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송씨鎭川宋氏를 중심으로 바라본 송가宋家의 기원에 대한 오해와 진실
※ 본 글은 세간에 송씨의 도시조로 알려진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공의 신라 귀화설이 역사적 근거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아울러 일전에 필자가 서술한 ‘진천송씨의 뿌리를 찾아서(은왕족설의 진실)’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
진천송씨의 관조貫祖는 ‘송인宋仁’공公이다. 묘향墓鄕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비봉산이다.
그렇다면 진천 송씨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송인 공으로부터 16대를 거슬러 올라간
후신라後新羅 시대 ‘송순공宋舜恭’ 때부터다. 진천송씨대동보에는 시조 송순공宋舜恭 공公을 ‘일세一世’로 적고 있다.
그리고 이분께서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875~886) 때 대아찬大阿湌 벼슬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릇 송씨 족보를 통틀어 동방 송씨의 첫 기록인 것이다.
족보에는 그 세계를 실전됨으로 인해 ‘시조 송순공’에서 그 16대손代孫 송인공 사이의 세계는 기록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정리를 하면 현재 진천송씨 대동보에는 송순공공을 일세一世로서 기세紀世하나 17세世인 송인공을 진천송씨의
관조貫祖로서 모시고 있다.
현재 두촌리 매산梅山에는 시조신위의 단비만이 남아 있을 뿐 그 묘소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신라는 일반적으로 진골 귀족 이외에는 대아찬 이상의 벼슬을 못했다는 것이 통설이니
송순공 공의 기록은 그 진위를 의심받게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다만 신라왕이 보덕왕을 사위를 삼아 3등급인 소판의 벼슬을 준 기록이 있으니 이것은 곧 왕족인 진골귀족에 준하는 대접이다.
그러므로 공 또한 진골귀족의 대접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기존 학계의 인식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는 세계 실전이 무려 15대가 넘는 까닭도 있다. 이렇게 되면 족보의 기록을 긍정하는 측이나
부정하는 측이나 그 사실을 명확히 증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대저 진천송씨 최초로 발행된 1677년 계축보의 첫머리에 등재된 이래 계속해서 이어온
송순공 공의 후신라 대아찬 벼슬 역임 기록 아직도 그 진실이 오리무중이다.
중국의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한국 송씨의 도시조가 당나라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류스타인 송승헌, 송혜교 등이 모두 중국인의 후손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낭설이다.
사실 같은 종원으로서 ‘불가불가不可不可’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의 빌미가 되어 준 것은 제7보인 1975년도 판과
제8보인 1987년도판 진천송씨대동보라 하겠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후기인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송씨의 여러 본들이 모여 도시조로서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공을 내세우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논의가 각 본관 문중의 종원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그 논의 또한 대표성을 띄지 못한 까닭으로 결행치 못하다가, 충분한 논의 없이 현대에 들어서
우선 진천송씨에서 먼저 대동보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천송씨의 족보에서 앞서 밝힌 송순공공이 다른 본관의 위상을 진천송씨의 아래에 두는 결과가 되는 바 되어
타관은 이를 족보에 싣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제7보와 제8보에 나오는 진천송씨의 시조‘송순공’ 공은
곧 신라로 귀화한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공의 일세손 혹은 육세손으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시절 ‘신,구당서’에서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공의 기록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찾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워낙 현실 다물 운동이 급한 까닭으로 세력의 확산을 위해 자세히 읽어 볼 시간이 없는 고로, 나의 노력이 부족하여
시조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동족 중에 한 분인 부여열국님이 ‘신,구당서’에
그 기록이 없다고 제보해 줌으로 송주은공은 가공의 인물에 가까운 분인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송주은공의 기록은 새로 개정된 제9보인 2009년판 진천송씨대동보에는 다시 삭제된 상태다.
이는 대다수 진천송씨 종원 및 각 문중 수장들의 강력한 수정 여론에 의하여 바로 잡힌 바라 하겠다.
