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예수의 이름의 뜻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 모든 백성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만.
어디에서? 죄에서. 그게 메시아란 말예요.
그렇게 구약적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폭로한 성경은
역사적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 내시죠?
예수님께서 출애굽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대로 밟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애굽에서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게 지금 마태복음의 흐름이에요.
세례라는 건, 애굽의 이스라엘이 죽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의 모형이에요.
그래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행하는 거죠.
그것도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해 성취될 새 창조의 모형이에요.
첫 창조 때 무대 배경이 어땠죠?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하시고
빛이 있으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창조가 시작됐잖아요?
예수님의 세례 현장은요?
저주 받을 구약이 빠져 죽을 물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계시고
직접 하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또 떨어져요.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단 말입니다.
이게 새 창조라는 거예요. 새 창조, 첫 창조에서 모형 되었던,
그리고는 광야로 나가셔서 40일 시험을 받으세요.
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이제 12제자를 모으시죠.
그건 교회입니다. 12제자,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12제자를 모아서
그들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도를 전하는 어떤 산으로 끌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게 지금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입니다.
이건 정확하게 출애굽
이스라엘의 삶을 회복시키고 완성시키며 가는 모습이에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죠?
그걸 사도 바울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그래요.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서,
그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다 빠져 죽죠?
그 애굽 군대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져내면서 이스라엘을 자주 군대라고 부르시죠?
애굽 군대가 빠져 죽었다라는 건,
애굽화된 이스라엘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
400년간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 있었을 때,
그들의 그 정체성이 어떻게 확보가 됐을 것 같으세요?
확립이 됐을 것 같으세요? 애굽사람이에요.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의 학문을 배웠고, 애굽의 것 먹고, 애굽에서 생활했어요.
애굽의 것을 배웠고, 애굽사람이에요.
그걸 저주의 바다 홍해에 빠뜨려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는 가나안 쪽에서 봤을 때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 올라오는 걸, 세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걸 나중에 이스라엘의 할례를 통하여 다시 확인 시켜주죠?
할례와 세례는 그 정신과 내용이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할례를 길갈에서 행하게 하면서 뭐라고 그래요?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그러죠?
그러니까 홍해 사건은 애굽의 수치,
이스라엘의 애굽화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게 홍해예요. 그게 세례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홍해로 몰고 가신 건,
이스라엘 속에 있는 애굽을 죽여 버리기 위함이었던 거예요.
그리고는 40년 광야를 살게 하세요.
이스라엘은 그 광야에서 죽어야 할 자로 폭로가 되죠.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죽어야 할 자로 폭로가 돼요..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는 개뿔이나 하나도 못 지키고,
이건 다 죽어야 될 자구나, 폭로되고 죽어요. 거기서 다.
그리고 새로운 2세대가 여호수아, 예수라는 인물을 앞세워서
은혜로 다시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 과정이 마태복음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과정 속에 들어 있는 이 산상수훈의 이야기는
출애굽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중에 어디쯤 해당될까요??
광야 40년을 가면서 70, 60만 명이 다 죽고,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이 되어 가나안에 가는 거니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어디 산으로 데리고 갔잖아요. 무슨 산? 시내산이죠.
그러니까 이 산상수훈은
바로 출애굽 그 여정 속에서의 시내산을 지금 그리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산상수훈을 구약의 시내산이
어떻게 신약에서 회복되고 성취되는가의 측면에서 보아야 되는 거죠?
신약에서 구약의 시내산을 다시 그려내고 있는 산이 두 군데 나오는데,
그 하나가 이 산상수훈의 산이고, 나머지 하나가 변화산의 그 산이에요.
사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산상수훈은 새로운 하늘의 법이 공포가 되고
수여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는 거고,
변화산은 그러한 새로운 법이 통치하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모형으로 그려지고 있음과 동시에
두 산에, 산상수훈의 산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제자가 올라가 있고
변화산에는 두 증인, 두 증인으로 모형 되었던 교회,
그 두 증인이 누구예요?
모세와 엘리아였죠?
계시록에서 봤잖아요.
우리가 그 모세와 엘리아,
교회가 예수님과 또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다른 거란 말입니다.
두 증인과 12사도는 똑같은 거예요. 교회란 말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엘리야와 모세로 대표되는 두
증인 즉, 교회가 그 변화산 위에 나타나는 건데,
이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산에 올라갔던 사람이에요?
모세는 시내산, 엘리야는 호렙산. 두 산은 같은 산입니다.
