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동안 전남 나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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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후기를 소개합니다. 이야기가 많아서 두 번에 걸쳐서 소개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 조선시대 나주는 나주제도(羅州諸島) 또는 나주군도(羅州群島)로 불리었다
▲ 1872년에 만들어진 나주지도. 서남해쪽 나주목 관할의 섬들이 표시되어 있다. ⓒ 『천년목사골, 나주』
조선 초기 나주목(牧)의 관할 아래 해진(광주), 영암, 영광의 3개 군과 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 장성 등 8개 현이 속하였다. 또한 자은도, 압해도, 암태도, 흑산도 등 많은 섬이 나주목에 속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나주는 전국에서 첫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내는 고을이었다.
서남해 섬이 원래 나주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고려 말 왜구 침략 때 섬사람들이 나주로 피란을 와버려 주인 없는 섬이 되자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주인없는 섬을 새로 들어선 조선왕조가 나주 땅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5세기 성종 때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에는 팔니도부터 흑산도까지 무려 30개의 섬이 나주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섬들은 나중에 '나주제도(羅州諸島)’ 또는 '나주군도(羅州群島)’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말~조선초에 왜구가 경상ㆍ전라도는 물론이고 충청ㆍ경기도 연안에까지 그 활동무대를 넓혔으며, 때로는 황해 · 평안도에서도 노략질을 하였다. 정부는 주민들로 하여금 섬을 비우고 육지로 나오라는 공도(空島, 섬을 비움)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육지로 나왔다. 장산현 사람들은 나주 남쪽 왕곡면으로 나와서 사니 그곳이 장산리가 되었다. 압해군 사람들도 압해도에서 나주 남쪽으로 나왔다. 흑산도 사람들도 배를 타고 나와 남포강변에 터를 잡자, 그곳이 영산현(榮山縣)이 되었고 나중에 영산포가 되었다.
영산현의 치소는 주의 남쪽 10리에 있었다. 그곳은 통진포, 즉 목포(木浦)ㆍ남포(南浦)가 있었던 자리이다. 흑산도 사람들은 나오면서 자신들의 특산물 홍어(洪魚)를 가지고 왔다. 홍어 음식문화가 영산포에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현이 개설됨으로써 목포(木浦)는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영산포(榮山浦), 줄여서 영포(榮浦)가 되었다. 포구 이름이 영산포로 바뀜에 따라 자연스럽게 금강(錦江)의 이름도 영산강(榮山江), 줄여서 영강(榮江)으로 바뀌었다.
출처: 『천년목사골, 나주』, 국립나주박물관, 2013
■ 나주학생운동
대일항전기(일제강점기) 일제는 입으로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도 철저하게 민족차별교육을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에 의해 조선왕조가 설립한 '소학교'를 일제는 '보통학교'로 바꾸면서 자신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소학교라고 칭했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경우 실업학교는 찔끔찔끔 허용하면서 인문학교는 좀체 설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주 학생들은 초등학교를 나주에서 졸업한 후 도청 소재지 광주에 있는 중등학교를 다녀야만 하는데 대부분 기차 통학을 하며 유학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무렵,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광주중학교 학생 일본인 후쿠다[福田] 등이 나주역 개찰구를 나오다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는 같은 통학생 한국인 여학생 박기옥 · 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이리저리 출입구를 막는 등의 희롱을 했다. 이를 목격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준채(朴準埰, 박기옥의 6촌 동생) 등이 일본 학생들을 꾸짖거나 주먹으로 일본 학생 얼굴을 치면서, 상황은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간의 싸움으로 확산되었다. 이 싸움은 역 구내에 있던 일본역무원의 제지 및 일본 순사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구타나 일방적 꾸짖음으로 일시 중단되었지만, 모리다(森田)라는 일본 순사의 악행에 대하여 14명에 이르는 나주 학생들이 항의하는 사태로까지 나아갔다. 이것이 '나주역 사건'이다.
