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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필리핀 태풍 메기로 172명 사망, 20만명 이재민 발생
2019년 사상 처음 블랙홀 영상 공개, 국제블랙홀연구협력집단 사건지평선망원경(EHT)연구팀 처녀자리은하단 중심부의 거대운하 M87(5500만 광년) 중심에 있는 초대질량 블랙홀 관측 성공 발표
2010년 폴란드, 대통령 전용기 추락 사고
2010년 4월 10일 오전 10시 56분(현지시각)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공항 근처에서 레흐 카친스키(Kaczynski·60) 폴란드 대통령이 탑승한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 탑승객 96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러시아 측은 당초 탑승자 인원을 87명으로 발표했다가 최종적으로 96명이 탄 것으로 정정했다.
추락한 비행기에는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를 비록해 대통령 비서실장, 외교차관, 육군참모총장, 중앙은행 총재 등 고위 정부 인사과 의원들, 역사가들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는 스몰렌스크 일대의 기상악화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날 추락한 러시아제 Tu(투폴레프)-154 비행기는 러시아 투포레프사가 제작한 중단거리 여객기로, 미국 보잉사의 히트 여객기인 보잉 747기와 거의 흡사하게 만든 복제판 항공기다. 특히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20년이 넘은 낡은 비행기로 밝혀졌다.
2010년 태국 반정부 시위, 유혈사태
2010년 4월 10일 한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태국의 반정부 시위 사태가 시위대의 강제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빚어져 900여 명의 사상했다. 10일 수도 방콕에서는 시위대와 진압 부대가 상호 총격을 가하면서 충돌, 모두 21명이 사망하고 87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해외토피 중인 탁신(Thaksin)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붉은 옷을 입은 '독재저항 민주연합전선(UDD)' 시위대는 아피싯(Abhisit) 웨차치와 총리의 즉각 하야와 내각 총사퇴,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 등을 요구하며 한달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태국 보안당국은 이날 오후 랏차담넌 거리 인든에 군경을 투입해 물대포, 최루탄, 고무탄 등을 쏘며 시위대 해산에 나섰으며 시위대는 이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사망자 중에는 영국 로이터 통신의 사진기자인 일본인 히로유키 무라모토씨와 일반 시민 15명, 진압 작전에 나섰던 군인 5명이 포함돼 있다. 이번 대규모 유혈 참극은 1992년 유혈 쿠데타 이후 18년 만에 벌어진 첫 대규모 유혈 사태다.
앞서 태국 정부는 반정부 시위가 장기화하고 점차 격렬해짐에 따라 지난 7일 방콕과 방콕 주변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태이며 형사법원은 핵심 시위 지도부 등 총 27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04년 원로배우 독고성씨 별세
196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누빈 악역 스타이자 영화배우 독고영재씨의 부친인 원로배우 독고성(본명 전원윤)씨가 2004년 4월 10일 별세했다. 그는 엑스트라, 단역 등 밑마닥부터 시작해 조연-주연으로까지 성공한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입지전적 배우였다.
독고성씨는 1929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해 서라벌예술대학을 중퇴했다. 그는 한때 악극단에서 활동하다 1955년 액션영화 ‘격퇴’로 영화에 데뷔한 뒤 ‘목포의 눈물’ ‘5인의 해병’ ‘밤안개’ 등 60∼70년대 영화에서 활약했다. 그는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 이예춘 등과 함께 이른바 ‘다치마와리’로 불린 60~70년대 액션영화의 황금기를 만든, 충무로 1세대 액션스타였다. 가끔 앞이마를 가린 머리칼, 무섭게 번뜩이는 눈매, 야윈 얼굴의 그는 ‘건장한 박노식’이나 ‘신사 같은 장동휘’, ‘부드러운 허장강’이 해내지 못하는 잔인하고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주연보다 더 강한 개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외에도 그는 만연 악역에 대한 아쉬움을 풀기라도 하듯 이신명 감독의 1965년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선 악당과 싸우는 정의의 주인공을 연기했고, ‘5인의 해병’ 같은 전쟁 영화에서 멋진 국군이 되기도 했다. 중견 배우들이 영화 제작에 뛰어들던 1960년대 중반 독고성씨도 ‘뜨거운 안녕’(1967), 검객영화 ‘영(影)’(1968) 등의 제작에 손대기도 했다.
