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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11,1-4.9-18.20
그 무렵 아하즈야 임금의
1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2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3 아탈야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4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9 백인대장들은 여호야다 사제가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안식일 당번인 부하들뿐만 아니라 안식일 비번인 부하들까지 데리고 여호야다 사제에게 갔다.
10 사제는 주님의 집에 보관된 다윗 임금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대장들에게 내주었다.
11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주님의 집 남쪽에서 북쪽까지 제단과 주님의 집에 서서 임금을 에워쌌다.
12 그때에 여호야다가 왕자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다음,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3 아탈야가 호위병들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모인 주님의 집으로 가서
14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탈야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
15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가 군대를 거느린 백인대장들에게 명령하였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를 따르는 자가 있거든 칼로 쳐 죽이시오.”
여호야다 사제는 이미 “주님의 집에서 그 여자를 죽이지 마라.” 하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16 그들은 그 여자를 체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탈야가 왕궁의 ‘말 문’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거기에서 그 여자를 죽였다.
17 여호야다는 주님과 임금과 백성 사이에,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게 하였다.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도 계약을 맺게 하였다.
18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바알 신전에 몰려가 그것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그 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들은 또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다.
여호야다 사제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웠다.
20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탈야가 왕궁에서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9-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 신명 7,6).
한편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또한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가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저희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만약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눈은 몸의 등불이다.”
(마태 6, 22)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있는 것을 쓸모없다고 보는 불평의 눈이 아니라, 있는 것을 소중하다고 보는 축복의 눈이 되게 하소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경탄과 탄성, 경배와 경외를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를 보되 그 속에서 구원을 볼 줄을 알고, 죄를 보되 자책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보는 맑은 눈이 되게 하소서.
진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보고, 행위를 넘어 존재를 보는,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의 눈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재물이 보물이 되도록>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마태 6,20ㄱ)
제 생각에 오늘 주님께서는 재물을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갓 재물일 뿐인데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을 보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혜로운 프란치스코는 돈을 똥쯤으로 여겼지요.
그것은 돈이 이 세상에서만 쓸모가 있지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보물로 여기며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마귀처럼 원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프란치스코가 똥으로 여긴 재물을 천국의 보물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똥이 보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음으로써입니다.
재물을 세상에 쌓으면 똥이 되지만 하늘에 쌓으면 보물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재물을 어떻게 하늘에 쌓느냐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재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욕심을 부리면 재물이 똥이 되고, 집착하면 재물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그것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재물은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하늘나라를 사랑하면, 돈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면,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를 더 사랑하면,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돈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이 세상보다 하느님 나라를 더 사랑하는 것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마음을 두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보십시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보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이 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바다에 두면 바다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선한 곳에 두면 선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성한 눈은 맑은 눈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학부모는 하느님께서 최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가 입시를 준비하면 성당에 가는 것은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최고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아깝고 성당에 머무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며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최고이십니다.
이 세상의 무엇과 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보물이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7-8)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기려 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낮추고 섬기는 곳에서는 협력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특별히 열두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뽑힌 이들을 보면 아주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오, 혁명당원 시몬,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새 희망을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의 허물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사람이고 그 사람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때로 기적을 베풀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능력을 드러냈을 때, 트집을 잡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소신 있게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시작한 일이 선하다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께로,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님께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다른 것은 속여도 이것은 절대 속일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 곳에 나도 머물게 됩니다.
돈은 썩어서 흙이 될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자신도 흙이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로 떨어지는 얼음 위에 붙은 양의 사체를 먹겠다고 하다가 얼음에 들러붙어 죽는 독수리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과 같습니다.
밑으로 가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는 능력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바라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것을 사랑하면 이 지상의 것과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바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의 것을 바라는지, 지상의 것을 바라는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눈빛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여기에서 밝고 어둠은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눈빛이 맑으면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탁하면 지상의 것을 욕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건 다 속여도 눈빛은 못 속입니다.
