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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은 …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9년 포크 음악 모임 ‘참새를 태운 잠수함’으로 활동을 시작해 1986년 그룹 ‘이종만과 자유인’으로 1집 앨범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발표했다. 2집 ‘신사와 청바지’, 3집 ‘나의 선택’을 발표했고, 2002년 4집 ‘종로 아저씨’를 발표했다.
1996년 ‘찬불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좋은 벗 풍경소리’를 만들어 찬불가를 만들고 보급하는 일을 해 오고 있다. 2007년에는 두 차례의 개인 콘서트를 열었고, 행원문화상을 수상했다. 2010년부터는 뉴트리팝스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와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연등축제 회향한마당 기획과 각 사찰의 산사음악회 기획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연등축제의 노래 ‘오늘은 좋은 날’과 ‘길 떠나자’, 찬불동요 창작곡집 ‘풍경소리’,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장돌뱅이’ 등이 있다. |
조계사어린이합주단 인연 후 찬불가 접해 1986년 ‘이종만과 자유인’으로 정식 데뷔 1995년 첫 찬불동요집 발표…36집 발표 찬불가 400여 곡 발표 중 자작곡 100여 곡 연등축제 찬불가 작곡, 회향한마당 기획 “방송에서 찬불가 많이 틀어줬으면…” “찬불가는 사경·염불·독경과 같은 것”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온갖 꽃 피어나는 만 생명 축복의 날. 오늘은 기쁜 날 님께서 오신 날. 별 담은 새벽이슬 연꽃이 피는 날. 한줄기 햇살이 온 세상 빛이 되어 노래하리.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진리의 함성이 온 누리 퍼지네. 환희의 노래로 온 누리 퍼지네.”
국민 찬불가 ‘오늘은 좋은 날.’ 찬바람이 들락거리기 시작한 가을의 문턱에서 국민 찬불가의 작곡가 이종만(55)을 만났다. 사무실 창가엔 기타 하나가 서있다. 마주 앉은 그의 시선 끝에는 그동안 그가 발표했던 찬불가와 찬불동요 음반이 빽빽이 꽂혀 있고, 벽면엔 ‘붓다 콘서트’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1996년부터 ‘찬불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좋은 벗 풍경소리’(이하 풍경소리)를 이끌고 있는 그는 자신을 ‘찬불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불러 달라고 했고, 기사에 그렇게 적어 달라고 했다. 그동안 그의 이름 뒤에는 수식어가 많았다. ‘이종만’을 한 마디로 정의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그는 ‘찬불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오랜 세월을 살고 있는 뮤지션이다. 특히 ‘찬불동요를 사랑해오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찬불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일까.
갑자기 꺼진 불 그는 대중가수를 꿈꾸고 있었다. 길을 모색하던 20대 초반, 그는 포크 음악을 하는 동아리 형태의 그룹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그룹 내 선배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으며 꿈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주목받기 시작했고, 주목을 받기 시작한 젊은 음악인은 세상이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종만’이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다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는 대한민국이 격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1980년 초였다. 모든 것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시기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동아리 활동이 여법하지 못하게 됐다. 첫 번째 시련이었다.
“늘 환하게 켜져 있을 것만 같았던 인생의 불이 갑자기 꺼진 것 같았죠. 그 때는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았고, 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몰랐던 애송이였던 것인데, 자신을 몰랐던 거죠. 음악적으로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요.” 갑자기 꺼진 인생의 불빛.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처음 써 본 찬불동요 방황이었다. 답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친구의 부탁으로 서울 조계사 어린이법회 내 ‘어린이 합주단’의 지도교사를 맡게 된다. 약 50명 규모의 어린이 연주단이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에게 어린이 합주단은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다. 일단 음악 속에 있을 수 있었다. 말(馬)이 없던 기수에게 작은 말이 하나 생긴 것이다.
아이들의 음을 잡아주고, 손을 잡아주며, 아이들의 서툴지만 때 묻지 않은 음악 속에 있을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신이 나서 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 순간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거든요.”
그는 그렇게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음악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고, 음악의 처음으로 돌아간 그는 인생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하게 된다. 약 한 달 동안 어린이 합주단을 지도해주고 그는 다시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조계사 어린이 법회 관계자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게 된다. 노랫말이 있으니 곡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어린이를 위한 찬불가였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찬불동요를 작곡하게 된다.
다시 들은 나의 노래 “개구쟁이 우리 스님 살금살금 다가와서 귓가에 입을 대고 어흥하고 소리쳐요. 깜짝 놀라 돌아보면 메롱찌롱 놀리지만 스님 얼굴 바라보다 슬그머니 웃음짓죠. 개구쟁이 우리 스님 살금살금 다가와서 어깨를 툭 치고는 검지손가락 갖다 대요. 화가 나서 돌아보면 혀 내밀며 약 올려서 스님 모습 바라보며 까르르르 웃고 말죠.”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답답한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을 때였다. 그는 친구를 따라 조계사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여름 캠프를 따라가게 된다. 캠프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노래는 자신이 한 2, 3년 전에 만들어준 ‘개구쟁이 스님’이란 노래였다.