본래 동서양을 통털어 송씨를 처음 쓰신 분은 송미자宋微子란 분이다. 사마천 사기의 ‘송미자세가’는 바로 이분에 대한 이야기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가 은나라 말기 세 성인을 이야기하는데 “미자는 주나라로 가고,
기자는 노예가 되고, 비간은 충간을 하다 죽임을 당했다.”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論語 微子篇>
좀더 부연하면 은이 망하고 주周가 들어 설 때, 주周 무왕武王의 동생 ‘주공周公’이 그의 형제들과 전쟁을 벌일 때
‘미자’는 주공의 편에 서서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에 이긴 공으로 송나라를 분봉 받게 되는데, 이것이 곧 지명에서 얻은
‘송씨宋氏’의 유래다. 이는 배달국 안부련 환웅 때 소전씨가 강수에서 둔병함으로
그 아들 신농씨가 강성姜姓을 쓴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본래 우리 측 기록인 환단고기에 송씨宋氏로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송무기宋毋忌’라는 인물이다.
역사에는 진시황이 도사 ‘서복徐福’에게 동방에서 신선을 찾아오라며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을 주어 보낸 일이 있다.
이 서복의 스승이 바로 ‘송무기’다. 무릇 서복은 ‘송무기, 선문자고羨門子高’로부터 ‘도가道家 방술方術’을 배웠기 때문이다.
서복은 훗날 진시왕에게 돌아와 그가 해중海中에서 구한 비결을 바쳤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다.
이 비결이 뜻하는 바는 진시왕의 둘째 아들 호해가 진秦을 망친다는 뜻이었는데, 진시왕이 이를 북방 동호東胡로 잘못 해석하여
만리장성을 쌓아 '동호'의 침입에 대비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하겠다.
동호는 단군조선의 세 삼한 중의 하나인 북번한北蕃韓 세력을 가리킨다.
‘환단고기 신시본기’에는 진한교체기의 인물로 연나라 출신인 ‘송무기, 정백교, 극상, 선문자고’와 제나라 출신인
’문성, 오리, 공손경, 신공’를 이야기 하고 있다. 본래 중원에서 동이족 문화의 큰 축은 제나라의 근거지인 산동山東이며,
그 다음으로 연나라의 근거지인 하북河北 일대다. 이 두 나라는 모두 황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은 본래 배달조선에서 유행하던 신선술神仙術을 중원에 널리 퍼트린 사람들이다. 현재까지 지나에는
두 가지 정신적 큰 흐름이 있으니 하나는 ‘도가道家’요 하나는 ‘유가儒家’다. 하지만 실제 가장 오랫동안
지나인들의 신앙 세계를 지배한 것은 바로 이 ‘도가道家’다. 그런 까닭으로 지나支那에 뿌리를 둔 화교들이
가장 많이 신앙하는 것은 바로 이‘도가’다.
신선 도가의 풍습을 중원에 씨 뿌린 것은 병가兵家의 중시조中始祖인 강태공姜太公 여상이다.
이는 중원에 팔신제八神祭의 풍습을 전했기 때문이다. 팔신제八神祭란 곧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제사지내는 풍습이다.
진시왕秦始王은 지나 육국六國을 통일한 후 발해渤海에 이르러 팔신八神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이미 이곳에 동방의 삼신三神의 풍습이 전해진 증거라 하겠다.
이제 혹론或論을 세우자면, 동방에 '송성宋姓'이 전래된 까닭은 도가와의 인연일 수 있다.
설령 우리 직계 조상은 아닐지라도 ‘송무기’는 진한의 무렵에 대표적인 도사道士였으니,
신선도神仙道의 뿌리가 동방에 있었음을 명백히 알았을 것이다.
그들의 사상은 서복徐福, 한종韓終, 노생盧生을 거쳐 한의 무왕漢武王에 이르러 그 유명한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의 출현을 보게 된다. 동방삭의 기록에 보면 신통력을 가진 도사 동방삭은
지금의 동방이 곧 역사의 종주임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송씨는 그 혈통적 배경이나 정신적인 문화 배경으로 보나 결국은 뿌리를 찾아
동방으로 이주를 해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송씨의 조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힌 옛 기록은 없다.
혹론이란 “혹시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짐작과 상상이다. 그러므로 맞으면 다행이지만 그러나 아닐 확률도 많으니
그 까닭은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으면 여러 가지 있을법한 가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백제 8대 귀족인 목木姓의 연관설 또한 당대의 정황으로 짚어본 혹론이다. 백제는 부여씨夫餘氏가 다스리는 나라로
그 귀족은 팔신제의 수와 같은 팔괘八卦의 원리에 의하여 왕을 보좌하는 귀족은 그 근간이 팔대성八大姓으로 이루어졌다.
