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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8,41-46
그 무렵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42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
43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하고 일렀다.
시종이 올라가 살펴보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44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
45 그러는 동안 잠깐 사이에 하늘이 구름과 바람으로 캄캄해지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합은 병거를 타고 이즈르엘로 갔다.
46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이즈르엘 어귀까지 뛰어갔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나라’와 관련짓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의로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룸은 산상 설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앞세워 '의로움'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중심인 6장에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의 의로움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갈라 3,11)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
(로마 3,20)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섯 가지 대당 명제를 통해 제시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율법의 ‘살인’을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만이 아니라,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까지도 포함시키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시키십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1요한 3,15)
물론 모든 ‘성’(화)냄이 살인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화’냄도 있고, 교정을 위한 ‘성’냄도 있고, 단순한 습관이나 짜증의 ‘성’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회서>에서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고 했듯이, 의도되지 않더라도 '혀'로 인하여 죽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이 '화해와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 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화해와 사랑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8)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으로>
안토니오는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의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있는 곳에 만족치 못하고 부적응한 변덕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긴 것은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성덕과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더 잘살아보려는 거룩한 원의 곧 뜻에 따라 옮긴 것으로, 그뿐 아니라 성인들 가운데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뜻이었다면 그의 뜻이 아닌 것이 그의 일생에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생은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던 한 생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한 생을 요약하면 뜻하지 않았던 한 생인데, 하느님 뜻이었던 한 생입니다.
자기 뜻에 따라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자기 뜻에 따라 모로코로 순교하러 갔지만 그의 뜻은 병으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향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배는 풍랑으로 인해 고향이 아니라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 풍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곳에서 조용히 은수자로 살고자 하였는데 참석한 서품식 강론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안토니오가 강론하게 됐고 이로 인해 설교자가 됩니다.
이 갑작스러운 일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무튼 그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설교자가 되고, 관구장도 되고, 프란치스칸 최초의 신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서른여섯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흔히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가요 신학자였지만 오늘 지혜서의 말씀처럼 기도에서 얻은 지혜로 설교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주겠다."
이것은 또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신학 교수직을 허락하며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았고, 그 영의 불이 활활 타올랐으며,
그래서 기도의 영으로 가르치고, 헌신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뛰어난 설교가’요 ‘곤경 중의 전구자’로 인정합니다.
지금 치면 대학자가 강단에만 서지 않고 서민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너무도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것인데 여러분에겐 어떻습니까?
내가 뜻하지 않은 그러나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을 안토니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하고 예물을 바쳐도 정말 아무 쓸모 없는 경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타인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자격입니다.
빚이 없다란 뜻입니다.
내가 부모 때문에 의롭게 되었는데, 형제를 괴롭히고 부모에게 찾아와서 예물을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에게 원망을 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책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은 어린 소녀 스카웃 핀치와 그녀의 오빠 젬 핀치이며,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는 마을의 변호사입니다.
스카웃과 젬은 동네에서 이상하다고 소문난 부 래들리의 집 앞에서 노는 걸 좋아합니다.
부 래들리는 일체 마을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에 고마워 그들이 노는 나무 앞에 간식을 놓아두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는 도덕적 용기와 정의를 중요시하는 인물로, 아이들에게 항상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아티커스는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종차별이 심한 메이콤 마을에서 용기를 보여줍니다.
톰은 백인 여자 메엘라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메일라가 톰을 끌어들인 것이고 그녀의 아버지 밥이 그것을 보고는 메엘라를 구타하고 톰을 강간범으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아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항상 타인을 이해하고, 편견을 갖지 말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주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놀림과 비난을 받습니다.
젬은 이러한 상황에서 화가 나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티커스는 그들에게 인내와 용서를 가르치며,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알려줍니다.
아티커스는 젬에게 총을 선물해 주면서 다른 새는 다 잡아도 되지만, 앵무새는 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앵무새는 아티커스가 변호하는 죄 없는 톰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사실 밥이 못된 인간이고 자기 딸의 잘못을 톰에게 뒤집어씌운 것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다 백인이었기 때문에 톰은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밥은 여전히 판사의 집을 습격하고 애티커스의 자녀들을 위협합니다.
젬도 밥에게 팔이 부러지는 공격을 당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 밖으로 안 나오던 부 래들리가 나와 밥과 싸워주었고 밥은 칼에 찔려 사망합니다.
다행히 보안관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냥 자기 혼자 넘어져 그렇게 된 것으로 목격 증언해 주겠다고 하고 마무리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의 도덕적 가르침과 용기를 통해 스카웃과 젬이 세상의 편견과 불의를 극복하고, 타인과 화해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이 책에서 형제간의 관계 회복과 성장을 끌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정말 주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와도 소용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원망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앵무새를 죽인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사.시.]에는 이것이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존재였고, 세리는 죄인이기는 하였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리사이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돈을 바쳤고 세리는 감히 나서지도 못했지만, 누가 의롭게 되어 돌아갔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기도나 미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양심 성찰이 이것입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은 없는가?’
