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정체성은?>
오늘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것입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왜 사랑하고, 천벌을 받아 죽었으면 좋은 사람을 위해 왜 기도하냐고.
지금까지 이런 물음에 그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주로 대답해 왔습니다.
사실 원수가 있는 것보다 원수가 없는 것이 낫지요.
원수가 있다는 것은 나의 불행이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미워하는 나보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더 완전하고 성숙합니다.
그러니 나의 행복과 나의 완성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해온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지만, 오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왜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보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이라는 각도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44ㄴ-45ㄱ)
이것은 마치 왕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왕족의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답게 하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더 그러겠습니까?
원수는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하고 세리나 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 말씀하시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무척 경멸하는 존재였잖습니까?
이렇게 세리와 비교하면서 너희도 세리처럼 되겠냐고 오늘 주님께서는 도전하시며,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일깨우시고,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녀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듯 선인과 악인 가리지 않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고 오늘 주님 도전하시는데, 그 도전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이라도 먹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라>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미처 사랑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하면 저절로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이유>
원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요?
기도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정말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안 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여인이 기도의 힘으로 무엇을 얻었는지를 말하며,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이마쿨레 일리바 기자의 『로사리오 기도: 나의 생명을 구한 기도』를 덴버 가톨릭(Denver Catholic)이라는 블로그에서 “감히 용서하라!”라는 제목으로 정리해서 쓴 글입니다.
"임박한 죽음의 고통이 "천 개의 바늘처럼" 임마쿨레의 몸을 찔렀다.
그녀는 "어떻게 죽는 거지?" 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그녀가 다른 8명의 여성과 함께 숨어있던 3x4피트 크기의 화장실 밖에서, 그녀는 총과 마체테와 창을 든 남자들이 집을 수색하기 위해 다가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까?"
의심과 분노, 용서할 수 없는 그녀의 치열한 내적 싸움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 그랬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만약 내게 신의 힘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순식간에 모두 죽일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는 르완다의 두 주요 부족인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오랜 정치적, 민족적 긴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박한 비극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고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나왔는데, 성모 마리아는 1981년 키베호라는 작은 마을에서 슬픔의 성모라는 제목으로 세 소녀에게 나타나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바꾸고 하느님을 따르지 않으면 르완다에 피의 강이 흐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투치족을 몰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계획된 종족 말살 사건은 1994년에 대통령의 헬리콥터가 격추된 후에 시작되었다.
투치족을 비인간화하기 위한 수년간의 마케팅 노력 끝에, 이제 그 메시지는 라디오에서 공개적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라. 바퀴벌레를 끝장내라!
아이들을 잊지 마라. 나라를 깨끗이 해야 한다!"
투치족인 이마쿨레 일리바 기자는 겨우 십대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묵주를 주고 이웃집으로 보내 숨게 했다.
그 이웃은 반대 부족의 일원이었지만 정직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91일 동안 피에 굶주린 남자들이 대낮에 수천 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는 동안 나머지 8명과 함께 작은 화장실에 숨어 지냈다.
이마쿨레의 증오와 용서의 신앙적 갈등은 그녀가 숨어든 지 불과 며칠 만에 시작되었다.
발각될 가능성에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로 "문을 열어라, 고문을 끝내라! 어쨌든, 놈들은 널 죽일 거야."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그녀에게 "문을 열지 마라.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것은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기회가 있다."
그때 그녀는 인생을 바꾸는 약속을 한다.
"하느님, 저는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다시는 당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문인지 집을 수색하던 남자들은 화장대 뒤에 잘 숨겨져 있는 화장실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를 도와주는 남자에게 성서를 달라고 부탁하였다.
처음으로, 그는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성서를 주의 깊이 읽기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 순수한 사랑으로 자신을 창조하셨고 천국의 축복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곳에 가려면 예수 말씀과 계명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천국의 영원성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나 이마쿨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따끔한 현실에 직면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용서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나는 내가 곤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은 내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라고 이마쿨레는 회상했다.
대신 그녀는 아빠가 준 묵주로 눈을 돌렸다.
기도하면서 그녀는 새로운 것, 즉 깊은 평화를 경험했다.
그녀는 이 평화를 꽉 붙잡았다.
그녀는 매일 총 27번의 묵주기도와 14번의 하느님 자비의 기도를 바쳤다.
이것만이 그녀가 분노와 절망의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 후, 하느님의 온화한 손길이 다시 한번 용서로 그녀를 이끌었다.
성부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라는 구절이 너무 불안해서 아예 생략하기로 했다.
적어도 하느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그녀는 다른 음성이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네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예수 자신도 이 기도를 바치셨고, 그분은 실수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때 처음으로 항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제게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내게 주어라.'라고 하실 때 '좋아, 기도는 하겠지만, 아직도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하느님의 도움이 왔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의 싸움은 십자가 밑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는 예수 말씀을 읽었을 때 끝이 났다.
