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에 거주하는 37살 개업의 이명규(가명) 씨는 주위에서 알아주는 미술 애호가다. 몇 년 전 갤러리를 드나들며 알게 된 작가의 작품을 처음 구입한 이후로 한 점 한 점 그림을 사 모으고 있다. 아내도 평소 술자리나 골프 라운딩 등을 즐기지 않는 이씨가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미술품 구입에 목돈을 쓰는 것에는 괘념치 않는다. 부부는 언젠가 그 작품들 중 ‘잭팟’이 터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하지만 사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집안 곳곳에 걸어놓고 보는 재미만도 쏠쏠하다.
재벌 사모님들의 공식적인 직함은 대부분 '미술관장'이다. 우아하고 고등한 취미를 뽐내기 위함인지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깊은 뜻인지 고질적으로 지적받듯 탈세의 창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월급쟁이인 우리에게 미술품 구입이 무슨 해당사항이 있나 싶다. 예술이 투자 성격을 띠면서 예술의 숭고함은 비싸게 팔리는 것에 다름 아니게 돼버렸다.
어느 경제학자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생활의 질이 향상돼 현대의 평범한 사람은 19세기 록펠러보다 잘 산다고 했다. 일찍이 TV, 인터넷, 대중 예술, 유흥과 쇼핑 등 다양한 물질적·문화적 수혜를 입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과거 부유층의 ‘차가운 유산’이던 미술품을 쇼핑하듯 가볍게 즐기기로 한 것 같다. 실제로 신사동 패션거리에 위치한 갤러리 ‘FIFTY FIFTY’에는 자이언티, 강소라 등 미술을 사랑하는 젊은 연예인들이 직접 작품을 골라 사간다.
예술품 경매사 아이옥션의 공균파 실장은 “경매품 중 100만원 이하 작품도 많아 명품 백보다 싸다”고 말한다. 그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일찍이 성공을 맛본 젊은이들은 재테크 목적으로 구입하고 이들이 선호하는 작품은 모던 컨템포러리 아트 장르”라고 설명한다.
선진국 투자사들의 경우 투자 포트폴리오에도 주식, 외환, 부동산과 함께 미술품을 포함시킨다. 저금리에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젊은 부호들까지 미술품 시장에 눈을 돌리면서 지난해 세계 미술품 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지난해 미술품 경매시장 거래액은 152억달러로 2013년보다 26%나 증가했다.
중저가 시장이 커지면서 서울옥션은 디지털 프린트 그림판매점 ‘프린트 베이커리’에서 10만원대의 작품들을 팔기 시작했고 최근엔 코엑스, 분당 AK플라자 등 도심 쇼핑몰에도 세계 유명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갤러리 ‘옐로우 코너’가 문을 열었다. 한국에도 초급 ‘아트 쇼퍼’들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전시회를 찾아다니며 미적 욕구를 채우는 데 그쳤던 이들도 이제 성과급을 떼어내 그림을 사고 되팔며 ‘아트 테크’를 시작했다. 뉴욕 컬렉터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더 컬렉터스(강희경 지음, 1984 출판사 펴냄)>에서 컬렉터인 시저 야쿠나도 “물려받은 유산은 없다. 저축을 작품과 바꾸었고, 그렇게 사두었던 몇 작품을 옥션에서 팔아 더 많은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고 했었다.
비영리재단 소속 한원미술관의 이지나 큐레이터는 “신인작가의 경우 80~100만원 선(소품은 50만원 선)에서도 좋은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가격대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 가격에는 작가의 경력, 작품성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간혹 합당하지 않게 너무 부풀려진 작가도 있는 것 같다도 말했다.
아트 시장에도 온라인 바람이 불어 초급자들이 경매장 ‘문지방’을 쉽게 넘도록 해준다. 미술품 경매사 K옥션의 관계자는 경매를 진행할 때마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연령, 지역 등 범주가 넓어져 컬렉터 층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온라인 경매 방식을 통한 신규 컬렉터 유입이 활발하다고 덧붙였다.
관계자는 “메이저 경매가 최소 300만원 이상에서 보통 1000만원대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한편 온라인 경매는 합리적 가격대 작품도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프라인 경매의 경우 나와 경쟁관계의 다른 응찰자가 얼마만큼의 가격을 부르는지 모르지만 온라인 경매에서는 이를 파악하기 용이하다”고 귀띔했다. 요즘의 아트 컬렉터들은 온라인 경매에서 판화, 소품 등의 합리적 가격대의 작품을 시작으로 메이저 경매라고 부르는 오프라인 경매를 거치면서 그림 보는 눈도 키워간다는 설명이다.
아트 쇼퍼들이 예전 세대의 컬렉터들과 또 다른 점은 전문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취향과 판단이다. 올해로 ‘아트 쇼핑’ 8년차인 강희재 씨는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 사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에 어렵고 치밀한 그림보다 밝은 색감의 그림이 좋았다. 좋아하는 컬러들로 조합된 그림을 사서 사무실과 집안에 걸어놓고 보면 심리적으로 ‘컬러 테라피’ 효과도 체험하고는 했다.
대구에 사는 개인 사업가 김종수 씨는 4년 전 지인의 작품을 구입하면서부터 아트 컬렉터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추상화였는데, 그림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색감과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고 첫 아트 쇼핑 경험을 기억한다. 이어서 그는 지금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구입한 작품의 가격은 항상 합리적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구하기 힘들었던 중국 스타 왕조현 책받침을 당시로서 정말 큰 금액인 5000원을 주고 산 적이 있었는데요. 당연히 너무 좋았고 후회하지 않았지요. 그런 거예요.”
이지나 큐레이터는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 작가의 유명세나 인지도보다 ‘봤을 때 좋은 그림’을 사는 것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더 열린 마음으로 미술품과 미술시장을 즐겨주길 부탁하기도 했다.
사실 미술계 전문가들은 천만원 이하 작품으로 재테크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거창하게 ‘아트 컬렉터’라고 부르지 말라며 손을 내젓는 ‘아트 쇼퍼’들은 오늘도 즐거운 아트쇼핑 중이다.
박재성기자 /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