그래서 변화산 위에 바로 그 시내산에 올라갔던 두 사람이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변화산과 이 산상수훈의 그 산은
구약의 시내산의 신약적 성취를 보여주는 그러한 산이란 말이에요.
누가복음 9:30~31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여기서 이 별세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엑소더스에요.
엑소더스는 출애굽기의 제목이죠.
예수님의 엑소더스가
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내산에 올라갔던 세 분이
그 예수님의 엑소더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별세라고 하죠.
그러니까 산상수훈이 전해진 그 산이나
변화산의 그 산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수어진
구약의 율법과 그렇게 해서 완성이 된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 자명한 거예요.
그래서 변화산 아래에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마치 금송아지 사건 같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구약의 시내산이 갖는 메시지를 잘 정리를 해야
신약의 시내산인 이 산상수훈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지 50일째 되는 날,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시죠.
그리고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19:5~12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게 구약의 율법이에요. 잘 지키면 복 준다. 이거에요. 이게 시내산입니다. 구약의 시내산)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 들로 옷을 빨고
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이게 셋째 달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의 유월절 아빕월이죠.
이스라엘은 달력이 세 개가 있어요.
애굽에서 쓰던 민간력,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 히브리력이 있어요. 성력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들이 로마에 들어가서 썼던 양력.
유월절이 있는 그 아빕월을 첫째 달로 하라고 그러죠.
그 아빕월 14일이 유월절이잖아요.
그날 애굽의 장자가 모두 다 죽고 나온 거죠
그러면 한 달을 30일로 쳤을 때 첫째 달에 17일 남죠.
둘째 달, 한 달, 30일이에요.
셋째 달, 세 번째 날까지 기다리라고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시내산에 임하는 그날이 몇 일째? 오십일 째.
이 때 하나님이 임해서 그들에게 법을 줬더니 3000명이 죽죠?
그런데 신약에 그 똑같은 오순절 날에는
똑같은 인간들이 하나님 임재 앞에 있는데
베드로가 설교를 했더니 3000명이 똑같이 살아나요.
그 가운데에 뭐가 있었던 거죠?
십자가가 있었던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될 신약의 산,
신약의 새 언약의 성취가
구약의 이 시내산을 부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산상수훈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출애굽기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내면,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거라는 약속을 주세요.
그리고는 또다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그래요. 왜?
아직까지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켜내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 부정함이 거죽에 닿으면 하나님의 돌격으로 죽게 돼요..
그러니까 못 올라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구동성으로 다 지킬게요.
지킬게요. 그랬다니까요.
다 지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랬어요.
이게 구약의 시내산이에요.
다 지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상이나 준비해 두세요. 그랬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그 말을 듣고 확인 도장을 딱 찍으세요.
분명히 너희들 그렇게 말했어.
출애굽기 24:6~8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라는 말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피를 뿌렸다는 건,
너희들 그 약속 안 지키면 다 죽인다 라는 뜻이에요.
다 죽인다. 지키면 복 주고, 하나님 백성 되는 거지만,
못 지키면 다 죽어 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피를 뿌리는 거예요. 언약이에요.
피의 언약.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죠?
모세가 그 법을 받는 그 시간에 금송아지 만들고 있었어요.
뒤 돌아서서 바로, 피 닦기도 전에,
인감도장에 인주 마르기도 전에 계약을 위반한 거죠.
어떻게 해야 돼요.. 죽어야 돼요..
그래서 3000명이 거기서 죽습니다.
다 죽어야 돼요.. 그런데 모세가 그 앞을 가로막죠.
하나님 저 사람들 다 죽이려고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겁니까?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세요.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세요. 그래요.
이게 누구의 모형이에요. 예수님의 모형이에요.
그리고는 두 번째 돌판이 주어지는 거죠.
그 돌판이 법궤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두 번째 돌판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 돌판을 볼 때마다 뭘 생각해야 되요.
우리는 벌써 그때 죽었어야 되는데,
모세의 중보로 덤으로 산거구나 라고 모세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법을 대할 때
이걸 지켜야지 하면 구약사람 되는 거예요.
나는 벌써 죽었어야 될 자인데,
이걸 못 지키니까. 벌써 죽었어야 될 자인데,
예수님이 가로막고 아버지 차라리 날 죽이세요.
그래서 내가 산 거야..
이렇게 은혜를 붙들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그 산상수훈을 가지고 지키겠다, 라고 그래요.
그리고 지켜야 하나님 백성다운 사람이라고 그러고,
그걸 지켜야 복 받는다고 그래요.
지켜야 하나님 나라 들어간다고 그래요.
여러분, 이게 청교도 신앙이었어요. 조심하세요.