2004년 일본 영화 ‘카게무샤’ 두 주역인 전국시대 앙숙 오다·다케다 가문 화해
2004년 4월 10일 일본의 전국시대에 패권을 다툰 무장(武將)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1521~73)의 후손들이 만나 430년 만에 두 집안이 화해했다. 이날 오다 노부나가의 가계를 이어온 오다 노부나리(織田信成)·노부카즈(信和) 부자가 다케다 가문의 16대 종손인 다케다 구니노부(武田邦信)를 찾아가 다케다 신겐의 위패가 있는 사당을 함께 참배했다.
2004년은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는 계기가 되는 ‘나가시노(長篠)전투’ 430주년으로, 1575년 미카와(三河·현재의 아이치 현)의 나가시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勝賴)가 이끄는 무적의 기마군단이 천하 통일을 다투는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노부나가는 3000정의 조총을 준비한 다음, 조총 부대를 3열 횡대로 포진시켜 차례대로 조준 사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해 다케다의 기마군단을 전멸시켰다. 나가시노 전투 이야기는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카게무샤(影武者)’의 소재가 됐고,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이 싸움이 끝나고 7년이 흐른 뒤 다케다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다케다 집안의 종손인 구니노부는 “오랜 원한을 뛰어 넘어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고, 오다 노부나가의 종손은 “두 가문이 싸운 지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제는 편안하게 만나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2004년 미술사학자 최순우씨 옛집 개관, 시민문화재 제1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라는 글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제시했던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씨의 서울 성북동 옛집이 2004년 4월 10일 오후 4시 개관식을 갖고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최남선과 현진건 고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등 근현대사의 체취가 깃든 옛 건물들이 속속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최순우 옛집 복원은 시민들의 힘으로 살려낸 문화 재산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더 컸다.
성북구 성북2동 126의 20, 대지 120평에 안채와 사랑채 등으로 이뤄진 최순우 고택은 1930년대에 건립된 한옥. 조선 말기 선비 집의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최씨는 한국 전쟁 직후부터 작고하기까지 30여년간 이 집에서 살았다.
최순우씨의 ‘옛집’이 ‘시민 문화재 1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이 주체가 돼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매입·보존하는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국민신탁)’ 운동의 성과였다. 사단법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 2002년 12월 8억여원의 기부금을 통해 이 집을 사들였고, 그중 삼성전자와 학고재가 비용의 절반 이상을 맡았다. 다시 1년여 간의 기금 모금과 후원인 발굴, 보수·복원 자문회의가 이어졌고 2억원을 더 모금해 보수와 복원을 진행했다.
‘옛집’은 최씨의 자필 원고나 안경·라디오 등 유품을 상설 전시하며 한국의 전통공예와 관련된 전시회를 여는 역할을 하게 된다.
2003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삼국유사’를 국보 제 306-(2)호로 승격
문화재청은 10일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삼국유사’ 권 제1~5를 국보 제306-(2)호로 승격 지정했다.
역사학자인 고 황의돈(黃義敦) 교수가 소장했던 이 책은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중종 임신본(壬申本)’ 중 낙장이 없는 유일한 것이며 인출(印出) 시기도 가장 빠른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또 통도사 소장 ‘금동천문도(金銅天文圖·제1373호)’ 와 용흥사 소장 ‘삼불회괘불탱(三佛會掛佛幀·제1374호)’, 안중근의사숭모회 소장 ‘안중근 의사 유묵(제569-25호)’ 을 보물로 지정했다
2003년 청남대 기자단에 내부 첫 공개
대통령 하계 별장 청남대는 의외로 평범하고 소박했다. 22일 일반 개방을 앞두고 10일 대전·충청지역 기자들에게 공개한 청남대 내부는 예상과 달리 화려하지 않았다. 군인들이 지키는 입구의 육중한 철문과 겹겹이 싸인 철조망은 청남대가 국가 중요 보안시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내부는 대통령이 1년에 한 두 차례 묵고 가는 연건평 800평 규모의 본관 건물과 몇몇 휴양·레저시설을 갖춘 간단한 휴양시설에 불과했다.