앵무새를 살리려고 목숨을 거는 아버지에게 앵무새를 죽이고 와서 죽은 앵무새 고기를 바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한때 한국 살레시오회의 전설이셨는데, 이제는 아프리카의 살레시안들의 존경받는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에서 사목하실 때, 한국인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많은 성가들을 직접 작사작곡하셨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좋기도 좋을시고’입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지금도 형제들이나 가족 구성원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교의 날이나 명절에 자주 부르곤 합니다.
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그 공동체에는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분위기가 무척 썰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가 선창을 담당하는 형제가 공동체 미사 마침 성가로 ‘좋기도 좋을시고’를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찹찹하고 심각한데, 공동체 분위기가 전혀 전혀 아기자기하거나 오순도순하지 않은데, 그래서 얼굴이 다들 심각한 표정인데, 입으로는 좋기도 좋을시고,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너무나 어색하고 웃겼습니다.
외국 생활을 할 때 한동안 한 작은 수도 공동체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미사를 마치면 작은 방에 제 식사를 차려주셔서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빵을 먹는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에서는 미사를 마친 수도자들이 식사를 했는데, 뭐가 그리 꼬였는지, 매일같이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광경이 반복되니, 여기 매일 오다가는 나까지 전염되겠다는 생각에 미사 나가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거룩한 얼굴로 미사를 봉헌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다투니, 속으로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보다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1)
앞의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5,17).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율법 실천을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형제를 모독하는 일도 십계명 제5계명을 위반하는 일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폐지하신 일이 아니라, 그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라는, 즉 계명 실천을 완성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살인’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만큼이나 ‘큰 죄’ 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그 미움을 없애는 것까지 해야 계명 실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감추고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십계명 제5계명을 잘 지킨다.”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자의 위선’입니다.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도 죄이고, ‘위선’도 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실 그 마음 자체가 죄입니다.
‘죄의 뿌리’가 아니라, 그냥 죄입니다.
뒤의 6장에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6,4.6.18).
‘숨은 일’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한 일을 뜻하기도 하고, ‘마음속’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동도 보시지만, 우리의 마음속을 먼저 보십니다.
그러니 제대로 회개하려면 우선 먼저 마음속부터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 선언’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8).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2)
20절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고 경건하고 깨끗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고, 그래서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3)
23절의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형제가 나에게 화가 나 있고, 나를 미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죄이고, 그 형제가 분노와 증오심을 품게 만드는 것도 죄입니다.
(1)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형제가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남을 용서하는 일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살다보면 남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그런 경우에, 형제와 화해하려면 내가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형제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2)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그 형제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또 화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형제가 화해하기를 거부한다면, 역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2베드 3,9).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언제나 항상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의로운 삶 -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성도들은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
(시편 132,9)
제가 강론을 쓰면서 참 많이 등장하는 말마디가 “참”이요 “참으로”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도 “참 의로운 삶,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으로 정했습니다.
유난히도 우리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말마디같습니다.
참을, 진리를 추구하는 타고난 정신을 지닌 한국인들 같습니다.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 봤습니다.
“순우리말로 진실, 사실이라는 뜻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참말이냐 거짓말이냐’ 등의 예문이 있다.
접두어로는 ‘진실하고 올바른’ 혹은 ‘품질이 썩 우수한’, ‘먹을 수 있는, 맛이 좋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기름, 참나무, 참꽃, 참교육, 참군인, 참사람등이 있다.”
새벽 일어나 우선 열어보는 것이 교황님의 홈페이지입니다.
어제 삼종기도 후 강론 제목은 ‘성령이 성서를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였습니다.
성서 대신 사람을 넣어, ‘성령이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즉 참사람이 되게 한다로 읽어도 좋을 것입니다.
또 2025년 희년을 맞이한 바티칸 메디아 주제도 멋졌습니다.
“관광객에서 순례자로: 자신을 변형되도록 하라!”
(From Tourist to Pilgrim: Let yourself be transformed!)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말마디에는 영어나 한자를 병기하게 됩니다.
흔히 믿은 이들의 여정을 순례여정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순례자, 진리의 순례자,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갈 때 참삶의 실현이겠습니다.
마침 다산의 말씀도 참삶에 대한 지침처럼 보입니다.
“동물은 오늘을 살기에 일희일비하고, 인간은 오늘을 쌓기에 일취월장한다.”
“안목이 짧은 사람은 오늘 뜻대로 안되면 울고, 내일 뜻에 맞으면 생글거린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참을 추구하는 이가 참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우리의 성소도 관광객이 아닌 참된 순례자의 진실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 말씀에서 착안된 참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제자들의 충실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충실성, 더욱 새롭게 되고 절박하게 된 충실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런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태 5,6ㄱ)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마태 5,10ㄱ)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한다.”
(마태 3,15ㄴ)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ㄱ)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ㄱ)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마태 21,32ㄱ)
정적靜的인 의로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양되고 업그레이드 되는 동적動的인 의로움으로,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처럼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이런 동적 의로움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하시며, 그 첫째가 오늘의 “성내지 말라”입니다.
