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공주에서 19km 떨어져 있고, 동학사에서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거리에 있다.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암시해주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는 계룡갑사, 갑사, 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리워 왔으며, 통일신라 화엄종 십대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고 해서 갑등의 이름으로 갑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름대로 하면 첫째가는 절인 것이다. 조선 세종 6년(1423)에 일어난 사원 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일찍이 이름이 났던 절이었으며, 세조 때에는 오히려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1597년 정유재란시 전소되었으며,선조37년 (1604)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절 주위에는 용문폭포, 수정봉, 천진보탑, 군자대 등 수려한 경승이 줄지어 있으며 특히 남쪽 계곡은 이른바 9곡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 대웅전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05호 이 건물은 갑사의 본전으로,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37년(1604)에 중건하였고, 고종 12년(1875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는 원래 현재의 대적전 부근에 있었으나, 다시 세울때에 현재위치로 옮겨 지은 것으로 보인다.
* 갑사 강당
도지정유형문화재 제95호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 갑사 공우탑
이 탑은 대웅전에서 대적전에 이르는 개울 건너 계곡변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갑사의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전하고 있다. 탑은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과 기단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탑신의 1층에는 탑의 건립내용이, 2,3층에는 탑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탑의 건립은 옥신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갑사 중창시에 큰 공을 소로 인해 이루어 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명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연히 합치되었네. 세 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라.'
* 갑사 동종
보물 제 478호 이 종은 갑사 해탈문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 지은 사모지붕의 종각안에 있다. 몸체에는 명문이 있어 조선 선조 17년(1584)에 만들었음과 갑사의 절이름도 당시는 갑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의 크기는 총 높이가 127cm, 입지름이 91.5cm 이다. 종의 크기는 총 높이가 일제강점기 헌납이란 명목으로 공출해 갔다가 해방후 되찾아 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한 범종이다. 1584년(조선선조 17년)에 만든 종이며,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소리가 울려 나가는 용통이 없는 등 조선시대의 특징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용뉴(종을 매는 고리)에 새겨진 사실적인 용의 모습, 어깨부분에 붙여 놓은 9개의 윤곽(젖꼭지 모양의 장식), 연꽃 형상의 당좌(종을 쳐 울리는 부분) 등은 신라 이래 한국 범종의 전통적인 요소이다. 당좌 사이에는 비처낭 대신 지장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종의몸체에 만든 시기를 표시한 명문이 있어,우리나라 종의 변천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갑사사'라는 표기가 있어 절의 이름이 지금과 달랐던 것도 알 수 있다.
* 공주 갑사 철당간
보물 제 256호 갑사 철당간은 당을 다는 철깃대와 기둥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 기둥을 말한다. 갑사 철당간은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 24개를 이어 놓은 것으로 당간의 높이는 약 15미터이다. 그러나 1893년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 처음보다 낮아졌다.이 철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갑사가 신라 의상대사가 일으킨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점과 받침돌 측면에 새겨진 안상조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갑사의 철당간 지주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당간 형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주산성''
* 백제 문주왕 시절의 산성, 공산성 *
공주 시내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년(475)에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 북문인 공북루 등이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주변에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공산성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정이 깃든 수려한 자연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있게 보여지고 있다. 가족 단위, 부부, 연인들이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길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사이의 산책로가 있다.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비단결 같은 금강이 발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 공산성의 유래 *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 공산성 서쪽에 위치한 정각, 공산성 쌍수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1984.05.17 지정) *