“그때 곡을 써주기만 했지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들어보진 못했는데, 캠프를 같이 가서 처음 아이들이 부르는 제 곡을 처음 듣게 되었죠. 합주단 지도교사를 했을 때 받았던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찬불가’란 거창한 생각보다도 ‘동요’에 대한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지만 아, 이런 음악도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이란 생각에 답답한 시간만을 보내고 있었던 저로서는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거죠. 그 시절이 훗날 제가 찬불가를 할 수 있게 된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른 행복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그는 1986년 ‘이종만과 자유인’이란 그룹으로 1집 앨범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을 발표한다. 1집 앨범이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음반이 발매되고 약 1년이 지나서다. 조용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그의 노래는 1987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공전의 ‘히트’를 한다. 20대 중반, 그는 이른 나이에 뮤지션으로서 성공한다.
대중의 사랑은 달콤했고, 조명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너무도 냉혹한 ‘조건’을 필요로 했다. 또한 그 사랑이 만든 조명도 영원하지 않았다. 대중의 마음속에 선명했던 그의 이름은 차츰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를 비추던 조명도 꺼져가기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뮤지션으로서 성공을 맛보았던 그는 갑자기 다가온 어둠 속에서 당황했고, 또 한 번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른 어둠 이른 나이에 성공의 행복을 경험했던 그는 이른 나이에 어둠의 시간을 맞는다. 1990년대 초 3집 앨범을 끝으로 그의 이름은 대중들로부터 멀어진다. 또 다시 어두워진 시간, ‘인기’를 먹고, 밝은 조명 속에서 살았던 젊은 뮤지션이 견디어 내기엔 힘든 시간이었다. 그동안 대중이 가져갔던 이름 ‘이종만.’ 하지만 더 이상 대중이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런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그들이 가지고 있을 순 없었다. 다시 찾아온 자신의 낯선 이름. ‘나는 누구인가’로 방황은 시작된다.
“힘든 시간이었죠. 길을 완전히 잃었다고 할까요. 김민기나 한돌 같은 선배들이 가는 길도 멋있어 보였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매일매일 반짝이는 후배들이 가는 길도 부러웠죠. 다른 사람들의 길만 보이고 나의 길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시간이었죠.”
첫 찬불 동요집 또 다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어린이 여름 불교학교’에 참석하게 된다. 불교학교에서 돌아온 후 그는 어린이 율동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에게 율동에 필요한 음악을 녹음해 주게 된다. 카세트 테잎에 직접 기타연주를 하며 찬불가를 녹음하고 있던 그들에게 제대로 된 사운드의 찬불가를 녹음해준 것이다. 반응은 뜨거웠다.
교사도 아이들에게도 모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찬불가가 이렇게 신나는 것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찬불가의 맛을 본 어린이 법회 관계자들이 그를 찾아왔다.
“찬불 동요로 음반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죠. 10년 전 조계사 어린이 합주단을 할 때가 생각났어요. 힘들 때 들었던 아이들의 음악. 그리고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제 노래가 떠올랐어요. 얼마 후 음반을 냈죠. 첫 찬불동요집이죠.”
1995년 그의 첫 번째 동요집은 그렇게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풍경소리’라는 이름으로 현재 36집까지 발표됐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동안 ‘풍경소리를 통해 발표된 찬불동요는 약 400여 곡에 이르고 그 중 그가 작곡한 곡은 약 100여 곡에 이른다.
그는 풍경소리 10집이 나온 2000년부터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를 위한 찬불가를 만들기 시작한다. ‘부처님 오신날’은 그때 만들어진 노래다. 그리고 그는 연등축제의 피날레인 ‘회향한마당’을 봉축위원회와 함께 10년 째 기획해 오고 있다.
“노래 좀 틀어주세요” 그는 2012년 7월부터 ‘붓다 콘서트’를 월 1회 진행해 오고 있다. 자신이 만든 노래를 비롯한 찬불가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그동안 그와 ‘풍경소리’는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을 해온 그가 바라는 것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언론이나 방송에서 찬불가를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언론에서 좀 더 간절하게 소개해 주고, 방송에서 많이 틀어달라는 것이다. 대중이 찬불가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고 기회가 없으니 찬불가에 대한 인식과 저변이 넓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그런 무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무대가 ‘붓다콘서트’인 것이다.
“음악의 힘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성 형성에 대단히 큰 작용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부처님, 부처님’ 할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매일 매일 찬불가 들으면서 자라게 하는 거죠. 그것이 훨씬 더 확실한 불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찬불동요’라는 말 보다는 ‘어린이를 위한 찬불가’, ‘어린이 찬불가’라고 하고 싶어요. 어린이 찬불가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요를 비롯한 모든 찬불가가 존재하는 의미는 ‘불교’ 안에 있는 여러 신행과 수행의 방법 중의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경을 하는 일이나 염불을 하는 일, 경전을 읽는 일과 같은 것이라는 거죠.”
그는 벌써 내년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를 위해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불가를 사랑하는 사람 ‘이종만.’ 이제 그의 이름 석 자는 공든 ‘탑’이고, 그의 어깨엔 무너질 수 없는 업적이 쌓였다. 그는 “이제 전역하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하지만 ‘풍경소리’ 36집 CD에 한참을 머물고 있는 그의 시선에서 그의 업적은 계속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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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0년부터 뉴트리팝스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와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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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7년 두차례 개인콘서트를 여는 등 대중가수로서의 활동도 왕성하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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