산상수훈은 그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서, 구약의 옛 성전은
그 자체 안에 자체 부정과 자체 충돌을 내포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이라는 거 자체가 율법의 표상이죠.
물론 그 안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다 못 지켰을 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준 거예요.
그러나 그 안에서 율법에 정해진 규례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그 제사는 무효에요.
그러니까 그것 또한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율법의 표상인 성전 안에 지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인간들의 그 죄가 십계명 돌판으로 들어가 있고
그것이 일 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염소의 피로 덮임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는 은혜의 현실이 그 안에 숨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그 지성소가 나중에는 이 성전 전체를 먹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그 요한계시록에 가면은
성전을 측량하는데 정사각형이 되는 거예요.
성전 안에서 정사각형은 지성소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구약의 성전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지성소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 거예요.
그 지성소가 뭐냐면, 신약의 새 언약이라니까요.
예수의 피, 제물의 피에 의해 인간들의 죄가 그냥 거저 덮이는 것.
그 은혜가 바로 이 율법의 성전을 부술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성전이 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신약에 와서 그 성전이 부숴지는 거란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그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볼 때마다
나는 벌써 죽어야 할 사람인데
모세의 중보로 살아난 자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해야 됐어요.
따라서 우리도 성경의 법을 대할 때,
하라, 하지말라의 명령을 대할 때,
먼저 머리 싸매고 지켜야지 그리로 가기보다,
지키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그걸 지켜야 되겠다 라는 지향성을 갖게 만들어요.
그러나 이걸 먼저 지켜야 되겠다 라는 그 의지를 발동하는 게 아니라
나는 벌써 이 법 때문에 죽었어야 할 자인데
예수 때문에 산 자라는 그 은혜의 현실을 먼저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성전의 의미를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또다시 출애굽기 19장의 그 허탈한 맹세를 하고 있었던 게 구약의 이스라엘이었어요.
다 지킬게요. 다 지킬게요. 그러다가 다 죽을 뻔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어땠어요? 다 지키고 있어요, 그랬다구요.
지금은 어때요?
그거 잘 지키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이에요. 또 이러고 있잖아요.
계속해서 에덴의 아담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언행일치는 뭐니 이런 소리들을 하는 거죠.
왜 훌륭한 신앙인이 언행일치가 안 돼! 그게 돼야 되는데,
그게 된다고 우기는 게 바리새인들이었다니까요.
그래놓고 굉장히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이 역사는 그러한 아담들의 하나님처럼의 그 행위가
즉, 구약이 부인되고 깨지는 곳이에요.
그래서 미가서에 보면
한 산이 부수어지고 다른 산이 새롭게 서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미가서 3:9~12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삵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갈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성전, 율법의 모형인 그 성전이 서 있는 그 곳을 산이라고 그러죠.
이 시내산이라는 말이에요.
그것 다 부수어질거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시온과 예루살렘이 등장하는 거거든요.
구약의 산, 율법의 산은 부수어질 거래요.
그런데 똑같이 그런 산이 다시 등장할 거라고 이야기해요.
그 다음 장으로 가보세요.
미가서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옛날에는 어땠어요?
그리로 몰려가면 다 죽어요.
그런데 민족들이 새로 세워지는 그 산에는 올라간대요.
예전에 그 시온산이 무너진 그곳에 선 그 산이에요.
근데 그 산에는 모여 올라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산상수훈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12사도가
그 예수가 이끄는 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아무런 제지 없이. 이 미가서의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거라니까요.
미가서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보세요. 이스라엘 정도가 아니라 많은 이방이 함께 산에 올라 간다구요.)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산과 성전을 같은 것으로 보죠. 동격으로 묘사를 한다구요.)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수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있잖아요.
산상수훈에서 이 이야기하는거예요. 구약의 율법은 그들을 죽이는 율법이었는데
지금 새로 선 그 산에서 나오는 율법이 이들을 지금 살려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법이에요. 그거는요.)
3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이 내용은 이사야서 2장 1절에서 4절까지 똑같이 또 기록되어 있어요.
두 선지자가 똑같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부분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시면 여호와의 전과 여호와의 산이 다른 산들의 꼭대기에 선다고 그래요.
다른 산들이 부정되고 이 새로운 산이 그들을 점령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아닌 많은 이방이
그 산 즉, 성전에 올라가서 새 성전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도를 받아 그 길로 행하게 되는 거예요.
산상수훈에서는 어떤 성전이 있었어요? 예수라는 성전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지을 거야.