이마쿨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순간 저는 진정으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예수 예수님께서 제게 용서의 공식을 건네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길, '너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닥칠 결과를 측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처럼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게서 배워라!"
그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저는 증오의 편에 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야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개월 만에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 은총에 의해서만 그녀는 부모, 형제, 사촌, 친구들을 포함하여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끔찍한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임재는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분이 나를 꽉 붙잡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여정은 이 지상에서 끝났지만, 너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의 삶이 얼마나 길든 간에 어떻게 살기로 선택하는가는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몇 년 후 그녀는 르완다로 돌아와 자기 가족을 죽인 모든 사람을 직접 용서했다.
이마쿨레와 함께 키베호와 키갈리로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녀가 기뻐하며 한 남자를 껴안고 돌아서서 "그의 오빠가 내 오빠를 죽였다."라고 말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용서하지 않음의 고통과 피해를 알고 있다."라고 말한 이마쿨레는 모든 이들에게 "그러니 간청하노니 감히 용서해 달라. 하느님을 붙잡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가고…. 용서에는 너무나 많은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감히 도전하라!"
[출처: ‘Dare to forgive: Immaculée Ilibagiza & radical reconciliation’, Denver Catholic]
기도는 성령을 받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받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면 점점 그것과 어긋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가장 큰 것이 미움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랑받는다고 믿는 이상 기도 안에서 미움은 성령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결국 하느님과 있는 행복을 택하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기를 택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런 능력이 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스테파노 성인처럼, 모세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음이 믿어지고 더 행복해집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원수 사랑의 비결, 주님 현존 안에 지속적인 머뭄>
우리 한국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박해의 순간을 잘 넘기고 놀라운 순교의 영예를 누리게 된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고민과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비결은 인간의 힘에 있지 않고 주님 현존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 순간 주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그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은 절대로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비결은 일상의 작은 기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대별로 이루어지는 아침저녁 기도, 삼종기도, 식사 전후 기도를 충실하게 하는 것.
특히 틈틈이 수시로 바치는 묵주기도는 주님 현존 안에 살아가기 위한 더없이 좋은 도구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 일정을 촘촘하게 기도로 짜고 또 짤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만이 순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요구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 44)
또 다른 순교라고 할 수 있는 원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냥 맨정신으로는 그 어려운 원수 사랑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묵주를 쥐고, 하루 온 종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 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오고 연장시키는 탁월한 도구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영예로운 순교였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주님>
1)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일인데, 사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편 가르기, 자기 편이 아닌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일,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 등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어떤 부상자를 고쳐 주신 일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당신의 계명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루카 22,49-51)
칼을 뽑아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라버린 사람은 베드로 사도이고(요한 18,10), ‘대사제의 종’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온 군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사용한 것인데, 상대방의 귀를 잘라버린 것은 아마도 칼이 빗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칼을 사용하는 것을 막으셨고, 그 다친 군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일은 원수를 사랑하신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전혀 저항하지 않고 체포당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라는 말은 천사 군대는 로마제국 전체 군대보다 수가 더 많고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속 사람들의 방식으로 일하셨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18,36)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힘이 없어서 참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약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아니라, 어느 정도라도 힘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힘없는 약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의와 선이 짓밟히고, 인권이 탄압 당하고, 약자들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럴 때에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만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가?
그럴 때에는 공동체가(교회가) 나서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고, 정의와 선과 인권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어야 합니다.
4)
자기 자신을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위치에만 놓고서 그 계명은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 자신’이 누군가의 원수일 수도 있고, 그 누군가는 원수 같은 나를 사랑하는 그 어려운 일을 실천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의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함부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고, 죄의 내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들(죄인들)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은 ‘바로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죄가 없으니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다.” 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이웃을 향해서는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자비와 사랑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악인, 불의한 이’가 곧 ‘나’ 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원수를 사랑하여라 - “하닮의 여정”>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된다”
요즘 눈에 자주 띄는 푸른 하늘에 흰구름을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제 짧은 자작시입니다.
누구나에 공통된 하늘 같은 하느님 안에 살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몇 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웬만한 책들은 도서실로 보내지만 감명깊었던,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들은 방이나 집무실에 보관합니다.
‘메르켈 리더십’이 그런 책입니다.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무려 16년간 재임했던 분인데, 퇴임 후로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 사실도 참 놀랍고 멋집니다.
재임중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책, ‘메르켈 리더십’의 마지막 문장도 잊지 못합니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지 묻는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노력했다(She tried).”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이 사실이 메르켈을 대변하고 있다.’
알베르크 슈바이처가 쓴 바흐 전기에서 다음같은 문답도 잊지 못합니다.
슈바이처가 묻고 바흐가 대답합니다.
“어떻게 자기 예술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낼수 있습니까?”