팔대성을 단성으로 표기하면 사沙, 목木, 연燕, 협協(열십자는 제외함), 해解, 진眞, 국國, 백白(초두를 더함)이다.
역학에서는 이를 구궁팔풍九宮八風이라고 하는 바, 이는 중앙中央의 중궁中宮을 주변의 팔궁八宮이 둘러 싸
보좌를 하는 형상이다. 그 내외의 두 본처를 합하고 보면 구궁九宮이요, 주변의 변화작용만을 보면 팔풍八風이다.
이는 중궁이 본체로서 용사를 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에 반해 초기 신라의 성씨 구조는 일육수一六水의 구조다. 신라 초기 귀족의 근간은 6대성이니
이李, 정鄭, 최崔, 손孫, 배裴, 설薛이다. 왕족인 박씨朴氏는 곧 양수陽水로서 일一이고, 6부족의 성씨는
곧 음수陰水로서 육수六水인 셈이다. 합하면 북두칠성北斗七星과 같은 황극수皇極數로서 7이다.
본래 해상왕국 백제는 7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요서, 진평군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22담로를 경영하였으니,
중원에는 요령성 일부 및 연燕, 제齊, 오吳, 월越의 대부분이 이에 포함된다. 장구한 역사와 영토를 가지고 있는 백제의 귀족은
더불어 번창하며 그 성씨 또한 많았을 것이지만, 지금에 이르러 목성을 한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골품제가 유지되던 후신라에 의한 병합 후에 이뤄진 탄압과 차별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까닭으로 이제 ‘목木’에 관을 하나 씌워 그 성씨를‘송宋’으로 하던지,
아니면 목木에 자子를 붙여 '이李' 성을 썼을 개연성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부 송씨나 이씨가 목씨의 후예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백제사의 저명한 연구가 중의 한 분은 김성호 선생이다. 선생은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에서
재당, 재송 백제 후예(중원의 고구려, 신라 후예 일부 포함: 편집자 주)의 동방 이주가 고려 태조 때 시작되어
광종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고 현종을 거처 고려 후기에 까지 이어졌다고 적고 있다.
부연하면 고려 때에 지금의 양자강구의 절강성 일대에 위치한 오월국吳越國 등지로부터 이 땅 한반도에 60여개의 성씨가
귀부 안착한 것이다. 그 중의 한 성씨가 곧 송씨宋氏(여산, 은진, 서산)임을 중앙일보사가 간행한 성씨의 고향(1989)를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 1권 240쪽) 김성호의 본 책에서는 오월국이 백제의 지손으로
순수한 동이족의 나라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고려사 태조본기에는 송함홍宋含弘의 기록이 있다. 본래 궁예의 책사였으나 태조 왕건의
신하가 된 인물이다. 그 유명한 일화로는 하루는 태봉의 궁예가 거울에 적힌 도참예언을 해석하라고 지시하자
이를 왕건을 위해 감추고 거짓 해석을 한 이야기가 있다.
이 분이 우리 사서의 기록에 등장하는 진방辰方의 첫 송씨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분이 송씨의 시조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각 본관의 족보에도 이 분이
시조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이 분이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대저 송씨가 그 시조를 전하지 못한 까닭은 파란 만장한 한민족의 역사 때문이다. 한민족의 역사가 11차례의 병화 때문에
소실되었으니, 이는 여타 수많은 성씨처럼 송씨 또한 그 뿌리와 계보를 객관적으로 밝히기 어렵게 된 주 원인이다.
이는 부수적으로 시대의 불리한 상황에서 무언가 감추어야만 생존과 번영을 영위할 수 있는 가문의 필연적인 이유를
양산하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가문의 뿌리에 대한 기억은 점점 잊혀지고 변질되게 된다.
박씨가 박혁거세 이전의 뿌리에 대하여 명확히 전하지 못한데서 알 수 있듯, 가문의 뿌리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단 한 가지
기록이 없는 까닭이다. 본래 가문의 뿌리는 주관적으로는 족보와 객관적으로는 사서의 기록이 합일할 때 완전성을 띄게 된다.