쌍수정은 공산성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정각이다. 원래 그 터는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산성 파천시 머물렀던 장소이며, 이 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인조는 환도시 쌍수에 정3품 대부작을 하사하였는데 그 후 나무는 죽고 구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유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에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정조 11년, 고종 7년, 1947년에 걸쳐 중수되어 오다가 1970년에 건물은 전면 해체되고 새로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복원된 쌍수정의 건물은 본래의 형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한다. 자료에 의하면 건물은 이층의 누각이며 누각 주변에 담장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의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익공 계통의 건물로 조선 후기 전형적 누각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지만, 원형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공산성의 남문, 공산성 진남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1984.05.17 지정) *
공산성의 출입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이 진남루는 성의 남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두 석축 기단에 걸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은 조선 초기의 일로 이 진남루 역시 그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수축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 공산성 추정왕궁지 *
공산성 내 서쪽의 표고 85m의 정상부, 종래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약 6,800㎡의 면적이 추정 왕궁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 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적은 건물지를 비롯하여 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이들 유구나 또는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시대로 편년되어 왕궁지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확인된 건물지로는 반지하식 건물지, 굴건식 주공을 사용한 건물지,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 2개소와 연지, 저장혈, 목곽고 등이 있다. 건물지는 굴건식 건물지까지는 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하기 이전의 유적으로 보고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는 남천 후, 즉 왕궁지의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적심석 검물지는 각각 24칸, 10칸 규모였다. 수습된 유물은 대체로 기와류인데 막새기와는 백제의 8엽, 10엽 연화문을 비롯하여 파상문 수막새 기와이고, 10엽 연화문 수막새 기와는 연꽃의 끝부분 반전이 심하게 이루어진 백제 초기의 것으로 공주 공산성에서 주로 출토되는 전형적 형식이다.이외의 평기와 중에는 웅천(熊川) 혹은 관(官)자의 명문이 찍힌 것을 비롯한 각종의 도장문이 나왔다. 토기는 백제토기로 등잔을 비롯하여 개물이나 삼족토기 등이며 특수 유물로 봉황형 금동향로가 수습되었는데 이는 부식이 심하고 출토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조사된 건물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 공산성의 북문, 공산성 공북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1976.01.08 지정) *
공북루는 공산성에 설치된 문루 중 북문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선조 36년인 1603년에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시축 후 수 차례에 걸쳐 개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나 현존의 것은 본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대표적 예로 꼽는다. 건축의 내용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동성의 충청도 편에 보면 1603년인 계묘년에 쌍수 산성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공북, 진남 양문을 건립한 내용을 적고 있어 현존의 공북루 건물의 축조에 대한 기사를 남기고 있다. 본래 현존 공북루의 자리는 망북루가 자리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유지는 공북루의 동쪽 성벽상에 초석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외형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망북루의 초석은 자연석으로 4매가 지표면에 남아 있지만 이것만으로 건물의 형상을 복원하기는 어렵다. 성문의 건축은 협축형태로 조성된 석성이 절단된 후면에 이층의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면적은 남문인 진남루의 2배 가량이며, 고주를 사용한 이층의 다락집 형태로 고창 읍성의 공북루와 유사한 모습이다. 각 문의 크기는 등간격이며 누의 중앙 어칸에는 출입문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근세까지 문비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백제시절의 누각터, 공산성 임류각지 *
임류각지는 공산성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정도 떨어진 산의 중턱 서향 사면에 위치한다. 임류각은 삼국시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 (493)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1980년의 조사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된 유지는 정비되어 있으며, 건물의 문화적, 학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래의 유지에서 약간 위쪽에 새로이 복원되어 있다.임류각에 대한 조사 결과 초석의 배열은 남쪽열에 6매, 동쪽열에 7매를 배치하여 건물은 남변이 5칸, 동변이 6칸이지만 각각 10.4m ×10.4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에 사용된 초석은 총 42매였으나, 현재 남아있는 초석은 31매이고 나머지 11매는 결실되어 있다. 초석의 기본형태는 방형이나 2∼3매의 돌을 합하여 1개의 초석을 이루고 있으며, 고층건물을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초석의 상면에 요철을 주어 기둥이 힘을 받고 밀착되도록 하는 소위 그랭이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기반이 약한 초석 주위에는 굴건식 원형 주공을 만들어 보조 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임류각지의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가 대부분으로, 단판 8엽의 백제 연화문 와당과 후대의 세판 연화문 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임류각지는 초석을 지상에 노출시키면서 정비가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임류각에 대한 복원도 이루어져 정면 6칸, 측면 7칸의 이층 형태의 누각 건물이 광복루 아래 광장에 복원되어 있다.