토종 민물고기가 뛰노는 1000평 규모의 양어장, 옛날 농기구를 진열해놓은 초가집, 대청호의 시원한 바람을 들이킬 수 있는 정자, 미니 골프장, 흙길로 된 몇몇 산책 코스 등도 눈에 띈다. 어린이들을 무척 귀여워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본관 부근에 만들었다는 어린이 놀이터, 거동이 다소 불편했던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설치해놓은 특별 통로 등은 청남대의 역사를 말해준다. 청남대 건물이나 산책로 주변에는 백송·주목·감나무·살구나무·은방울꽃·붓꽃·애기백일홍·꿀풀·취나물 등 100여종의 우리나라 토종 나무와 야생화가 자라고 있어 상춘객들의 인기를 끌 전망이다.
청남대는 오는 18일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는 개방 행사를 끝으로 20여년 만에 대통령 하계 별장 겸 집무실 기능을 공식적으로 마친다.
2001년 네덜란드 상원 안락사 합법화 의결. 세계최초로 안락사 합법화
네덜란드 상원이 2001년 4월 10일 안락사를 최종 승인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가 됐다. 종교계와 보수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네덜란드 하원이 지난해 2000년 11월 이 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상원도 이날 표결에서 46 대 28로 의결했다.
이 법안은 불치병에 걸려 도저히 회생할 가망이 없는 환자가 온전한 정신으로 안락사에 동의하면 의료진의 권고에 따라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안락사 과정에서 만약 의사가 위법행위를 한 것이 드러나면 처벌을 받게 된다. 네덜란드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안락사가 사실상 허용돼왔으며, 지난해 안락사한 환자는 2123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서울-평양에서 동시 발표
2000년 4월 10일 오전10시.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송호경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2000년 3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첫 접촉을 한 이후 세 차례 중국에서 만나 남북합의서에 서명한 결과였다.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두고 터져나온 빅 뉴스는 전세계 매스컴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켰다. 국민들은 그러나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으로 야당인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줬다. 남북한은 1994년 6월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그해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으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담이 열리지 못했었다.
1999년 국방과학연구소, 사정거리 300km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
1999년 독도 유인등대 가동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타결
29년간 계속된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상이 1998년 4월 10일 타결됐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버티 어헌 아일랜드 총리를 비롯, 8개 북아일랜드 분쟁관련 정파는 벨파스트 인근 스토몬트성에서 본회의를 열고 역사적인 평화협정안 타결을 선포했다.
협상중재자인 미국의 조지 미첼 전상원의원과 영국, 아일랜드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협상은 당초 협상 마감시간인 9일 자정을 17시간이나 넘기는 난산 끝에 최종합의에 도달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은 5월22일 남북 아일랜드에서 동시에 실시되는 국민투표를 거쳐 최종 확정됐다. 이로써 400여년간에 걸친 신구교간 반목과 29년간의 유혈분쟁 종식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어 1999년 12월2일 0시를 기해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통치권한을 공식 이양받았다.
1997년 공덕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지하철공사를 하던 굴착기가 도시가스관을 건드려 폭발하는 사고가 1997년 4월 10일 발생했다. 이날 오후 1시45분쯤 서울 마포구 공덕동 로터리 지하철 6호선 6공구 공사장에서 하수관 교체작업을 벌이던 굴착기가 지하 4m 지점에 매설된 지름 3백50mm 도시가스관을 깨뜨리면서 누출된 가스에 불꽃이 옮아붙어 폭발했다.
이 사고로 불길이 지하철 공사장 위로 30여m 이상 치솟으며 작업 중이던 굴착기 1대가 전소됐고 통신회선 등 지하매설물 일부가 불탔다. 또 폭발충격으로 부근 차도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 이 일대 교통이 2시간여 동안 두절되고 전화 4천여회선이 끊겨 불편을 겪었다. 그러나 굴착기 기사 등 공사장 인부들은 사고가 나자 재빨리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1997년 야구인 김동엽씨 사망
독특한 제스처와 쇼맨십으로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타고난 말주변과 끼는 그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와 탤런트로 활동하게 해 그야말로 화려하면서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창단 야구팀 사령탑을 4번 맡는 행운을 누린 그였지만, 13번이나 중도해임 당하는 아픔도 맛본 야구계의 풍운아였다.
