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주 시인 약력>>
-경북 칠곡 출생
-경북대 화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서정시학> 등단
-2003년 <신라문학대상>
-2008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2009년 <파블로네루다 기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수상
잉여
늦둥이 하나 낳으면 잉여라고 이름 짓겠다
떨어지지 않는 애물단지
과분하게도 가치창출의 꽃이라네
넌출넌출, 홍냥홍냥
이 가지 저 가지 앵겨붙는
귀룽열매 눈망울 순한, 햇빛 좋은 날 소풍 같은 아이야
사랑이 밑밥인 밥통잉여가 엄마의 업이다
월척의 꿈 놓아건지는 낚시다
너는 전승의 꽃가지를 확, 분질러 버리거라
장벽이나 구획 따위에 물리지 않는
잉여, 물색 다른 그님은
한 생이 붕어해도, 잉어해도 해갈 안 되는 물고기
우리는
소시랑게 눈흘김 얄랑얄랑 너름새 넣어
노들강변 한허리 감아 도는 잉어이고 싶었다
한목숨 수족관 잉여로 치부되기는 순간이란다
저인망 논리가 바닥까지 털기 전에
절체절명이여,
그 아리아리한 효율 토란 알토란 낳기를!
채색화에 들다
된통 갇히고 말았다
너무 간결한 텃치는 치명적이다
기호도 없이 수식도 없이
붉어지는 풍경, 대책 없는 외통수다
새들의 하늘에도
틀 수 없는 길이 있어
벙어리 설형문자가 싸락싸락 흉금을 켠다
습자지처럼 포옥, 젖은 풍경 한 장 받쳐내려고
소름 돋는 진피 안으로 공그르는 수피나무
눈 멀어야 갈 수 있는 나라
배경을 물리고 바탕만 남은 그림이다
감 깊어진 바다가 요동도 없이 울렁거렸다
헛것이 키운 색, 수평선 너머로 포박을 푸는
숨비 환한 달빛 돛배
아무래도 나는
방어막 위태로운 바람의 말을 알아들어서 덧나는 내상
먼동이 트도록 토혈, 직녀성모양 환칠하는
금벽산수화
목포의 눈물
폐허도 한 송이 꽃이다
그 붉고 난만한 꽃진이 자아내는 여흔은
아무나 발할 수 없는 불립문자다
뻘밭 페이지를 넘기면
그녀가 걸어온 길이 태풍 뒤의 고요처럼 누워 있다
한 세상의 끝에서
간단히 뛰어내려본 자만이
그 지독한 사체의 냄새를 향기롭게 맡을 수 있다
누가 뜨거운 자궁을 폐허로 읽는가
어둠이 습자지처럼 스며드는 갯벌
아무도 몰래 부풀다 자결해 버린
한 송이 꽃의 절정을,
그녀를 차고 환하게 승천하는
바람의 눈매가 젖은 광휘로 읽힌다
꽃 진 다음
상처의 배꼽, 밑자루로 받쳐 올리는
가없는 눈빛
다가가는 모든 위무의 손을 부끄럽게 하는
폐허 위에서 함부로 흩날리는 꽃잎을 노래해서는 안된다
헝클어진 풍경을 오독해서는 안된다
다만 눈을 감고 끝없이 펼쳐지는 뻘밭 문장을 맨발로 느껴야 한다
그녀가 가르치는 저 뭉클한
포복의 예의를 제대로 읽는 인간이라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이상기류일지도 몰라 백화쟁론 만발한 꽃밭에 끼지 못한 꽃들 열외의 줄이 십리 밖이라는
풍설, 온실 속 화초를 불렸지 화창할수록 말 없어야 신비해 보인다네 거기도 못 낀 꽃이 꽃이
냐고 일축하는 족속,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 노릇 할 동안 상전벽해가 진선미를 바꿔버렸지
기실 진이 미를 꺾든 미가 진을 후리든, 흘러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꽃들의 거취가 문제
지 쟁점은 괄호 속에 가둬두고 각축 다투는 청문회가 깨끗하면 뭐하냐고, 권불십년 삼대 째
환장하겠다는 노숙자대표 일갈이라네 삼삼하고 쫄깃한 그 어록 곱씹으며 화환을 마다한 이
태백 사오정이 즐비하다지 위치가 확실하면 운동량을 알 수 없듯 제 하나로 만발한 꽃밭에 쟁
론을 들여 욕보지 말게나 필연이거나 우연이거나 발등의 불끄기가 장난 아니라네 도대체, 개
망초나 씀바귀에게 꽃밭타령이 비루먹은 말꼬리에 댕기 다는 일 아닌지 원, 인과를 굽어보시
는 하느님도 수줍은 화무십일홍, 주사위나 던지고 그러심 오죽 좋겠는가!