그건 예수님의 성전됨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미 부수어진 그 율법의 산, 여호와의 말씀의 산,
시내산이 다시 나타나서
또 다시 율법과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지게 된다는 거예요.
물론 그 율법과 말씀은
이미 부수어진 구약의 산,
옛 성전에서 전해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겠죠?
그게 바로 산상수훈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때에는
근처에만 가도 다 돌격하여 죽이시던 하나님이
그 말일의 산, 그 말일의 성전에서는 ...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도를 가르치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거예요.
옛날 구약시대 같으면
지금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떨어지면 여러분은 다 죽어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어요.
제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말게 해 주세요.
모세에게 부탁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듣고 있다니까요.
바로 이 현실을 12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표현해 내고 있는 거예요.
이건 바벨탑이라는 옛 성전을 부수시고,
그 자리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도 나타난 거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느브갓네살의 그 금신상
이게 힘의 원리 속에서의 그 용사들을 상징하는 거죠? 세상의 용사들,
그 금신상이 다른 산에서 뜨인 돌,
뜨인 돌이 둥둥 떠 있는 돌이 아니라
산에서 삽으로 이렇게 뜨여진 돌이라는 뜻이에요.
다른 산에서 뜨여진 어떤 돌에 의해 박살이 나는 거죠. 그 이야기에요.
이 산상수훈의 그 산 위에 있는 뜨인 예수라는 돌이
구약의 그 시내산, 그 산을 박살을 내버리는 거예요.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 새로운 산, 율법의 산이 무너진 곳에 새로운 산,
새로 선 산, 새로 선 새 성전의 모습이 산상수훈의 산인 거예요.
그리고 그 새로운 산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하늘의 법과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의 내용인 거구요.
물론 그런 구약의 산과 신약의 산 사이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거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바로 이곳 산상수훈의 이 현실을
구약의 시내산과 비교해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한 번 보세요.
히브리서 12:18~24
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여기가 어느 산이에요? 시내산이잖아요. 첫 번째 율법이 전해졌던..
그런데 지금 교회에게 히브리서 기자가 뭐라고 그래요?
너희는 그 산에 당도한 거 아니라고 그러죠.
율법 지킬게요. 다 맞아 죽는 그런 산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산? )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지금 미가서의 그 산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미가서에 나온 그 단어들이 그대로 등장하죠.)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의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바로 이 산인 거예요. 그런데 그 산을 가리켜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산상수훈의 이 산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새 언약의 산이며,
어린양 예수의 피로 뿌린 피로 말미암게 된 은혜의 산인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은 이제 그곳에서 율법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돌격으로부터 해방이 된 자들이 된 거야,
이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선포되어지는 곳이
산상수훈의 산이란 말이에요.
시내산, 그 율법의 산은 모세도 못 들어갔던 산이에요.
여기 나오잖아요. 모세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
많은 이방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산이 섰단 말이에요.
그게 산상수훈이란 말입니다.
그 입구에 뭐가 서 있다고요?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산상수훈을
지금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이나 윤리나 행동강령으로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완전히 거꾸로,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존경하는 그분들이 그렇게 해석을 했다니까요.
그리고 그게 옳다고 그래요.
이 설교가 나가면 또 아마 난리들 칠 거예요.
그건 성경의 전체의 맥을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다른 종교인들까지 쫓기를 원하는
기독교 윤리나 실천 강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성도를 어떻게 구별하여 들어내시고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명쾌한 선포인 거예요.
본문 2절을 보면 입을 열어 가라사대 라는 어구가 나오죠.
이거 마태가 일부러 끼어 넣은 거예요.
그럼 입을 열어 가라사대이지, 코를 열어 가라사대 합니까?
그런데 왜 굳이 이 단어를 썼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이 떨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입이라는 단어가 종종 나오죠.
여기서 마태가 지금 예수를 하나님으로 선언하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죄인들이 죽었어요. 벌벌 떨었다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제자들이 턱을 괴고 이렇게 듣고 있는 거예요.
재미나게. 이게 신약인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됐다고요?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게 중점이라니까요.
산상수훈의 핵심은 어린양의 피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그런 행동강령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그 자체가 뭔가 해결되어 있는 모습이잖아요.
하나님이 입을 열어 가라사대, 뭔가 말씀을 하시고.... 하늘의 도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아무런 제지나 방해 없이 그것을 듣고 있어요.
즐겁게. 그게 지금 뭔가 해결된 게 아니에요? 그게 어린양의 피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의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그건 너희들의 행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기초로 끝나는 거라고 그랬어요.
7장 마지막이 모래위에 세운 집, 반석 위에 세운 집.
