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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21,1ㄴ-16
그때에
1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
그 대신 그대에게는 더 좋은 포도밭을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셈하여 줄 수도 있네.”
3 그러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4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제 조상님들의 상속 재산을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궁전으로 돌아갔다.
아합은 자리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5 그의 아내 이제벨이 들어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속이 상하시어 음식조차 들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6 임금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실은 내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그대의 포도밭을 돈을 받고 주게. 원한다면 그 포도밭 대신 다른 포도밭을 줄 수도 있네.’ 하였소.
그런데 그자가 ‘저는 포도밭을 임금님께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는 것이오.”
7 그러자 그의 아내 이제벨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제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당신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8 그 여자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인장으로 봉인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시오.
10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11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
12 그들이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자,
13 불량배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맞은쪽에 앉았다.
불량배들은 나봇을 두고 백성에게,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를 고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인 다음,
14 이제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15 이제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합 임금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셔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돈을 받고 넘겨주기를 거절하던 그 포도밭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합은 일어나,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 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40-42)
<오늘의 말·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악인의 악에 말려들지 않는 비법>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마태 5,39)
오늘 주님의 말씀들은 문제적인 말씀들입니다.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악인과 맞서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는 뜻이거나 복종까지는 아니고 타협하라는 뜻이라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옳은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복종이나 타협의 뜻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악인이란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죄인이나 사회정의를 거스르고 사회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주님은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뜻은 맞대응하거나 말려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가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해 불행해지거나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왜 그들 악플을 보느냐, 보더라도 대응치 않으면 되는데 왜 대응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악플을 볼 때부터 이미 그 악인들의 악에 말려드는 것이고, 한번 대응하기 시작하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얽히게 되지요.
이는 마치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은 것이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딜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도 악플에 말려드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원해서겠습니까?
원치 않는데도 말려드는 거지요.
남이 상처를 줘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하는 말이 ‘준다고 다 받느냐? 좋으면 받고 싫으면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인데, 그런데도 받는 것은, 받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지요.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싶지만 몸이 약하고 면역력이 약해 받듯이 상처나 모욕 같은 것들도 받고 싶지 않지만 약하기 때문에 받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약하다면 무엇이 약한 것일까요?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약한 것이며, 그래서 심리적으로 약하면 우울증에, 정신적으로 약하면 정신병에, 영적으로 약하면 마귀 병이 드는 것이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랑이 강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하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 고통에 약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은 또 왜 불완전하고 약합니까?
그것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좋은 것만 좋아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자란 사람은 웬만한 악플에 까딱없습니다.
연예인 같이 인기를 끌고 좋은 얘기만 듣던 사람이 계속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기에 악플을 보게 되는 것이며 악플에 말려들고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 한 뺨 맞고 다른 뺨까지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오리뿐 아니라 십리까지 가 줄 사랑이 있는 사람은 악인이 하는 짓에 말려들지도, 대응하지도, 까딱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지에 도달하면 맞설 악인조차 없게 되겠지요?
내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될 텐데 원수까지 사랑하면 내게는 악인이 아예 없게 되는 거지요.
바라고 요구하는 딱 그만큼이 아니라 바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려는 우리가 되라시는 오늘 주님이십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오늘 복음은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악인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밭을 노립니다.
나봇은 아합에게 포도밭을 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벨 여왕이 나서서 일을 꾸며 나봇을 죽게 합니다.
나봇은 반항도 못 해보고 포도밭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말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독재자가 나타나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데모라도 해서 저항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대로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지배하에 있었지만, 로마에 세금을 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악인에게 맞서면 같은 수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주인공은 사이코패스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본인이 그 사이코패스보다 더 악랄한 존재가 됩니다.
같이 놀면 같은 존재가 됩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뒤집어엎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권을 잡으니 더 악랄한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쿠데타를 해 보니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들고일어서지 못하게 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싹부터 잘랐습니다.
그리고 무려 49년 동안 20세기 들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독재정권을 유지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를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과 맞서면 나를 따르는 이들도 그를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중에서 많은 이들은 마음에 미움을 가지게 될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민중이 귀족과 종교에 대해 들고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런데 몇몇 선동에 일반 시민들은 수많은 사제와 귀족들의 머리를 단두대에 올려 잘라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미움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범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와 맞서지 않고 그를 감싸셨습니다.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기기 위해 입맞춤하실 때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끌려가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유다를 감싸신 이유가 ‘하.사.시.’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에 잘 드러납니다.
