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24일
여기, 이 동네는 50년도 더 된 꽃시장이 있는데 우리 같은 도매상들이
들어와서 기존의 꽃집들하고 같이 장사하는 거야.
내가 집에서부터 가게로 나올 때는 7번가에서 28스트리트로 해서 들어
와. 7번가는 맨 밍크 도매상들이라구. 28스트리트에도 밍크상이 몇 집 있
어. 그 몇 집만 빼놓고는 다 꽃 도매상들이야.
어떤 집은 앙란만 파는데 밖에서만 봐도 참 이뻐. 하얀색, 자주색 해서.
그리고 어떤 집은 국화 종류만. 국화 종류도 많더라구. 백일홍 같이 생겼는
데 백일홍보다 훨씬 때가 벗어진 가베라라는 꽃도 국화 종류에 들어가. 실
크플라워만 하는 집도 몇 있어. 그 중에서도 마른 잎하고 마른 꽃만 하는
집이 있는데 그건 인공으로 하는게 아니고 다 말려서 하는 거야. 장미 같
은 거를 어떻게 기계로 말렸는지 살아 있는 것처럼 이쁘더라구. 화분에 담
긴 관상 식물을 하는 지도 많아. 그런가 하면 왼쪽 맨끝 코너집은 정원에
놓는 돌과 돌조각들로 가득차 있어. 비너스상도 있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
람' 비슷한 것도 있고 아름드리 돌로 깎은 화분이 가득차 있어. 천사도 많
고.
6번가에도 무지무지하게 큰 꽃 도매상들이 많이 있어. 꽃 도매상들은 새
벽 4시쯤에 일찍 문을 열어. 아침 7시쯤에 지나가다가 들어가 보면 그렇게
냄새가 좋은 꽃들이 다발다발 박스에 그냥 있어. 아직 상품이 되기 전이야.
그래서 꽃이라기보다는 야채 같기두 해. 어떤때는 그런 것들은 기술적으로
하나도 시들지 않게 하면서 비행기로 운반을 한 대.
요즘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그런지 소나무 냄새가 많이 나구 포인세치
아로 집집이 덮여 있어 온통 빨갛구 노랗구 거기에 색바랜 것 같은 것두
있는데 그런 것두 이뻐. 그래도 역시 빨간게 크리스마스 상장이 되지. 이
때쯤 되면 초록잎이 빨갛게 된다구, 계속.
크리스마스가 되면 뉴욕은 마법의 도시가 되는 거 같애. 화려하잖아. 록
펠러 센터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에는 2만 개의 오색 전구가 살아나는 것
처럼 빛나구, 천사들이 그 밑에서 나팔을 부는데 참 평화롭고 화려하대. 몇
년 전에는 호두까기 인형 같은 것을 상점 쇼윈도에서 하는 걸 지나가다가
봤어. 5번가에 샤넬이라든가 티파니, 구치 같은 데도 얼마나 예쁘게 해놨
어. 기가막히게 해놨잖아.
그리구 이 때가 되면 이 도시를 온통 음악으로 다 휩쓰는 거 같이 느겨
져. 헨델의 메시아 같은 게 연주되는 거창한 음악회도 많구. 거리엔 어디나
캐롤 그런게 울려퍼지고.
그렇지만 나는 이 근처 꽃시장에 꽃을 사러 다니는 꽃 소매상들, 그렇게
생활하기 때문에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화려한 데보다는
그런 사람들한테 찾아오시지 싶어. 조그만 선물을 서로 나누고, 음식 서로
나눠먹고 그런 데가 따뜻하고 좋아서. 나에겐 언제나 함께 있는 따뜻한 이
웃 ABC핸드백의 이장로님 부부가 있어서 더욱 흐뭇한 성탄이야.
1996년 12월 30일
내가 참 좋아하는 꽃집이 있어. 바로 옆집인데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쌔미라는 사람이 주인이야. 그 집은 첫째 싼 게 좋고 오래 이웃으로 있다
보니까 친해서 좋고. 그러구 그 주인이 이 '미세스 박'을 좋아한대요. 내가
가면 직원들한테 막 화를 내대가도 얼른 그치곤 해.
그런데 이 꽃집을 3대째 하고 있는 거래. 할아버지서부터 아버지, 아버지
는 아직 살아계신데 가끔 가게에 나오셔. 참 그러고 보니 아들까지 나와서
하네. 그러니까 4대째네, 지금. 아들은 젊어. 스물 몇 살쯤 됐어.
꽃집 하는 데가 4층 건물인데 그게 자기 꺼래요. 그 건물은 우리 집에서
오른쪽 옆집이고, 우리 왼쪽으로는 분위기 좋고 우아한 작은 빌딩이 있는
데 그 발딩도 쌔미네 거야. 굉장하지는 않지만 재산이 그렇게 있는데두 그
이는 참 근면해. 7일을 계속해서 열고 쉬는 날이 없이 일을 해. 그 집 직원
이 스물 몇 명쯤 돼. 배달도 몇 사람이 하고. 크진 않지만 바쁜 집이야. 그
런데두 어저껜가 보니까 장례 꽃 큰 거 둘을이 사람이 번쩍번쩍 들고 그냥
트럭에다 갖다 넣더라구. 난 그이가 직원인줄 알았어.
쌔미 부인은 초등하교 교사였다는데 남편보다사람이 섬세하고 우리가 보
기에 우아해. 거기서 일하는 한국 여자 한 사람이 있거든. 그이가 그러는데
부인이 우울증이 좀 있나 봐. 그래도 참 마음이 곱고 좋대요.
이런 크리스마스나 무슨 날일 때 나는 그 부인한테 브로치를 하나 선물
해. 거기서는 장미를 보내와. 내 생일 같은 때 우리 아들이 전화를 해가지
구 여기로 꽃배달을 보내는데 그래서 내 생일을 아니 봐. 뭘 받고줘서가
아니라 참 훈훈하고 좋은 이웃인 거 같애.
그러구 그 집은 꽃이 딴데 보다 반값밖에 안돼. 도매상 비슷하게 하며서
소매를 하는 거야. 한국 사람들이 어떤 때는 나를 다리놔서 거기서 꽃을
사기두 하는데 그러면 조금 더 싸게 줘. 그 집에서 일하는 한국 여자 말이
미세스 박이 산다하면 쌔미가 특별 가격으로 그렇게 준대요. 내가 뭐 좋아
서라기 보다는 그냥 옆에 오래 사니까 그런 것 같애.
여기 가게일이 너무 힘들고 불안할 때도 많잖아? 그럴 때면밖에 나가서
그쪽을 이렇게 바라봐. 그러면 그게 상품이든 뭐든 꽃냄새가 거짓말은 못
하잖아. 꽃처럼 이쁜게 어딨어. 거짓 없는 빛깔, 거짓 없는 향기, 그걸 그냥
내뿜는 거야.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다 뺏어가지 않고 꽃에다 남기셨어. 꽃이 참 위안이
된다구. 그게 어디 나뿐이겠어? 다 그렇겠지.
1997년 1월 3일
요 브로드웨이 부근에 한국 사람들이 옷가게, 모자가게, 신발가게, 장난
감가게, 가방가게, 또 무슨 잡화(장갑, 머플러) 그런 가게를 많이 하지. 한
국 사람이 거의 다 해. 주얼리도 우리처럼 몸에다 하는 거 말고 머리에 하
는 거 파는 집이 있어. 보우라고 하는 머리핀 이쁘게 한 거며 헤어밴드 집
게 같은 거, 클립이라고 하지 그런 거는…. 우리도 그런 걸 하긴 해.
하여튼 이렇게 여러가지 가게를 한국 사람이 하고 있는데 금년 연말연초
는 너무 안 춥잖아. 그게 좀 타격이 돼. 모자나 장갑, 스카프 같은 겨울용
품이 많이 팔려야 딴 것두 사구 그런데. 이상하지. 그런게 팔려야만 돈이
돌아가서 다른 것두 사구 그러는데 금년엔 그게 완전히 스톱 됐대. 금년엔
전체 경기가 나쁜데다가 날씨까지 더워서 그렇대요.
또 사회복지금 같은 게 없어지잖아. 법으로 사회복지금이 다는 아니자만
그게 삭감돼서 시민권이 없으면 못타고 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준대
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불안한 거야. 가난한 사람들은 불안해서 돈을 못
써요. 그런데다가 한국 사람들이 하는 작은 가게들은 비싸대요. 비싸서 오
질 않는대. 메가스토아라고 대형스토아가 많이 생기니까 소상인들은 더
어렵지. 그게 참 마음이 아픈 얘기야.
브로드웨이 중심으로 도매상점이 없는 게 없는데 그게 다 활기가 없어요.
그러구 한국 사람들이 바삐 와서 사던 그런 모습이 없어졌어. 사람들이 가
방두 1년 들던 거 2년 들구, 우리가 하는 이런 장신구는 안 걸으면 그만이
지.
암만 이렇게 불경기구 그래두 외국에서들은 와. 그 보따라장사들이 오면
은 좀 사가지구 가요. 뉴욕이나 이 근처 사람은 어렵지만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멀리서 오니까 돈으 ㄹ가지고 와서 조금씩이라도 사요. 조금 전
에 세네갈 손님이 왔었는데 안 변하는 거, 안 변하는 거 하면서 사가지고
갔어. 거긴 땀이 나니까 싸도 변하는 거 팔면 다신 안 와. 진주 계통은 잘
안 변하잖아. 질이 좋은 거는 까지고 그럴게 없잖아. 그런 걸 사기 위해서
도 많이 와.
그런데 외국 사람들만 가지고는 50년도 넘은 여기 도매상의 파워라 할까
그 파는 양을 충족을 못 해. 그래서 사업이라는 게 참 살얼음판 걸어가는
거 같애.
그렇게 벌써 한 해가 갔네. 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이즈음은 그런대로
정초 분위기가 있어. 하다못해 과일이나 와인병이라도 나누고 중국집에서
는 계란이 든 그런 맛있는 중국빵을 주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들 그러
지.
1월 1일은 다 놀아. 어떤 곳은 3일인 오늘까지도 노는 집이 있어요. 그러
구 또 전에 빌려준 돈 받을 것이 있어도 이럴 땐 조심하고 안 받구 그래.
내주나 되야지 정상적으로 모든 게 제 궤도에 오를 것 같애.
1997년 1월 7일
오늘은 뒷집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 우리 뒷집에 한국 사람이 살아요. 우
리가 이사오고 바로 그이네도 이사를 왔어. 그러니까 만 9년을 이웃해서
산 거야.
거기엔 할머니가 계시구 딸이 다섯이라는데 지금은 넷째, 다섯째 딸하고
살아. 이사왔을 때는 딸들이 30대 초반들이었는데 지금은 40대지. 어머니는
70이 가까우셨어.사위가 둘에 손주가 각각 남매씩 잇구. 대가족이지. 여기
미국에서 그런 걸 보기가 쉬운일이 아니어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큰딸네 아이는 용이라구 그러구 막네집 애는 스티브인데 그이네를 부를
때는 스티브네라고도 그러구, 어떤때는 용이네라구도 불러. 큰딸네는 커피
숍을 하다가 꽃무역을 하구, 작은딸네는 그 동네에서 세탁소를 해.
그 위로는 딸이 셋이 있는데 맏이가 수녀고 둘째는 꽃가게를 하는데 그
둘째도 언젠가 딸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서 1,2년을 사랑ㅆ었어. 그집이 커
피숍을 할 때는 가게세서 일하는 남자도 그집에서 방 하나에 살았구.
그 집은 뒤뜰에 참 좋은 채소밭을 만들었어. 거기서 채소가 철철이 다
나와. 호박서부터 상추, 오이, 고추, 깻잎, 가지 그리고 배추. 배추는 김장을
할 만큼만 심어. 우리는 심지도 않고서 계속 얻어다 먹었어.
그런데 그 막내딸이 4,5년 전에 신장이 나쁜 병에 걸렸어. 애석하게도 못
고친대.
용이엄마가 일하면서 살림 다 하고 동생을 봐줘요. 살림도 두 집 돈을
합쳐서 하니까 경제적이지. 집도 하나 가지고 두 집에서 부금을 내니까 아
파트 얻는 것보다 낫지. 아이들한테는 피아노도 가르치고, 바이올린도 가르
치고, 운동, 태권도도 가르치고 그러는데 그런 것도 한 사람이 데려가고 데
려오면 되잖아. 그런 게 참 너무너무 보기가 좋았어. 그러구 만약에 병이
났는데 혼자 어디서 살았어봐. 애들은 누가 봐주며 남편이랑 어떡할거야.
대단해. 딸도 같이 살면 어려운데 사위까지 말이야. 사위는 아들도 아니고
남인데 장모를 모시고 잘 살더라구. 작은사위는 아침에 세탁소엘 가면서
쓰레기를 내다놓고 가요. 그게 우리집에서 다보여. 큰사위는 잔디를 깎구
채소밭을 잘 가꿔. 굉장히 남자답고 서글서글한 경상도 사람이고 작은 사
위는 말이 없구 아주 얌전해.
대개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말이 많고 친정어머니 모시구 살아도 그렇
잖아. 그래서 여기 할머니들은 대개 혼자 살기를 원하는데 이집은 너무 의
가 좋구 재미있게 살더라구. 그 할머니는 한 번도 난 혼자 살아야겠어 그
런 말 안하구 항상 웃구 그러더라구. 그 할머니는 딸만 낳아서 이혼하신
분이야. 영감님은 여기 어디 퀸즈에 사신대지 아마.