▲ 구 나주역사,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
다음 날인 10월 31일과 11월 1일에도 간헐적인 충돌이 있었다. 11월 3일, 이 날은 음력으로 10월 3일로 우리 민족에게는 개천절이었고, 또 학생들에게는 성진회(醒進會, 독서모임) 창립 3주년 기념일이었다. 일본인에게는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이자,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자축하는 '전남산 누에고치 6백만석 돌파 경축대회'가 열리기로 한 날이었다. 일요일임에도 명치절 행사에 강제로 참석했던 한국인 학생들은 나주역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한 보도를 했던 신문사를 습격했으며, 일본인 학생들과 시내 각처에서 충돌했다(1차 우체국 앞, 2차 광주역, 3차 역 인근).
11월 3일 시위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대거 참여하여 양상이 격렬하고 그 규모도 커졌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일본측은 11월 9일까지 각급 학교에 휴교조치를 내리고,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휴교가 끝나고 개학이 되자 학생투쟁지도부는 제2차 궐기 날짜를 광주 장날인 12일로 정하여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가두투쟁을 전개했고, 시민들도 이에 가담했다. 일제는 각급 학교에 재차 휴교령를 내렸고 언론기관에는 보도 금지령를 하달하여 사태의 확산을 막으려 힘썼다. 광주의 학생 시위는 곧바로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 목포와 나주에서 먼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지지시위가 일어났다.
전국적 •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확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열기는 전라도를 거쳐 서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의 학생시위에는 신간회 · 조선청년총동맹 · 학생전위동맹 같은 운동조직이 적극 가담하여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해외에까지 전파되어 일본과 만주 각처 그리고 중국 본토와 하와이에서도 학생들이 궐기했다. 일본에서는 12월 9일 오사카의 전단 살포를 시작으로 도쿄를 비롯한 일본 각처에서 전단 살포와 벽보 부착 및 시위 등의 항쟁이 있었다. 간도지방과 길림ㆍ장춘ㆍ하얼빈 등의 만주 각처, 북경ㆍ천진ㆍ상해 등지의 중국 본토는 물론이고, 멀리 하와이에서까지 청년단체와 사회운동단체 및 독립운동단체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시위를 펼치는 등의 항쟁을 전개하였다.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발단으로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하여 이듬해 3월까지 5개월 동안 국내에서만 250여 개교 5만4천여 명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인 학생 582명이 퇴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처분을 당한 대규모 시위였다.
출처: 『한국사 속의 나주』, 나주시ㆍ무등역사연구회, 2018
■ 남파(南坡)고택
역사를 알면 양반이고, 역사를 모르면 상놈이다. 양반 노릇을 하려면 역사를 기억하고 음미해야 한다. 나주의 옛 도심에 있는 남파고택(南坡古宅)에 가면 아직 그 자취를 맡을 수 있다. 어떻게 이 풍진 세월에도 한옥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집주인의 역사의식과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고택을 허물고 아파트를 지었을 것이다.
▲ 남파 고택. 옛집이 모두 사라진 나주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이다.
전체 대지가 4950㎡(1500평)인데, 사랑채가 500평, 안채가 1000평이다. 안채 건물만 하더라도 50평이나 되는 큰 규모의 한옥이다. 이른바 ‘칠량(七樑)집’이다. 안채를 칠량집으로 한 것을 보면 이 집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한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건축된 것이다. 이 박씨 집안이 부를 가장 많이 축적했던 시기가 남파(南坡) 박재규(1857~1931년) 시절이다. 현재 남파고택을 지키는 후손 박경중의 고조부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은 함락시켰지만 나주성은 함락하지 못했다. 나주성의 지리적 방어가 유리했던 점도 있었지만 나주의 토박이 세력, 즉 향리(鄕吏)들을 비롯한 토반(土班)들의 저항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이때 나주 방어대장인 도통장(都統長)을 정석진이라는 인물이 맡았다. 정석진은 나주의 호장[戶長, 고을 아전(衙前)] 출신이었다. 정석진은 나주 방어의 공을 인정받아 해남군수로 발령났다.
