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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2,1.6-14
1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 걷다가, 예리코에 도착하자
6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요르단 강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함께 떠났다.
7 예언자들의 무리 가운데 쉰 명이 그들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요르단 강 가에 멈추어 서자, 그들도 멀찍이 떨어져 멈추어 섰다.
8 엘리야가 겉옷을 들어 말아 가지고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9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10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12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13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섰다.
14 그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강물을 치면서,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말하였다.
엘리사가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넜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칭찬 결핍증?>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태 6,2)
칭찬받으려고 선행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악령이나 세상은 칭찬을 위해 선행하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칭찬받으려고 선행하는 것이 왜 나쁘다고 말씀하실까요?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말입니다.
우선 선행하는 것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고, 제 생각에 칭찬받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며, 다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나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칭찬받으려는 것은 왜 나쁠까요?
그것은 칭찬받아야 행복한데 야단맞으면 괴롭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더 나쁜 이유는 그것이 칭찬 결핍증 더 나아가 애정 결핍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애정 결핍증의 사람은 늘 애정의 결핍을 느낄 뿐 아니라 인정과 칭찬도 고파합니다.
그렇습니다.
애정 결핍증은 사랑을 받아도 받아도 바다처럼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름다운 갈망이 아니라 지옥 같은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칭찬을 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하느님의 상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이 세상 행복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저의 통탄할 가련함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아직도 바랍니다.
칭찬이 고프지는 않아도 아직도 바라기는 한다는 말입니다.
칭찬이 귓전을 울릴 때 사탕이 달콤하게 하듯 달콤한 것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실 상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합니다.
더 통탄할 가련함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모욕을 이것이 참을 수 없게 하고, 비난이나 모욕을 받을 때 그것을 주님 때문에 받지 못하게 하는 점입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하니 비난이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칭찬의 달콤함을 의지적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수준이고,
그래서 저를 칭찬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마귀라고 하며 물리치려 합니다.
멀쩡한 사람을 마귀로 만들고 고마운 사람을 마귀라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칭찬하는 사람이 마귀가 아니라 그의 칭찬을 하느님 상 대신 받고 싶어 하는 제가 육의 영을 지닌 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저입니다.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성한 두려움과 지혜와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로부터 오는 상>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의 속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대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인데,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이는 숨겨놓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고, 자녀의 이름이나 배우자의 이름을 부른단다. 그의 속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깨어나서 제가 한 행동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누구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 부름을 받았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지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구애받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풀든, 단식하든, 기도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바랍니다.
생색내기가 아닌 사랑의 진정성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매일 이 세 가지를 실천하지 않으면 목표가 없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도 산상수훈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2천 년 동안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사순절 동안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은 왜 세워질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곡식이 저절로 자라기는 하지만, 물을 주고 풀을 뽑아주고 거름을 주는 등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이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평생 유지할 기도, 자선, 단식의 매일 루틴을 결정한 자는 이미 믿음으로 삼구와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은 비록 종교인만이 아닌 모든 꿈을 좇는 선한 이들이 매일 하는 일입니다.
우선 꿈이 있는 사람들은 매일 독서, 명상, 감사일기 등을 씁니다.
우리로서는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책 100권 읽기를 하였고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씩 썼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독서, 감사일기를 하였고, 트위터 공동 설립자인 잭 도시는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묵주반지를 끼고 대회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꿈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이 꿈의 성취를 방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일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싸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단식한 것과 같습니다.
잭 도시는 간헐적 단식을 하였고, 긴연아 선수는 “야식이 뭐예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 육신의 욕망을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연예인 중 유재석이나 박진영 씨의 몸 관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자기 육체를 괴롭힐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드웨인 존스가 왜 굳이 매일 새벽에 운동을 몇 시간씩 하겠습니까?
자기를 이기는 게 곧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꿈이 있는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자선입니다.
매일 자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왜 굳이 김연아 선수가 많은 돈을 기부하였을까요?