김씨는 1938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6.25때 월남, 부산 토성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 글러브를 잡았다. 경복고, 성균관대, 해군을 거쳐 1968년 조흥은행 팀 해체로 현역생활을 청산하고 2년여 심판을 보기도 했다. 그는 선수보다는 지도자로 빛을 봤다. 건국대(1971년)를 시작으로 공군, 성균관대, 프로야구 해태의 초대감독을 지냈다.
1975년 아마추어 롯데 사령탑을 맡았을 땐 선수들과 함께 부산서 서울까지 열흘 간 천리행군을 벌이는 등 독특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우승과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러나 강훈에 힘겨웠던 선수들의 반발로 타의에 의해 팀을 떠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1987년 7월 MBC를 떠날 때도 이유는 같았다. 1991년부터 5년 간 서울방송 해설위원으로 일한 뒤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1995년 북미 직통전화 개통
1995년 중국 혁명원로 천윈(陣雲) 사망
중국 공산당 보수파의 대부이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최대 정적이었던 천윈(陣雲) 전 중국공산당 고문위원회 주임이 1995년 4월 10일 오후2시 베이징 동성구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였다. 진운은 지난 1976년 마오쩌둥(毛泽东)이 사망한 이후 막후에서 중국 정계를 좌지우지한 8명의 혁명 원로 가운데 최고 실권자인 등소평(90)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실력자였다.
랴오천윈(료진운)이 그의 본명이며 식자공출신으로 1920년대 상해를 휩쓸던 노동자시위의 배후주동자로 활약하다가, 무장봉기도 주도했다. 20세 때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소련에서 2년간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공부했다. 그는 1945년 일본의 패전 당시 팽진, 임표의 군대와 함께 만주 심양지역을 접수, 사회주의화 한 경험을 쓴 보고서 `심양의 접수관리에 관한 종합보고`로 일약 당내에 이름을 떨쳐 `당내 최고의 경제이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죽음은 당내 보수파 최대거두가 현실정치에서 사라진 것을 의미하고 이를 계기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겸 당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3세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보다 확고히 하는 전환점이 됐다.
1993년 남아공 흑인지도자 크리스 하니 피살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군사 지도자이자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인 크리스 하니(50)가 1993년 4월 10일 피살됐다. 크리스 하니는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에 버금가는 흑인지도자로 대 백인정부 강경노선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1942년 건축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하니는 1982년 ANC의 군사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의 총사령관직을 맡았으며 1991년 남아공 공산당의 총서기직에 이어 ANC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갖고 있었다. 만델라가 협상을 중시하는 온건노선을 걸어온 반면 그는 흑인의 권력장악을 위한 무장투쟁을 강조해 흑인청년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아왔다.
그는 1990년 망명지인 잠비아에서 돌아온 뒤 ANC와 데 클레르크 정부와의 평화협상이 시작된 뒤에도 협상을 거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지켜와 지난 수십년동안 백인들의 공적 1호로 늘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왔다. 하니의 피살은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공 정부와 ANC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됐다.
1991년 남북직교역 승인
1984년 호주 의료진, 최초 냉동 수정아 출산 성공 발표
1982년 유럽연합(EC)10개국, 아르헨티나 상품 수입금지 긴급 결정
1980년 소련. 중국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실효
1979년 과천 제2정부청사 기공
1978년 외환은행, 국내 첫 신용카드 발급
1973년 우리나라 여자탁구 첫 세계 제패
1972년 한국 히말라야 등반대 조난. 한국인 3명 등 15명 사망
1972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조인
1971년 미국 탁구선수단 중국 방문. 핑퐁외교 시작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석한 미국 탁구 대표가 1971년 4월 10일 중국을 방문했다. 1949년에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로 미국 스포츠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국교도 없고, 오랫동안 서로 적대시해 온 미국과 중국이 갑자기 취한 `우호 무드`에 세계가 놀랐다. 이른바 `핑퐁외교`의 시작이었다.