해남으로 떠나는 정석진을 보내고 남은 나주의 유지들은 당시 개화파이자 단발령을 강력하게 시행했던 안종수라는 인물을 잡아 죽여버렸다. 그리고 내친 김에 나주관아를 점령하고 관찰사도 죽이려고 했다.
이때 남파 박재규가 나섰다고 한다. 이때 남파가 나주 관찰부(동헌)에 모인 군중 앞에 나타났다. 남파는 그때 등창이 나서 집에 누워 있었는데, 소식을 전해듣고 머슴에게 자신을 업고 동헌으로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성난 군중들 앞에서 남파는 사태를 진정시켰다.
“여기서 더이상 나가면 국가에 대한 반란이 된다. 반란이 되면 나주는 관군의 진압으로 다 죽는다. 나주 관찰사는 죽이면 안된다. 안종수만 죽이는 선에서 끝나야 한다. 관아 건물도 불 지르면 안된다. 멈춰야 한다.”
무정부 상태의 흥분한 군중 앞에 나타나서 사태를 냉철하게 판단하도록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담력과 강단, 그리고 평소에 지역사회로부터 축적한 신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신망 없는 사람이 나서서 군중의 생각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맞아죽는 수도 있다. 남파는 이때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부자가 지역사회로부터 신망을 얻으려면 역시 돈을 써야 한다. 1904년 나주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남파는 쌀 200석을 구휼미로 내놓고, 이듬해 종자가 될 50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굶는 사람들이 사먹을 수 있도록 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100석을 내놓았다.
1907~1908년에 나주 의병이 일어났을 때도 박씨 집안의 박민수ㆍ박사화가 의병대장을 맡았다. 의병활동도 역시 돈이 문제다. 무기ㆍ의복ㆍ식량 조달이 돈이다. 나주의 부자인 남파 집안에서 뒷돈을 댈 수밖에 없었다. 남파의 손자인 박준삼(1898~1976년)은 서울 중앙고보에 다니다가 3·1운동에 참여해 퇴학당하고 감옥살이도 했다. 그래서 1920년에 일본 릿쿄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귀국해서 신간회 활동도 하고 국산물품을 장려하는 협동상회운동에도 참여했다. 안재홍 계열이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광복군 나주 출신들도 이 집에서 뒷돈을 가져다 썼다.
1929년에 발생한 나주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된 인물은 광주고보에 다니던 남학생 박준채와 광주여고보에 다니던 여학생 박기옥이었다. 박준채는 박준삼의 친동생이고 박기옥은 사촌여동생이었다.
출처: 『조용헌의 백가기행百家紀行』, 2010
■ 궁삼면 농민들의 토지회수투쟁 60년
▲ 1991년에 건립한 나주 궁삼면 토지회수투쟁 기념비 ⓒ『한국사 속의 나주』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리게 된 까닭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1890년부터 1951년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 나주 농민들의 피어린 역사이다.
세금을 중앙정부에 납부하는 직책인 나주의 경저리(京邸吏)였던 전성창(全聖暢)은 1888년부터 3년 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세금을 내기 어려운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악용하여 세금을 대납해주겠노라 선심을 쓰는 척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인을 잃은 농토도 자기 소유로 만들었고, 나아가 대납기간 중의 담보물로 농민들의 토지 2만4천여 두락(斗落, 마지기)의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 280장을 모두 자신의 소유로 강탈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농민들이 전성창과 재판을 벌이자 전성창은 같은 탐관오리 김영규(金永逵)와 짜고 지난 번에 받아둔 담보 서류 280장을 10만냥에 엄귀비(嚴貴妃)의 경선궁(慶善宮)에 팔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경선궁에 속한 3개 면이라는 의미로 궁삼면(宮三面)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이다. 이른바 궁삼면은 현재의 나주시 영산포읍, 왕곡ㆍ세지ㆍ봉황ㆍ다시면에 해당된다.
