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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9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카리브해 화산 폭발
해발 1234m 높이의 수프리에르 화산은 4월9일 폭발했다. 1979년 4월 폭발 이후 42년 만이다. 다행히 현재까지 인명피해는 없지만 1만6000∼2만명의 주민이 집을 떠나 피난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화산 폭발 여파로 일부 지역엔 전기와 물마저 끊겼다. 화산재로 식수원이 오염돼 식수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으며 가축과 농작물 피해도 상당하다.
2019년 강원 산지에 43년 만의 4월 폭설 대관령 23.8cm 태백 22.5cm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기소됨,
다스 비자금 조성 등 횡령‧다스 법인세 포탈‧다스 140억원 회수 관련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등 뇌물‧국정원 특활비 등 뇌물‧공직 임명 대가 뇌물 수수 등 혐의
2015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자살
검찰 수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북한산에서 자살했다
그의 주머니에선 정치인의 이름과 돈 액수를 적은 메모가 발견되었다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조옥 3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 10만불, 이병기, 이완구 였다
대부분 여권 핵심인사였던 만큼 파문은 커졌다
검찰은 7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전총리와 홍지사는 불법자금 수수혐의로 불구속 기소했고 나머지는 무혐의 또는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2013년 북한 노동자 철수로 개성공단 가동 중단
2009년 북한 12기 최고인민회의 첫 회의 - ‘김정일 3기 체제’가 공식 출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 실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율이 46%로 잠정 집계돼 역대 전국 단위 선거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낮았던 2002년 제3회 지방선거 때의 48.9%보다 2.9% 포인트 더 떨어진 수치다. 국회의원 총선에서 투표율이 50% 아래로 떨어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역별로는 제주가 53.5%로 가장 높았고, 인천이 42.2%로 가장 낮았다. 2000년 16대 총선 때 57.2%였던 투표율은 2004년 17대 총선에선 대통령 탄핵 사태 등의 영향으로 60.6%로 반짝 상승했었다.
이 같은 최저 투표율은 여야가 뚜렷한 이슈를 만들지 못해 유권자들의 관심을 모으지 못한 데다 정치 무관심이 확산되고 선거 당일 전국적으로 비까지 내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4·9 총선에서 야당인 통합민주당엔 압승을 거뒀지만 당내 친박(親朴)세력의 저지선을 넘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여야가 각각 주장한 ‘안정론’ 과 ‘견제론’ 중에서는 안정론 쪽 손을 들어 주었지만, 여당엔 친이(親李)와 친박(親朴) 세력 간의 협력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라는 별도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원내의 좌우 균형은 4년 만에 뒤바뀌었다.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152석), 민주노동당(10석), 민주당(9석) 등 대북 유화정책에 동의하는 진보 좌파 성향 정당들의 의석 수는 171석으로 과반을 훨씬 넘겼다. 한나라당(121석), 자민련(4석) 등 보수 우파 정당들은 12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반면 이번 총선에서는 한나라당과 한나라당에 뿌리를 둔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그리고 친박 무소속 등 우파에 속하는 당선자 수가 200석에 육박하고 있다. 지난 4년간 노무현 정권의 실패한 좌파 실험에 대한 역풍이 그만큼 거셌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4년 전 과반을 넘겼던 열린우리당의 후신 민주당 의석은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지난 총선에서 10석을 차지하며 3당으로 부상했던 민노당도 이번엔 민노, 진보신당으로 분열하면서 위상이 크게 위축됐다.
2005년 영국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볼스와 재혼
영국 찰스 왕세자가 2005년 4월 9일(현지시간) 그의 첫사랑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했다. 이들은 말 많고 탈 많았던 35년간의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고 합법적 부부가 됐다.
카밀라는 1947년 런던에서 평민의 딸로 태어나 런던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프랑스와 독일에 유학했다. 1970년 윈저성의 폴로 경기에서 찰스와 처음 만나게 됐다. 열렬한 연인이었던 찰스와 카밀라는 1971년 찰스가 해군에 입대하며 멀어졌다. 2년 후인 1973년 카밀라는 찰스의 친구인 앤드루 파커볼스와 결혼해 1975년 아들 톰을, 4년 뒤엔 딸 로라를 낳았다. 찰스도 1981년 11세 연하의 다이애나와 결혼해 1982년 윌리엄 왕자, 3년 뒤 해리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찰스와 카밀라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다이애나와 삼각관계로 이어졌다.