“적어도 마지막 시간까지, ‘죄악’을 숨겨 두어, 제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피로 그들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7-224).
만약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드러내셨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당신 제자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나쁜 생각이 깃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악인에게 맞서면 안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고 분별하는 장소입니다.
더 큰 고통과 시련이 있을수록 더 정화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 저항하거나 맞서기보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으셨는지 먼저 배워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언제나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
예나 지금이나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현장에는 언제나 사악한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그의 뒤에는 그에 못지않은 사악한 여인들이 존재해왔습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악함에 있어서 어찌 그리도 유사한지...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 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 39~42)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 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선은 악보다 강하고, 언제나 항상 선이 악을 이깁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1)
오늘 말씀에서, 대사제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요한 18,19-23)
이 이야기를 번역되어 있는 대로만 읽으면, 예수님께서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바리사이들 같은 분이 되어버립니다.
우선 먼저 우리말 성경의 번역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 존댓말이 없긴 한데, 우리말로 옮길 때 예수님 말씀을 존댓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사실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왜 나에게 묻느냐?” 라고 말하는 경우는 실제 현실에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니 실제로 대사제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전 경비병을 향해서 하신 말씀도 엄하게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씀으로 번역했다면, 또 존댓말로 번역했다면 분위기와 느낌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 대신 것은 아니지만, ‘폭력을 포기하여라.’, 또 ‘앙갚음하지 마라.’ 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신 것은 맞습니다.
2)
재판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한 모욕과 폭행을 당하셨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
(마태 26,67-68)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베드로 사도는 그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1베드 2,23)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 12,2-3)
3)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
그 곁에 서 있던 자들이 "하느님의 대사제를 욕하는 것이오?" 하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저분이 대사제인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네 백성의 수장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23,1-5)
대사제가 바오로 사도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이 신성 모독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대사제가 율법대로 재판하지 않는 것을 항의했습니다.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은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5절의 말도, 사과하는 말이 아니라 대사제를 꾸짖는 말입니다.
대사제답지 않게 행동함으로써 대사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은 대사제 자신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합해서 생각하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행을 당해도 그냥 참으라는 뜻이 아니고, 악에 굴복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같은 악행으로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17.19.21)
우리는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선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반드시 ‘선’이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전사 - 폭력을 포기하라 - “악에 대한 승리의 비결은 주님과의 일치뿐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경계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다산>
“남용이 ‘백규’ 구절을 날마다 세 번씩 외우자,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논어>
저절로 참삶이 아니라 한결같은 노력으로 이뤄지는 참삶임을 깨닫습니다.
험하고 거친 인생 광야 여정, 성인이 되기보다는 악마가, 괴물이, 폐인이 될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참 중요한 일이 참사람이 되는 일이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요, 이를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훈련에 온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구체적으로 진리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를 뜻합니다.
어느 피정온 자매가 밤에 보내온 메시지와 이에 대한 답글입니다.
“우울증으로 방황하다 계단에서 넘어져 1년반 정도 의식잃고 병원생활하다 6월8일 별세한 친구입니다.
구원은총 청하며 피정기간 동안 연미사 봉헌합니다.”
“예, 그렇게 연미사 봉헌합니다. 너무 불쌍하네요.”
벙사, 사고사, 객사, 자살자등 불쌍하게 살다가 불쌍하게 세상 떠난 이들이 곳곳에 너무 많습니다.
유비무환이 답입니다.
살아 있을 때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그리고 영혼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끝으로 성모님께 바친 전구입니다.
“당신 안에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도록 만드시고 환영하신 분, 동정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 역시 복음의 너그럽고 충실한 씨뿌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사랑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5 대당명제인 “폭력을 포기하라.”입니다.
200주년 주석성경은 “보복하지 말라.”입니다.
보복은 물론 일체의 폭력을 배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격성, 잔인성, 폭력성, 배타성을 꿰뚫어 통찰한 예수님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괴물을 순하게 길들이는 일 역시 평생 수행의 목표가 됩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군더더기 설명이 불요할 정도로 자명하게 공감하는 예수님 복음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완전히 압도하며 능가하는 의로움의 실체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져 돌려 대어라.