* 공산성의 동문의 터가 있는 곳, 공산성 동문루 *
공산성 중심부에서 남동방향으로 토성이 위치하였는데 본래 여기에는 공산성의 동문이 있었으나 훼손되어 단지 유지만 남아 전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폭 5m 정도의 토성이 절단된 형태로 남아 있었는데, 1980년에 문지가 조사되어 구체적 형태가 확인되었다. 당시 조사된 문지의 내용을 보면 규모는 문지의 통로길이가 6.54m이고 너비가 2.46m로 남아 있었다. 문지의 양쪽에 문지석 2매가 원위치에 남아 있었고 자연석으로 쌓은 통로벽도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2매의 문지석의 상면에는 문설주공이 장방형으로 길이 15㎝, 너비 5㎝, 깊이 5㎝로 파여 있었고, 그 문설주공의 바로 안쪽에는 원형으로된 분지공이 있었는데 지름이 11㎝에 깊이는 7㎝였다. 이러한 크기와 모양은 양쪽의 문지공에서 동일한 것이 었다. 다만 서쪽 문지공의 바닥에는 문초곶이의 마멸방지를 위하여 설치된 무쇠받침도 남아 있었다. 문지석의 전면에는 장대석을 높이대로 놓고 그 위에 큰 면석 하나를 포개어 놓았다. 이렇게 큰 면석을 서쪽에 똑같이 쌓은것은 밖에서 문을 열지 못하게 한 성문의 공통적 형식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지석 양끝에 접해서 통로벽을 쌓았다. 현재 이 공산성의 동문은 정비와 함께 문루가 복원되어 있다. 문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 형식에 따른 것이며 규모는 기록에 남아있는 삼칸규모라는 내용에 맞추어 건립한 것이다.
* 공산성 내 연못,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공주공산성연지 -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1982.12.31 지정) *
연지는 공산성 북쪽의 금강과 영은사(靈隱寺)사이에 있는 연못이다.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雙樹亭)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 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연못의 축석상태를 보면, 모두 단을 두어 쌓았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아울러, 축석에 사용된 석재는 비록 정치석되지는 않았지만, 면을 어느 정도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이들의 축조는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석질은 절석이 잘도는 반암계통을 사용하고 있다.
* 공산성 연못 *
연못은 광장의 전면 남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을 원형으로 쌓아 만든 것이다. 규모는 상면의 너비가 7.3m이고 바닥의 너비가 3.0m에 깊이는 4.18m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대접형으로 정연한 축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원상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축조를 보면 부식된 화강암질인 생토면을 지름 9.5m되게 원형으로 파고 내부에 석축을 한 것이다. 더불어 바닥은 널찍한 판석을 깔았는데 호안석면은 부정형 할석을 연못 안쪽으로 면을 맞추어 1열만 축조한 것이다. 특히 벽면은 위로 쌓아 올리면서 약간 밖으로 휘어 올려 지름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배려한 것이다. 한편 호안석의 후면은 점성이 강한 점토를 1m의 너비정도 채우고 있는데 연못 외변이 동일한 상태이다. 이는 연못 내의 물이 누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이 연못은 추정왕궁지역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후쳐 있으면서 중심건물로 추정되는 24간 건물의 정면 중앙에 자리한다. 따라서 외형상으로는 조경을 위한 시설인 것으로 추정되나 또다른 기능, 즉 용수 저장을 위한 시설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연못 내의 용수는 외부에서 길어다 채운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연못 안에서 흙이 완전하게 채워져 있으면서 기와나 토기 등의 각종 유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 바 유물들은 전부 백제시대의 것이다. 기와는 평와를 비롯하여 숫막새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숫맛새 기와는 단판 10엽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8엽연화문, 그리고 파상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연화문 와당은 소판이지만 연판의 반전이 심하고 연판 자체는 풍만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는것이다. 파상문 숫막새 기와는 양선으로 만든 것과 막새면에 볼륨을 둔것으로 구분되는데 소박하지만 균형과 유려한 멋을 갖추고 있는 것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병형토기를 비롯하여 삼족토기, 개물, 등잔 및 벼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백제토기로 정형을 이루는 것들이다. 병형토기는 표면에 자연 유가 있는 평저의 기형인데 광견형으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벼루는 소형의 원판형에 다리가 3개 부착된 것이다.
