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 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이사 49,1-2)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진짜 헛수고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사 49,4)
헛수고.
저는 헛수고를 정말 싫어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 중의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전에 산청 성심원에서 했던 포르치운쿨라 축제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인상이 많이 남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금 새로 프란치스칸이 된 분들에겐 그런 체험이 없어서 안 됐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수천 명이 모여서 그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억과 감명으로 남았다는 것이, 한편 저의 보람으로 남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은 다른 한편 헛수고로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하나의 일이랄까 행사일 뿐이고, 전국적인 축제는 없어져도 어쨌거나 여기저기서 축제를 지내니, 이 프란치스칸 운동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헛수고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더 헛수고로 느끼는 것은 사람 농사입니다.
수도원 안팎에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저의 노력이 열매 맺지 못하거나 그런 노력이 비록 일부에게서지만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난받을 경우, 무척 마음이 아프고 헛수고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정말 제가 세속적이라는 표시이고, 그런 면에서 이런 헛수고 체험은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하지요.
이런 헛수고 느낌은 저의 노력과 수고가 세속적으로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욕망과 욕심이 아직도 있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이사야가 얘기하는 헛수고 느낌은 제게 필요하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성인들과 비교하면 헛수고 체험을 오히려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의 수도회 개혁 노력이 반대와 박해로 보상받고,
성 프란치스코도 자기가 시작한 운동이 제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았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제자들은 다 자기를 떠나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의 목숨은 한낱 계집의 앙심 때문에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생각에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범인은 이 헛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지만, 성인은 이 헛수고 체험이 하느님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이 없는 수고가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진짜 헛수고는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헛수고 체험으로만 남고,
그 이상의 하느님 보상 체험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헛수고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진정 가련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에게서 보상받지 않고 세상에서 보상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례자 요한이라는 거울을 통해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하였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앞세웠습니다.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주님의 영광을 말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자기 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자기 소신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신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 소리만 키우고 기대하며 강요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크고, 더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흔들어 떨어뜨려야 내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이 아닌가 합니다.
여당 대표로 나서는 사람들의 주장이 꼭 그렇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요한처럼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을 앞세우는 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주님을 가슴에 담고 그분을 위해 산다면 우리의 주변은 참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커질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요한의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젊은 날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石女)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도 잠시 벙어리가 되는 아픔을 통해,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셨고 성장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은총을 받았으며,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을 더 크게, 그리고 우선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섬김을 통하여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비혼주의: 행복할까?>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통상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인(聖人)들의 축일은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분들께서 돌아가신 날, 다시 말해서 천상 탄일을 축일로 정해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탄생 축일을 경축합니다.
그에게는 축일이 두 개입니다.
탄생 대축일과 수난 기념일.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등급이 높은 성인인 것입니다.
그를 성인 중에서 대성인으로 인정하며 각별한 공경과 예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세월을 나자렛에서 조용히 지내셨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오랜 세월 광야에 머물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 내공을 닦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헤로데 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럴 때 마다 세례자 요한은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자 요한을 성인 중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지녔던 탁월한 겸손의 덕 때문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제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히 귀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1)
우리 교회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 강생의 예고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은 사실은 ‘메시아 강생’을 경축하는 것이고, 이 대축일의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 1,6-8)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참 빛이신 분’(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옛말에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요한의 손가락만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나를 보지 말고 그분을(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만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권고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를 제대로 알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등장하시면 자기는 물러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왜 메시아 앞에 세례자 요한을 보내셨을까? 그냥 메시아께서 곧바로 활동하셨어도 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효율성을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이 없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을 회개시킨 것도 아니고, 요한 덕분에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쉽게 시작하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 5,33-36)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구원 사업의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메시아 예수님보다 예언자 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 라는 것을, 즉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메시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3)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필요했겠지만,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필요 없지 않은가? 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세례자 요한과 그의 활동을 중시하고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단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명을 완수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회개 선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처럼, 요한이 선포한 ‘회개 선포’도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이 완전히 확정될 때까지는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루카 3,7ㄴ-8ㄱ)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루카 3,9)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
(루카 3,16ㅁ-17)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섭리의 삶, 겸손의 삶, 감사의 삶”>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시편92,5)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 말고 이렇게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성인은 요한 세례자뿐입니다.
새삼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교회에 얼마나 독보적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입당송과 화답송 후렴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 요한 세례자 요한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입당송>
“오묘하게 지어 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화답송 후렴; 시편 139,14ㄱ)
이어지는 시편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시편 139,1-2)
24절까지 이어지는 시편 139장은 참 깊고 좋은 묵상자료가 됩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님을 봅니다.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무리 물어도 하느님 없이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필생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임과 동시에 참나를 아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여정을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하닮의 여정에 오늘 옛 어른이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느긋한 걸음이 가장 멀리 가니 먼 길을 앞당길 수 유일한 길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다산>
“주저하는 준마보다 꾸준히 가는 둔마가 낫다.”