또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우리 내면의 상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괴물을 순치할 수 있는 평생과제입니다.
결코 무저항주의자로, 겁보로 비겁한 자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 사랑의 저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일일이 악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악의 박멸이 아니라 아예 악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예방이 제일입니다.
이렇게 인간 탐욕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악은 제어할 수 없습니다.
건드릴수록 강해지는 악이요 결코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악에 대한 처방은 선善이 아니라 성聖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삶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내적으로 강해질 때 악에 대한 두려움도 약화됩니다.
무지의 악이요 악의 신비입니다.
발본색원할 수 없는 악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성공한 적도 없고, 피흘리는 혁명이 성공한 적도 없습니다.
세계나 국내 현실을 보세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악의 세력이 약화되기는커녕 날로 강해지는 느낌입니다.
교황님의 평화를 위한 기도 요청입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단, 미암마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위해우리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자.”
무엇보다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전쟁의 참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악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의 자발적 실천 뿐입니다.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방법이요 악을 무장해제 시켜 무력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이 권한 사랑의 저항은 내적 힘의 반영이요 존엄성의 발휘입니다.
무력으로 악마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힘, 내적 사랑의 힘으로 악마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래서 말씀과 기도의 수행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져가는 일치의 삶이 우선입니다.
폭력이, 보복이 일순간 통쾌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선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폭력이요 보복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듯 하나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의 악의 괴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진리의 실천으로 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거룩하게 합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만이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 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 장면을 보세요.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농간으로 유약하고 탐욕만 가득한 아합은 중심을 잃고 무죄한 나봇을 합법을 가장하여 감쪽같이 죽이고 나봇의 땅을 제땅으로 만듭니다.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악행을 태연히 감행할 수 있는 아합이요 이제벨인지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또 현재의 세상에서도 반복되는 악의 현실을 체험합니다.
잔인무도하고 사악한 이들이 여전히 활개치는 현실입니다.
악과의 영적전쟁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아합왕과 왕의 아내 악녀 이제벨에 의한 나봇의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은 다윗에 의해 죽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들뿐 아니라 인류역사상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어나간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보상될 수 있을런지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악의 화신같은 아합과 이제벨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같은 이름이요, 회개와 더불어 영적 분발을 촉구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모두 악과의 전쟁에서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희망>
음악 프로그램 중에 ‘가요 톱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순위를 정하는 겁니다.
경쟁이 치열하면 매주 순위가 바뀌곤 합니다.
5주 연속 1등 하면 자연스럽게 다음 순위로 1등이 정해집니다.
20위 권 밖에 있지만 사람들이 점차 좋아할 만한 노래도 정해서 들려줍니다.
순위는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노래도 흐름이 있는지 어떤 때는 서정적이고 조용한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과 춤이 어우러진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K Pop이 사랑받으면서 솔로 가수가 아닌, 그룹이 순위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HOT, 동방신기 그리고 방탄 소년단이 있습니다.
걸 그룹에는 SES, 핑클, 소녀시대 그리고 뉴진스가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았던 1991년 가요 톱텐 1위 곡은 이렇습니다.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김지애의 몰래 한 사랑,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이선희의 추억을 책장을 넘기면, 노사연의 만남,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있습니다.
33년 전의 노래인데 지금도 멜로디와 가사가 생각납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슴 벅찬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 중에 ‘노아의 방주’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홍수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탈출기’가 있습니다.
앞에는 깊은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홍해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린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정말 기적처럼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나왔습니다.
‘5병 2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카인의 죄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 첫 번째 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갔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죽였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독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아합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 때문에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봇을 억울하게 누명 씌어서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억울한 죽음이 많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는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보여줍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꼬마 아이와 큰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어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이가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어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바보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자가 정색하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스승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렇다. 네 말도 맞다.”
어쩌면 자기를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진리를 향하는 방법인 바보들과 다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설득해 봐야 무의미한 논쟁이고 이를 얼른 끝내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 동의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논쟁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당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것이 가장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더 큰 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니 그보다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넓은 마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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