그렇게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구약의 율법을 부수며 새 언약의 성취를 확고하게 세우는 그런 내용이란 말입니다.
산상수훈의 맨 앞부분과 맨 뒷부분을
샌드위치 빵처럼 감싸고 있는 게 뭔지 아세요?
감싸고 있는 단어, 천국이에요. 하나님 나라,
바로 그 앞에서는 천국 복음을 전했는데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고 그랬다! 라고 천국이 나오는데,
그 천국이 오해되니까
하나님이 천국을 다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이 천국이고 마지막이 천국이에요.
마태복음 5: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7: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니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잖아요.
그건 하나의 질문이에요. 그건 제가 풀어드릴게요.. 조금 이따가,
천국은 대접을 받고자 해서 ....
먼저 남을 대접한 예수에 의해 완료가 되어서 ...
이미 교회에게 주어진 곳이라는 거예요.
이게 7장 서두에 나오죠?
너희들이 대접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해 줘라.
이거는 불경에도 나오는 얘기에요.
너희들이 대접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해 줘라.
이거 초등학교 도덕책에도 나올 거요 아마?
그 이야기겠어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대접받기 위해 우리를 먼저 대접한 게 십자가거든요.
그런데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했어요?
예수님이 왕이네요.
당신이 구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네요, 라는 그 대접! 믿음!
그 대접받기 위해
예수가 대접하여 이룬 게 하나님 나라다, 를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인간들의 선악 구조로 행하는 자들은 절대 못 들어간다,
이게 산상수훈의 요지란 말이에요.
7장의 결론 부분을 보시면
인간의 선악 구조의 판단에 의해서 열심을 부린 사람들이
지옥 문 앞에 서서 막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죠.
마태복음 7:22~23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거 나쁜 일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하고 선지자 노릇했다고 하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주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왜 예수님이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러냐구요.
지금 이게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인데
산상수훈이 붙어있는 부분이 똑같은 부분이었죠.
예수님이 병 고치고,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고 그런 일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진의가 숨어 있던 건데,
사람들이 그걸 이게 진짜 하나님 나라로구나 라고 표피적으로 이해를 했잖아요.
그게 오해죠? 그걸 그대로 갖고 와서
이게 하나님 나라이겠거니 하고 이 세상에서 그대로 행한 거란 말입니다.
착하게 산 거예요..
귀신 쫓아내주면서 다른 사람들 위해서 이 한 몸 불살라 산 것이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나님 나라 들어간다, 라고 생각한 그게 죄란 말입니다.
그 행위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걸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게 바로 지옥 갈 일이다, 를 보여주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요.
그래서 앞뒤가 인클루지오 구조로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고
이렇게 붙어 있는 거예요. 샌드위치 빵처럼.
그러니까 산상수훈은 적어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니까요.
구약식으로 표피적으로만 문자적으로만.
그 중에서도 팔복은 오늘 우리가 읽은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은 이들이 이 역사 속 현실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팔복은요 전부 마카리오의호이로 시작이 되요.
그건 감탄문의 형식이거든요. 복 있는 자요~라고 선언하는 거예요.
뭐뭐 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니가 아니라
복 있는 자요! 복 받은 자여!
너희는 이렇게 될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희의 현실은 이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에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너희들에게 복 주셨다 그러죠.
복 주시되 과거 시제거든요. 복을 이미 받았단 말이에요.
그러면 복을 받기 위해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게 옳아요,
아니면 복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게 옳아요?
복을 받았다 면서요.
그런데 무슨 복을 또 받아요? 뭘 해서 복을 또 받냐구요.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우리에게 신령한 복으로 복 다 주셨다는데
산상수훈은 지켜서 복받는 비결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이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모양으로 만들어 가실 것인지에 대해서 선포해 주시는 거예요.
그게 팔복이에요. 안 그러면 탈락한다가 아니요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라니까요.
그런데 복 있는 사람들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의 개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구약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부자 되는 게 복이고,
애통이 없는 삶을 사는 게 복이고,
핍박을 할지언정 핍박을 당하는 자 위에 서지 않는 것이 복이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복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복 있는 자여~
너희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고,
의에 주리고 목 마르게 될 거고, 긍휼히 여기게 될 거고,
마음이 청결하게 될 거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거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예수로 인해 욕먹고 핍박을 당하고,
거짓으로 모함을 당하는 자 이게 너희의 복이다. 복의 현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구요. 완전히 다르잖아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러면 부자는 복이 있나니 이 세상이 저희 것임이어죠?