용이엄마한테 내가 물어봤어. 어떻게 그렇게 의좋게 사느냐구. 친형제도
싸우고 부모자식도 싸우고, 애들끼리는 벌써 사촌 아냐, 그러구 사위라는
게 남남이구. 그러니까 용이 엄마가 '니꺼 내꺼 없이 사니까 그래요'라고
그래. 남편도 있구 그런데 불편한 거 없냐니까 자기들은 안 그런데 남편들
은 어떤 때 나만의 가정을 갖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그래.
그 집에서 횃수로는 10년, 만으로는 9년을 그렇게 산 거야. 각 집에 아들
딸, 아들 딸이 있는데 아이들이 크니까 방이 모자라서 요새 이사를 간다구
그래. 누구네가 따로 나가느냐니까 스티브네가 나간대. 어디로 가냐니까 바
로 옆집으로 간대. 그 집은 바로 우리 길 건너집인데 이사가는 집은 뒷집
이야. 용이네하고 스티브네는 마당도 이어 있고 한데 붙은 집인 거지. 이사
간다는 게 방만 늘린 거야. 내일 이사 간대. 내가 그 소릴 들으니까 너무
좋더라구.
왜 대개는 서로 뵈기 싫어서 멀리들 가고 그러잖아. 어떤 집은 형수하고
시동생하고 서로 같은 장사를 하다보니까 우리 가게에 물건 사러 와서 만
나. 그래도 못 본 척해요. 내가 형수 아니냐고 그러면 서로 얼굴이 이상하
게 돼.
그런데 이런 거 보니까 참 좋아. 정말 그게 가정이라구. 집은 있는데 가
정이 없는 집이 많잖아.
또 그분들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서 주일날은 다같이 성당으로 가더라
구. 우리 안방에서 내다보면 가는 게 다 보여.
1997년 1월 9일
아까 어떤 손님이 한 명 왔다갔는데 프로비던스 근처에서 그린랜드라는
신부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룰 하는 사람이야. 이름이 '조'라는 폴란드 출신
의 백인이야. 결혼식에 쓰는 거를 많이 하는데 다른 것도 좀 있어. 무슨 가
방이니 그런 것들.
두 사람이 파트너로 장사를 했는데 오늘 온 사람은 조이고 그 파트너 이
름은 폴이야. 그이들은 우리집에 와서 진주로 된 세트를, 귀걸이, 또 반짝
거리는 왕관같은 것을 사요.
폴이 훨씬 더 편안하고 사람이 좋아.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주고 싶어
서 애쓰구, 낭만적이구. 그야말로 자기보다 남을 더 위하는 사람이야.
우리보구 자꾸 놀러오라고 해서 갔었어. 거기 프로비던스가 주얼리의 고
장이라서 전시장을 보러갔다가 그 집앨 놀러간 거지. 그 집은 뉴포트 중에
도 폴리버(fall river)라는 곳에 있는데 말하자면 '가을강'이야. 그런 동네이
름도 있더라구.
폴과 조가 조의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참 좋게 살더라구. 폴은 헌신적
인데 조는 굉장히 깍쟁이야. 저이하고 하루를 거기서 잤어요. 오리고기 구
운거 같은 그런 폴란드 음식도 얻어 먹구.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그
이들이 거기 철도왕 밴더빌트의 별장이 있다구 가보자구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었어.
내가 왜 또 거기를 갔냐하면 시인 전규태 씨가 여길 와가지고 한번 그런
말을 해. 교환교수로 왔을 때 자기 부인을 초청해서 전 미국을 다 다녔는
데 부인이 제일 충격을 받은데가 밴더빌트 별장이었다구 그랬어. 그런데
정말 대단하더라구. 바닷가인데 100년 전쯤에 이탈리아에서 재료들을 갖다
가 식다이구 침실이구 온통 대리석으로 해놨어. 굉장해. 화장실, 목욕탕 이
런 곳도 대궐이지. 거기가 아주 관광지가 됐어. 나는 너무 충격받거나 놀라
지는 않앗어. 이런 게 다 허무하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그러구 우린 왔
지, 집으로.
그리구 나서 얼마 뒤에 폴이 입원을 했다고 그래. 그렇게 한 몇 달이 지
났어. 내가 꽃도 한 번 보내주고, 병원으로 전화도 두어 차례 했어. 폴은
자꾸 아프다고 그랬어. 병명은 뭔지 잘 모르겠어.
그러다가 폴이 죽었어. 이제 폴은 우리 가게에 안 오지. 죽었으니까 조만
와. 그 사람을 보면 너무 폴의 생각이 나. 죽은 지 2년쯤 됐는데도 나는 그
사람을 보면 '폴 어딨니?' 그래. 그러면 조는 '노모어(No more)'라고 그래.
참 평범한 대답이지.
나는 그게 인생이라고, 그런 소리로 웃으면서 말하고 보내. 보내면서 눈
시울이 뜨거워져. 그사람이 올 때마다 내가 그래. 이상하지. 그 사람이 친
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또 괜시리 조가 미워지기도 해. 그 사람은 폴이 죽었는데도 여전히 장사
잘하고 있잖아. 아니 그게 당연한 거지. 그런데두 그게 좀 얄미워. 내가 보
기에는 폴 생각은 하는 거 같지도 않구. 그런게 밉다기보다는 세상이 이런
거구나 싶어서 서글퍼지는 거야. 지금은 덜한데 전에는 훨씬 더 했었어.
벼랑을 날으는 독수리
그 해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록펠러 센터에는 80피트 높이의 노르웨이산 소나무에 수천 개의 불이 색
색이 켜졌고 가지마다 내려앉은 금색의 천사들이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화가들은 허드슨 강과 브로드웨이 거리, 홈리스와 센트럴파크를 그렸다. 그
렇게 뉴욕의 겨울은 터져나올 듯 아름다웠다.
"누나, 여기가 록펠러 센터야. 크리스마스 트리 멋있지?"
신선하고 힘찬 젊음을 맘껐 발산하고 있는 대학 1학년 준상이가 운전하
는 차엔 한국에서 갓 온 조카 경미 부부가 타고 있었다. 준상과 건상은 사
촌 매형이 뉴욕에 산다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여기서 공부했지만
이런 나들이는 오랜만인 듯 차창 밖으로 준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매형에
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며 즐거워했다.
겨울이 성큼 들어선 도시는 왠지 더 바삐 움지이는 듯했고 우리는 그날
그 계절의 정취에 흠뻑 젖어들었다.
"건상이가 워크매을 끼고 거리를 걷는 것이 뉴스에 나왔대."
"그래? 건사이는 거리에서 음악을 듣는 뉴요커구나!"
형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건상을 바라보며 경미는 경쾌하게
말했다.
경미는 그의 맏형님의 셋째딸이다. 세브란스 의대에서 만난 신랑과 함께
부부 의사로 뉴욕에 살면서 뒤늦게 두 딸을 낳았다. 이제 만 세 살 반, 한
살 반인 다영이, 애영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다. 그애들은
조카의 아이라기보다 내소중한 친손녀딸들 같다. 때때로 너무 보고싶을 땐
일을 끝내고 포트워싱턴까지 가서 30분쯤 아이들을 보고오곤 한다. 다영이
는 전화를 걸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노래를 불러대더니, 요
즘은 건방이 들어 "작은 할머니, 안녕!"만 하고 그만이어서 서운하기가 이
만저만이 아니다.
"누나가 뉴욕에 살게 돼서 좋아. 집에 가서 다 같이 저녁 먹자."
차의 방향을 틀며 말하는 준상은 그 크리스마스날 사촌누나 부부와의 맨
해튼 나들이를 무척 좋아했다.
장위동집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온통 아이들의 축제였다. 새벽녘 선잠에서
깨어난 준상, 건상은 머리맡에 놓아 둔 동화책이며 따발 총 등의 선물보따
리를 풀어보고 좋아하며 철썩같이 산타 클로스를 믿었다.
"박준상, 성경 암송 1등, 전도·출석 1등이에요.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으세요."
염광교회의 송요섭 목사님이 그래프를 펴며 호명할실 때 준상의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피어났었다. 그렇게 장위동집의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이 자라
나면서 해마다 새로웠다.
준상이가 세 살 반일 때는 의정부에 살았다.
건상이가 돌이 지날 무렵, 두 주가 넘어가도록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해
매일 병원엘 다녀야 했다. 건상이는 등에 업고 준상이는 걸려서 병원에 가
는 길은 진창길일 때가 허다했다.
"엄마, 물 없는 데로 가. 내가 장화 신었으니까 물 있는 대로 갈게.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지?"
"응, 시장에 가. 맛있는 것 사줄게."
"아니지? 아기 병원에 데리고 가는 거지? 병원에 데려가지 마, 주사 맞
으면 아기가 아프잖아."
병원까지 가는 길에 준상은 몇 번이나 버티고 울어댔다. 동생이 주사 맞
고 아파서 우는 게 안쓰러워 더 크게 우는 형을 달래는 일은 참 만만치 않
은 일이었다.
"엄마, 머리카락하고 손톱은 안 아프지? 그치?"
병약한 나를 걱정하며 어릴 때부터 늘 안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확인하
기를 원해 이렇게 묻곤 하던 아이. 어떤 날은 차 안에서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걱정스레 말하곤 했다.
"엄마, 어떻게 이런 팔로 일을 해? 꼭 인형팔 같아."
그러면 나는 그애에게 팔을 굽혀 보이며 안심시키곤 했다.
"엄마 팔이 얼마나 센데. 이거 봐!"
1970년 ○월 ○일
준상의 입학식이다.
빨간 가죽 모자를 쓴 준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가슴에 손수건을 매단
준상은 고사리 손을 뻗어 앞으로 나란히를 한 채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
이고 있었다.
나는 준상이의 앞으로 16년 학창생활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기도드
렸다. 또 그애의 꿈이 실현되도록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도와
주실 것도 함께.
입학식이 끝나고 준상의 손을 잡고 집에 오는 길엔 금가루 같은 햇볕이
부드럽고 찬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준상이가 사립이었던 월계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시어머님은 준상이를
아주 대견해 하셨다.
"아이들 중에 준상이만큼 예쁜 애가 없구나."
"어머님을 닮았어요."
"준상인 광대뼈도 나같이 안 나오고 얼마나 잘생겼는데."
준상이는 손자로는 맏이인지라 할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앤
할머니가 사오신 맛없는 떡도 그 앞에서 싫은 내색 없이 맛있게 먹던 아이
였다. 어머님은 그앨 보며 늘 목소리가 굵고 책 읽는 것을 잘 하니 커서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애는 결국 그 길을 가고 있다.
내 고향 음성엔 뻐꾹새 울고
어느 봄날 점심, 어린 새댁이었던 어머니는 삭정이나무를 때서 녹두밥을
맛있게 지으셨다. 때마침 친정에 온 맏시누와 시어머님께 딱 두 그릇밖에
안되는 밥을 차려드리고 부엌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방에서는 들어오라는 말씀이 없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빈 밥상
이 나왔다. 왈칵 솟는 눈물이 어린 새댁의 볼을 타고 흘렀다.
어머니가 열세 살 우리 아버지와 혼인하신 건 열다섯 되던 해였다고 한
다. 가난한 시골 면장이었던 친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서 다듬이질 하는 어
머니를 먼 발치에서 보시고 체구가 실하다고 혼인을 시키신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은 강원도 영월. 부농이었던 그 지방의 의병대장의 딸로
태어난 때가 20세기의 포문이 막 열리는 1899년이었다. 정든 땅 고향을 떠
나 낯선 곳에 왔을 때 정작 어린 신랑은 새색시만 보면 계속 도망다니며
공부만 했다. 시집살이의 서러움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만큼 어린 신랑에
대한 원망은 쌓여갔다.
다홍치마 날리던 봄바람이 몇 차례 불어가고 나서 아버지는 충주 군청의
공무원이 되셨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지금도 양복에 단정히 넥타이를 매
고 백구두를 신은 멋쟁이로 웃고 계신다. 일기를 쓰셨던 자상한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하여 정신적으로 섬세하셨다고 한다.
그리로 이사해서 어머니는 스물셋의 나이로 큰언니를 낳으셨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렸으니 내리 딸만 셋만 낳다가 셋째는 홍역으로 잃고
넷째에서야 아들인 큰오빠를 보셨다. 그 뒤로는 내리 아들 둘을 낳으셨는
데 잘생겼단 셋째아들 중기를 어려서 잃고 막내인 나를 낳으셨다.
큰오빠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음성으로 전근하게 되었고 우리집은 그
때부터 음성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지금껏 50년을 살아 온 집은 음성
장터에 있었다.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ㄱ자 집이었는데 마당에는 미루나무
가 심어져 있었다.
명필에다가 평생을 관리로만 보내셨던 아버지는 폐가 나빠 돌아가셨다.
그 당시 폐가 나쁜 것은 지금의 암처럼 사형선고와 다름 없었는데 아버지
가 작고하신 후 페니실린등이 나타나 가족들을 못내 아쉽게 했었다.