1992년 내연관계를 암시하는 대화 테이프가 유출됐고, 이런 삼각관계는 결국 파탄을 낳았다. 1995년 카밀라가 이혼한 뒤 1996년 찰스와 다이애나가 파경을 맞았다. 1997년에는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찰스와 카밀라 커플에 대한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지만 카밀라는 찰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여왕마저 결혼을 허락하여 2005년 4월 9일 부부가 됐다.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 사실상 함락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대한 공격을 펼쳐온 미·영 연합군은 전쟁 시작 21일째인 9일(현지 시각) 바그다드 전 지역을 완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라크전쟁을 반대해온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바그다드가 미군에 함락되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후세인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간 이라크인들과 이스라엘은 환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아랍인들도 많다.
그러나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에 거주하는 시아파 이라크인들은 바그다드 함락을 일제히 반겼다. 후세인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에 이민한 이라크 동포 1000여명은 9일 디어본 시내에서 이라크 전쟁 지지 시위를 갖고, “마침내 독재자가 무너졌다”면서 부시 대통령을 열렬히 연호했다. 한 참석자는 “바스라로 돌아가 조국을 둘러볼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포스트는 사설에서 “오늘은 평화가 승리한 날”이라고 밝혔다
2003년 전직 미국 FBI 요원, 내연의 관계에 있는 이중 스파이에게 국가 기밀정보 누설한 혐의로 체포
007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현실 세계에서도 벌어졌다.
전직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자신의 정부(情婦)인 중국계 미국 여성에게 국가 기밀 정보를 거꾸로 흘린 사실이 공개됐다. FBI는 지난 9일 제임스 스미스(59)라는 전직 요원이 중국계 이중 스파이인 카트리나 륭(49)에게 민감한 정보를 흘린 혐의로 이들을 체포했다.
중국 스파이들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던 스미스는 1980년대 초 륭을 FBI의 ‘끄나풀’ 로 포섭한 뒤 그녀를 조종해 중국의 정보를 얻어 왔었다. 스미스와 륭은 각자 가정을 꾸미고 살면서 스미스는 정기적으로 륭의 집에서 그녀로부터 브리핑을 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눈이 맞아 뜨거운 사랑도 나눴다는 것.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스미스는 자신의 기밀서류를 그녀에게 보도록 허용했고, 급기야 기밀서류를 그녀의 집에 놔두기도 했다. 륭은 은밀히 국가 기밀 서류를 복사했고, 중국 정부에 이를 넘겨 줘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해왔다. 륭이 체포될 당시 그녀의 집에서 미국의 국가 기밀 서류가 발견되기도 했다.
1999년 니제르 군부쿠데타 마이나사라 대통령 피살
1999년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은 9일 오후 청와대에서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자신의 대북화해정책을 설명하면서 이를 북한 지도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대통령은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북메시지에서 “우리는 북한에 대해 어떤 악의나 무력 사용의 생각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바라는 것은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해 나가는 것”이라면서 “이에 필요한 모든 논의를 (북한과)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회견에서 “김대통령이 전하라는 메시지를북한에 전달할 것”이라면서 “최선을 다해 남북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 정착은 이뤄져야 한다”며 “북한도 검토해 좋은 답변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은 양국의 경협을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지난해 8억3000만달러였던 양국 교역 규모를 더욱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또 이집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아무리아 국영방적 공장 지원, 알렉산드리아 조선소 확충, 변압기 설계 및 제조분야 전문가 파견, 기술단지 개발 사업 등에 대한 우리측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김 대통령은 이집트의 발전소 프로젝트 등 건설, 통신 분야 등에 우리 기업이 진출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이집트 대통령의 방한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99년 80년전 임시정부 요인 130여명 사진 첫 공개
1920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 직후 130여명이나 되는 임정 요인들이 애국지사의 장례식에 모여 찍은 초대형 사진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동오 안태국(?∼1920) 선생 장례식때 찍은 이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 안창호 이동휘 이광수 여운형 선생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희귀 자료다.
안태국 선생은 을사조약 후 평양에서 협동사를 설립, 실업구국운동에 참여하고 1907년 양기탁,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신민회에가입, 최고위 간부로 활약했다. 이광수(왼쪽에서 26번째 모자든 사람들 가운데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 여운형(34번째 뒷짐지고 수염 기른 사람), 정인과(44번째 얼굴 왼쪽으로 돌리고 안경 쓴 사람), 신익희(55번째 지팡이 든 사람), 이동휘(70번째 깃발 아래 수염 기른 사람), 김구(82번째 수염 기른 사람), 차이석(103번째 주먹쥔 사람), 김희선(104번째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 안창호(111번째 수염 기른 사람) 등의 얼굴이 보인다.