바꿔 말하면, 그러면 뭐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부자라는 것이
단순히 돈이 많은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서
인간의 자존심을 챙겨 갖는 그 부자, 그들의 영역은 세상이다 라는 거예요.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인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복의 개념과
신약의 복의 개념은 완전히 달라요.
구약의 복은 실제로 그런 거였어요.
왜냐하면 복의 실체이신 예수가 오기 전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가장 좋은 거라고 여기는 것으로 복을 설명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복의 실체가 온 이후에
신약 어디에 복 받은 자는 이렇게 부자로 살 거고
자식들 많이 낳을 거고 땅이 많이 생길 거고 이런 얘기가 어디에 있어요?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근본이다,
이렇게 초를 치잖아요. 그런데 그게 복이라잖아요.
그걸 안 사랑하게 되는 것이 복이라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이 친구나 사랑하는 이웃의 개업식에 갈 때 뭘 들고 가야 돼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걸 들고 가야 돼요~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근본이니… 이걸 들고 가야 돼요?
후자를 들고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이걸 안 들고 가냐구요?
여러분도 그게 복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거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삶을 일차적으로 누가 살다 가셨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셨죠.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이 역사 속에서
누구의 삶에 연합이 된다는 말이죠?
예수의 삶에 연합이 된다는 뜻이에요.
예수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게 된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예수의 삶이 어떤 삶이었어요?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이었잖아요.
그 자기 부인과 십자가로 밀고 내려갈 때
남들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고
아무리 남들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려도
내가 원래 그런 존재인데 뭐,
나중에 소금 먹인 배추처럼 흐물흐물해져 가지고 온유해지는 거죠.
여기에서 동사의 시제를 보면
3절과 10절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는 현재형이에요.
그런데 나머지는 전부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누구죠? 하나님 나라죠.
천국은 하나님 나란데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고 그러잖아요.
새 성전, 성전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
그러니까 천국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천국이 임한 거죠.
지금 천국은 너희 것이다.
현재로 이야기하는데 이 천국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는
천국에 의해 침공 당한 그 자들은 이렇게 살게 될 거야,
이거는 어느 시점에 이렇게 완료가 되는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미래에 어떤 점을 향하여 지향되어지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죽는 날까지 이렇게 밀려간다는 뜻이에요.
여러분이요. 그런데 이 삶이 쉽냐구요? 어렵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여러분이 이렇게 힘든 거예요.
내가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어요? 이렇게 불행한데,
이렇게 늘 우울한데, 외로운데, 그게 하나님 나라예요.
내가 지금 부정되고 있고, 부인되고 있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힘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마치 내가 기대하고 내가 그려 놓은 그 하나님 나라가 나한테 안왔는 줄 아는 거예요.
왜? 그거 하나님 나라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역사 속에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절대 경험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그려 놓은 그 하나님 나라는,
그건 불교의 극락이라니까요.
하나님 나라가 뭐예요? 바실레이야 통치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시행되어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예요.
예수님의 삶이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다스린 삶이었죠?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나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현실, 모든 존재의 현실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없음이라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나라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역사 속에서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 상태에서 ....
하나님의 나라가 통치가 임해 버리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나는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죽여 버리려고, 하나님 나라가 왔으니까.
그래서 힘든 거예요. 어려운 거란 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뭔지 아세요,
여러분?많이 가진 자가, 뭐 멋지게 성화된 자가
그리고 많이 배운 자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못 배운 사람처럼
이렇게 겸양을 떠는 게 겸손이 아니라
겸손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뜻은 ‘하나님 앞에 서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겸손이에요
그러니까 엉뚱한 겸손 떨려고 하지 마세요.
겸손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엄청난 권세와 그 영광 앞에서 깨갱거리고 나는 죽은 자네요,
이 상태가 되는 것을 겸손이라고 그래요.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이 역사 속에서 임했을 때
지금 여러분이 그 자리로 밀려가야 되잖아요.
그게 지금 팔복에서 나오는 내용들이란 말입니다.
그걸 해야 복 받는다,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은 그리로 밀려가는 거예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팔복의 내용은 전부 인간의 육적 자아가
존재성과 주체성이 점점 부인되어지고 부정되었을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것 말고 더 좋은 인간의 덕목들 많잖아요, 왜 이것만 해야 해요.
인간의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런 대표적인 것들 몇 개만 적어 놓은 거예요.
요것만 하고 딴 건 안 해도 된다 이거 아니라니까요.
사도 바울이 그러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침공으로 인한 이 자체 충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로마서 7:21~25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자 두 법이 싸우죠? 구약과 신약의 산이 싸우는 거예요.)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 구약의 법이 자꾸 이겨요.