아버지 장례 때 나는 어머니나 언니들의 곡성이 무서워 아이들과 한참을
놀다가 혼났다. 혼자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곡이 끝나면 돌아왔었다. 그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는 그후로 어린 우리 앞에선 눈물을 보인 적이
없으셨다.
그나마 초기엔 아버지가 남기신 논밭이 꽤 되어 고생을 많이 하지는 않
으셨는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변이 터지고 나서는 다 잿더미가 되
버려 숱한 고생을 하셨다. 그랬어도 어머니는 담대했다. 땅 팔아서 벌린 사
업이 허공에 떴을 때도 목숨을 구한 것에 감사하신다고 하실 뿐이었다.
당시 자손이 없던 작은시아버지를 모시고 큰오빠의 두 자녀까지 여덟 식
구가 살아가는 일은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산 입에 거미줄 칠
리 없다'며 의연하게 생활하시던 어머니와 군청에 복직하게 된 큰오빠 덕
에 우리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마흔 중반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줄곧 흰색과 회색 옷만 입으셨다. 혼
자 사는 여자는 무색옷(물감을 들인 빛깔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유교 정
신 때문이었다. 어렸을 땐 그게 늘 못마땅하고 부끄러워 철없는 짓도 많이
했지만 그 어머니야말로 내겐 영원한 비너스 였다.
어머니의 낙이 무엇이었는지, 그 괴로움이 어떠했을지 나는 알길이 없다.
그래서 배우셨을까, 어머니는 담배를 피우셨다. 가을이면 노란 연초를 구해
서 종이에 말아 피우셨다. 나는 것이 싫어서 가끔 눈살을 찌푸리고 어머니
를 구박하는 말을 하곤 했었다.
'1959년 4월 12일
어머니를 위하여 우리가 할 것이 무엇인가.
환갑에 상을 차리는 것은 우리 세대엔 골동품 냄새가 나는 일이지만 그
형식치레가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 5남매가 해야 한다. 어머
니의 성스러운 헌신 앞에 우리가 이렇게 엉거주춤한 행동을 하는 것은 불
효다. 흐르는 봄에 내가 서 있다.'
환갑을 지내고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나는 조금 간호하다가 시
집을 왔다.
"나는 네가 떠나면 죽을 것 같다."
어머니는 우둔해진 입으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매정하게 어머니 곁을 떠
났다. 집을 떠나던 날 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끝없이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
도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었다.
내가 떠나고 더 약해지신 어머니는 늘 창밖을 쳐다보셨다고 한다. 나는
기도할 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머니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영혼
을 영원한 생명이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유교와 불교 문화권 시대가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것을 나무라진 않으셨
다. 오히려 크리스마스 때 개근상으로 학용품도 타오고 유년 주일학교에서
1등 상을 타오면 대견해 하시곤 했다. 또 무학(無學)이지만 머리가 뛰어나
《現代文學》같은 문예지도 아주 흥미있게 다 읽던 어머니는 내가 드린 성
경책을 곁에 두고 읽으셨다. 나중엔 목사님의 심방을 받고 기도도 하셨다.
그 해 가을, 갈대숲 바람 지나가는 소리는 유난히 스산했다. 지금껏 나의
등골을 때리는 그 바람 소리를 따라 어머니는 그 가을에 떠나셨다.
이젠 떠나신 지 32년, 살아계실 때의 불효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
랴. 오직 회개하고 애통해하며 기도할 뿐이다. 천국에 가면 그곳에 어머님
이 계시리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이다.
진달래 온 산에 불지르고
호두기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도 세상 뜨시고
어진 세월은 흘러
나도 이 봄 뉴욕땅에서
당신의 보리밭 사이에
비단 바람이 되어
떠나려합니다.
덕있고 어진 큰언니 남기는 내명(內明)하고 착했다. 경기도 여주 어느 고
을에 교장인 부농의 며느리가 되었던 언니는 6·25때 남편을 잃었다. 가난
속에서 몸부림치며 4남매를 길렀다. 고생 탓에 덥수룩한 큰언니가 나는 늘
못마땅했고 어린 마음에 부끄러웠었다.
"저 사람은 누구니?"
"우리 아줌마."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 했던 이 말이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는데 이젠 그
얘기조차 할 길이 없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우리집 대문에서 눈물을 훔
치던 그 모습이 내게 남은 큰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30세 젊은 나이에 재혼도 않고, 다른 남자를 사귀지도 않은 채 그 젊음
을 다 바쳐 세 아들과 화가인 막내를 길러냈던 언니. 그 어떤 고생 중에도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나의 큰언니.
작은언니의 이름은 우기다. 또 딸을 낳았다고 '또 우(又)'자를 넣어 지은
이름인데 나와는 17년 차로 지금은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혈육이다. 내겐
언제나 자랑스럽던 언니.
매사에 헌신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발한가하면 예민하고 섬세했던 작은언니
는 열여덟에 달성 서 씨네로 출가했다. 형부는 체신부에 근무하던 아주 미
남자에 이상주의자였다. 자식들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금성사 상무이사, 작은아들은 신문사 편집국장, 막내딸은 고등학교 교사이
자 시인이며 주부로 잘들 살아가고 있다. 지금 그 자식들에게 효도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언니의 못브은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다.
큰오빠 성기(聲起)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나를 키워주고, 공부시키
고, 시집 보내준 아버지 같은 오빠다. 내가 어렸을 땐 '큰오빠를 아버지라
고 할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도 한다.
음성에서 청주로 중·고등학교 6년을 통학한 큰오빠는 영어와 일어를 잘
했다. 또 특별히 문학에 뜻이 있어 '아꾸다가와 賞'에도 여러 번 응모했었
다. 큰오빠를 생각하면 내겐 사무치는 추억이 너무도 많다.
증평에서 시집온 큰올케는 남매를 두었는데 오빠는 올케를 싫어하고 멀
리해서 바로 얼굴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곱고 안존한 큰올케는 울면서 집
을 떠났다. 어려서 중매로 한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은 6·25때 어린 남매
를 모두 병으로 잃었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안 같은 큰오빠는 육군사관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아버지 없는
집의 가장으로서는 움츠린 채 뛸 수가 없었다고 마디마디 안타까움을 실어
말했다. 그래서 일생을 공무원으로 지내다 독재정권을 싫어해 음성 군청
문화원정을 끝으로 많지 않은 나이에 관직을 퇴직했다. 재혼한 큰올케와
다섯 남매를 무던히도 고생시켰던 오빠는 그 뒤로는 일본어로 소설을 쓰며
여생을 포기한 사람같이 지냈다는데, 내가 미국에 간 지 10년 만에 타계했
다.
큰오빠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기는커녕 못한 채 나는 미국에 발이 묶
여 장례에조차 올 수 없었다. 맨해튼 거리에서, 라이오 시티에서, 링컨 센
터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큰오빠를 떠올렸던가.
"오빠, 여기가 유엔 본부야. 여기는 티파니가 있는 휩스에베뉴구, …."
하면서 오빠를 즐겁게 해드르지 못한 것이 결국 엄청난 무게의 아쉬움으
로 남아 버렸다.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작은오빠 흥기(興起)는 가장 친했고 좋아했던 오빠
다. 음성에도 중학교가 있는데 굳이 청주로 여중을 택해서 간 것도 그곳에
서 작은오빠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심천변에 벚꽃이 구름같이 피면 그 터널을 지나 학교엘 다니던 나는
오빠와 자취를 하며 고생도 많이 했고, 내 일기장을 훔쳐보았다며 싸우는
일도 예사였다. 그러나 작은 오빠는 '정기는 똑똑해. 너무 똑똑해'라며 사실
똑똑치도 못한 나를 언제나 자랑하고 예뻐해 주었다.
작은올케 명희화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중앙제약 이사로 일하더 ㄴ오
빠는 《비즈니스 영어의 지름길》, 《단절의 시대》라는 저서와 번역서를
남긴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 오빠가 세상을 떠난 게 벌써 14년 전 일이다. 그때도 나는 뉴욕에서
부고를 받고 하늘을 보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는 것
은 오빠도 예수를 믿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 '이 세상 험하고 내 비록 약하나….'를 늘 불
렀더 ㄴ그 오바를 하늘나라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기에.
나는 아버지가 제천 군청에 재직하실 때 읍에서 10리쯤 떨어진 새터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딸이지만 막내인지라 나는 집안의 기쁨이었다고 한다. 거
기서 음성으로 전근가시는 아버지와 버스를 탔을 때는 내가 박달재를 다
넘도록 그렇게 울어댔다고 한다. 그때가 백일 때니까 내 고향은 아무래도
충청북도 음성이라고 해야겠다. 나는 그곳, 음성에서 자랐다. 그래서 늘 그
곳에 그립다. 그곳은 지금 생각해도 언제나 환하고 찬란하다.
뉴욕 브로드웨이 28스트리트 7번가에서 6번가 사이를 지나가면 꽃 도매
상들이 즐비해 지천으로 쌓여 있는 꽃들을 볼 수 있다. 카바라, 맘, 아이리
스, 버드파라다이스, 양란…. 꿈없는 사람들에 의해 꿈꾸는 사람들에게로
옮겨지는 상품이 되는 꽃들이 도매상점 안에 다발로 쌓여 밖을 내다보고
있다. 새벽 꽃시장을 지날 때면 나는 주술에라도 걸린 듯 어김없이 고향
마을을 떠올렸다. 내 고향 음성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키작은 들꽃들이, 유
년에 뛰놀던 냇가가, 풋풋한 젊음으로 빛나던 친구의 얼굴이 물감 벗지듯
번져오곤 했다. 특별한 이민 철학도 없이 떠나온 고향과 조국, 이 고된 타
향살이 그 몇 해던가.
고향엔 나만이 안다고 여겼던 두 개의 산이 있었다. 성재산과 가엽산. 성
(城)이 있다고 성재산이요, 가엽이라는 분이 거기서 도를 닦았다 해서 가엽
산이었다.
성재산 기슭의 봄눈이 녹으면 버들강아지가 눈뜨고 실개천의 맑은 물소
리가 들리는 곳, 냉이·달래 꽃다지가 논바닥에 빼꼼이 눈뜨면 산과 들엔
온통 봄의 정령들로 충만했던 곳, 다리 밑에서 사금파리를 깨서 접시를 만
들고 모래를 담아 밥을 지을 때면 역귀풀, 강아지풀이 언제나 훌륭한 반찬
이 되어주었던 곳, 내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빨래하던 이름없는 개울들과 맑은 물가의 조약돌,
그 옆의 파릇파릇한 보리밭, 제방에 펼쳐 널은 흰 광목필이며 쏟아질듯 빛
나던 별무더기가 있던 곳. 여름날 금강 상류 옥같이 맑은 물에 몸을 담그
며 그렇게 여인들의 알몸도 안아 주는 마법을 갖은 고을이었다. 거기에 단
오날이면 숙고사 남치마에 분홍 저고리를 새로 해입고 날아갈 듯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었다. 그 고향의 창포 향기가 아직도 나의 몸 한 구석에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철들고 학교에 들어갈 때쯤 어머니는 오십 줄에 들어선 노인이었
다. '엄마'라고 부르는 게 부끄럽게 여겨지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엄마가 색깔옷 입기를 원했지만 회색두루마기에 흰치
마를 고수하시는 엄마 앞에서 그건 헛수고였다. 그래서 툭하면 나는 어머
니에게 심통이 나서 말했었다.
"엄마도 익순이 엄마처럼 분홍 치마 좀 입어봐요."
익순이, 나의 라이벌!
그랬다. 익순이는 강력한 내 라이벌이었고, 내 심통의 대부분은 나의 라
이벌을 의식해 일어났었다. 익순이는 우리집 사랑채에 세들어 살던 집의
큰딸이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위인데도 나와 같이 학교에 입학
했기에 고무줄 넘기나 사방치기 등에서 난 도무지 그애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키가 큰 익순이는 내 머리만큼 높은 고무줄을 흘쩍훌쩍 잘도 넘었
다. 그리고는 그 긴 혓바닥을 내 밀고 나를 놀려대곤 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일시에 만회할 기회가 왔다. 나는 한글을 다 깨치고
학교에 들어간 덕에 국어책이든 뭐든 간에 줄줄 읽어댈 수 있었는데, 그래
서였는지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급장을 시켰고, 그때만큼은 힘으론 도저히
못 당하던 익순이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 때는 그 해에 입학한 신입생 중에 남가 아이나
여자 아이가 첫 인사말을 하게 되어 있었다.
'양지쪽 잔디밭에는 오랑캐꽃이 한창이고 들에는 소울음이 한가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우리들의 재롱을 보여드리려 하오니 칭찬 많이 해
주시고 박수도 많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내용의 인사말을 나는 단번에 외웠다. 하지만 숫기가 없어 끝내 선
생님 앞에서 외운다는 말씀을 못 드렸다. 그래서 몇 주 만에 외운 남자 아
이에게 인사말을 뺏기게 되었는데 내겐 그게 못내 속상한 일이었다. 그 일
은 어머니도 모르셨다. 지금껏 말도 못했던 것이다.