물방울집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거나
처마끝 낙숫물이 궁글린 물방울을 헤아리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집 속에 들어앉아
내가 둥근 알을 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부풀린 물방울로 지은 집 한 채가 있어
둥글고 온전한 방 속에 몸을 푸는 내가
안과 밖이 잘 어우러진 창의 굴곡을 훑고 지나갈 때
마음과 달리 나는 물방울집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좀체로 뚫고 들어갈 틈입을 주지 않는 물방울집은
갓 구워낸 빵처럼 부드러워 보이나
온힘을 다하여 밀치고 들어가려 하면
그만큼의 반동으로 나를 미끄러뜨리며
단단한 경계가 반짝 일어서는 걸
그때 알았다
아무렇게나 굴러 살점이 발겨진 뼈 하나를
기둥처럼 붙들고 중심 잡을 수 없을 때
울림 큰 바람의 세계는 중심이 텅 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면벽하는 정신 하나 투명한 연잎 위
이슬로 맺히려 하고 있을 때
풍경은 그때서야 가장 깨끗한 경계를 세워두는 것이 아닐까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집은
갈고 닦은 뼈로도 깨뜨릴 수 없는
부풀린 생각의 모서리를 보기좋게 다듬은
둥글고 단단한 물방울다이아처럼 빛나는데
다시 생각의 중심을 비우고
부딪쳐 생채기난 몸집 둥글게 말아
구심력을 잡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둥글고 단단한 물방울집 한 채가
내 안에 들어와 있음에
흠칫 놀라는 것이다
그릇
운문사 연화대에 그대 모시러 갔다가 이미 꽃으로 피어 있는 그대를 보았다 하늬바람 잔잔한 미소 하나가 정오를 가르며 환히 피어나고 있었다 실뿌리 아늘아늘 담아낼 그릇 하나 없는 빈 손바닥, 낡은 지문이 가문비나무처럼 흔들렸다 그 손안에 그대를 엮어두고자 하는 우매함이 雲門 밖 풍경소리로 떨어졌다
그대가 나를 깨었는가 내가 그대를 깨었는가 허공에 부침하던 어떤 뜻이 죽비로 내리쳤다 아프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멍울이 명치를 메어왔다 길이란 길은 죄다 등 돌리고 있었다 질문들의 참혹한 막다름이 마음의 모서리를 들이받았다
부서진 종소리가 그대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다 틈과 틈이 거느린 하얗게 빛나는 가문비나무 몇 그루, 초두루미처럼 웅숭깊다 부서져 비로소 완성되는 나, 민무늬와 빗살무늬 사이 그대가 만지면 부스스 깨어나는, 바람과 햇빛 물과 불의 거처에 순연한 내가 누워 한 잔의 백련차로 우러나고 싶다 한나절, 갸륵갸륵 갸륵한 물새들을 본다 넓이를 모르는 연못을 건너는 연밥그릇이 아름답다
종소리
멜로디 없는 음이
어떻게 세상끝까지 울려퍼질 수 있나요
아가, 그것은 바로 네가 종안에 있기 때문이란다
내가 어떻게 종안에 있을 수 있었나요
그것은 이 아비가 너를 그 안에 가두었기 때문이야
가두다니요, 갑갑해요
밤마다 포뢰*의 울음소리가 나를 잡아먹어요
아가, 그래도 견뎌야 한단다
오직 견디는 자만이 만리밖 소리를 거머쥘 수 있단다
아버지, 가슴이 아프지도 않으세요
아가, 가슴을 찢으면 무덤이 보이고
무덤을 밟고서면 종소리가 들린단다
견디고 견디거라, 소리가 키운 네가
마침내 그윽해지거든
저기 저 기다리던 구름을 타고 날아올라라
이 배흘림의 감옥이 나의 것이라면
一乘圓音을 얻게 해 주세요
아가, 내가 가둔 건 네가 아니란다, 네가
단 한번의 울음을 소리 높여 울 적에
대대로 업고 온 종의 몸
뒤통수의 공명 같은 것이란다
* 포뢰 : 바다에 살고 있는 상상의 동물로, 그 울음소리가 끝없이
멀리까지 난다고 함
草蟲圖