“나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다산의 삼근계三勤戒>
그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참 반듯한 천재의 특징은 “부지런한 천재, 노력하는 천재”임을 깨닫습니다.
상담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참으로 죄를 찾아보기 힘든 한결같이 성실한 분들도 간혹 만납니다.
이런 참 좋은 성인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의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있습니다.
감쪽같이 합법적으로 자행한 아합과 이제벨 합작품의 완전범죄와 같은 나봇의 살인에 대한 사실이 폭로되는 오늘의 제1독서 장면은 흡사 지옥의 심판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 눈에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격적입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심판이 참으로 단호하고 준열합니다.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져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아합에 이어 이제벨에 대한 천벌도 예고됩니다.
사가(史家)의 아합에 대한 평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엘리야의 선언에 회개한 아합에게 당장의 재앙은 보류되지만 그의 아들대에 가서는 에누리 없이 재앙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제1독서가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면, 오늘 복음은 천국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사명을 수행하며, 사랑하며 살기만으로도 턱없이 짧은 세상인데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해도 더욱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더욱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뿐이기에 남는 기도문은 “주님,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 하나 뿐일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하느님 친히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지금부터의 삶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단호한 결의와 선택으로 바로 지상천국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답은 하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주님의 제6 대당명제인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사랑뿐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기도뿐입니다.
원수를 좋아하라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과 존중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하느님 눈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와 박해자에게도 자기 탓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사정이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의 악의 희생자일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참 많을 수 있습니다.
무지에 기인한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왜곡된 시선이나 생각으로 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을 닮아, 끼리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의 편협한 이기적 사랑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사(聖事)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결코 동호회원들이나 친목회원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있는 모든 존재가 살 권리가 있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들이요,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통절히 깨닫는다면 전쟁의 악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난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물인생에 부여된 평생 숙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이런 평생 숙제를 목전에 둔 우리들인데, 평생 기도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일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들인데, 또 인생 후반에는 병마와의 싸움인데, 도대체 죄지을 시간이, 세상 헛된 일들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여기서 사랑의 완전함(perfectin)이란 대자대비하신 그분을 닮은 사랑의 너그러움(generosity), 온전함(wholeness)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둥근 마음, 둥근 삶의 둥근 사랑입니다.
어제 문화영성대학원 전례 강의 중인 원장수사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도 소개합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오늘로 종강입니다.”
“종강! 축하드립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1학기 강의였네요!”
마지막 강의 주제가 '십자가'라니 참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모두가 주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수렴되며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시편 67,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울타리>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기서 ‘하느님의 성전’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유품을 보관한 박물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뜻하는 것도 아닙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하느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코린토 지역에는 우상숭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에게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우상숭배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신앙인을 보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에덴동산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동산이라고 표현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에덴가든’이라고 합니다.
동산과 가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동산은 울타리가 없습니다.
가든은 울타리가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회로 간다며 개신교 목회자들이 걱정한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그 원인으로 개신교회의 울타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식었다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져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져서 신앙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울타리가 견고해야 세상 사람들이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었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 칼로 울타리를 쳤다고 합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수도자성소도 줄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도 현저히 줄고 있습니다.
박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팬데믹 때문도 아닙니다.
사제들이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벗고, 기도 시간을 줄였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이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수도복을 벗고 순명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의무와 직분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이, 수도자들이, 신앙인들이 울타리를 세우고 믿음의 횃불을 높이 든다면, 사제성소도 수도자성소도 늘어날 것입니다.
아합왕은 잘못했지만, 회개의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왕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스스로 울타리를 치우곤 했습니다.
기도의 울타리, 나눔의 울타리, 섬김의 울타리를 치웠습니다.
울타리를 치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치워서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울타리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를 말씀하십니다.
그 울타리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울타리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이를 사랑해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자동차 사업으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을까요?
처음에 기계공으로 시작해 에디슨 회사의 기술 책임자에 올랐다가 나중에 자기 공장을 세운 것입니다.
만약 기계공으로 있을 때, ‘지겹다, 힘들다’라는 생각만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자기 일에 흥미를 갖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세계 제일의 자동차 생산 기업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좋아하는 것이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초콜릿, 사탕 등을 좋아하지만, 저는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단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제가 싫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사탕 나눠주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 아이들과 친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제가 사탕을 좋아하지 않지만, “좋다, 좋다”를 외치다 보니 사탕 나눠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일도 또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싫다, 싫다”라고만 한다면 자기 일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왜 이렇게 지루해. 신앙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어?” 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가장 쓸데없는 일을 하는 ‘어리석은 나’ 정도로만 여길 것입니다.
당연히 기쁨도 행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하는 나를 바라보고, 삶 안에서 피곤하지도 또 힘들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율법을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내용을 확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뜻과 맞지 않아 반대하는 사람을 원수 취급합니다.
본인의 부정적인 마음이 원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며 ‘싫다, 싫다’라는 생각만 하니 원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이를 사랑해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설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