2학년 때엔가는 극장에서 3·1절 기념행사를 했는데 세일러복을 입고
'하이킹'이라는 무용을 했다. 그때 작은오빠도 '아름다워라, 3·1절에 방긋
웃는 겨레의 꽃이여!'라는 3·1절 시를 낭송했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어머
니는 '이럴 때 너희 아버지가 생각이 난다'며 엷은 울음기 어린 눈으로 우
리를 바라보셨었다. 그 젖은 모습은 내 가슴으로 들어와 지금도 불현 듯
눈을 뜨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나도 드디어 S언니를 갖게 되었다. S언니란
'Sister'를 의미하는 약자인데, 그 당시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사랑의 표현으로 S언니, S동생을 삼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여학교 2학년이던 용옥이 언니가 나를 S동생으로 점찍었고, 용옥이
언니의 S언니는 3학년 상희언니여서 우리는 셋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으로 들로 소풍도 다니면서 아주 즐겁게 지냈다.
해당화가 진분홍 아름드리로 피어 있던 어느 하루, 나는 S언니 집엘 놀
러갔었다.
"정기야, 이리 앉아. 머리 땋아 줄게."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서 처음으로 황
홀한 사랑을 느끼며 나느 부끄러워 머리를 다 땋을 때까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녀의 눈은 맑게 빛났다.
"무슨 말인데요, 해보세요."
나는 더듬거렸다.
"저기, 사람들이 연오빠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러던데…."
연이 오빠는 우리 작은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꿈꾸는 나이 열일곱,
그들은 제모 쓴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연오빠보다도 석오빠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전해줄래?"
나의 이 말은 봄바람처럼 퍼져서 급기야 연이 오빠는 나를 불러 그게 사
실이냐고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후로 연이 오빠는 공부도 안 하고 몸져
누워 버렸다. 작은오빠는 연이 오빠를 데리고 제방에 나가서 한 시간을 넘
게 얘기를 하며 마음을 풀어주었다. 달콤하고 연한 첫사랑의 상처는 그렇
게 아물어갔다.
숙이를 기억한다 음성 출신의 내 고향 친구.
그녀와 나는 여학교 때부터 매일 기차에서 만나면서도 매일 편지를 주고
받던 문학 친구였다. 나보다 한 학년 위로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결혼을 해
서도 교사로 있다가 작가가 되었다.
어느 해 섣달 그믐, 그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와서 화가인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맞아들여서 두 딸을 그리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울고 또 울었
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12월에 그녀는 청각을 잃었다고 했다. 그래서 교편
생활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나는 '듣기싫은 세상 소리 안 듣고 좋지않
아!'라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과수원 외딴집에서 사막을 걷는 자의 강인함을 가지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몸부림쳤을까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여전히 저리다. 그 후 25년이 지난 겨울, 그녀는 긴 편지를 보내왔
다.
'남편에게 보낸 두 딸은 모두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았어. 친구와 나는 같
은 시간, 같은 역사 위에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시련을 결코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어. 껍질에서 부풀지 않고 뿌리에서 차올라
오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
고국의 12월은 요란하고 당혹스러워. 달동네 닭장집에 꺼진 연탄불을 보
고 전도하러 갔다가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연탄 한 장 임을 알았어. 누
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것보다 그들에겐 방 한칸에 여덟 식구가 비비고 자
야하는 것이 문제이고 관심사야. 친구는 잃은자, 약한 자를 위해 매서운
시, 맑은 시를 쓰기 바라겠어.'
그녀가 지난해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리는 '한국 문협 세미나'에 참석 차
왔을 때는 '미국 전체가 정기 너로 가득찬 것 같아 미국엘 왔다'며 뉴욕 우
리집에서 하룻밤 묵어갔었다.
나는 신문에서 그녀가 H문학상을 탄 것을 읽었고,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
선 생생한 목소리를 낸 방송도 들었다. 가슴이 벅차고 눈 시울이 뜨거워졌
다. 그 긴 시간의 강 위로 그리움은 봇물처럼 터져 버린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과수원집 딸 동순이.
그녀는 나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같이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3년 동안 한방에서 자취를 했던 친구다. 부유했던 그녀는 인자하신 아버지
가 계셨고, 나는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동순은 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언니가 보고 싶은 사람은 정기언니예요. 병원에 있어요. 오래 못 살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정기언니를 꼭 보고서야 눈을 감겠대요."
죽기 전에 보고 싶은 단 한 사람이 '정기'라고 했다며 전화에 대고 울먹
이던 그녀의 동생 목소리는 아직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때
도 한국엘 올 수가 없었고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 해 가을, 뉴욕 우리집 앞뜰에 꽃이 피었다. 내 친구 동순이는 거기 그
렇게 그리움을 뚝뚝 떨구며 가을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곳엔 언제나 해가 떠오릅니다.
17년 6개월 만에 돌아와 걸어보는 사령부 앞길의 빨간 넝쿨장미는 영화
라고는 할 수 없지만 행복했던 젊은 시절의 그이와 나의 모습을, 그 바람
이 된 시간을 마구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그때 그이가 근무하던 사령부
검은 철책 울타리에도, 우리집 철망 울타리에도 빨간 넝쿨장미가 피빛으로
피어 있었다.
얼마 전에 우리의 34주년 결혼기념일이 지났다.
언제나처럼 레스토랑에서 먹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불쑥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34주년이 되도록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기억하지
못하고 뭘 사줄지도 모르는 남편이건만. 이혼이 아니라도 사별할 수도 있
는 건데 34년간을 헤어지는 일 없이 산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이와 떨어져 있는 걸 견디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유엔 50주년 기념으로 '한국 음악의 밤'을 여는 토요일이었다. 남
편과 나는 융네 앞 커피숍에서 6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서, 남편은
일이 있어 먼저 집으로 갔고 나는 3시 반에 가게문을 닫고 나섰다.
5시까지 천천히 걸어가다 시간이 많이 남아 어느 교회로 들어갔다. 푸른
녹이 뒤덮인 지붕위로 뾰족히 솟은 십자가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1884년
건립'이라고 씌인 돌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나는
마당을 돌면서 예수님께 기도를 드렸다.
겨울이라 빨리 찾아온 어둠 탓에 4시가 조금 넘으니 거리는 어둑어둑해
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의 상점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6시가 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은데다 거리에서 헤매
는 게 아무래도 허전해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갔다.
커피숍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책을 꺼내 읽었다. 그러나 못내 허전하고
빈 것 같은 마음엔 한 시간을 견디는데 10년은 지나는 것 같았다. 웨이트
리스가 몇 차례나 커피를 따라줬다.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왜 이다지도 두
렵고 쓰러질 것만 같은 걸까. 도대체 3시 반에서 6시까지의 시간이 뭐 그
리 긴 시간이라고….
유리창 밖의 부빛은 현란하고 차가웠다. 6시 정각을 지나도 남편은 나타
나질 않았다.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에 피가 졸아드는 것 같아서 몇 번이나
일어났다 앉았다. 밖엔 비에 젖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6시 20분이 막 지나는 순간, 반대편 길에 그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일어나선 차렷한 병사처럼 얼어붙어 서 있었다.
"차 파킹이 어려워서 세 블록 위에다 세웠어."
감색 양복에 흐르는 빗물을 가볍게 털어내며 들어오는 남편은 아무렇지
도 않게 조금 늦은 걸 미안해할 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조바
심쳤는지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나이에
겨우 2시간 반 떠어져 있다고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내가 정말 못난이
일 뿐이었다.
그 일으 나의 삶 속에서 대체 남편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예정된 대답인 듯 남편은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의 90%라는 걸 부정할 여지
가 없었다. 모든 걸 그이에게 맡기고 의지하며 살아온 34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 것이다.
나는 모든 일에 덤벙대고 성격이 급한데다 불평이 많아 작은 것도 참지
못하고 퍼부어대거나 감정이 복받쳐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다. 그에 비해
매사를 관조하고 분석하면서 냉철하게 처리하는 남편은 감정적으로 치우치
는 나를 제어해준다. 온순한 성격으로 쓸데없이 화내는 일도 없을뿐더러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애쓰는 그이는 내대신 해야할 일이라면 심
지어 화장실도 대신 가 줄 사람이다. 평생 동안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내며 이것저것 잘 참아내는 사람, 그이는 나에게는 더없
이 좋은 남편이다.
...
1959년 12월 25일
눈을 맞으며 상무동을 떠난다. 흔들리는 BUS, 옆에 앉은 오빠의 얼굴이
끝내 마음에 남는다. '물망초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은오빠와 나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들인지를 알았다.
"現在는 내것이지만 未來는 정기 네것이야."
이런 말을 하고 돌아서는 오빠는 옆에 있던 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서울 사는 박 중위야. 함께 가."
크리스마스 밤, 호남선 열차의 밤은 깊었고 하늘엔 파란 별이 솟아 있었
다.
박 중위님은 좋았다. 국문과를 다녔고 영어를 잘한다는 배경보다도 그에
게 담겨 있는 예지(叡智)가 좋았다. 오빠와 친할 수 있는 기질이 있는데도
어째서 광주에서 그를 만나지 못하였을까. 충북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나를
플랫폼에 말없이 서서 배웅하던 박 중위님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일기장의 겉표지에는 '國語學 槪論'이라고 써 있다. 이것은 '국어교사
자격시험'을 보러 전라남도 광주에서 고등군사반 훈련 중인 작은오빠에게
가서 묵다가 시험을 치르고 돌아오던 날의 일기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
다.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시를 써온 나는 토인비와 샤프트르 등을 읽으며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거기다 카뮈의 《시지프스의 神話》는 너무 많이
읽어 외우다시피할 정도였다. 그래서였는지 청주의 석학들은 나를 두고 문
학(文學)과 철학(哲學)에 대해 말하면 알아듣는 여자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음성에서는 야학을 했는데 구두닦이, 아이스크림 장사하는 아이,
양복점에서 심부름 하는 아이 등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학교에 못 간 아
이들을 모아 밤마다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청주 고등학교
송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고시공부(考試工夫)를 시작해 대학 4년을 한 해에
할 수 있다는 욕심으로 '국어교사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다 그날, 1950
년 12월 25일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날, 박기창 중위를 만난 것이다.
그는 대위로 재직 중인 오빠와 같은 통역장교 출신으로 함께 훈련을 받
다가 서울 돈암동 집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가는 길이었다. 그날 이후 나
에게 세상은 아주 다른 것이 되버렸다. 깊은 사랑에 바졌기 때문이었다. 하
늘도 땅도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봄이 오기 전 그는 오빠 친구로서 우리집을 방문했다. 휴가 중이었던 작
은오빠가 마침 외출 중이라 자연스레 내가 손님 접대를 하게 되었다. 스피
커 소리 요란한 읍내 극장도 가고 바람을 쐬며 제방도 함께 걸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와 함께 걸었던 걸목이며 방천길을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리움이 너무 진한 아픔으로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박중위는 그
렇게 젊은 나를 뒤흔들어 놓았고, 나의 모든 시간은 그로 인하여 출렁이고
있었다. 지나간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의미해졌고 바로 지금부터가 내 인
생의 새출발인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던 가족드에 대한 배반 같았지만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암내 나는 고양이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나의
모든 생각의 길들은 그이를 향해 뚫려 있을 뿐이었다.
"너는 문학을 해야지, 교사도 해야 하고. 상록수에서 불우한 청소년을 위
해서도 일한다고 하더니 모든 것에 손놓으면 어떻게 하니? 사람이 한 번
뜻을 세우면 끝까지 가야지 중도에서 포기하면 안된다."
이웃에 살고 있던 큰언니의 준엄한 나무람도 있었으나 그때의 내겐 소용
이 없었다. 내겐 그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과 그를 만나는 일 외에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가 있는 곳에만 해가 뜨고 있었다.
박 중위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K사단 사령부에 있었다. 그가 있
는 땅의 흙은 부드러웠고 바람은 향기로웠다. 그 해 4월, 전방부대 옆 보리
밭에 내리는 황홀한 볕과 종달새는 그저 눈부시기만 했다. 20사단이 있던
신산리를 나는 우리 사랑의 성지라고 불렀다. 면회실에서 면회 신청을 했
을 때 전화 속의 그이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렸고 내 가슴은 설레임으로
두근거렸다. 어쩌면 그때 나는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면회소에 나타난 그이
의 단정한 군복, 그 군복이 바로 나의 새애를 매는 끈이 되리라는 것을.
그이의 숙소는 초라했으나 아름다웠다. 그 숙소부터 그이와 함께 살아온
모든 시간과 공간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결혼하고 신혼 살림을 차렸던
정릉의 전세방, 속초 바닷가의 셋방, 의정부집, 신산리집, 첫 우리집이었던
미아리집, 3사단 언덕 위 그이의 숙소, 장위동집, 그리고 리버데일 아파트,
양커스의 우리집까지 모두가 내게는 해뜨는 집이 되었다. 그 길을 따라 그
이에 대한 어려움과 사랑은 이렇게 34년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그이를 사
랑했고 그랬기에 그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내올 수 있
었다.
신혼 초, 그이가 3개월 만에 일본 오끼나와에서 정복학교를 마치고 돌아
오는 날이었다. 둘째형님도, 동생들도 함께 살 때여서 열댓명도 넘는 대식
구들이 모두 모여 그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층방 높은 창문으로 골목을
내다보며 그이를 기다리던 나느 공항까지 마중 나가셨던 맏형님과 그이가
골목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그만 뒷방으로 숨어 버렸다. 그 많은 시댁
식구들 앞에서 그이를 만나는 것이 아무래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모두들
현관으로 몰려나가 인사를 하는데 정작 나는 나타나질 않으니 작은형님이
"춘향이는 숨는구나!"