사진은 한국 근현대사연구회가 임정 수립 80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도산 안창호 선생 외손자 필립 안 커디씨가 공개했다.
1994년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 (위원장 김광일) 출범
행정에 대한 국민의 고충민원을 전담 처리할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가 1994년 4월 9일 정부합동민원실에서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이날 출범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광일 위원장과 최종백 변호사, 허범 성대교수, 신대균 경실련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사무처장, 손정 상임위원등 5명의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했다.
1994년 1월 공포된 `행정규제 및 민원사무기본법`에 따라 국무총리 직속으로 발족된 고충처리위원회는 행정기관의 위법부당한 행정처분으로 인한 국민의 권익침해를 조사해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국민들이 위원회에 제기할 수 있는 고충민원은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행정행위를 비롯, 공사공단등 공공단체, 행정권한을 위임위탁받은 협회조합 등의 민원처리에 따른 불편 및 애로사항 등이다. 특히 민원접수거부, 처리지연 등 행정상의 잘못이나 불합리한 제도시책으로 인한 국민불편 및 애로사항도 접수대상에 포함된다.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UR) 비준반대 집회 - 전국 3만여명 가두행진
1993년 청와대 앞길 개방해 관광코스로
1993년 32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국내 첫 개발
연세대 부설 아식(ASIIC) 설계공동 연구소가 국내최초로 독자적인 설계기술에 의해 컴퓨터의 핵심소자인 32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했다고 1993년 4월 9일 발표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컴퓨터의 가장 핵심적인 부품으로 자동차의 엔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명령축소형(RISC)의 최신방식으로 설계됐다.
당시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국내 기술현황은 일부 연구소와 기업에서 8비트급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설계하고 있었으며 16비트급 이상에서는 외국기술에 의존하여 제작하고 있었다. 가로 세로 9㎜크기의 이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20메가헤르츠의 주파수에서 초당 2천만개의 명령어를 처리하는 기능을 가졌으며 14만개의 트랜지스터를 탑재하고 있다.
1993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추대
북한은 1993년 4월 9일 속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5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자 군총사령관인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추대하고 공석이 된 제1부위원장에는 현 부위원장이자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를 선출했다.
김정일은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선임된 후 1991년 12월 24일 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가 1992년 3월 개정된 헌법에서 최고군사지도기관으로 격상된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됨으로써 전반적 무력의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북한헌법 1백13조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일체 무력을 지휘 통솔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군최고사령관으로 군지휘권을 갖고 있던 김정일이 국가보위부, 사회안전부, 노동적위대, 청년근위대 등 정보기관, 경찰 및 예비병력까지 모두 장악했음을 의미했다. 북한헌법은 또 국방위원회의 권한으로 중요군사간부 임명 또는 해임, 유사시 전시 상태와 동원령 선포 등도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군총참모장 등 군관련 요직의 인사권을 갖게 됐다.
1992년 알바니아 첫 비공산계 대통령 살리 베리샤 피선
알바니아 민주당 지도자 살리 베리샤(47)가 1992년 4월 9일 의회에서 알바니아 사상 최초의 비공산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베리샤는 대중정치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알바니아의 새로운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심장전문의인 베리샤는 알바니아 민주변혁의 시발점이 된 지난 1990년 12월의 학생시위 때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자생적인 학생시위를 전면적인 반정부운동으로 탈바꿈시킨 그는 이어 최초의 야당인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민주당은 3월 22일과 29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에 압승, 라미즈 알리아(67)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1991년 9월 민주당 당수로 선출된 뒤 연립내각에서 탈퇴를 결정하며 총선을 이끌어내는 등 정치력을 과시했다. 이슬람계로 농촌출신인 그는 뛰어난 선동력과 검소한 생활로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다소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 추종세력들로부터는 국자로 칭송받으며 격동기의 지도자에게 필수적인 정확한 판단력과 뛰어난 대중정치적 감각을 겸비한 ‘정직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1991년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 정식 출범
평민당과 재야의 신민주연합당(가칭)이 1991년 4월 9일 서울 삼성동 한국 종합 전시장에서 통합출범 전당대회를 갖고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이라는 새로운 당명으로 공식 출범했다. 이로써 지난 1987년 11월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후보출마를 위해 창당됐던 평민당은 3년5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신민당이 원내의석 69석의 제1야당이 됐다.