돈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더 나은 성과가 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잭 도시는 코로나 구호 활동 및 기타 자선 활동에 10억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10억 달러는 1조 3천억 원 정도 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재단까지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하고, 주윤발 씨는 자신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도 1조 원 가까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돈으로 퇴색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루카 복음 6장 20~23절 행복 선언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배고픈 자는 복이 있으며, 지금 박해받아서 우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속, 육신, 마귀를 이긴 이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루지 않고는 ‘사랑’이라는 목표가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구는 사랑과 반대 욕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 나라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매일 삼구와 싸우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도-자선-단식을 매일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자선, 단식을 하지 않아도 천국을 원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또한 자연에게 별의별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죄를 쌓아갑니다.
때로 이 산더미 같은 죄 어떻게 보속해야 되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선•기도•단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있는 자선•기도•단식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외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래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 그리고 또 다른 부인 시간, 재능, 경험과 연륜 등등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위선,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1)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위선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누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를 내면서 그것을 부정합니다.
위선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위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주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 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이 있습니다.
“케파(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갈라 2,11-14)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이방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계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위선인데, 이방인계 신자들 쪽에서 볼 때에도 위선이고, 유대인들 쪽에서 볼 때에도 위선입니다.
아마도 이방인계 신자들은 그 일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일을 직접 본 바오로 사도는 몹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라는 말은 “평소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잘 했으면서”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라는 말은 “당신의 행동은 유대교 율법과 관습을 지켜야 한다고 이방인계 신자들에게 강요한 것과 같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은 “당신은 위선자다.”입니다.
사도들마저도 그렇게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위선이 그만큼 위험한 함정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베드로 사도가 그 비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티오키아에서 있었던 그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그 회의에서 ‘네 가지 필수 사항’(사도 15,29) 외에는, 유대교 율법들과 관습들을 모두 폐지하기로 공식 결정했습니다.
2)
위선자들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실제로’ 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누군가가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돈이 아니라 그 돈을 내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분명히 도움을 받았는데도 전혀 고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움을 준 쪽에서 생색을 내거나 고마워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일 때 그렇게 됩니다.
–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연기(演技)’입니다.
즉 기도하는 척 하는 것이고, 가짜 기도입니다.
– 위선자들도 단식할 때에는 ‘실제로’ 밥을 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선의 경우처럼 ‘굶는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하느님께서 속마음을 보시고 그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면, 굶는 사람은 쓸데없이 헛일을 한 것이 되고, 죄만 지은 일이 됩니다.
3)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숨은 일’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본인도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자선을 베풀 때에는 그 일이 자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하라는 뜻인데,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그것이 사랑과 선행인 줄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일이 사랑과 선행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일에 대해서 상을 주십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떠남의 여정 - “하느님 중심의 자유로운 삶”>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
(시편 86,4)
위 시편과 더불어 하심공경(下心恭敬)하는 마음으로 사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기도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땅에 뿌리내린 신비가 장일순 선생님입니다.
“밤이면 달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낮이면 해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 하권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는 장면입니다.
흡사 신명기에서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름 뜻도 흡사하니 엘리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God saves)”이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The Lord saves)”입니다.
말 그대로 엘리사와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후계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요셉수도원에서 저와 현재의 빠코미오 원장수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992-2014년까지 원장직 책임을 해오다가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빠코미오 수사가 원장으로 뽑혀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빠코미오 수사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요셉수도원에는 큰 복입니다.
10년전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밤새워 썼던 강론이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이었습니다.
미사 시 한 강론이 아니라 그냥 기록상 남겨두려 쓴 강론 서두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 사랑하고 신뢰하는 제 후배이자 도반인 최종근 빠코미오 신부가 원장좌 자치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주신 느낌입니다.
경사 중의 경사요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분들을 모시고 대망하던 자치수도원 승격 감사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랫집 수녀원의 모든 수녀님들이 두 개의 꽃다발을 들고 신임원장과 퇴임하는 저에게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신임 원장과 ‘감사합니다.’라는 제 꽃다발에 붙은 내용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임원장과 퇴임원장의 아름다운 조화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순간 떠남의 여정은 감사의 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도 저와 흡사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오다 마지막 승천의 떠남을 앞두었을 때, 엘리야에게는 바로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에 대한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떠남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동안 그 힘들었던 날들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면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아오다가 오늘 맞이하는 마지막 승천의 떠남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평소 삶을 그대로 요약하는 참 멋진 승천의 떠남입니다!