그때에 신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구나.
나는 죽은 자구나.
절대로 내 힘으로 뭔가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구나. 내가 어떻게 법을 지켜,
그랬을 때에 어디로 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러잖아요.
그리로 가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니라,
나는 이미 이 법 때문에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이 중보자로 서서 내가 산 거야, 이리로 가야 되요.
그 때에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요만큼씩 요만큼씩 나타는 것일 뿐입니다.
무슨 언행일치는 얼어 죽을 언행일치에요.
됩니까, 그게?
그래서 내가 말을 안 하는 거예요. 행동이 따라 주질 않아요.
여러분 한 번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구요.
정말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그런 천국이 여러분이 원하시는 천국 맞습니까?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즐겁게 대 주는 곳이 천국이라는데
여러분 그런데 가고 싶으세요? 진짜로?
여러분 오른손 잡이가 오른편 뺨을 때릴려면 손등으로 때리는 거거든요.
그건 모욕이에요. 아프라고 때리는 게 아니라.
그런데 그 상태에서 왼편 뺨 한 대 더 때려서 마음을 더 풀어, 이게 돼요?
그런 천국 가고 싶으세요? 가끔은 할 수 있죠.
그러면 내가 상 줄게 그러면 내가 이를 악물어서…. 천국이 그렇게 벼르는 곳입니까?
오리를 가자 그랬을 때 십리를 함께 가줘야 되는 그런 천국에 가고 싶으세요?
이게 뭐예요. 에게, 우리가 원하는 천국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곳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 자체가 나를 비우고 털어서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가 천국 맞아요.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안 가고 싶잖아요. 저도 안고 싶어요. 여기에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야 되냐구요? 이건 내가 원하는 천국이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도저히 우리는 이 법을 지켜낼 수가 없어요.
이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 하나님처럼을 지향하고 있는 이 육신을 입고 이상
도저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지켜내야 할 그 법을 다 지켜낼 수 없다니까요.
안 가고 싶단 말입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되요?
천국이 나를 뚫고 들어와야 되요. 장악해야 되요.
그래서 역사 속에서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는 게 산상수훈의 팔복이에요.
여러분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자꾸 우울해지는 거예요.
그러한 하나님 나라는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훤한 빛이 나를 비추고
비둘기 다섯 마리가 저기서 푸득거리며 내려와서
아침 식사를 대령해 주고…. 그런 천국 없어요.
이 땅에서 그런 천국이 체감되어질 때는 ...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접촉점을 형성한 그 잠깐 동안에 그 순간에 소망으로
내가 잠깐 땅겨서 얻을 수 있는 그 기쁨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전부 이 육이 그 하나님의 법과 충돌을 하여 내 속에서 전쟁밖에 안 일어나요.
그러니까 수시로 내가 구원받은 자가 맞나? 이런 고민에 휩싸이게 돼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에이, 삶이 그러니까 자꾸 그런 의심이 들지.
언행일치를 해봐라 왜 그런 마음이 드나? 그것들이 마귀에요.
여러분은 그런 고민하셔야 돼요.
그래서 저는 가끔 우리 교인들이 그런 질문하며 눈물지을 때 아주 기특해요.
그리고 참 아주 잘 가고 있구나. 정말이에요. 여러분 그런 고민을 하셔야 돼요.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도덕과 윤리를 실천해서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욱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해요.
그래서 언행일치니 뭐니 하면서
인간들의 삶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진단하곤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설 자리가 어딥니까?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 구조로 판단하고
정의한 착함과 악함이 정말 모두 참인 명제가 맞아요?
인간의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이라는 건
전부 인간들이 자기 정당화를 위한 합리화의 수단일 뿐이에요.
그런데 그것 몇 가지를 정해 놓고
그걸 잘 하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건
아직 유치원 수준도 못 올라 간 거예요.
막대 사탕 쭉쭉 빨면서 울면 안 돼,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거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는 지금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법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잘 지키고 수행하는 게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그 가르침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건 아니잖아요.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라는 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그랬죠?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여러 가지 능력 행했는데 왜 날 모른다고 하십니까?
그랬을 때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라고 그러죠?
예수님이 나중에 진짜 성전을 박살내시면서 똑같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거기서 그게 무언지, 지금 여기서 모형적으로
구약의 성전이 구약의 산이 신약의 성전,
예수에 의해 신약의 산에 의해 박살내는 것으로 이렇게 그려지는 게 산상수훈이라면
진짜 옛 성전이 박살이 나면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게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이야기해주신다니까요.. 보세요.