마음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 육체의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솔직한 여자TV: 키 작은 중국 재벌이 가난한 척하고 소개팅 나갔더니’란 중국 소개팅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냥 예상한 것 그대로였습니다.
여자는 돈과 외모를 밝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는 돈만 바라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제작팀에게 자기 재산과 직업을 숨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여자 측에서는 키도 작고 옷 입는 감각도 없는 남자를 대놓고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빨리 가서 쉬고 싶다는 귀찮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자는 끝까지 친절하려고 노력합니다.
여자가 하도 남자를 무시하니 제작진은 남자 몰래 그 사람이 호텔을 아버지로부터 인수하는 중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돌변합니다.
눈이 빛납니다.
남자는 짙은 화장의 여자는 싫다고 했고 여자는 바로 립스틱을 지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종처럼 부려 먹던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려고 합니다.
허술한 남자는 이제 자기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라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작진은 솔직하게 돈 많은 사람임을 밝혔다고 말해줍니다.
어쩔 수 없이 여자의 마음을 알기 위해 따로 제작진이 말을 하고 이것을 남자가 듣게 했습니다.
만약 남자가 돈이 없었어도 선택했을 것이냐고 하자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돌아서 가버립니다.
만약 남자가 돈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이는 사람과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못 벌어다 주면 끊임없이 구박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돈을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아도 자신과 똑같이 돈만 욕망하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자녀 대부분은 엄마를 그대로 닮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사람을 사귈 때 자신과 비슷하거나 나은 수준의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나의 수준이 곧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의 대화에서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었는데도 그녀와 함께 해서 멸망했습니다.
사람은 말이나 행동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빛은 절대 못 속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챌 수 있어야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1)
오늘 말씀에서 ‘자신을 위하여’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세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현세의 인생만을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 14,7-9)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는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허무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생명을 받으려고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2)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는 “현세의 인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욕심내지 말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는 “지상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진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하다.”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입니다.
허무한 것만 찾는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 것이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 믿는 세속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즉 주님 뜻에 합당한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어서 ‘그날’에(종말의 날에)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그날 완성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시작된 그 생명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는 “주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복음의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입니다.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는 “복음을 외면하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찾는 사람의 인생은 멸망을 향해서 간다.”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남들보다 더 짙은 어둠 속에 빠진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멸망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콜로 3,1-4.9ㄴ-10ㄱ)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것과 낡은 것은 죽이고, ‘새 생명’을 얻어서 ‘새 인간’으로 태어났고, ‘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4)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5-17)
‘세상에서 온 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세상에서 온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 “참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미친 사회, 병든 사회, 비정상 사회 같습니다.
저절로 예나 이제나 묻게 되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작년 모 정신과 의사의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는데, 작금의 현실은 <대한민국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또는 <세계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라 해도 될듯 합니다.
삶의 비전을, 삶의 꿈을, 삶의 희망을 잃으면 그 어디나 머지 않아 정신병동이 됩니다.
정말 건강한 정신, 튼튼한 영혼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곳곳에 끊임없이 올라가는, 신축되는 고층 아파트 숲을 볼 때마다 참으로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마을에 이어 흙과 나무와 풀과 꽃과 다양한 생명체들과의 평화로운 조화와 공존이 정신 건강에 절대적인데...
자연과 흙에서 멀어질수록 심신의 병들은 늘어나고 깊어질텐데 참 걱정입니다.
어제 원장수사와의 면담차 수도원을 방문한 분에게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을 만나니 예수님 앞에 있다 생각하고 속 사정을 겸손히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또 엊그제 이 형제를 재무수사에게 안내하면서 드린 대동소이한 조언도 생각납니다.
“수도원에서 제일 좋은 분이니 용기를 내어 어려움을 다 털어 놓으시오.”