풀잎 아래 몸을 누인다 뼈 없는 통증이 편안하다
난생의 벌레인 나는 늘 웅크린 자의 등을 기억한다
내게 익한 모든 것들은 주름진 마디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그랬고 애인이 그랬고 생각이,
말이 그랬다 직립을 꿈꾸었으나 접히지 않을 만큼 독하지 못했다
낙오자로 채색된 길을 굼실굼실 기는 종족,
수풀 아래 버려진 울음이 온밤을적시도록 적막은 한지처럼 흔들렸다
캄캄한 먹물을 쏟아내어 울음을 그렸으나 여백 한 점 들키지 못했다
풀뿌리를 닮은 말들이 자꾸만 지하로 뻗어갔다
온몸으로 캄캄한 자에게 밝음이란 말은 상상화다
내 안에서 이슬방울로 맺히는 한 세계를 순백의 경험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버려진 것들끼리 기댄 풍경이 진저리치도록 아름답게 익어갔다
아늘아늘 부푼 나는 그 작열 속에 나를 풀었다
그대로 한 마리의 벌레인 나, 어떤 앵속도 접근하지 못했다
껍질을 쓰고도 앉은뱅이 풀과 즐겁게 내통했다 잠자리며 산실인 그녀가
내게 산차조기와 사마귀의 붉고 푸른 비밀을 귀띔해 주었다
커다랗게 버려진 것들만이 건널 수 있는 강과 바람과 그 너머에 자리한 솔숲의 향기까지,
그때 처음 태어나는 말들이 흰빛으로 그려졌다 눈을 감고도 환한 세밀화였다
고산에 걸린 달
축전이란 말이 설핏한 비감으로 다가오는 고산생가, 초승달이 걸렸다
高山이 孤山인 줄 눈치 챈 사람끼리 멍울진 가슴을 맞대고 점층법으로 밀물진다
먹물처럼 번지는 외로움 고봉으로 안아 월궁을 짓겠다?
준령을 가슴에 앉히려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으나
비워지지 않는 뚝심이 가파른 산을 오른다
얽히고설킨 길, 우뚝한 능선 하나 아름답게 걸던 사람들은 다 앞서 갔다
남은 자들만 모르는 길을 더욱 깊게 하는 밤,
고산에 걸린 달이 차겁게 맑다 달 속 여의주가 박힌 현인의 눈 짚힐듯 말듯 하였다
이미 오래 전 경전을 작파하고 달 속으로 들어간 사람, 나오지 않는다
땅 위의 집들은 이지러지며 그 이유를 쓴다 풀벌레가 애면글면 어둠을 우는데,
알 것 없다 산중의 어부가 고기를 낚아 무어하려고?
그저 五友나 벗하며 사시를 견디게! 가벼운 헛기침 시치미로 떼시며
어른께서 다 오른 고산을 사뿐사뿐 내려오신다 짊어진 달이 한 살이다
미친 듯이 달리는 것들은
끝을 모른다 엎질러진 물은 스스로 형체를 지운다
풍경화도 정물화도 될 수 없는 몸, 상상 밖 상상화를 뭉텅뭉텅 게운다
허물어진 구도를 오직 바탕의 힘만으로 달린다 탈것도 없다
날개도 없다 부여 받지 못했다는 건 어쩌면 은총이다
신이 그들을 버리기 전 이미 자신을 구원한 족속 광야의 시험에서 살아남은 몸이 병기다
낙타 혹이 바늘귀를 단숨에 통과하는 초식을 터득했다
비등점 이상의 온도를 지닌 안으로 끓어 넘치는 것들
키보다 높은 담을 기어이 넘는 출혈이 빛깔이며 속도다
독 오른 꼬리는 머리를 문다
통각 환한 살모사 발 없는 그 몸이, 출발이자 끝인 풍차를 狂狂狂 돌린다
탈주의 가속도가 제 몸을 뚫고 우주 밖으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저 깨끗한 명중을 봐 눈부신 살의 火, 花의 살이 소실점으로 하르르 꽂히는
水月觀音圖
600년 전 남국 어느 바닷가에서 놓쳤던 圓光, 통도사에서 만났다 얼핏 낯익은 듯도 한 버들가지 손, 주름진 한바다 연꽃 맨발로 피운 여인의 옷자락을 만진다 주르르 마엽무늬 물처럼 흘러내린다 베일에 감싸인 시간의 속살 아늘아늘 헤엄치자면 무량겁은 걸리겠다 선연히 부딪친 눈빛이 정병에 화들짝 꽂힌다
사바를 휘어잡는 꿈이 공감대라면 분수가 웃을까? 물론 자태는 천양지차다 바위의 가부좌 대신 밥상을 의자를 침대를 깔고 대지의 기운 대신 업 속을 벌레처럼 파고든다 금니은니 비단 대신 싸구려 천의를 걸친, 언감생심이 그런 문양일 것이다 거북등을 파는 내 무릎과 당초원문을 엷게 바림질하는 여인 사이