라며 놀려대 온 가족들이 웃었다.
우리가 정릉에 살았을 땐 큰댁이 있는 돈암동 언덕길을 많이도 오르락거
렸다. 올망졸망한 집들이 모여 있는 고갯길 막바지엔 시어머님이 권사로
계셨던 '동암 교회'가 있고 교회를 지나 조금만 더 내려가면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집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큰형님댁이었다.
을지로에서 건축자재상을 하시던 아주버님(그이의 맏형님)은 참으로 네
동생의 아버님 같은 분이셨다. 무역업을 하시던 시아버님이 일찍 세상을
뜨신 후 그 역할을 대신 해온 큰 기둥이셨다. 또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에
다니는 일을 즐겨하신 큰형님은 시어머님을 잘 섬기셨다.
"큰아범은 한 번도 내 말을 어기지 않는다. 언제나 예라고 하지."
라며 늘 흐뭇해하시던 시어머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어머님은 소박하고 선하신 분이었다. 어머님은 학교도 안 다니셨다 한
다. 이모님(이금전)은 김활란 박사와 함께 이화대학 1기생으로 외국 유학 1
호였고, 제1회 나이팅게일상을 수상한석학이셨다. 또 시외삼촌은 초기 영화
계의 거장으로 그 함자를 딴 '금용 영화상'도 만들어져 있다. 그에 비해 어
머님은 형님을 따라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집에 와서 불때고 밥하는
게 더 재미있으셨다면서 1910년대 개화된 가정의 둘째 따님이셨던 얘기를
자주 하셨다. 그렇게 시어머님은 아들 넷과 외따님을 기르시며 평탄한 일
생을 보내셨다.
네 명의 며느리가 다 그 어머니를 좋아했다. 나도 시어머님은 순수하신
분이었고, 당신의 고통은 내색 하지 않는 분이셨는데, 내가 뭘 못해도 꾸지
람을 하지 않으셨다.
"갈비도 먹을 줄 몰라?"
이게 시어머님이 처음으로 나를 나무라신 것이었다. 시골 공무원의 딸로
자라 그때까지만 해도 갈비를 먹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나는 시집온
첫해 추석, 갈비를 젓가락으로 쑤셔먹는 촌스런 새댁이었던 것이다.
나는 시어머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뭐든지 잘 버리는 나와는 달리 어
머님은 알뜰하셨고 반찬 같은 것도 깔끔하게 하셨다. 서울 음식을 잘하셨
는데 어머니가 담근 김치는 참 맛있었던 기옥이 남아 있다. 또 우리집에
오시면 내가 여기저기 원고를 쓰고 다니느라 오실 때마다 변번이 없었는데
도 말없이 뭘 해놓고 가시는 분이셨다.
그럼에도 나는 시어머님께 잘하지를 못했다. 그이와 나는 군인으로 떠돌
이 살림을 하는 바람에 잘 모시지도 못했다.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맘으로
애쓰며 지낸다면서도 손주들이 보고 싶어 가끔 오셔도 다들 그냥 조금 반
가워하거나, 때로 오래 계실 땐 내심 빨리 가시기를 바라곤 했었다. 그런데
도 시어머님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나를 만나셨던 분이다.
내가 꽤 바뻐 글을 쓰고 다니던 78년 5월, 시어머님이 입원하셨다는 소
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간 세브란스 병원에 어머님은 눈발 같이 흰 머리
칼을 곱게 만지신 채 누워 계셨다. 심근경색증이었다. 평생을 속옷에 때 한
방울 안 묻히고 사신 어머님께 대한 불효가 죄스럽고 안타까워 나느 며칠
을 그 옆에서 지냈다.
아들들이 다녀가고 목사님이 오셨다. 목사님께 어머님 병세가 어렵다고
귀띔했더니 잠드신 모습을 보며 코를 풀면서 우셨다. 자식들보다도 더 애
달파 하시는 목사님, 그분에게 있어 어머님은 개척 교회의 조용한 동지였
던 것이다.
시어머님은 5월에 돌아가셨다.
5월 31일 밤을 어머님 옆에서 보내고 주부백일장 심사 차 경복궁엘 다녀
오니 어머님이 별세하셨다. 그 밤이 마지막이 된 것이다. 불효가 겹치게 된
것이 너무도 애통하였다. 퇴원하시면 식구가 적은 우리집에 모시자고 상의
도 해놓았는데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버린 것이다.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벽제에 갔다. 신록이 우거진 계절, 유난히 새소리가
맑은 날, 어머님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때를 벗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큰형님부터 막내동서까지 우리는 셋째아이를 가진 시누이가 너무 애통해할
까봐 위로하기에 바빴다. 시누이는 어머님이 참으로 많은 사랑을 쏟으셨던
외따님이었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님이 모두 가버리신 터에 시어머님마저 떠나시고 나니 이제 진
심으로 우리를 걱정해 주고 아껴주는 분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완전한 고
아가 된 듯 했다. 큰애 준상이가 중학 3학년, 건상이가 초등학교 6학년인
때였는데도 말이다. 나는일주일간 일절 외출을 안하고 근신하며 지냈다. 세
상의 모든 부귀영화, 기쁨, 슬픔에 대한 허무와 허전함이 물밀 듯 밀려드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지금껏 5월말 경이면 교회 제단에다 꽃바구니 하나씩을 해서 올려
놓는다. 아무도 내가 왜 그 꽃을 올려놓는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시어머니 사진을 방에도, 거실에도 걸어 놓고 그리울 때 마다 바
라보곤 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 내가 이렇게 어려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을 때 나는 그이에게 말했다. 어머
니가 계시면 죽어도 가야 하는데 어머니가 가셨기 때문에 견디고 산다고.
뉴욕의 길거리나 식당에서 머리가 하얀 사람들만 보면 시어머님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모시옷을 봐도 그랬다. 어머니가 모시옷을 많이 입으
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머님은 떠나셨어도 그 아련한 그리움의 무늬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이가 막 한 돌 지난 작은애와 세 돌이 지난 큰애를 내게 맡겨 두고 월
남전에 대위로 참전했을 때 우리는 매일 편지를 쓰고 일주일에 한 번씩 사
진을 찍어 보냈다. 어떤 날은 한꺼번에 열 통씩 도착하기도 했다.
나는 작은애는 업고 큰아이는 걸리면서 편지를 부치러 다녔고, 방 안에
서도 그이의 편지를 가지고 오는 우편배달부의 자전거 소리와 그냥 자나가
는 자전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어느 여름날에는 겨울옷을 꺼내 햇볕을 쬐이느라 빨랫줄에 너니까 네 살
짜리 큰아이가
"엄마, 아버지 옷이다! 아버지 옷이다!"
라고 소리치곤 옷을 만지며 좋아했다. 오랫동안 안 보이던 아버지의 옷
을 보니까 어린 마음에도 그리움이 뭉클 솟은 것이다. 그러던 중 그이가
닌호아 백마부대로 간다는 소식이 왔다. 밤이면 베트공의 습격과 포탄이
빗발치는 곳, 나는 밤마다 아이들을 재워 놓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때 남들은 경제적으로 좀 나아진다는 이유로 서로 월남엘 가길 원했
고, 어떤 부인네들은 남편에게 왜 월남엘 못 가느냐고 닥달하기도 했지만
나는 반대였다. 우리의 일생에서 1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닐뿐더러 돈
이야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또 젊으니까 열심히 벌 수도 있지만 위험이 목
전에 처해 있는 전장에 나가 헤어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남편은 백마부대의 행정과장으로서 근무를 충실히 마치고, 닌호
아에 휴계소도 짓고서 11개월 만에 돌아왔다. 비행기 트랩에서 손을 흔드
는 그이를 보고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 저기 있다!"
소리치는 큰아이의 환한 웃음으로 우리는 다시 모였다.
그때 처음 텔레비젼을 샀다.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
고 큰아이 준상은 제 또래 아이드에게 여기저기 자리를 마련해 주며 목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남편이 흘린 땀을 바탕으로 두 어린 것들과 절약하며 산 보람의
열매는 성북구 송천동에 마련한 조그만 '우리집'으로 영글었다. 좁은 골목
한쪽, 방 셋에 부엌과 마루 한 칸이 딸린 빨간 기와집이었다. 마루에는 친
구가 보세품이라고 사준 레이스 커튼이 바람이 일 적마다 살랑거렸고, 장
독대에선 간장, 된장, 고추장이 맛나게 익고 있었다.
미아삼거리에 가서 마루에 놓을 차단스를 사가지고 짐수레에 싣고 오는
내내 준상이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엄마, 저거 우리 꺼야? 응?"
"그럼 그렇구말구. 천천히 가, 넘어질라."
그애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재차 물어대면서 기뻐했는데 그 달콤한 설레
임을 감추지 못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듬해에는 그곳에서 큰아이가 유치원에도 갔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따뜻한 한 가정을 굳혀가고 있었다.
1970년 ○월 ○일
아침 일찍 순이가 휴가를 떠났다. 순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즐겁다. 나는 주부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빨래까지 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목욕탕에 다녀왔다.
준상이의 취학통지서를 받고 나니 감개무량하다. 우리 준상이가 벌써 학
교엘 가다니….
준상이, 건상이가 TV에서 '황금박쥐'를 보면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상
하의 틈바구니에서 지쳐 있을 그이를 위해 나는 이 가정을 잘 지켜야 한
다.
1970년 ○월 ○일
수반 우엔 백합이 피고 빠알간 칸나도 냉장고 유리컵에서 웃는다. 준상
이가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이 마냥 대견스럽다.
1전도 떼지 않고 봉급을 타다주는 그이와 두 아들이 탈없이 자라는 오늘
이 너무 행복해서 두렵다. 저녁에 남편은 주스와 초콜릿을 박스로 사오고
운전사와 함께 식사했다. 오랜만에 어머님이 오셔서 주무신다. 참으로 따뜻
한 저녁이다.
그랬다. 그때 우리집에네 그런 날들이 숨쉬고 있었다. 햇볕 곱게 들던 우
리 마루엔 〈양지(陽地)에서〉라는 나의 자작시가 그이의 글씨로 씌어 걸
려 있었다. 거기서 어김없이 우리의 해가 떠올랐고 석양이 물들었고 그리
고 또 다시 해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의 조그만 눈 안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마알간 유리창을 닦고
늦가을 바람에 여무는 풀씨 한 알로
뒹굴어
당신의 피로한 옷 자락에
떨구어져
생성의 꽃나무로 싹트는
양지에서
고드름으로 녹아가리.
아이들 그림에 피는 꿈의 색깔은
엄마가 채색한 도화지 위에서
황홀한 햇빛으로 빛나리.
"여보세요? 그래 어때? 모든 것 다 괜찮아?"
남편은 나를 혼자 서울에 보내놓고 여전히 모든 것이 염려스러운 것이
다. 말은 물론이요, 여든 살 노인도 하는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혼자서는 한 발짝도 못나가던 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그이의 그림자인 듯, 마치 그이의 한 부분이라도 된 듯이 그이 없이는 아
무 일도 못했다. 미국에 살면서부터는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더더욱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편은 가끔 내가 문법과 발음이 틀린 말을 주절댈 때면 조심스럽게
"그 말은 뒤로 가야 하고 트기 아니고 쯔야."
라고 교정해 주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편은 나를 펀하게 해 주려 정성을 쏟는다. 또 좋은 남
편이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것임을 새삼 확인시키듯 아이들에게 쏟는 사랑
도 끔찍하고 각별하다.
그이의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지금, 그이와 나에게 똑같
이 찾아왔다 가는 세월과 건망증의 흔적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다.
"그 안경 어디다 뒀어?"
"언제 내가 뒀어요. 난 아니에요."
시간은 그렇게 화살같이 우리의 어깨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 건너야할
난관도 많았던 우리, 그이와 나는 그렇게 시간에게서 당하는 폭력과 배신
을 함께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軍服
시인 지망생 채지심.
그녀는 장위동에서 7년을 살았던 일하는 '누나'였다. 애들이 어려서부터
'누나'라고 부럴 우리 모두 그렇게 불렀다.
해남의 시골 어느 면소재지에서 왔던 그녀가 자주 하던 애기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무엇이 되고 싶냐는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시인'
이 되고 싶다고 손 든 유일한 아이였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가슴엔
시를 쓰겠다는 소망이 품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 집에는 현역 시인과 시인 지망생이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으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한국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누나'도 크게 절망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서 시를 쓰고 있
을지. 아니면 전라도 어느 시골 소박한 촌부가 되어 있을지...
그때 나는 현역 시인으로 뛰고 있는 터라 함께 지내는 데 있어 그녀보다
는 조금 더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힘닿는 데 까지 그 시인
지망생을 돕고 싶었기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문학(文學)이란 첫날밤 순결을 바치듯 나의 모든 순결을 아낌없이 바쳐
야 하는 작업이다. 그의 삶의 방향과 본질과 존재가 전환되어야 한다. 목마
른 사람에게 한 컵의 물이 되는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시다 .시인은
사랑의 감각과 결을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작가란 이웃과 사회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지가 되어야 한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말했듯이 시인은 그 시대의 산소측 정기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경제 전쟁이 지나고 문화 전쟁이 시작 될 때 작가는
21세기의 기수로 그 첨단에서 뛰어야 할 사람이다. 선지자라는 말이 술부
대에서 포도주가 끓어올라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처럼 작가도 끓어올
라 넘쳐야 하는 것이다. 또 시인은 언어와 문자를 뛰어넘어서 있을 수도
있어야 한다.