미국 탁구단의 중국 방문은 탁구대회에 참가한 미국 대표팀이 중국 방문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방문을 주저하고 고민했지만 결국 이들의 중국 방문을 허락했다. 마오쩌둥이 처음에 이들의 방문을 주저한 것은 당 내의 반응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미 제국주의`를 `소련 수정주의`와 아울러 `최대의 적`이라며 극구 매도하도록 부추켜 온 사람은 마오쩌둥 자신이었다. 그 급격한 변신이 지도부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급진 좌파에게 동요를 안겨 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소련의 군사위협이었다. 1969년의 진보도 사건 등 중-소 국경에서 일어난 대규모 군사 충돌은 그러한 불안감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마오쩌둥은 `미국 카드`를 갖고 싶었다. 미국 역시 소련과 냉전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 카드`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1970년 비틀스 10여년 만에 해체
1970년 4월 10일, 비틀즈의 소속사가 폴 매카트니의 탈퇴를 공식 발표함으로써 10여년간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과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던 영국 출신의 4인조 록그룹 비틀즈가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비틀즈 기획자 엡스타인이 약물과다복용으로 사망한 뒤 구성원 간에 내연해 온 불화가 폭발한 것이었다.
비틀즈의 깃발을 처음 올린 사람은 존 레논이었다. 고등학생 때인 1956년에 ‘쿼리멘’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한 레논은 이후 폴 매카트니(1957년)·조지 해리슨(1958년)과 합류,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아갔다.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세하고 진용이 갖춰지자 이들 19∼22세 더벅버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 이름으로 데뷔 싱글앨범 ‘Love Me Do’를 발표한다.
뒤이어 나온 앨범들이 잇따라 히트하자 이들은 미국 정벌에 나섰다. 1964년 2월 7일, 뉴욕 케네디 공항은 이들을 맞는 3000여 소녀팬들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이틀 후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을 때는 7300만이나 되는 미국인이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8년간 12개의 앨범과 211곡이 발표됐고 팔려나간 앨범만도 1억6000만장에 달했다. 20세기 최대 음반 판매 기록이었다.
1968년 뉴질랜드 해안에서 워하인호 침몰
1968년 남아공- 요코부스 푸케 대통령 취임
1966년 월남 불교도 키 수상 부에(후에) 선전
1964년 국공유지 불하사건
1964년 4월 10일 서울 사직공원 부정 불하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국회는 국공유지 부정불하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 국공유지 부정불하사건조사에 나섰다. 공화 7, 민정 3, 삼민 2의 비율로 구성된 조사위는 사직, 삼청, 남산 등 세 공원과 수유동 임야, 서울시유지도로 등 14건의 부정불하사건의 진상과 그 배후에 권력개입 여부를 14일간 조사를 벌였다.
사직공원 용지 불하 건은 3월 당시 황종율 재무장관과 강신경 서울시 관재국장이 공모해 관련 공무원을 시켜 2만3천여평에 달하는 사직공원 용지와 수목 7천7백그루를 동양부동산 대표 김영동씨에게 부정하게 불하한 사실이 드러나서 매매계약을 취소, 원상으로 환원토록 조치했으며 관계 공무원은 의법조치했다.
수유동 임야 불하사건은 1962년 2월 유원식 전 국가재건 최고위원이 서울 수유동 산127-3 국유임야 1만6백평을 국가가 일단 대부한 뒤에 다시 불하하는 형식으로 착복했다. 대부·불하절차에 위법성은 지적할 수 없으나 권력형 부정행위로 보고 국유지로 환원조치했다. 이를 비롯해 14건을 발표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사면령 `공소건무` 무협의 등으로 종결됐다.
1964년 소련 저개발국 상품에 관세 철폐 발표
1963년 미국 핵잠수함 드레셔호 대서양 해상에서 침몰. 129명 실종
1963년 4월 10일 승무원 129명이 탑승한 미 핵잠수함 드레셔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는 평화시에 발생한 최악의 해군참사였다. 침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핵공격 잠수함 계열에서 최신형인 드레셔호는 이날 뉴햄프셔주 포츠머스 해군항에서 정비를 마친 후 심해잠수 시험을 위해 출항했다.
드레셔호에는 잠수함 구조선 스카이라크호가 동행하고 있었으나 드레셔호가 오전 9시 보스톤 동쪽 338Km 떨어진 해역에서 잠수한 이후 연락이 두절됐다. 잠수해역은 깊이가 2,520m로 해군 당국은 구조노력에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깊이라고 밝혔다.
1963년 한국-콩고민주공화국 국교 수립
1961년 한국 국제언론인협회(IPI) 가입
1959년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1959년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이날, 나니와(浪華)상고를 갓 졸업하고 프로야구단 도에이(東映)에 입단한 6번 타자 장훈(張勳) 선수가 타석에 섰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바로 프로야구 1군에 진출한 것이다.