그후 경선궁측은 소작료 검사관이란 이름으로 파견한 김영규(金永逵)더러 궁삼면 토지에 대한 소작료를 징수토록 하였다. 그러나 궁삼면 농민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자 김영규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농민들을 잡아가두거나 두들겨 패며 소작료를 빼앗아 갔다. 이에 맞서 농민들이 김영규의 권력 남용과 폭력행위를 경성재판소에 제소하자 김영규의 형인 궁내부 경무관 김영진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채 사유지를 입증하는 자료를 몰수하고 경선궁 궁장토임을 인정하라는 날인을 강요하였다. 궁삼면 농민들은 억울하지만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먼저 토지조사사업에 눈독을 들였다. 일제는 1908년 말 식민통치를 목표로 한국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를 설립하였다. 동척의 주요 사업 목표는 토지의 매입과 일본인의 농업이민을 장려하는 일이었다. 특히 비옥한 땅의 매수에 눈독을 들였는데, 최초의 대상지가 바로 궁삼면 토지였다. 동척은 경선궁의 재무 책임자에게 궁삼면 농민과의 소송으로 인한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말하며 토지를 팔라고 종용하였다. 이때 중개인은 서류를 조작하여 시가 200만원 상당의 토지를 단돈 8만원에 동척에 팔아먹었다.
이후 동척은 궁삼면 농민들에게 매매계약의 승인과 소작계약을 강요했다. 결국 경찰을 앞세운 동척의 위협에 각 면 대표들은 토지매매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소유권은 동척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동척은 “동척 소유”라는 푯말을 궁삼면 곳곳에 세우고, 우선적으로 일본인 이민 14호를 궁삼면으로 이주시켰다.
나라가 망한 1910년대에도 궁삼면 농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본격적인 소송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결국 1910년대에 진행된 재판에서 농민들은 동척과 일제 경찰의 무력탄압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1924년 말 궁삼면 농민의 대표자 이화춘 나재기 등 4명은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 척식국(拓殖局) 등 관계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925년에는 지역사회단체와 연대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에 총독부와 동척은 1926년에 이르러 이 사건을 한국 폭정의 포본이라면서 현재 법률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농민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방향에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를 침략한 후 전시동원 식민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이렇다 할 해결을 보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궁삼면 농민 대표들은 국회를 찾아가 해결방안을 호소하였다. 1950년 2월 현지답사를 한 국회의원들의 조사보고를 토대로 정부에 무상반환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4개월 후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 건의안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결국 궁삼면 토지는 농지개혁법에 의거하여 다른 귀속농지와 같은 조건으로 이들에게 분배되었다. 궁삼면 농민들의 피어린 토지회수투쟁을 대한민국 정부조차 '법적인 해결'로 마무리한 것이다.
농민들이 내 땅을 되찾기 위해 60년 이상 줄기차게 투쟁한 역사는 전무후무하다.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농민들을 비롯한 나주 지역민들은 옛 궁삼면 너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길목에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 옆에 궁삼면 농민들을 질곡에 빠뜨린 주범이자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전성창과 김영규를 잊지 말자는 '오리비’도 서있다.
▲ 탐관오리 전성창과 김영규를 잊지 말자는 '오리비(汚吏碑)'와 이설(移設)을 알리는 표지석. ⓒ『한국사 속의 나주』
출처: 『한국사 속의 나주』, 나주시ㆍ무등역사연구회, 2018
■ 호남비료공장과 독일인 프리츠 호만
해방 이후 약 20여년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가난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소망은 '배불리 밥 먹는' 것이었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의 가장 큰 소망인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식량증산'이었다.