나의 문학 역정의 시발은 아직 6·25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던 국민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들국화>란 동시를 보신 차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그 글을 낭독하셨던 그때로.
친정 쪽의 식구들 오빠, 언니, 나, 어머니까지 우리 식구는 다 책밖에 몰
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컸으니 나도 문학밖에 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청주여중 1학년, 학교 교정인 '희망원'을 제목으로 '불타듯 끓어 오르는
희망의 그림자는 …'으로 끝맺는 시를 지었었다. 그 시를 보신 장충근 국
어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그걸 낭송하셨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교내 백일장 장원을 했고 신동문, 민선생님에게 시작
(詩作)을 배웠다. 또 대학 4년 과정을 1년에 마치게 했던 '국어교사 자격시
험' 응시에 추천을 고등학교 송병기 선생님께서도 사사 받았었다.
그리고 '푸른문 문학 동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문우(文友)들을
알게됐다. 김문수, 홍기삼이 이 때의 문학 친구들이다. 친구 모혜정과의 인
연은 후에 그녀의 아버님이신 모기윤 선생님께서 내 결혼 주례를 해 주시
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서 '바라춤'으로 유명하셨던 신석초 선생님께
정식 문학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문학 공부를 하다가 나는 그이를 만났다. 그리고 나서는 그이가
나의 전부가 되었기에 나는 문학을 잊고 있었다. 몸 한 쪽이 마비되는 것
같이 아팠고 문득 죽음을 아주 가갑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급해졌고, 다시 신석초
선생님을 찾아가 문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신석초 선생님은 중학동에 있던 한국일보사 논설위원으로 계셨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작품이 되는 대로
몇 편이고 들고 가서 세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님은 한 편 꼼곰하게
봐주시면서 말의 절제를 누누히 설명해 주셨다. 그러면서 한 마디 칭찬을
절대 잊지 않으셨다. 난ㄴ 그렇게 션생님의 덕을 입고 힘을 추스려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은 초등학교 1학년인 준상이의 소풍 때문에 바쁜 날이었다. 일찍 시
장을 다녀와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시인 임성숙 선생님이 자신의
첫시집 《우수의 뜨락》을 전해야하니 경복궁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주셨
다.
거기서 모윤숙 선생님이 주관하는 주부 백일장 생사가 열리는 중이라
200명에 가까운 주부들이 모여 있었다. 임성숙 선생님은 이왕 온 김에 한
번 써보라고 권유하셨다. 소풍 때문에 마음이 급했던 나는 <그이와 나>,
<가을 식탁> 두편을 단숨에 써놓고 남보다 먼저 운전기사와 집으로 돌아
왔다.
"따르릉"
김밥 안에 넣을 시금치를 부지런히 다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뜻
밖의 전화였다.
"장원이에요. 빨리 와요."
경황없이 달려간 시상식장에서 당시 여류문학인회 회장이신 모윤숙 선생
님이 반기셨고 나는 순식간에 수십 명의 기자들에게 둘러 싸였다.
"왜 집에 가셨습니까?"
"큰아이 소풍 때문에요."
"남편의 직업과 근무처는요?"
"보안사령부 비서실장입니다. 육군소령이구요."
"아들은요?"
"아들만 둘이에요."
나는 그때 유행했던 미니 밤색 원피스를 입고 청와대로 갔다. 그리고 당
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 앞에서 당선작<그이와 나>를 낭랑하게 낭독
하였다. 30세 젊은 엄마의 목소리는 수줍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이와 나
우리는 작은 무명 헝겊
그이는 씨줄, 나는 날줄로
인연의 질긴 올실은
올올이 짜여져
바다에서 장미를 가꾸는
역사를 빨아 말리는
물독에서 시름을 퍼 내는
우리 아가들의
구멍난 배내옷을 기우리라.
햇볕과 물이 넘치는
사랑의 골짜기에
스무개 손가락 마다마디 씻고
그이의 진한 목소리에
나는 찌든 옷을 벗고
별을 깔고 앉은
알뜰하고 호사스런
한 송이 목화로 핀다.
다음날 아침 TV에 나가서 모윤숙 선생님과 대담을 했다. 신문이며 잡지
에 일제히 나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나는 미스크리아라도 된 것 같
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송원고를 비롯해 여성잡지 등에서 원고 청
탁이 쏟아졌다.
그해에 모윤숙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문학》誌에서 추천 완료를 받았
다. 어려서부터 계속 문학을 잡고 있었다해도 추천 완료를 받고 시인이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기가 되었고, 주부 백일장이 등단을 추진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그때 추천 완료 된 시는 〈우물〉이라는 시였다.
우물
오래 전 어느 날
나는 우물에 빠졌다.
그 우물 속에도 세상은 있었고
거기서 물을 긷다가
다시 우물에 빠졌다.
거듭 우물에 빠질수록
물결은 서늘하고 깊고 잔잔하다.
오늘 마지막 빠진 우물 속을
헤엄치면서
풀어질수록 커지는
어머님 소리에
아이들 울음에
깨어지는
나르시스의 거울을 잡는다.
우물 밖 신화는 다리를 절며
지팡일 짚고
역사의 뒤안을 거닐고
두레박 끈에 매인 하루가
이끼 낀 돌을 le고
제이, 제일의 우물을 벗어난다.
이옷은 닫힌 창을 열고
집안 가득 사랑을 길어올린다.
이 시는 우물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철학에 대해 쓴 시였는데 나의 생각
은 이랬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우물에 빠져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그때
죽었는데 나 없이도 세상은 똑같이 존재하여 그 세상을 내가 지금 살고 있
는 것이고, 그 뒤 결혼해서도 또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도 여전히 세상이
있다. 우물 속에 세상이 있고 또 있고 또 있고…. 여기 살고 있는 나는 그
러니까 지금 죽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늘 시와 함께 사셨던 신석초 선생님을 존경했기에 여러 군데 편지
를 써서 그분과의 문학 수업을 고백해 방송이 되거나 신문에 게재되었다.
《시문학》지에서 추천 완료한 뒤 찾아뵈니 선생님은 아주 흐뭇해하셨다.
나의 시가 너무 천재적이라 결혼도 안할까봐 내심 걱정했었다는 말씀을 하
시면서 크게 웃으셨다.
국수 한 가락, 회 한 조각을 아무 집에서나 드시지 않는 멋쟁이 셨던 선
생님은 수유리댁을 방문할 때면
"잘생긴 아들을 낳았구나. 어이 운전사도 들어오라고 해."
하시며 운전사에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던 분이셨다.
문단에 데뷔하면서 나는 유명하진 않았어도 왕성하게 글을 썼고 여기저
기 다니면서 시 얘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한 1970년, 그 해를 빛낸 12명의 여성에 들어 《주
간여성》 표지에도 나왔다.
그때 남편은 중령으로 3사단 보안부 대장으로 있었다. 그이의 숙소는 부
대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고, 방 두 개에 마루 그리고 부엌
하나가 딸린 집에서 운전사와 요리사 그리고 당번이 함께 살았다. 당번은
매일 세숫물을 떠 놓고 크림통 뚜껑까지 열어 놓으며 그이를 도왔다.
나는 토요일마다 김치항아리가 든 가방을 들고 눈비를 맞으며 전방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의정부를 지나 운천에서 내리면 그곳에서 신
수리까지 20분 정도 산록을 타고 가야 했다. 특별히 그이에게 일이 있어
나올 때는 그이 차를 탔지만 대개는 버스를 갈아타고 갔다.
신수리의 6월은 유난히 아카시아꽃이 희고 향기로웠다. 전방부대의 이상
기후는 어디나 마찬가지여서 조그만 다방에는 슬리퍼를 끄는 마담이 코먹
은 소리를 내고, 연실 '크레이지 러브'라던가 '서머타임' 같은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 주변엔 군인 가족들을 위한 식품점이 다닥다닥 붙어있느가 하
면, 임시로 지은 집 같은 곳엔 독신 군인들이 투숙하기도 했다.
전방을 지키는 사병들은 당당해 보였다. 후방에서 상사의 구두 끈이나
매주며 빈둥대다가 제대하는 이들보다는 돈도 없고 줄도 없는 그들이 훨씬
장해 보였다. 남편은 높지 않은 직책에 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청탁을 해왔었다.
"우리 아들이 몸이 약한데 일선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강변에서 모래를 파는 건X사단 소속인데 어떻게 부탁 좀…."
남편은 한번도 "네"라는 대답을 한 적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었다. 옳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던….
서울에 있을 땐 사복 군인이었던 남편은 여기선 육군중령 계급장에 군복
을 착용하고 24시간 근무에 들어갔다. 나는 군복을 입은 군인의 아내로 처
신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매번 다짐하듯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전투하는 남편을 가진 아내는 전투하는 태세로 살아야한다. 후방의 느슨
해진 마음가짐과 사치풍조를 본받으면 안되는 것이다. 일선의 군인은 적과
의 싸움에만 마음을 쏟아야지 물질에 마음을 두면 안된다.'
그렇게 나는 남편에게 다려진 군복을 내주며 내 삶의 많은 부분들에 대
해 결단을 해야 했다. 나는 군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가난 하지만 자랑스
런 군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때 내게 사단보안부대 내의 태극기, 꽤 잘 지은 ㄷ자 막사 옆 테니스
장에 있었던 '휘날리는 태극기'는 전국 방방곡곡의 어느 태극기보다 황홀하
고 가슴 뛰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물겨웠다. 그건 그이와 나의, 우리
아이들의, 그 부대원의, 아니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가슴 벅찬 태극기였던
것이다.
사단장 숙소에서 가족 모임이 있었던 날이었다. 사단장 이취임식이 있은
지 꼭 한 주일 후였다. 사단장 이취임식에는 사열 분열이 있었는데 먼저
전 사단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면 새 사단장이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났다. 참으로 한 번쯤은 별을 단 군이 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었다.
'저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있는가?'
그때 나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하는 군복 위의 계급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단장 숙소의 밤은 유난히 깊어갔고 소나무가 많은 숲속의 집은 솔냄새
로 그 정취를 더했다.
제1연대장 황대령이 '보리밭'을 불러제끼고 난 뒤 사단장 부인이 '동그라
미 그리다가 무심코 그린 얼굴….'을 불렀다. 이윽고 그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어느 좌석에서건 노래를 못 불러 찬송가만 했기 때문에 우리 부부 대
표는 늘 그이였다.
군복 차림의 남편은 영화 '모정'의 주제가를 원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Love is a mony splendor thing…'
우리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불렀던 그 노래는 그이의 목소리를 타고 달콤
하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때 진한 국방색 그이의 군복은 사십이 채 안
된 젊은 장교의 쇠사슬이요, 멍에요, 그리고 영광으로 비쳤고 그건 내 가슴
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 평소 그이와 가까이 지내던 후
배 치과의사 이장훈 씨, 신문사에서 일하는 손기상 씨, 인쇄업을 하는 백영
환 씨 세 사람이었다.
이장훈 씨는 우리가 예전에 20사단 신산리에 살 무렵 군의관으로 그곳에
배속되어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가끔은 우리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기
도 했었는데 바로 그가 친구들과 함께 선배를 보러 일선으로 찾아온 것이
었다.
"이곳 공기 한 말만 담아갔으면 좋겠어요."
손기상 씨는 몇 번이나 맑은 공기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이곳에는 많군요."
그곳에서 잡은 꿩고기를 먹으며 그들은 이곳에 대한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다가 《중앙일보》에 있던 손기상 씨가 내게 말했다.
"정말 시(詩) 한 편 주세요. 저의 신문에 싣게요."
《한국일보》 1면에 내는 시만 가끔 썼던 나는 그때 《중앙일보》를 위
해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당신의 軍服〉은 그런 과정들을 겪고서 태어났다. 그때 햇살은 유난히
눈부셨고 누가 심었는지 빨간 넝쿨장미 한 송이가 철망에 기대어 햇볕을
쬐고 있었다.
당신의 軍服(Ⅰ)
당신의 군복에서
새들이 우짖는다.
빨강, 노랑 장미가 피고
아늑한 저녁 종소리가 난다.
山脈이 뻗어가고 바다가 넘친다.
해가 뜨고 달이 진다.
당신의 군복에서
내가 던져져서
아카시아 그늘에서
흙을 털고 아픔을 털어내며
나는 구겨진 군복을 다림질한다.
당신의 軍服(Ⅱ)
당신의 군복에 흐르는 한탄강
솟아있는 오성산
우거진 갈대밭
잠든 10리 비무장 지대
당신의 군복에서 애국가를 듣는다.
영하의 격전지 총성(銃聲)을 듣는다.
단기 4038년의
쓰르라미 울음을 듣는다.
푸울장에서 떠드는
우리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다.
당신의 군복에서
울산공업단지를 본다.
고속도로, 지하철, 빌딩을 본다.
시골집 마당에 핀 사루비아를 본다.
祖國을 본다.
나를 본다.