이날 대회에서 신민당 총재에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선출됐으며 수석최고위원엔 이우정 신민주연합당창준위원장이, 최고위원 8인에는 최영근, 노승환, 박영숙, 이용희, 박영록(이상 평민측) 박일(전신민당 정책심의회 의장), 김말용(전노총위원장), 최성묵씨(목사)가 선출됐다. 신민당이라는 당명은 이날로 세 번째 사용됐다. 지난 1967년 신한당과 민중당이 합쳐 1980년 5월 17 까지 이어진 신민당, 1985년 5공의 12대 총선을 앞두고 탄생한 제2의 신민당, 그리고 이날 제3의 신민당이 출범한 것이다.
1988년 전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 성고문혐의로 구속
1988년 쿠웨이트 여객기 납치 사건
1987년 강원도 양구에서 기원전 500-1000년 경의 제단 고인돌 1기 발견
1987년 한국-과테말라,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
1985년 일본 대외시장개방정책 발표
1983년 대학 여름학기 신설
1983년 해저유물단, 충남 태안군 태안반도 앞 해저에서 1000여점의 자기류 발견
1982년 아르헨티나 10만 예비군에 동원령(포크랜드 관련)
1979년 고리원자력발전 3호-4호 착공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8인, 사형확정 판결 하루만에 사형집행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1975년 4월 9일 새벽 긴급조치 1호-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8명은 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우흥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이다.
이들은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이란 이유로 1974년 체포되어 동년 6월 15일 비상군법회의 1심 재판을 거쳐, 1974년 9월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린 지 만 19시간 만인 이날 새벽 집행됐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 회의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으로 의혹받는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은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북한 노동당의 강령을 토대로 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구성, 활동한 혐의로 인혁당계 4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함으로 전모가 드러난 인혁당 사건은,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로부터 넘겨받은 공안부 검사들마저 피의자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는 항명 파동을 일으킬 정도로 사건 자체가 조작 혐의가 짙었다.
재판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임이 밝혀져 관련자 대부분이 무죄를 선고 받고 일단락되었던 이 사건의 망령이 10년 후 다시 살아나 젊은 운동가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결국 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1974년 유엔(UN)자원특별총회 개막
1973년 한국 여자탁구 유고 사라예보서 세계 제패
1973년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세의 이에리사는 중국과의 8강전에서 두명을 연다아 꺽어 만리장성을 넘고 이어 벌어진 헝거리와의 준결승과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이겨 여자 단체전에서 건국이후 첫 구기종목 우승의 쾌거를 이루었다
1973년 네덜란드, 베트남과 국교 수립
1972년 우간다, 이스라엘과 단교
1972년 잔지바르섬에서 키르메 피살
1967년 진해 제4 비료공장 준공
1965년 한국과 서독 무역협정 체결
1964년 최두선 총리, 맥아더 원수 사망 장례식 참석차 존슨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62년 한국-이스라엘, 국교 수립
1961년 서울 창신동 화재로 230동 소실
1954년 흥사단 금요강좌 개강
1953년 폴란드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뵈치에호프스키 사망
1952년 일본 여객기 추락 - 37명 사망
1951년 노르웨이의 기상학자.물리학자 비에르크네스 사망
1949년 캐나다 한국 승인
1945년 독일의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사망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1945년 4월 9일 독일 출신의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이날 교수대에 올라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 행동하는 신앙인이길 바랬다. 그는 20세기 후반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그리고 새로운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목자이자 전쟁의 광기에 희생된 어린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순교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교회 재건과정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의 학문적인 분위기의 한 가정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21세 때인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신학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신학계에서 처음으로 책임윤리를 설파한 그는 몸소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교회의 역할을 일깨워줬다.
그러던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후, 유대인들을 겨냥한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자 본회퍼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1943년 4월 5일. 본회퍼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됐다.
그후 2년 동안의 강제수용소 시절 친구 베트게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 ‘옥중서간’이란 제목으로 출판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과 용기를 줬고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내는 단초를 제공했다. 사후 반세기가 넘는 1996년 8월 6일. 베를린의 한 법원이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한 나치법정의 사형선고를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복권됐다.