재무수사는 그 초라한 분의 행색에 상관없이 정중히 악수한 후 함께 자리에 앉은 다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순간 차별감없이 정중히 악수한 후 경청하는 수사님 자세에 감동했습니다.
함께 살아도 우리 수도형제들이 얼마나 좋은 분들인지 늘 체험합니다.
평소 하는 본업(本業)이 하느님 찾는 일이고, 하느님께 삶의 비전을, 삶의 꿈을, 삶의 희망을 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아가는 신분의 수도자들이기에 참 좋은 사람이 될 수 뿐이 없겠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묵상감입니다.
“먼저 목표에 도달한 사람과 나란히 서라.
그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다산>
말을 바꾸어 감히 저는 말합니다.
“먼저 존경하는, 닮고 싶은 성인과 나란히 서라.
그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나이에 관계 없이 삶의 목표에, 정상에 도달한 분이 성인입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순임금의 모범에 비해 나는 아직도 시골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근심이 깊으니 어찌해야 할까?
그저 순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소학>
소학小學은 중국 남송 시대에 주희의 감수하에 그의 제자인 유자징 등이 편찬한 책으로, 1187년 주희가 58세 완성했으며, 대학大學에 대응시킨 말입니다.
아동의 초보교육을 위해 일상적인 예의범절과 어른을 섬기고 벗과 사귀는 도리등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책입니다.
순임금 대신 성인을 넣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예수회 수도자도 23년이란 짧은 생애로 선종했지만 삶의 햇수에 상관없이 삶의 목표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가문에 태어난 그는 군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원의에 결연히 반대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신학생 시절 흑사병이 만연한 도시 로마에서 병자들을 돌보다 병에 전염되어 23세 꽃다운 나이에 선종한 성인입니다.
짧은 성인의 생애였지만 삶 전체가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1591년 선종한 알로이시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3년 후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에 대한 배려가 참 놀랍고 감사합니다.
창공의 빛나는 별들처럼 우리 삶의 비전이, 삶의 꿈이, 삶의 희망이, 삶의 길이, 삶의 빛이 되어주는, 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성인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 바로 살아 있는 성인이라 일컫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어제도 다양한 분들과 만나 금과옥조의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진리 탐구 중 믿음과 과학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과학자들과의 만남 시 주신 말씀의 요지입니다.
“희망의 표징들(signs of hope)이 되십시오.”
루터교 신자들과의 만남 시 강조한 대목입니다.
“너희의 확신과 믿음에 진실히 머물러라.”
신학생들과의 만남 시 주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지런히 교회의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착한목자 성인교황이요 하시는 모든 일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십니다.
참 행복을 원하십니까?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한 내적 삶을 원하십니까?
답은 하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전념(專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땅에 보물을 쌓습니다.
그러니 두 부류의 삶으로 나뉘어집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과 땅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늘 물어야 할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에 속합니까?
이타적 사랑 실천의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자선활동도, 봉사활동도,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성무일도 시간이나 미사시간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참으로 안전한 하늘 보물 창고에 쌓이는 사랑의 선행들입니다.
땅에만 보물을 쌓다가 하늘 나라에 갔을 때 내 텅빈 하늘 창고라면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뵈올수 있을런지요!
참 시급한 일이 수시로 내 하늘 창고를 점검해 보는 일이고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부여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기회들입니다.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과연 내 마음은 하늘에 있습니까?
땅에 있습니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음으로 내 마음 하늘에 있을 때 그 사람은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충실할 때 주님의 빛이 그를 채워 마음도 눈도 몸도 환할 것이요 웬만한 심신의 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복음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내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하늘에 보물을 쌓는 무욕의 삶, 비움의 삶일 때, 순수로 빛나는 마음에, 눈이요, 몸입니다.
마음이 밝고 맑으면 눈도 몸도 밝고 맑으며 저절로 심신의 치유와 건강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할 때, 주님의 빛으로 빛나는 눈이요,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마음이요 몸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야다 사제의 혁명이 성공함으로 폭력의 악순환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무지의 미몽에서 벗어나 바알 신전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상들을 산산조각 부숩니다.