* 공산성 동쪽의 누각, 공산성 광복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1984.05.17 지정) *
광복루는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는 누각이다. 이 곳은 공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토성이 겹성으로 위치한 곳인데 공산성 두 개의 봉우리 중 서쪽의 봉우리에는 쌍수정이 있고 동쪽의 봉우리에는 광복루가 있으며 공산성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여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 광복루로 불리는 건물은 원래 해상루라 하여 성 내의 중군영 中軍營의 문루였으나, 중군영이 폐쇄되면서 중군영지에 있던 것을 일제 초기에 옮겨 웅심각 雄心閣이라 불렀으며, 1945년에 퇴락한 누각을 공주의 주민이 합심하여 다시 보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 김구, 이시영이 이 곳에 이르러 누각에 국권회복의 뜻을 기념하는 광복이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누각 명칭이 개칭되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각지붕 초익공 양식으로 창방을 각 칸마다 우미량과 함께 깎아내어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음이 특이하다. 8각의 고준한 화강암 주초 위에 고주를 올렸으며 지붕은 홑처마로써 네 귀퉁이를 반전시킴으로써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 공산성의 서문,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서문지) *
서문은 본래 유지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문루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문루의 복원이 이루어져 있다.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면서 성의 입구를 개구식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상태이다. 더불어 본래의 문지는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본래 공산성 서문 문지의 복원은 이미 1975년에 성곽에 대한 보수공사를 겸하여 실시한바 있다. 그러나 1975년의 보수에서는 양단의 기단만 축석하였을 뿐 누적은 복원되지 않은 채 남겨 놓았었다. 당시 복원된 기단부는 높이 4.4m, 너비 5-6m, 그리고 길이는 각각 17m로 조성하였는데 좌우 양단간의 간격은 7m의 범위였다. 본래 서문지의 형태는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문의 형태에 대하여 여지도지에서는 동,서문은 각각 3칸이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서문지의 복원은 1990년에 이르러 본래의 문지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3칸 규모의 고주 형태의 문루가 축조되었다. 비록 최근에 새로이 조성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룡산 자연박물관''
* 최대 규모의 교육 체험의 장, 계룡산자연사박물관 *
계룡산자연사박물관은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계룡산 국립공원 자락에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와 최다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교육과 체험의 명소이다. 직접투자, 발굴에 참여한 계롱이라 불리는 천우호연사우르스청운엔시스 공룡의 실물 화석과 계룡산 특산식물 동물, 곤충, 자연사 관련자료 등을 수집, 보존 및 전시 연구를 하고 있다.
고(故) 이기석 설립자는 의술을 펼치면서 교육의 터를 닦고 어려운 이웃에 헌신하며 살다간 이 시대의 거울이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안겨준 이기석 박사는 ‘노벨상은 자연사 박물관의 수에 비례한다’는 신념으로 자라나는 과학도들에게 꿈을 키워주고자 80평생 모은 힘과 열정을 박물관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 자연 학습의 장으로 탈바꿈 중인 박물관 *
계룡산 자연사박물관은 소중한 자연사의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보전하고 이를 전시함으로써 문화와 과학,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함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하여 자연 과학에 대한 문화 교육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유치원, 초·중·고등학생들에게 자연과 함께하는 친환경적인 심신 수련의 공간을 제공하고 호기심 및 자연 과학에 대한 탐구심을 불러 일으켜 자연 과학 분야에서 최고의 과학자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계룡산 자연사박물관은 웅대한 꿈을 키우게 하고 과학에 대해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배우도록 하여 과학의 일반 대중화와 확산을 꾀하고 있다.