그의 첫 데뷔 상대는 한큐 브레이브즈였다. 고교 시절 왕정치와 고교야구계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지만 프로야구는 역시 달랐다.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은 3개뿐, 3구 3진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수비에서도 외야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수까지 범했다. 그날 밤 장훈은 2군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초조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4월 11일의 상대 투수는 전년도 성적 14승 4패라는 발군의 성적을 기록한 한큐(返急)의 아키모토. 프로야구 데뷔 두 번째 타석에 나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좌중간 2루타, 데뷔 첫 안타였고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은 우측담장을 넘기는 홈런, 역시 23년간 기록했던 504개 홈런의 첫 출발이었다.
데뷔 첫 해 장훈은 신인왕을 수상했다. 1982년 41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7차례 ‘수위타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3,085개의 안타와 함께 지금까지 일본 프로야구의 대기록으로 남아 있다. 2000년에는 일본 야기기구가 발표한 '20세기 베스트 9'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58년 공군수송기 납북 미수사건 발생
1958년 4월10일 7시 40분 대구 공군비행장을 이륙한 공군수송기 C-46이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할 내빈 및 기자들을 진해로 왕복 수송하는 임무를 부여 받고 조종사, 부조종사, 통신사, 정비사와 뒤의 기체 실내에는 7명의 공군 장병이 타고 고도 6,000피드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을 향하여 비행하는 중이였다
8시 33분 경 오산상공에 들어서자 화물실에 탑승하여 있던 대위가 권총으로 통신사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그리고 통신사의 권총을 뽑아 기장에게 북으로 가자고 하였다
조종사인 김대위가 신속하게 범인을 휘어잡고 박치기로 넘어트리자 기관사도 합세하여 범인을 제압하는데 도우고 부조종사가 자동운항장치로 전환하고 같이 합세하였다
집단 난투에 범인이 의식을 잃자 화물실로 이동시키고 미군 평택 캠프 험프리 기지에 비상착륙하였다
범인은 대구 제7항로 보안단 기상전대 소속 행정장교 최정일 대위였다
이는 부인이 바람을 피우는데 격분하고 이혼을 한 후 친지가 있는 북으로 가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1957년 수에즈운하 개방 재개
1957년 서울대 법대생들 이강석(이승만대통령의 양자)의 입학반대 동맹휴학
1953년 함마슐트 UN 사무총장 선출
1949년 유엔(UN) 안보리, 한국 가입안 부결
1941년 미국 그린란드에 미군기지 설치
1930년 보통학교 조선어사전 제3판 출간
1927년 미국의 생화학자 마셜 니런버그 출생 - 유전정보 해독에 이바지해 노벨상 수상
1916년 서양화가 이중섭 출생
1912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출생
1900년 서울 종로에 최초의 민간전등 가설
"전기회사에서 작일부터 종로에 전등 삼좌를 연하였더라." (황성신문 1900년 4월 11일자)서울 종로 거리에 가로등이 설치됐음을 알리는 이 짧은 기사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생활방식을 바꾸는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전등이 처음 들어온 것은 1887년 3월. 미국 에디슨의 1879년 백열등 발명 이후 불과 8년 만이었으므로 제법 빠른 셈이다. 더구나 공사 담당자가 에디슨이 설립한 회사였고 경복궁 향원정 옆에 설치된 발전기도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것으로 동양 어디에 내 놔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전등 등장은 사람들의 밤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사랑방에서 호롱불을 밝히며 투전판을 벌이던 남정네들은 대낮처럼 환한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전등을 보러 일부러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나라 `전기의 날`은 이날을 기념해 1966년 제정됐다.
1898년 작곡가 홍난파 출생
1898년(광무 2년) 광무협회, <대한신보>(격일간) 창간
1882년 각료직에 오른 최초의 여성 정치가 퍼킨스 출생
1847년 현대신문의 정형을 확립한 미국의 신문왕 퓰리처 출생
1755년 `동종요법` 치료체계를 확립한 독일의 의사 사무엘 하네만 출생
1583년 네덜란드 법학자 그로티우스 출생
1397년(조선 태조 6) 세종임금(1397-1450)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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