온나라 백성이 기빠하고 이제벨에 버금가는 악녀 아탈야는 살해됨으로써 도성은 평온을 찾습니다.
바야흐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 기반을 마련한 여호야다 사제의 대활약이 눈부십니다.
참된 회개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이렇게 살 때, 참된 자유, 참된 부요, 참된 행복의 삶이겠고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온누리 반기어 주님께 소리쳐라.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당신 앞에 나아가라.”
(시편 100,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흥부네는 자식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아이들까지 많으니 흥부네는 열심히 일해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쁘기 마련입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작은 가게를 시작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해서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큰 행사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본당 견진성사와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겹쳤습니다.
둘 다 일정을 제가 잡지 않았습니다.
견진성사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꾸르실료 교육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제가 댈러스로 오면서 꾸르실료 지도신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꾸르실료 교육을 맡아야 했기에 일정이 겹친 겁니다.
견진성사는 주교님이 오시고, 본당의 큰 행사이니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꾸르실료도 지도신부이기에 당연히 교육에 함께 해야 합니다.
주일 새벽에 꾸르실료 미사를 마치고, 본당으로 와서 견진성사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주교님이 떠나시고, 다시 꾸르실료 마침예식을 위해 갔습니다.
견진성사도, 꾸르실료 교육도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견진성사 미사를 하면서 주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시고 소탈하신 모습입니다.
작은 차를 손수 운전하고 오셨습니다.
장백의도 직접 입으셨고, 제의는 본당 것을 빌려 입었습니다.
공지사항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이 오시니, 제가 순위에서 밀리네요?”
교우들은 웃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말을 이해 못하시니 나중에 교우들이 왜 웃었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주교님에게 본당 사제와 주교는 순위와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교와 본당 사제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권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교님은 점심 도시락을 드시고, 남은 건 가져갔습니다.
저녁에 드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주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도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30개월 임기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건 저와 부주임 신부님이 속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께 먼저 청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시니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권위와 직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겸손과 단순함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나눔입니다.
그것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료는 교육 특성상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마친 사람을 꾸르실리스타라고 합니다.
3박4일 교육을 마친 형제님이 소감을 발표하면서 ‘꾸르실리스타와 바리스타’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스타는 일정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 커피의 맛과 풍미를 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줍니다.
명동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은 가톨릭 바리스타 협회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자원봉사로 커피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은 하늘에 재물로 쌓일 것입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도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리스타도 3박 4일 교육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맛과 풍비를 이웃에게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꾸리실리스타는 기도, 활동, 공부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서 복음을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꾸르실료 교육의 목적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입니다.
저는 32년 꾸르실리스타로 지내고 있지만 그렇게 멋지게 설명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타는 별이라는 뜻도 있고,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번 3박4일의 교육에 15명의 봉사자가 함께 했습니다.
그분들 또한 하늘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분들이 쌓은 재물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일치할 수 있도록>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연애의 고수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상대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말에 자기 속마음을 슬쩍 얹어서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넘어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애 때만 그렇겠습니까?
사기꾼들도 그렇다고 하지요.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해주면서 사기를 칩니다.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저 역시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저에 대해 말하면 귀가 쫑긋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걸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자기 SNS 계정의 글에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신경을 씁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이렇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댓글을 달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말씀을 직접 해주지 않아서일까요?
사실 계속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이웃을 통해, 무엇보다 자기 삶을 통해 직간접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침묵 속에서, 또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워낙 다른 사람 말에 집중을 잘하는 우리이기에 조금만 노력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충분히 담을 수 있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웃이나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보물이 망가지지 않고 안전한 곳인 하늘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따라 우리 몸이 빛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어둠 속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봐야 할까요?
주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일치할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만을 바라보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삶은 이제 버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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