그동안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은 참 좋은 선물인 후계자 엘리사를 마련해주셨고, 이렇게 홀가분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같은 승천의 떠남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둘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 신뢰의 관계인지 오늘 전 독서는 물론 승천의 장면을 목격하고 부르짖는 엘리사의 외침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그는 이어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응답을 받아냄으로 명실공히 엘리야의 자랑스러운 후계자임을 확인시킵니다.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엘리사가 말하며,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면서 엘리사가 강을 건너니 이제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서 이제부터 엘리사가 새역사를 시작합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일은, 특히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같은 죽음이겠는지요!
말 그대로 엘리야의 승천처럼 영적승리의 기쁨의 축제같은 죽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축제같은 떠남의 여정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행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자유로운 삶이요,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는 축제같은 멋잔 삶이겠습니다.
바로 모든 수행을 오늘 복음의 참된 기도, 참된 자선, 참된 단식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과시욕의 허영과 교만의 위선적 삶에서 벗어난 철저히 숨겨진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이웃에 자기에게 활짝 열린 사랑의 삶이요, 참으로 내적자유와 평화의 삶이요, 그대로 진리 체현의 삶입니다.
이런 숨겨진 삶에서 샘솟는 맑은 기쁨, 참된 행복입니다.
다음 한마디 주님의 약속이 큰 위안이요 힘이 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다산의 다음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한 인생을 뜻할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성실함이 비범한 인생의 조건이다.”
특히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기념하는 성 로무알도 아빠스가 이런 인물입니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사랑과 진실, 겸손과 지혜의 은수자 성 로무알도입니다.
951년경 출생한 로무알도는 972년경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생활하다가 아빠스의 허락하에 마리노라는 수도승과 함께 고독한 삶중에 스승과 제자라는 동방의 모델에 따라 살고자 수도원밖 라벤나 근교에서 공동체를 시작합니다.
당시 10-11세기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부유와 세속화로 타락한 획일적 공동생활에 환멸을 느낀 많은 수도자들이 은수생활쪽으로 향하던 시기였고, 이의 대표적 수도회가 까말돌리회와 카르투시오회입니다.
언제나 수도회 개혁과 쇄신은 부유에서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고독으로의 전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약 1023년경 성 로무알도가 설립한 마지막 공동체입니다.
로무알도의 까말돌리 수도회 영성의 특징은 은수적 관상과 사도적 활동이 절묘하게 조화된 관상적이며 수도승적이고 베네딕도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답게 사는 것은 참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떠남의 여정의 궁극의 목적지는 하느님이기에,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기에,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충실할 때 저절로 자발적 홀가분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도 가능하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사랑의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시편 31;24ㄱ,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자명한 수학적인 진리도 있고, 존재의 근거를 알려주는 철학적인 진리도 있고, 현대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과 물질의 진리도 있습니다.
수학적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감시의 그물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그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유배를 갔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유배가 끝나 자유인이 되었던 그는 성경 말씀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유명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가 되면서 성경이 금서로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이 감옥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도, 극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극한의 순교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순교한 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이 올 때까지, 30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있었습니다.
사제가 없이, 미사가 없이 한국교회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직해’라는 성경말씀입니다.
교우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조직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물질의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사목지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0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복음나누기 7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복음나누기는 미국의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한 삶>
어느 분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저 때문에 자기 아이가 잘 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들어 보니 제가 독서를 강조해서 자신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는데, 어린 자녀도 시간이 나면 자기 옆에서 책을 읽고 읽는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있는데, 아직까지도 스마트폰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책에 취미를 갖게 되어서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자녀 역시 그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갖춘 좋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 독서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큰 도움을 책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행동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따른다고 해서 내게 큰 손해가 올까요?
반대로 큰 영향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범을 따름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좋은 영향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이 이 땅 곳곳에 펼쳐지게 됩니다.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하나의 변화를 통해서도 세상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 기준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시지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다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이 아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선, 기도, 단식은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목적을 두고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이런 모범이 나의 이웃들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더욱 넓게 펼쳐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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