쌀 수확량 증가의 핵심은 비료였다. 이 비료는 일제강점기에는 흥남비료공장에서 생산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흥남의 비료를 남쪽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며 남한은 절대적 비료의 부족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비료의 절대적 부족상태를 면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외국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료가 원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고, 결국 정부와 농민들은 비료의 안정적 공급을 위하여 비료공장을 건설하고자하였다. 화학비료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충주와 나주에 비료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충주비료공장은 FOA원조계획에 의거한 AID 자금과 내자로 연산 8만 5천톤 생산규모의 요소비료공장을 1955년 착공하여 1961년 4월 준공하였다.
나주에서 처음으로 비료공장 건설문제가 거론된 것은 1952년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본도 부족하였고, 기술도 부족하여 공장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았다. 1956년 정부는 서독의 루르기사의 자본에 의하여 건설 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 결정이 있고도 공사는 자금의 부족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그 와중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군정 체제인 1962년 12월 준공을 하였다. 10여년 동안 전남도민의 염원이 비로소 실현되었다. 호남비료의 준공은 쿠데타 세력들이 전남도민의 민심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준공식에 박정희는 대통령권한대행의 신분으로 참석하였고, 사장은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함께 육사 2기를 졸업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가 호남비료 사장을 역임하였다는 것은 박정희 정부가 그만큼 호남비료공장의 건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준공 1년5개월만인 1964년 4월부터 공장은 정상 가동되었다.
▲ 1950년대부터 염원하였던 호남비료공장이 1962년 12월 준공하였다. ⓒ『한국사 속의 나주』
호남비료는 1962년 준공된 이후 적자운영에 시달렸다. 1970년대에 이르면 비료의 생산량이 수요를 넘어서는 공급과잉의 상태가 되었고, 이는 호남비료의 지속적 운영을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료3사의 합병문제가 제기되었다. 결국 충주비료와 호남비료의 합병이 결정되었다. 정부는 1972년 12월 충주와 호남비료 합병회사인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로 합병되었다. 그런데.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되기 전인 1972년 충주비료와 호남비료는 사장이 겸임하였는데, 백선엽이 임명되었다.
백선엽은 봉천군관학교를 1940년 입학하여 1942년 12월 졸업하여 만주국 소위로 임관하였다. 만주국 소위로 임관된 1년 후 박정희가 만주국 소위로 임관하여 인연이 있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가 군내 좌경 인사숙군 작업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백선엽의 도움으로 구명이 되었다. 그는 이 인연으로 박정희 정부에서 승승장구하여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이 되었다.
호남비료공장을 통한 독일과 나주의 인연(나주공고)
독일의 루르기사와의 교류로 나주와 독일과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 것이 있다. 바로 나주공고이다. 나주공고는 1964년 9월 호만애암 기술학원의 설립이 그 시작이었다. 이 학교에 1965년 독일인 프리츠 호만(Fritz Hohmann)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호만은 1959년 루르기사의 기술고문으로 나주에 왔다. 그는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1962년부터 청소년 교육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한두 명의 청소년을 모아 자신의 거처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가르치는 수준이었다. 호만의 교육활동이 나주 시민들에게 알려지자 나주향교의 일부 시설을 2년가량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렇게 호만애암 기술학원이 설립되었다.
▲ 프리츠 호만(Fritz Hohmann, 1909~1982). 나주공고의 시작인 호만애암 기술학원 설립자. ⓒ『한국사 속의 나주』
교육비는 무료였으며, 기숙사비만 형편에 따라 받았다. 그래도 부족하였고, 부족분은 호만이 부담하였다. 호만애암학교는 독일식 숙련기술인 양성과정을 모델로 한 것이었으며 교육기간은 2년이었다. 호만은 학생들중 학력과 기능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독일 유학의 길을 주선해 주기도하였다.
호만은 1967년 대한민국에 귀화하였는데, 1982년 3월 독일 하노버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유골을 나주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였다. 그의 유골은 유언대로 6명의 박사를 포함한 국외 2백, 국내 3백여 명의 제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나주에 묻혔다.