<사기>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가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한 소의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뜻, 한결같은 노력의 자세를 뜻함),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의 시선으로 멀리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걷는다는 뜻)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소띠요 우직하게 날마다 '참으로 살기 위하여' 소처럼 몸으로 강론을 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늘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입니다.
짐승들처럼 생각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일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주님을 섬기며, 은총의 도움에 힘입어 주님을 닮음으로 참나를 실현해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은 참 좋은 삶의 좌표가 됩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아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인 축일 때마다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성인이 되려는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가 우리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첫째, 섭리의 삶입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하느님 섭리안에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의식은 정체성의 형성에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기에 생각없이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다음 이사야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거듭 확인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 대신, 내 이름을 넣으면 그대로 우리의 신원이 됩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의 영예로운 성소라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에겐 새로운 힘이 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세례자 요한,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고유의 제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으로 살라고 불림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주님은 우리 삶의 존재 이유가 되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해 평생 기도와 말씀 공부의 수행은 필수입니다.
둘째, 겸손의 삶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일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평생과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바로 주님께 돌아오는 평생 회개를 통해 참 나를 아는 겸손에 이르게 됩니다.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바로 이런 겸손의 모범이 세례자 요한이요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가 잘 증언합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세례자 요한입니다.
겸손의 아름다움, 겸손의 매력, 겸손의 향기, 겸손의 진실, 겸손의 사랑, 겸손의 용기, 겸손의 지혜입니다.
겸손은 우리 인품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에게 파견되신 구원의 말씀, 예수님을 닮을수록 겸손과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있어 세례자 요한이듯 예수님 있어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세례자 요한의 자랑이듯, 세례자 요한,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예수님,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자랑이어라.”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겸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성덕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셋째,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관계 속의 더불어의 존재들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관계는 존재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과 인간의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합작품의 결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엘리사벳 단독행위가 아닙니다.
복음 서두가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함께 기뻐하였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이런 함께 기뻐할, 참 좋은 인정을 지닌 마을 사람들이, 친척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을의 자리에 고립단절의 아파트 숲이 들어서니 더불어의 삶은 날로 악화되고 온갖 질병도 늘어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작명 과정에 연루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작명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경사이자 기쁨이었고, 즈카르야 엘리사벳 부부는 물론 후에 이런 상황을 전해 들었을 세례자 요한 마음 깊이 각인된 하느님께 감사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례자 요한의 생애가 답을 줍니다.
1. 섭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자녀, 빛의 자녀로서 사명을 다하는 섭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 겸손의 삶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겸손의 삶입니다.
3. 감사의 삶입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감사입니다.
이렇게 관계 속에 더불어 살 수 있음에 하느님께, 이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섭리에 충실하며 매사 겸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다른 성인의 축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성인들은 세상을 떠난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공덕을 쌓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경자, 복자, 성인’의 순서를 거쳐야 합니다.
증인이 있어야 하고, 성인의 전구를 통해서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103위의 성인과 124위의 복자를 신앙의 증거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성인과는 달리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는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엘리사벳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따라서 속죄의 예식을 거치고, 제물을 바쳐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요한은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상대방 중심의 생각’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도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여름이 긴 하지에 가깝습니다.
하지가 지나면 여름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축일은 겨울이 가장 긴 동지에 가깝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점점 길어집니다.
‘성소 후원회’ 임원 연수 때입니다.
강사 신부님은 제가 예전에 본당 신부님으로 모시던 분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끈 없는 신발을 신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을 유쾌한 유머로 받아 주시는 신부님은 역시 저보다는 한 차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슬플 수 있습니다.
구약을 마치고 신약을 시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는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들었던 세례자 요한은 ‘살로메’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사랑과 공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휴대폰 광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 놓으셔도 좋습니다.’
늘 켜져 있어야 하는 휴대폰도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면 꺼도 좋다는 광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서운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속이 상해도 웃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질 때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셨고, 재물보다는 가난함을 택하셨고, 모욕과 멸시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쥐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의 기다란 두 통에 쥐를 각각 한 마리씩 넣었습니다.
한 통은 깜깜했고, 다른 통은 뚜껑에 바늘구멍을 뚫어 빛 한 줄기가 들도록 했습니다.
빛이 전혀 통하지 않는 통의 쥐는 세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빛 한 줄기만 비치는 통 안의 쥐는 무려 서른 시간을 견뎠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만이 가득한 곳에서 살맛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덕분에 희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비칠 빛만 찾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빛으로 다른 이가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 역시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현실이 힘들어도 내일은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어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라고 불리는 또 다른 빛도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빛이기에 가능합니다.
오늘은 오실 주님을 준비한 요한 세례자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이웃과 친척 모두 기뻐합니다.
단순히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는 자애로우시다.’라고 하지요.
그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지금 갓난아기인 요한 세례자에게, 그리고 요한의 명명식 때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내려서 불신으로 말하지 못했던 그가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했던 것은 하느님 찬미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았기에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모두 기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기 빛이신 하느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만 받아야 할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받아야 살 수 있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또 그 희망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