200주년 성서와는 달리 새 번역 성서는 “화해하여라”입니다.
화해하니 요즘 한창인 개망초 들꽃들이 연상됩니다.
화해라는 멋진 꽃말에 개망초꽃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저는 “성내지 말라”가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성내지, 화내지 말아야 합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이들이 자주 화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지도자를 보면 자주 격노했다는 보도를 보는데 지도자로서는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내는 것 반대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을 한층 깊이있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형제에게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에게 격렬한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형제들에 대한 이런 이성을 잃은, 형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분노나 막말은 그대로 간접적 살인에 버금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노나 비난은 살인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여차하면 살인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쇄신, 마음의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정화를 요구하는 의로움입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들과는 화해후 예물을 바치라는 요구, 고소한 자와는 얼른 타협하라는 권고 역시 삶의 지혜이자 참된 의로움의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두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이요,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혼자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살핀다는 신독(愼獨)의 수행과 습관도 참으로 필요함을 느낍니다.
바로 이런 참된 의로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가뭄해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의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의 기도가 하느님을 감동케 하며, 엘리야의 이런 마음은 다음 동작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는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릅 사이에 묻었고, 무려 시종에게 일곱 차례까지 묻습니다.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보아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시종의 대답입니다.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킨 엘리야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의 손이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뛰아가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의 한생애가 참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진리 추구에 몸바친 의로운 삶인지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포르투칼 리스본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5세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참사회원으로 입회하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음적 생활 방식과 순교에 크게 매료되고 감화받은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에 입회했고,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모로코로 파견된 안토니아는 심한 병으로 회항하여 귀국길에 오르던 중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고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어 그는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대 설교가로서 성 안토니오를 능가할 자는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인을 ‘성경의 보물창고’, ‘신약의 방주’라고 불렀습니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35세로 선종한 후 다음 해 1232년 5월30일 스폴레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거의 700년 후 1946년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합니다.
안토니오는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특히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았던,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승천한 엘리야요, 하느님의 불꽃같은 치열한, 의로운 삶을 살다가 35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회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
‘21세기에 여전히 종교는’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종교의 발전 과정에서 학자들은 ‘자연, 신, 인간’의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의 엄청난 힘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이때 생겨난 종교는 자연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큰 바위, 높은 산, 오래된 나무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보다 힘이 센 동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곰, 호랑이, 사자, 코끼리, 늑대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고, 능력이 발전하면서 ‘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민족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정하였고, 신을 경배하였습니다.
이런 신화의 시대가 발전하면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생겼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유일신의 시대는 신분이 정해진 시대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사회였습니다.
성주나 왕이 종교를 선택하면 백성들 모두가 같은 종교를 믿는 사회였습니다.
이 신화와 신의 시대가 2,000년 넘게 이어왔습니다.
르네상스, 산업혁명, 과학의 발전,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이제 ‘인간’ 중심의 시대가 왔습니다.
자연과 동물을 숭배하던 인간은 신을 숭배하였고, 신을 숭배하던 인간은 이제 인간의 능력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열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인간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에 인간의 과학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서 인간은 누군가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였던 곳에서도 비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종교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비신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가 가지는 힘은 ‘친교, 공동체,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갑을 들고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고,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인 체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지식, 윤리적인 실천은 여전히 종교가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삶>
혹시 레밍(lemming)을 아십니까?
어느 정치인이 우리나라 국민을 빗대서 ‘레밍’이라는 표현을 써서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그네쥐라고 불리는 이 레밍은 자살하는 쥐로도 유명합니다.
일정 수 이상의 개체가 밀집하면 메뚜기 마냥 갑자기 행동 양식이 바뀌어서 떼를 지어 무작정 몰려다니는 기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이가 바닥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행동이지만, 한번 떼를 짓는 순간 무작정 앞을 향해 직선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만 한다는 게 이상한 점입니다.
이러다 보니 땅끝 해안 절벽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우르르 떠밀려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살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가 미화되어서, 개체군의 밀도가 높아지거나 먹이자 부족해지면 늙은 쥐들이 후손을 위해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단지 습성이었고,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뒤따르는 다른 쥐에 밀려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고귀한 동물처럼 생각했지만, 사실 레밍은 군중심리로 인해 비이성적, 비합리적 행동을 생각 없이 집단으로 하다가 파국적 선택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남들처럼 살려고 합니다.
나만의 삶이 아닌 너의 삶, 그리고 그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나답게 살지 않을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작정 앞으로만 갈 뿐입니다.
혹시 레밍처럼 절벽 아래까지 무작정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남들의 삶이 세상의 뜻만을 따르는 삶입니다.
남들처럼 풍요와 안정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는 나만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끔찍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잘 아는 율법의 내용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되나.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율법 내용의 준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되고 또 ‘바보!’라고 말해서도 안 되며, ‘멍청이!’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그렇게만 살게 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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