〈당신의 軍服 Ⅰ〉은 1975년 6월 18일자 《중앙일보》의 「중앙 시단」
에 게재된 것이다. 시작(詩作) 노트에도 '나는 군인의 아내로 주말이면 김
치항아리가 든 가방을 든 채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눈비를 맞으며 일선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시를 씁니다'라고 썼다.
이 신문이 나간 지 이틀 후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어떤 사람이 나
를 찾고 남편의 소속을 물었는데 그분은 당시 별 셋을 단 3군사령관 김종
환 장군이라고 했다. 일선에 있는 남편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3군사령관님
이 남편이 근무하는 사단을 방문하여 남편을 극진히 대하시고, 사단 장교
들에게 〈당신의 軍服〉을 보았는냐고 물으며 그 시를 칭찬하셨다고 한다.
갑자기 집안이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삶
이란 가끔 이런 만남을 통해 달라지기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직후 그이의 사단장이던 권익검 장군이 시집을내도록 도와줘서 첫시
집 《당신의 軍服》을 내게 되었다.
'나는 몇 편의 女史의 詩를 읽고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귀중한 감정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직능에까지 미치고 있는 김여
사의 그 일상의 마음가짐에 나는 범상치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아내를
가진 남편의 행복이 눈이 부시게 부러웠다.
당신의 군복에 내가 던져져서
바람을 막고
비를 막고
총탄을 막으리라
이런 감정은 군인의 아내들이 가진 일반적인 비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군복에서 애국가를 듣고, 울산 공업단지를 보고, 시골집 마당에 핀
사루비아를 보고, 조국을 보고, 나를 보는 아내는 결코 흔하지 않다.'
위에 적힌 서문은 《현대문학》 주간이자 문인협회 이사장으로 계시던
조연현 선생님이 써주셨다. 체구는 작아도 마음이 크시고 어떤 일에도 구
구한 변명을 하지 않는 남자 중의 남자였던 선생님.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
분이 사시던 정릉 골짜기 언덕배기에 누워 있던 말간 햇살이 떠오른다.
서문에서 과찬을 해 주셨던 조선생님은 시집 제목도 지어 주셨다. 약간
연한 벽돌색 표지에 새겨진 '당신의 軍服'이라는 제자(題字)는 그이가 써
주었다.
이 시집은 출판되자마자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육군본부는 물론 각
부대에서 이 시집을 구입했고 3군단과 그 예하부대 식당엔 이 시가 액자로
걸렸다고 했다. 신문사와 잡지사의 인터뷰가 끊이질 않았고 《조선일보》,
《중앙일보》,《한국일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원주에 있는 군인
부인들은 이 시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는 전화를 하기도 했고, 특
별히 육사 11,12기생 계모임에서는 이순자 씨 등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는 소리를 여러군데서 들었다. 군인 부인들은 이 《당신의 軍服》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 또 후일 미국에서 만난 이여주 씨는 주부백일장에서 보았
던 그 여자가 또 이렇게 기막힌 시를 썼구나 하고 놀랐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집은 표지 색깔을 달리하며 2판, 3판 계속 찍혀나갔다. 그렇게 《당신
의 軍服》은 당시 군인세도의 파도를 탔다. 매일 수십 통씩 편지를 받았고
심지어는 일본, 미국, 프랑스에서도 팬레터가 왔다.
한번은 종로서적에 갔다가 내가 《당신의 軍服》의 작가라는 것을 알아
본 점원 때문에 금방 말이 퍼져 졸지에 우리 부부는 거기서 구경거리가 되
었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백 개도 더 되는
눈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수근대었다.
"저 사람이 남편인가 봐."
"남편이 더 잘생겼다."
나는 위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아래로 깔고 지나갔다.
이렇게 그야말로 《당신의 軍服》으로 인하여 세상이 들끓고 있다는 착
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서른네 살 젊은 나이에게는 모든 것이 벅차고
힘겨울 뿐 그 명예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해 10월 25일 한국일보 13층 송현클럽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월계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이던 준상과 건상은 단정히 이발을 하고서 교복을
입었고, 남편은 감색 양복을 그리고 나는 연분홍 바탕에 진분홍 꽃수가 놓
인 드레스를 입고서 손님을 맞이했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조연현 선생님이 축사를 해 주셨고, 오학영 문
우가 사회를, 정의홍 시인이 작품평(作品評)을 해 주었다. 그리고 김지향,
이향아 시우(詩友)가 낭송을 해 주었다.
그외에도 많은 문단 선배들과 동창들, 3군사령관 부인, 사단장 부인 및
여러 군인 부인들이 와 주었고 특별히 그이의 동창인 김용호 장군을 비롯
한 동기 후배들이 구름떼 같이 들어섰다. 또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축하의
꽃다발을 보내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빠, 언니, 조카들도 왔고, 또 흰머리를 쪽지시고
양단 두루마기를 입으신 홀시어머님과 시댁식구들도 왔다. 시어머님은 쓸
데없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남편을 위해 썼다니 다행이라며 글쓰는 며느
리를 인정해 주셨다.
"오신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회비까지 받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글
을 쓰도록 도와준 아이들 아빠에게 감사합니다."
답사를 마치고, 인사를 받고, 사진을 찍으며 나는 온통 화려한 스포트라이
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76년) 봄, 황금찬 선생님을 비롯한 문우들이 일선부대를 견학했
다. 지난번엔 우계숙, 한분순, 서영은 씨가 다녀갔다.
우리 일행은 부대에서 무말랭이 무침에 된장국, 보리밥을 먹고서 최전방
으로 갔다. 비무장지대(DMZ)는 사단사령부에서 비포장도로로 2㎞를 더 가
야 한다. 그곳을 지키는 유소위를 보고 구혜영 선생이 외국 영화에 나오는
배우같다고 하여 한바탕 웃기도 했다.
거기서 앞을 바라보니 기름지고 넓은 땅, 그러나 버려진 땅, 4㎞의 비무
장 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이 있었음직한 자리엔 우물만 보였고 만
개한 복숭아꽃, 살구꽃이 구름처럼 피어 흡사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선
경이었다.
그러나 망원경의 렌즈에 잡히는 북한의 마을, 햇볕, '속도전'이라는 글자,
철책 밑의 움막들, 병상의 얼굴, 나를 닮은 얼굴들은 우리의 탄식을 자아내
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또 금강산을 향해 깔린 경원선 녹슨 철교와 그 위
를 달렸을 끊어진 기차의 잔해는 우리 민족만이 가진 아픔을 여지없이 드
러내고 있었다. 오직 새들만이 가로놓인 휴전선 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통일촌엘 들러 예비군 중대장의 간단한 브리핑을 듣고 나
서 진열해 놓은 것들을 둘러보았다. 갈대숲, 억새풀숲에서 파낸 저울받침이
며 접시, 가위, 호미 등속이었다. 지나 겨울 MP모자를 쓰고 '헌병' 완장을
차고 3.5㎞ 땅굴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가슴이 아팠다.
오천 년 역사가 물려준 땅을 이렇게 간수하다니, 이념이란 대체 무엇인
가? 부모형제를, 자식을, 부부를 떼어 놓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
인가? 아픈 가슴으로 얼어붙은 들꽃의 잔해들이 박혀 들어왔다.
그후로 나는 문예지나 신문, 월간지, 기독교 잡지 등에 수없이 많은 글들
을 기고 하면서 여전히 김치항아리가 담긴 가방을 들고 일선을 오갔다. 아
이들을 서울에 두고 일선으로 향할 땐 아이들 걱정이, 돌아올 땐 그이 걱
정이 끊이질 않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일선에 갔다 돌아오는 길, 가을이 짙게 깔린 어느 황혼녘이었다.
집집마다 백열등이 등꽃처럼 켜지고 있는데 나의 감성은 그 불빛들을 아름
답게만 볼 수 없었다. 어두움에 대한 불안이라 할까, 세상 영광의 무상함이
라 할까. 다시 나를 구속하지 못할 저녁 불빛….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저려왔고, 무엇인가 두렵고 떨렸다.
영예라는 것이 영니에게 어떤 구원(救援)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끄집어 내어 말할 수 없는 깨달음을 받아 안아 내게서 《당신의 軍服》
의 이 큰 잔치는 이렇게 끝났다.
모여서 피는 들국화
볕이 고왔다. 문정희 시인은 점심을 같이 하자며 나를 이끌고 인사동으
로 갔다. 아담하고 조그만 한옥에 들어가 우거지국이 나오는 한정식을 시
켰다. 고국의 흙에서 내 나라 바람을 맞으며 자란 산채와 김치라서인지 특
별히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너무나 맛나서 많이 먹었지만 그 동안 미국에
서 쪘던 살이 더 찔 것 같지는 않았다. '흐린 세상 건너기'라는 찻집에서
음미하는 솔잎차도 별미였다. 이런 것들이 내겐 새롭고 재미있었다.
서울에서 문정희 시인과 함께 인사동 골목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 내겐
각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나에게 남기는 흔적들과 감동은 언제나 굉
장하고 새롭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사로잡히기를 즐거워하곤 했다.
뉴욕, 그곳에 묻어 있는 그녀의 숨결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브로드웨이
나의 일상으로, 그 뜨겁게 내리쏟는 빗속으로 그녀가 걸어 왔고 우리는 끈
끈한 유대를 맺으며 행복했었다. 맨해튼 거리나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문정
희 시인이 10년 전 풍기고 간 형용할 수 없는 시간의 향기가 남아 아직도
나를 감격하게 하고, 그립게 하고, 눈물짓게 했다. 그녀가 그 조그만 손으
로 열어 젖힌 뉴욕의 매력과 신비는 표현할 길 없이 엄청난 부피였다.
브리커 스트리트 끝쪽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도서관 입구에서 노랗고
푸른 무늬의 스카프를 두른 30대 중반의 그녀가 팔랑거리며 뛰어나올 것
같은 착각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그녀가 뉴욕에 유학 중이던 1982년, 나
는 그녀를 각별히 좋아했다.
그녀는 우리집에 왔을 때 고작 장아찌만 대접했는데도 즐거워 했고, 차
를 샀다며 타고 오는가 하면, 피곤에 지쳐 돌아오는 남편을 보면 태연히
공부할 수가 없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녀에게 그리니치 빌리지는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엔 가게 하
나 하나가 신비하고 뜻이 있었다. 우리 가게에 쌓여 있는 싸구려 목걸이
하나에서도 색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감격했고, 조그맣고 예쁜 물건을
보면 '이건 김영태 시인이 좋아하겠다'라고 소리쳤다.
서로 가난했던 때인지라 5달러에 세 편씩 볼 수 있는 극장엘 갔고 거기
서 소련 영화를 보며 울었다. 음식점 대신 커피숍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
면서 마냥 새로워 했었다. 또 베르디의 라보엠에서부터 최진희의 노래까지
우리는 함께 좋아하며 향유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이 빌리지의 공기는 자유 그 자체예요."
"먼지 카페가 있어요. 그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답지오."
"폴란드 영화도 영화의 기본이 완전하고 예술적이에요."
"브리커 스트리트에서 영화를 보았어요. 체코 영화인데 우리나라보다 30
년은 앞섰어요. 일본영화 '라문쇼' 보셨죠. 그것도 50년 전 것인데 얼마나
잘 만들었어요.
지금도 나는 영화를 보면 가끔 시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녀의 감
성은 특별히 내 가슴에 와 박혀서 파문을 일으켰고, 그때 우리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함께 돌아다녔다. 그랬다. 모국어로 함께 시를 쓰는 우리는 함
께 목말라했고, 아파했고, 한 방울의 물로도 해갈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진
지하고 뜨겁게 뉴욕을 누리고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는 뜨겁고 격렬
했다.
그녀는 2년 유학을 마치고서 가족과 함께 뉴욕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두 번쯤 여행을 다녀간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도 뉴욕은 여전히 덜컹거리는 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굴러가
고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 문정희이기보다는 그녀가 품고 있는
시적(詩的)인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녀를 만나면서 내 마음 깊숙
히 주름잡힌 갈피갈피의 얘기들을 모조리 펴보이고 들려주기보다는 그녀의
젊음과 그녀의 감성에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그녀와 함께 하던 짧은 2년에 비해 내가 그 휴유증을 앓는 기간은 너무
길었다. 나는 내가 한 일이나 들은 것 모두를 그녀에게 하나씩 보여주어야
만 직성이 풀렸다. 심지어 뉴욕의 눈보라까지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했다.
무엇을 보든지 문정희 시인이 생각이 났다. 어디에 가서 어떤 물건을 보
면 "아, 이건 문정희 가 좋아하는 물건이야"라고 외쳤다. 함께 듣던 모차르
트며 가수 최진희 노래들을 들으며 그녀와의 추억을 더듬었고, 그리니치
빌리지를 헤매면서 함께 가던 카페들을 바라보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작년엔 그녀가 아이오와에 왔을 때는 비록 전화일망정 많이 만날 수 있
었다.
"세계 각국 작가들과의 생활하고 있어요. 색다른 것이 많아요. 이공기 자
체가 다른 것같이 느껴져요. 오늘은 영시 낭송을 했어요. 자작시예요."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면 시가 쓰고 싶어진다.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
으면 그렇듯이.
