을 신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댈러스에 뭐 대단한 게 있을까?’라는 저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찬양의 밤을 마치고 저는 봉사자에게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앞으로 찬양 팀과 음악 밴드가 함께하여 ‘음악 피정’을 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바알의 예언자들이 엘리야를 이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알의 예언자를 물리치시고,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골리앗은 큰 칼과 갑옷을 입었습니다.
다윗은 볼이 불그스레한 청년이었습니다.
손에는 돌팔매만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배움이 많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부들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비록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교회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역사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오랜만에 어느 자매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전의 젊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도 많이 늙었네요.”
무엇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요?
자매님의 삶일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자매를 거의 30년 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50대 초반이었던 자매님은 80대 할머니가 된 것이고, 저는 20대의 풋풋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50대 중년이 되어 만난 것입니다.
자매님을 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그 흐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 바뀌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이기시고 또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큰 착각은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구약 시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해방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억압과 구속하는 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팽배했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정신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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