출처: 『한국사 속의 나주』, 나주시ㆍ무등역사연구회, 2018
■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라는 노래를 아시죠? 김소월의 시에 안성현이 작곡한 노래다. 작곡가 안성현은 나주사람이다. 나주시 남평읍 남석리 779번지에 남평이 낳은 천재 음악가 안성현 노래비가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지 70년 만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세워졌다.
안성현의 가계는 내리 5대째 음악가의 가계를 형성한 '음악세가(音樂世家)'였다. 고조부는 판소리, 증조부는 저대(대금)의 명인, 조부는 꽹과리, 피리, 장구의 명인, 부친 안기옥은 스승 김창조를 이어 자신의 이름으로 가야금 산조를 창안한 가야금의 대가였다.
부친의 뒤를 이은 안성현은 전통 음악을 연마하고 17세가 되던 1936년 아버지 안기옥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하여 함흥중학교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1942년 도쿄의 도호음악학교 성악부(테너)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 1944년부터 전남여중(현 전남여고), 광주사범(현 광주교대),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 조선대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낭만적인 노래를 만들어 작곡 발표회를 열고 작곡집을 펴냈다.
1948년 목포항도여중 재직 시 국어교사 박기동이 1년 전인 1947년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그 누이동생을 기리기 위해 쓴 시 〈부용산〉에 안성현이 곡을 붙여 〈부용산(芙蓉山)〉 노래가 탄생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듸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은 1948년 10월 목포항도여중 예술제에서 발표된 후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빨치산이 된 사람들이 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의 가족을 그리며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작곡자 안성현은 1949년 9월 목포항도여중에서 면직되었다.
〈부용산〉이 널리 불려진 배경에 대해 극작가 차범석은 “노랫말이 쉬우면서도 서정적이고 곡 또한 친밀감이 가서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부용산〉 작사가 박기동 시인은 "내 깐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에 대한 무상을 노래한 것인데, 시보다는 곡이 워낙 절절해서 당시의 시대상에 맞아 떨어졌는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간 것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런 애창곡이 되어 나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을 만큼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천재 음악가 안성현에게 씌워진 월북 프레임을 알아보자. 안성현이 평양을 향해 떠나던 날 함께 있었던 곡성 출신 음악 교사인 김재민 선생의 이야기다.
"안성현을 만났을 때 사상성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칠줄 모르는 창작열에다 한 작품 한 작품이 한국 음악을 선두에서 이끌 만큼 앞서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전인 9월 15일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평양에서 내려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열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길을 가던 안성현 친구가 '안성희 무용발표회 리셥션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무용도 안 봤는데 참석하기가 좀 뭐하지 않느냐'니까 '그래도 본 셈치고 참석하자'고 해서 시간에 맞춰 가게 되었다. 강당에는 학생용 걸상으로 행사장이 차려졌고 장내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무심코 앉은 것이 주인공 안성희의 옆자리였는데 조금 떨어져서 안성현의 모습도 보였다. 안성희는 건강한 체구에 재치도 있었지만 최승희처럼 예쁘지는 않았다. 발표회와 리셉션을 마친 장내에 촛불이 꺼졌다. 깜깜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도 현관으로 나가다 말고 대기하고 있던 소련제지프차 앞의 안성현을 만났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까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는데 그럴까 한다' 했다.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성현을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으니까 미군들이 서울로 들어갔다면 평양 길이 끊어졌을 텐데 안성현은 어찌 됐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안성희가 평양에 있다는 풍문이 들려서 안성현도 무사히 평양에 도착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안성현이 평양에 가던 9월 15일만 해도 '월북'이나 '월남'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때는 부산 외에 모두가 인민군 치하에 접수되어있었으므로 목포에서 평양을 방문하거나 다녀온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안성현의 평양 방문 시점은 대단히 불운한 것이고, 북한에서 붙들린 상황(억북)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안성현을 '월북'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출처: 『나주의 기억을 걷다』, 박영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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