''동학사 계곡''
* 동학사계곡의 신록, 동학사계곡 야생화 *
동학사계곡의 야생화는 동학사계곡의 신록이라하여, 계룡팔경(제5경)에 포함된다. 학바위 앞에서 관음봉고개에 이르기까지 약 3.5km의 동학사계곡은 언제나 푸른숲에 둘러싸여 맑은 물소리, 새소리가 청량하다. 계곡의 입구 노거수속을 신선처럼 걷노라면 비구니의 강원이 있는 동학사에 이르고, 바로 그 아래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재상을 모신 삼은각 숙모전이 자리하고 있다. 동학사 앞에서 눈을 높이면, 저 멀리 쌀개능선과 서북능선이 시계에 다가서며, 계곡을 1.5km쯤 거슬러 오르면 산수의 조화미를 자랑하는 은선폭포에 이른다. 은선폭포를 지나, 관음봉까지 다소 가파르나, 잡목으로 우거진 숲속의 삼림욕이 상쾌하다. 동학사의 계곡은 항상 아름다우나, 신록이 피어나는 봄의 계곡이 으뜸이며, 예로부터 춘 동학, 추 갑사로 널리 알려져 있어, 계룡산의 제5경으로 일컫는다.
* 계룡산의 대표 산사, 동학사 *
동학사는 공주에서 약 25km, 대전에서 8km정도 떨어진 반포면 학봉리에 자리잡고 있다. 계룡산 동쪽 골짜기에 싸여 있는 천년고찰 '동학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비구니 강원(일명:승가대학)으로서,150 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부처님의 일대시교 및 수행과 포교에 필요한 제반교육을 받으며 정진하고 있는 유서깊은 도량이다. 또한, 동학사는 문필봉(文筆峰)이 있어서 대 강 백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도 유명하며 비구니 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는 맑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하나로 어우러져 고즈넉한 산사에 그 청아함을 더해준다. 주변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고 교통이 편리해 계룡산의 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박정자삼거리에서 동학사에 이르는 약 3km 거리의 가로수는 벚나무로 이루어져 봄이면 벚꽃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1993년부터 매년 동학사 봄꽃축제가 개최된다
첫댓글 거울님
안녕하세요
공주에 많은 유적지가 있네요
건강하시고 오후시간 도 즐겁게 보내세요
여기올린거 말고도 둘러볼때가 많더라구요
시간 되실때 둘러봐도 될듯합니다
거울님 대전근교에 있는데
언제나 동학사만 다녔어요
환절기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소식 많이 올려주세요
대표적인 명소이기때문이죠
한번씩 둘러봐도 좋을듯해요
하늘거울님!알려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시는 곳 근처 명소를 소개해 주세요
하늘거울님 공주 소개
잘읽고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거운 오후 시간 잘 보내요
잘계시죠
전남에도 둘러볼때가 많지요
소개좀 해주세요
대전에서 가까우니 자주 가는곳 입니다
공산성 관람후 시장과 음식거리가 조성되어 있어서 아주 좋습니다
또 한옥마을과 유적지도 둘러보시면 좋을듯 하죠
지기님 감사합니다
공산성 근처에 맛있는곳 많아요
저도 아이들 데리고 자주 가던 곳입니다
대전도 많지요
한참을 읽어 보앗네요
맛있는 저녁 식사드시고
편한 쉼 되세요~^^
ㅎㅎ 좋은곳이 많아요
연정님계신곳도 좋은곳이 있음 소개 해주세요
공주는 맛집과 찻집도 많지만..
밤과 재배되는 유명한 지역상품이 많습니다..
이번 공주와부여 축제를 기대해 봅니다.
밤으로 맛난 빵도 만들더라구요
공주와 부여 축제에 좋은 소식이 들어왔음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