과연 송씨는 은왕족의 후예일까? 아니면 백제의 후예일까? 아니면 은왕족의 후예이면서 백제의 후예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제국의 후예일까?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기록과 정확을 종합하여 보면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송씨는 그 태생부터 순수한 한족韓族이며
삼신종三神種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곧 인류 최초의 부모父母이자 두조頭祖인 나반과 아만인 것이다.
무릇 성씨의 원조는 풍씨風氏다.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풍성風姓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풍씨는 15대 만에 팔괘 사상에 의하여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리里, 사姒, 팽彭'으로 나뉘어 진 후 절성되었음으로 현존하는 성씨의 뿌리는 강씨姜氏가 된다.
환국이래 배달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씨가 탄생하고, 조선을 거치면서 고高, 박朴, 부여夫餘氏 등 위대한 성씨가
탄생하여 유구한 세월동안 명맥을 잇거나 변성變姓 및 창성創姓을 하였다. 이제 우리 송씨도 한민족의 영광을 대변하는
당당한 대성이며, 유구한 세월 동안 꿋꿋하게 민족을 지키며, 한민족의 명예를 빛낸 참된 성씨라 하겠다.
이제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은 순혈주의다. 이 핏줄을 지키기 위하여 옛 북마한의 땅인 지금의 한민족의 영토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이제 역사서가 10차례 불타고 말살됨으로 인하여 우리 뿌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하여
혼혈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그 혼혈의 정신적 배경이 된 것이 또한 비열한 역사가 및 종교가들에 의하여 주장된 한민족
혼혈잡종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필자는 한사람의 진천송가를 비롯한 여타 송씨의 혼혈을 막고
순혈을 이루기 위하여 이 글을 남기고자 한다.
무릇 삼국의 명장 관우는 지금 지나에서 공자보다도 더 높이 우러름을 받고 있는 성제군聖帝君인바, 자녀의 혼사를 종용하는
손권에게 " 어찌 호랑이 새끼를 개, 돼지에게 시집보낼 수 있냐."며 의기롭게 죽어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는 지금 당장 결혼이 아쉬워 쉽게 혼혈을 선택하는 지금의 세대가 가슴에 깊이 새길 대목이다.
끝으로 우리 가문의 뿌리를 논하는 것은 그 즐거움 보다 두려움이 컸음을 밝히고자 한다. 행여 내 가문의 뿌리를 왜곡함으로
인하여 ‘환부역조換父易祖’하는 대죄를 범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혼혈보다 더 큰 환부역조는
없을 것임으로, 이제 작은 화로서 큰 화를 대신하고자 하는 충정으로 이 글을 우리 혈족일가에게 남기고자 한다.
부 기 : 송씨는 본이 다른 송씨를 볼 때 동질감을 느낀다.
본이 다르지만 무언가 생김새나 풍기는 것이 무언가 닮았다고 느낀다. 그것은 곧 한뿌리 의식이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한 뿌리 의식이 송주은공 같은 도시조都始祖를 만들고자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송주은공이 진천송씨 족보에 기재되지 않았던 고려, 조선에서도 송씨끼리는 같은 조상이라 하여
서로 통혼하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 이러한 의식은 가공의 진실이 만들어낸 선입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무언가 송씨 제족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직감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송주은공의 이야기는 일단 파설破說을 하되,
그간의 경과를 기록하고 미완의 논설로 마감하여 더 나은 후인의 연구를 기대하고자 한다.
글 : 송호국(nokjisa@naver.com) 9208. 10. 1. 수정 9208. 10. 31.
참고서적 :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사기, 논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진천송씨대동보, 고조선사연구, 고조선연구,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대배달민족사, 신당서, 구당서, 고려사, 개벽실제상황
참고자료 : 진천송인 시조님에 대한 고려사 기록(부여열국 저) 당나라 호부상서 송주은 신라 귀화설 허와 진실(부여열국 저) 원제 : “진천송씨의 뿌리를 찾아서(은왕족설의 진실)”이나 크게 잘못 서술한 부분이 있어 바로잡음
출처 : 네이버 치우천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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