마태복음 21:28~32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성전을 막 뒤집어 엎으시자,
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당신 무슨 권세로 그런 일하냐고 막 따졌어요.
그때 예수님이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너희는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건지 땅으로부터 온 건지 아니?
대답 좀 해봐? 대답 안 하죠그럼 나도 대답 안 할 거야.
그리고서는 이 이야기해 주시는 거예요.
첫 째 아들은 바리새인들이에요. 그죠?
하겠습니다 라고 한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안하더라는 거예요.
안 한 게 되더라는 거예요.
근데 아버지 앞에서 안 하겠습니다.
세리, 창녀처럼 그랬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더니
그들이 뭘 한 게 아니라 예수를 믿었다구요.
그랬더니 그들을 둘째 아들에게 확 집어넣어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다 그래요. 그죠?
그래 놓고는 그들이 세리와 창기이고 그들이 예수를 믿었다라고 한다구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지
그 주여 주여 했던 그 사람들처럼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저것도 했는데요.
왜 나를 천국에 안 넣어 주세요?
이 일 아니다 를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행한 자가 누구냐? 그러는 거예요. 둘째다 그러는 거죠.
뉘우치고 갔다, 라는 게 회개하고 예수 믿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거예요.
여러분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주시면서 금지 명령을 내리셨는지 아세요?
선악과 먹지 말라가 율법이죠?
구약의 산이죠? 이게요. 그리고 생명과는 허용이죠? 먹어도 돼,
그러니까 금지명령과 허용명령이 떨어지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가.... 선악과와 생명나무로 제시가 되는 거죠.
그런데요. 하나님처럼 되겠다 라는 그런 존재는 금지명령이라는 걸 받게 되면
명령한 자와 명령을 받은 자를 구별해 내구요.
별도의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돼요.
왜? 나는 명령을 받았고
저 존재는 나에게 명령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구별이 일어나죠.
그리고는 내 존재성을 챙기려고 하는 욕구가 어떻게 표출이 되죠?
위반으로 표시가 되는 거죠.
내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서는 내가 저에게 굴복하면 안 되잖아요. 그 위반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위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벌이 떨어지는데
그 벌이 뭐냐면 정령 죽으리라, 예요. 사망이란 말입니다.
재밌는 것은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가장 보기 쉬운 곳에 배치를 했고
아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뭐 하라는 거예요. 따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정녕 죽음이 뭔지를 경험하라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계속 매일같이 12개씩 따 먹고 있잖아요.
선악과. 그것 먹으면서 여러분이 고통스러워야 된다니까요.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되나 진짜! 이렇게 살려면 확 죽고 싶다. 일이 안돼서가 아니라
이 내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게 되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게 정녕 죽음이에요.
한 번 네가 내 앞에서 별도의 나를 한 번 챙겨봐.
별도의 너를 한번 내 앞에서 챙겨 가져봐라. 그때 정녕 죽음이 뭔지 알게 될 거야.
그때 너에게 허용되었던 은혜로 허용되었던 너라는 존재를 별도로 챙겨 가지 않을 수 있는...
그 허용되었던 생명나무 실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건 그냥 덥석 먹으면 되는 거예요. 은혜로 뭘 해서 다리를 놓아가는 게 아니라.
그런데 이것들이 자기의 존재 주체성을 챙기려고 하다 보니까,
나라는 존재를 별도로 확립을 하려고 보니까,
이 위반이라는 걸 통해서 나의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죠. 이게 죽음이라니까요.
이 나의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시도를 얼른 버리고 쪽팔리더라도 주는 걸 그냥 먹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때 어 이거 내가 내 존재를 별도로 구축하여
챙겨 가지려고 하면 이게 죽는 거구나 라고 했을 때
그때 생명나무 실과에 그 위대함이
나에게 자각이 되고 그들에게 생명나무 실과가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부수고 구약을 부수고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생명나무가.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생명나무만 있는 거예요.
선악과가 없는 거예요. 구약은 부수어지는 거니까. 그게 산상수훈이에요.
산상수훈을 이거 지켜라, 저거 지켜라, 그럼 복주께
안돼도 오른편 뺨 때리면 왼편 뺨 대줘, 그렇게 연습하면은 나중에는 된단다.
되긴 뭐가 돼요.. 어금니 다 빠져요.
그렇게 벼르고 벼르다가 막 꿈속에서 그냥 난도질하고 그 뭐냐구요.
하나님이 그 정도의 선을 우리에게 원하시겠어요?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별도의 자아를 주체로 확보하려고 하는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공격당해서 .
결국 자기 부인의 자리....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애통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리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산상 수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