1940년 2차대전중 독일,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1927년 최악의 사법살인 사코와 반제티 사형선고
1920년 4월, 미국 보스턴 근교의 한 제화회사에서 경리직원과 경비가 살해되고 1만6000달러가 털리는 살인강도사건이 발생하자 제화공 니콜라 사코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용의자로 체포된다.
경찰은 명확한 물적 증거도 없이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고 1차대전 참전을 거부했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사실에 주목,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갔다. 전후 불경기와 과격해진 노사분규, 이에따른 사회불안을 과격분자와 공산주의자에게 전가하려는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1921년 7월 14일 두 사람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불공정한 재판에 분노를 표시했다. 파리에서는 미국 대사의 집이 파괴되고 구명운동을 벌이던 데모대에 폭탄이 터져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인 아나톨 프랑스와 아인슈타인 등 세계 지성인들도 나서 ‘최악의 사법살인’이라며 항의하자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사형집행을 연기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내린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1927년 4월 9일,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해 8월 23일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맞은 두 사람의 무죄가 공식 확인된 것은 1977년 메사추세츠 주지사가 이들의 무고를 인정하면서였다. 둘은 그림과 노래로도 명예가 회복됐다. 화가 벤 샨이 그린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1931∼1932)과 미국의 현실참여가수 훌리 니어가 부른 ‘누가 이들을 기억하랴?’가 그것이다.
1924년 김구, 임시정부 국무총리 직무대리에 취임
1923년 저축 장려한 첫 극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 상영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알려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세>가 경성 호텔에서 신문통신기자를 비롯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연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이 계몽극에는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출연했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는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었던 김도산의 <의리적 구투>로 연극 장면 가운데 필요한 대목을 영사 화면으로 만들어 공연 중에 비추는 활동사진 연쇄극이었다. 1923년 1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사진의 틀을 갖춘 활극 <국경>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고, 이어서 극영화의 형식을 띤 <월하의 맹세>가 상영되었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되면서 한국영화의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919년 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출생
1918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설계한 우드손 출생
1915년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뢰플러 사망
1915년 영국.프랑스군 갈보리반도 작전 실패
1898년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1865년 미국 남북전쟁 종식(남군 장군 로버트 리, 북군 장군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에 버지니아서 항복)
1864년 영국 전기공학자 페란티 출생
1855년 한말의 의병장 손영각 출생
1821년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 출생
1785년 서학의 옥(獄) 발생
1626년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사망
`아는 것이 힘이다` 와 `네가지 우상`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냉정하면서도 유연한 지성을 가진 현실파 인물이었던 그는 1561년 1월 22일 잉글랜드 런던 요크하우스에서 태어나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임스 1세 치하에서는 사법장관과 기타 요직을 지냈다. 그 후에도 날로 권세가 높아갔으나, 수뢰(收賂) 사건으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실각된 후 여생을 실의 속에 보내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새로운 발견(발명)을 추동하는 대신 기존의 진리를 마냥 다시 찍어냄으로써 판에 박은 대답만 되풀이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신기관(NOVUM ORGANUM)`이 있는데, 이것은 유럽의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ORGANUM)`의 논리학을 의식해서 붙인 제목이다. 베이컨이 새로 고안해낸 `기관`은 경험을 종합함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가설을 빚어내고, 이를 다시 경험 속에서 확인하는 `귀납법`이었다. 그는 이 새로운 기관을 통해 새로운 발견·발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귀납법을 채택한다고 해서 자연의 진리가 저절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적한 인간의 올바른 인식을 가로막는 네가지 우상으로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편견이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다. 각 개인은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처럼 자연을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 시장의 우상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편견이다. 극장의 우상은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생기게 된 우상"이다. 베이컨은 기존의 철학체계들이 극장에서 상연하는 각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하며, 르네상스적 마술이 근대 과학의 공학적 기술로 변화되려 한 전환점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그는 과학의 진보에 장대한 꿈을 싣고 과학연구의 방법을 제창했지만, 그 방법을 실제로 이루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는 1626년 3월 기관지염에 걸려 1926년 4월 9일 애런들 백작 저택 근처에서 생을 마감했다
1196년 (고려 명종 26) 최충헌, 이의민 죽이고 권력 잡음
아우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 일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명종을 쫓아내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네 임금을 자기 뜻대로 세우는 등 왕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평정하고 국경을 넘보는 거란족을 물리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벌였으나 독재 정치를 일삼아 비난을 받았다. 1198년 노비 만적 등이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자 100여명을 강물에 던져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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