화불보관 쓸 일 없어도 달 비친 바다 위에 설 수 있는, 그 길을 걸어 나는 예까지 왔다 600년이 너무 짧다 서로 모르고도 아픈 물의 살갗 오래 어루만져주는 알속, 환한 여의주를 빚는다
압살라
정향나무에 쏟아지는 노을, 불꽃 초서를 흘릴 때
읽히지 않는 너는 온다 압살라
우듬지를 타고 뿌리로 전해지는 물방울의 음률
하늘하늘 꽃가루로 날린다
지상의 가장 비루한 몸이 천의를 입는 때
탱글탱글한 너의 뽀얀 속살 훔치며
관능에 부르르 떠는 것들, 진한 수컷 내음을 풍긴다
뒤틀리는 허리 유려한 손동작 살짝 들어올린 발꿈치
사이로 재빨리 빠져나가는 너 압살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이 전생인 듯 일렁일 때
섬세하여 사위를 그릴 수 없는 네가 훅, 단김을 뿜는다
밤마다 정향나무를 안고 서쪽으로 쓰러진다
水性의 기운을 타고난 물거품인 내가
나무와 나무가 포개질 때 스며나는 향기를 알몸으로 그려낸다
형체도 없이 꺼져 버릴 것 같은 몸부림
천상과 지상이 내통하는 결계의 무늬다
형옥마저 들어 올리는 날랜 발꿈치
숨막힌 7막 8장을 사뿐대는 실뿌리 알알한 무곡
황홀 한 잔에 혼곤한 저녁, 막다른 유배지 같은 골목길 들어서다
문득 나는 너를 본다
회창대는 한 그루 정향나무로 걸어오는
전생의 향기를 감은 앳된 여인의 갈라터진 뒤꿈치에서
발갛게 달아오르는 현기증
지상으로 닿는 길을 내밀히 미끄러져 온 무희처럼
살짝 맞물린 경계를 들어 올리며, 너는 온다 압살라!
파르마콘
석박사 약국에 약을 사러 갑니다
동네에서도 소문난 석박사 약국
발 디딜 틈 없는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모두 박사님의 환자들입니다
만병통치한다는 마법의 약,
독감을 녹이고 홧병을 녹이고 우울증을 녹인다지요
힐끗 나를 한 번 훑어본 박사는
재빨리 조제실 너머로 사라집니다
또닥또닥 무언가를 떨어뜨려
빻기도 하고 갈기도 하는 박사의 익숙한 손끝에서
내가 한 번도 듣지 못한 성분들이 배합됩니다
창가에서는 아스파라거스가 피고 완두콩이 열립니다
출처가 꼬인 덩굴손이 남남쪽으로 뻗어갑니다
미심쩍은 햇살과 오후 두 시의 불안이
도가니 안으로 빨려듭니다
금박의 수상쩍은 자격증도 빨려듭니다
어쩌면 박사는 한눈에 나의 증상을 읽어내고
흥분제와 진정제를 묘한 비율로 섞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강단 한 알, 연민 한 술
극소량의 독 한 방울이 첨가될 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환자입니다
약을 건네주는 박사님의 눈빛이 잔인하게 부드럽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그 눈빛에 압도된 순간
나는 내용물을 복용합니다 이름도 성분도 모르는
오래 중독될 어떤 불온을
비슷한 명함은 도처에 있습니다
암자를 불사르다
꽃대궁 뻗은 산길 벼랑을 탄다
안간힘으로도 잡히지 않는
수직, 천길 아래
흔들리는 뿌리 바위를 뚫어내린 곳
신흥사 계조암을 오른다
세상 모든 근원이 저토록 단단한 침잠이라면
한 잎 갈대에 기댄 내 등은
새삼 얕은 바람에도 어찌할 바 모른다
캄캄한 억겁 오래 전에 건너온
인연 하나가 내 안에서 간당거린다
이 해독할 수 없는 약한 끈이 나를 지탱해온 명줄이라니!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풍상고초가
절벽에 내리 찧는 단풍으로 쏟아진다
그 풍경의 안쪽
수만 겁 흔들림을 쌓아 만들어진 암자가 있다
마른 나뭇가지 찬 바위에 불꽃을 피우는
영묘한 금당
해거름이 눙치는 빛과 어둠의 은밀한 교합
화들짝 벙그는 한 송이 꽃으로 설악은 있다
뜨거운 공양, 산그늘 한 채 고스란히 살랐다
破墨
한 자루의 붓도 쥐어 주지 않고 스승은 나를 문전에서 내쳤다
필생을 먹처럼 살거라
캄캄했다
먹이라니, 몸으로 황칠을 하란 말인가 어디에다?
살결 같은 화선지 한 장 내려 받지 못한 나는
사족이 묶인 백서로 내팽개쳐졌다
발묵도 익히기 전 파묵이라니!
팽나무 가지가 언 하늘을 쩡, 후려치는 혹한이었다
가도 가도 깡통인 탁발
자리를 잡아도 자리를 털어도
먼지 한 점 날리지 않는 茫茫寒天
나를 얼려 나를 보존할 맥문동 관절이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도리도 불목인 아수라였다
붓도 화선지도 없는 화공이
그림 그릴 생각을 하면
옥쇄도 없는 파천황이 마음 깊숙이 자라는 법
세상에 놓인 그 어떤 법도도 스스로 길을 벗어난다
개발새발 걷지 않아도
모든 길들을 빨아들인 먹 한 자루가
캄캄함을 깨어 스며나는
백광으로 농담을 밝힌다
살을 에는 아픔도 부드럽게 갈아
일필휘지로 내리긋는 무명의 빛
잔인한 교감
발원지를 알 수 없는 강물 따라
무작정 떠밀려온 소용돌이,
검정말 줄기 같은 여자가
몇 번을 휘청댔는지
몇 번을 굴렀는지
정강이께 핏물이 연산홍처럼 번져날 동안
상처마다 덧나며
굽이굽이 도는 비린내
그렇게 떠내려가는 일이
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혼신의 깊이라는 듯
물결무늬 이루며
꼴깍꼴깍 까무러칠 동안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에 관한
스틸영상을
일생일대의 역작인 듯
차르르, 감아올리는 저 남자
―
미친 듯이 달리는 것들은
끝을 모른다 엎질러진 물은 스스로 형체를 지운다 풍경화도 정물화도 될 수 없는 몸, 상상 밖 상상화를 뭉텅뭉텅 게운다 허물어진 구도를 오직 바탕의 힘만으로 달린다 탈것도 없다 날개도 없다 부여 받지 못했다는 건 어쩌면 은총이다 신이 그들을 버리기 전 이미 자신을 구원한 족속 광야의 시험에서 살아남은 몸이 병기다 낙타 혹이 바늘귀를 단숨에 통과하는 초식을 터득했다 비등점 이상의 온도를 지닌 안으로 끓어 넘치는 것들 키보다 높은 담을 기어이 넘는 출혈이 빛깔이며 속도다 독 오른 꼬리는 머리를 문다 통각 환한 살모사 발 없는 그 몸이, 출발이자 끝인 풍차를 狂狂狂 돌린다 탈주의 가속도가 제 몸을 뚫고 우주 밖으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저 깨끗한 명중을 봐 눈부신 살의 火, 花의 살이 소실점으로 하르르 꽂히는
숫돌
그림자를 문 빛날들 기어오른다
천 개의 칼을 갈고도 자루 한 번 쥐지 못한
예정된 운명이 낭자하게 핀다
툭, 터지 못한 피가 안으로 고일 때
가장 단단한 것들, 패각무늬로 새겨진다
막다른 것들의 역사는 그렇게 열린다
소나무 껍질처럼 투박한 살갗, 옹이진 뼈마디
칼금문신이 파랗게 시리다
이쯤서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바라보면
무딘 날이 상처를 더 깊게 한다
고심할수록 영험이 서리는 포석
달빛 간간한 집이 된다
징허게 갈아야 풀리는 어처구니
그 우묵한 돌 앞에 서면
소리를 삼켜 예리함을 얻는 모든 우회의 길이 직방이다
단숨에 고통을 날려버릴 한 칼
상극 희망을 솔잎피뢰침처럼 안고
그저, 받고 또 받아내야 하는 길 한가운데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의 거처가 반듯하다
세상을 관통하는 길 한 획
흘림체로 품어 안는 오 갸륵한 바탕
진저리 살점을 깎은, 벼루가 있다
첫댓글 일필휘지....의 너럭바위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