그녀는 한국에서 어머님 장례식을 치르고 편지를 보냈다. 편지엔 입관
때 성격책을 넣었다고 씌여 있었다. 성경책을 함께 넣은 건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쓰노라고 했다. 어느 해인가 우리들이 주고 받은 편지가 《뉴욕
한국일보》에 게재되기도 했다. '아아, 뉴욕'이라는 제목으로 쓴 편지였다.
한번은 한국에서 정이용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향수'를 천에 새
겨 보내줬다. 보드라운 천이어서 나는 스카프처럼 매고 다녔는데 노래를
들으며 그걸 보면 고향의 정경들이 아련해지는게 푸근해서 좋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돌아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시간은 마술사다.
지금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는다 해도 우리는 82
년의 가난했지만 황홀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지금 여기 서울 인사동 골목을 누비며 가을 햇살을 쬐고 있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
귀국 후 첫날은 '동서문학상' 시상식장을 찾는 데 너무 헤매는 바람에 10
분이나 지나서야 시상식장엘 들어설 수 있었다.
전숙희 선생님이 많은 참석자들 앞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17년 6개월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너무도 많은 얼굴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시간을 내
어 만나기를 원하는 말씨나 표정들도 따뜻했다.
"잘났다, 잘났어! 정말 잘났어!"
제대로 만날 시간을 못 내겠다고 쩔쩔매는 내게 정연희 선생님은 이렇게
웃으면서 소리치며 웃으셨다. 그 선생님의 막내동생인 소설가 정규택 씨는
뉴욕에서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는 좋은 문우다.
김규화 씨는 뉴욕에서 내가 한동안 잊고 있던 것들을 낱낱이 되살려주고
갔던 분이다. 문예진흥원장 부인이자 월간 《시문학》지 주간인 그녀는 내
게 작가는 작품이 말해주는 것이라며 나의 시가 굉장히 감각적이라고 칭찬
겸 염려를 해주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녀는 부엌에 편지와 봉투를 놓고 갔
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다가 나는 옛날 《문예사전》에선가 그녀가 나와
동갑이라는 것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이것으로 예쁜 옷을 하나 사야지 생
각했다. 김규화 시인은 나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기 때문에 나도 뚱뚱한
몸매에 멋 좀 내보고 싶어서다. 그 어느 틈에선가 생활의 고단함을 몰아내
줄 파릇한 젊은날이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소설가 윤남경 선배는 예전에 한국에 살 때 내게 함께 성경공부를 하자
고 했던 분이다. 둘이라도 하자고 해서 시작했던 성경공부 모임은 내가 떠
나고 난 후 여류문학인 기도회의 기틀이 되었다. 그분들, 김자림 선생, 정
연희 선생님, 또 강유일 씨 등이 뉴욕을 방문하여 함께 기도해 주고 우리
가정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젠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황금찬 선생님
이 웃음을 머금고 다가오셨다. 그리고 가만히 귀띔해 주셨다. 아랑들롱을
닮았던 이화대학의 김세익 교수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고. 그 말씀음 일순
간에 세월의 무상함을 몰고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나같은 며느리를 보고
싶다시던 이범선 선생님이 80년대 초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보내고 슬퍼하
셨다던 사람, 이젠 그가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세실
극장에서 '천당간 사나이' 문인극을 맡아 할 때 그분은 주인공 죄수 역할을
맡고 나는 대포집 여주인 역을 맡아 함께 연극 연습을 하며, 종로2가 '유전
다방'에서 늦도록 이야기 하던 기억들이 그대로인데 말이다.
황명 선생은 17년 동안 늙지도 않은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정의홍이 세상을 떠났어요. 예전에 빼빼마른 정의홍과 약간 통통한 여
성 김정기가 디즈니 다방에 나타났던 생각이 났넜요."
그랬구나. 장위동에선 한동네에 살았고 시(詩)얘기도 많이 했던 정의홍
시인은 이젠 세상에 없구나. .. 덧없어라, 흐르는 시간이여.
무상함의 골은 옆에 있던 김시인의 느닷없는 말로 깊어만 갔다.
"처음엔 초청자의 명단에 김정기 씨의 이름이 없었어요. 그게 의아해서
물었더니 김정기 씨는 오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군요. 그래도 일단 명단에
넣고 사정을 물어보라 하였지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억울하게 제나라에 돌아가지 못하는 작가를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올 수 있는 사람도 못 오도록 명단에서 빼는 그 알량한
충성심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조국은 아직도 나를 버려 두려 하는
가? 그런가? 솟구치는 분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신을 찾는 사람은 100명도 더 돼"
식이 끝나자 임성숙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가까운 사람은 빠지라고 해
서 옆으로 비켜 서 있노라고 하시면서. 서은영, 허영자, 구혜영 선생도 반
갑게 손을 잡았고, 조정래, 김초혜 씨도 오랜만이라고 되뇌었다.
저녁, 우리 '뉴욕문협팀'을 대접하는 선배 문인들의 눈길은 정겹기만 했
다. 그분들은 바로 지난 3월 '문학의 기쁨을 해외 동포와 함께' 라는 기치
를 걸고 뉴욕에서 열린 '문학의 밤'에 오셨던 분들이다.
그분들은 그때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한 대로 뉴욕을 문학의 물결로 출
렁이게 했고, 여러모로 부족한 내게 특별한 배려를 하고 떠나셨었다. 윤석
진 시인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던 그들을 향해 나는 얼마나 가슴 벅차
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를 외쳐 댔던가. 브로드웨이 32번가 모
퉁이에서 어둠이 차를 삼켜버릴 때까지 손을 흔들고 다시 춥고 어두울 뉴
욕 때문에 그 얼마나 휘청거렸던가.
식당 용수산에서 나오는 한정식은 이름도 모를 정도로 다양하고 맛있는
이 땅 산채들의 만찬이었다. 전숙희 선생님은 옆에 앉아 계속 많이 먹으라
고 권하셨다.
호텔 아래층까지 오신 김주영 선생은 밤중인데도 이탈리아 음식중 가장
좋은 것을 시켜 주셨다. 음식이 목에까지 찼다. 나는 몸이 더 무거워지든
말든 서울의 밤하늘 아래서 과식을 하며 이 공기, 이 하늘, 이 바람을 만끽
하고 싶었다. 내가 서울에서 지인(知人)들을 만나 함께 어울려 웃고 있다는
것에 마냥 젖어들고만 싶었다.
그랬다. 조국이, 동료였던 군인, 정치가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을 때, 우
리가 그야말로 폭삭 망했을 때도 변함없이 우리곁에 있어 주었던 나의 문
우들. 나는 그들 곁에서 숨쉬며 머물고만 싶었다.
침묵하는 뉴욕
"김선생님이 책임을 느껴야 해요. 이곳에 문협(文協)이 조직되는데 주축
이 되셔야지요."
1989년 황동규 시인이 뉴욕에 교환교수로 와 있을 때 우리는 최병현 시
인과 어울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최병현 시인이 우리집을 방문하
여 탁자를 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뉴욕 미동부 문인 협회'는 여기서 시작
된 것이다.
모국어권 밖에서 글을 쓰는 것은 자신과의 크나큰 싸움이었다. 사상과
이념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줄기 문화의 강을 흐르게 하려 할
때 그에 따르는 진통과 어려움의 한세기를 거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었다. 그러기에 늘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삶의 풍향계를 돌리는데 긴장을
느추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서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항 글이 나오는 것이
기에.
그러나 뉴욕은 아무리 두드려도 모국어로 글을 쓰는 나에겐 침묵으로 답
할 뿐이었다.
조국에 있는 많은 문우들과 특별히 김만조 선생님 그리고 나를 아껴준
많은 분들은 언어권을 떠난 시인은 물을 떠난 물고기라고 안타까와하며 염
려해 주었다. 그래서 뉴욕 미동부 문인협회를 건설하는 일은 많은 의미가
담긴 일이었다.
우리는 말이 나온 김에 추진하려고 우선 <뉴욕 한국일보>에 있는 김송
희 시인과 연락하여 문협을 창설하게 되었다. 일단은 한국에 계신 이계향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김송희 시인과 내가 부회장이 도기로 합의 되었
다.
이선생님은 연간으로 발행하는 <뉴욕문학>을 네 차례나 내셨다. 여자답
고 정많은 선생님은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고 나 또한 여러모로 그분을 의
지하고 따랐다. 참으로 오랫동안 쌓아온 그분과의 우의를 잊을 수가 없었
다.
내게 비로소 시의 배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릴무렵 많은 시우, 문우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란 하였다. 내 몸보다 더 아끼
고픈 귀한 나의 문우들,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지고 껴안는 귀하고 아름
다운 이름들.
나는 책을 내는 문우들에게 나의 서툰 솜씨로 발문도 써 주었는데, 책을
낼 때 마다 내가 내는 것만큼 기뻤다. 처음으로 쓴 발문은 이종성 의사와
허금행 씨의 수필집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또 나를 아껴주는 문우들의 책
머리와 뒤를 스는 일이 나는 마냥 즐거웠다.
혈육 같이 느껴지는 서량 시인과 또 한 동네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는 윤
석진 시인은 내가 늘 의지하며 지내는 분들이다. 한국 <중앙일보>신춘문
예 소설 부문에 당선한 신상태는 나의 자랑이다. 성공회 신부님 사모인 이
정강 시인은 언제나 틀림없고 예쁜 사람이다. 조라색 옷만 입는 김영란씨
는 나에게 늘 밝은 얼룩을 보여주려고 언짢은 일이 있으면 나를 피하는 신
앙의 자매다. 그 오빠 이봉로 장로(정혜문 시인의 남편)에게도 우리는 한
가게에서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살았다. 그래도 우리에게 얼굴 한번 붉히
지 않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그래서 나와 우리가족은 이 험하고 아픈
나날을 견디어 올 수 있었다.
회원들은 해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 같이 순정을 바치며 문협을
사랑 했다. 그러다 6년이 지ㄴ면서 오래된 회원간에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
했다. 너무 오래된 회장단에 싫증이 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원치도 않은
내가 '미동부 문인협회' 회장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이계향 선생남의 뒤를 이어 4대 회장직을 수락 했을 땐 이계향 선
생님은 이미 문협으로 상처를 입은 후 였기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
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뿐 이ㅏ었다.
"나는 문인협회가 정말 부담스러워, 정말. 나는 사람들에게 욕 먹으며 하
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아. 성격에 맞지도 않고. 회장이란 말 든는것도 징
그럽고 싫어."
내가 이렇게 투덜거릴 때 마다 아란은 잘 하면서도 그런다고 말하곤 했
다. 어쩌면 나는 그말로 위로 받기 위해서 자꾸 엄살을 부리는지도 몰랐다.
하여튼 나는 이 노릇이 부담스러웠다. '나의 가족들에게도 충성하지 못하면
서 무슨 문인협회; 활동을 한다는 것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해 3월 22일에는 우경문화재단 지원 아래 뉴저지 패리사이드 연회장
에서 '문학의 기쁨을 해외의 동포와 함께' 라는 기치를 들고 '문학의 밤'이
열렸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뉴욕의 동포들과 문인들, 그리고 늘 어머니 같
았던 전숙희 선생님, 78년도 중반 여류문학인회 여핸때 한방에 묶었던 김
후란 이경희 선생님, 작품속에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김원일,
김주영 선생님, 그리고 친구 김송이 둥과 가수 홍민, 김광일 씨가 어우러
져 역은 그날 '문학의 밤'은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내가 속해 있던 '미 동부 문인협회' 쪽에서도 출현했고 400명도 넘게 모
인 그 자리에서 나는 회장으로서 한분 한분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가 회장이 되고 바로 한국문인협회에서 개최하는 '한국문학의ㅣ 세계
화'란 심포지움이 있었고, 그날 밤 퀸스아스토리아에 있는 '아스토리아 매
너'에서 '문학의 밤'이 열렸다.
또 같은 날 케임브리지 화랑에서 동시에 개막한 미동부 문인협회 시화전
에는 브루클린의 고모(김재규 부장님의 동생)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왔었다.
나는 김원숙 그림에 두 작품을 냈다. 달밤 장지문에 여인의 그림자가 비
치고 댓돌 위에 흰 고무신이 놓여있는 그림이었다. 목침에 그린 이 그림은
아주 앙증맞았다. '문풍지'라는 제목은 옆에다 글씨를 따로 짜서 붙였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모닥불을 쬐면서 부끄러워 엎드려 있는 그림으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를 부인하는 모습이었다. 진자주색이 노
랑과 어울려 배경에 갈린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이 그림에다가 '나는
베드로입니다'라고 명명하고 시를 써서 역시 옆에 붙였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모닥불을 쬐면서 부끄러워 엎드려 있는 그림으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를 부인하는 모습이었다. 진자주색이 노
랑과 어울려 배경이 깔린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이 그림에다가 '나는
베드로입니다'라고 명명하고 시를 써서 역시 옆에 붙였다.
고모들은 그걸 사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원숙의 그림은 만만한 값이 아
니어서 나는 극구 사양해 그냥 돌아가게 했다. 물론 그런 그림을 사 놓으
먼 가치도 있고 좋겠지만 그댁이나 우리나 그런 여유가 없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나는 결사적으로 말렸다.
맨하탄 브로드웨이 32가, 우리가 전시회를 연 화랑은 한국 사람이 운영
하고 있었는데, 그 화랑이 있는 빌딩도 한국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이 화
랑엔 들어서자마자 이상윤 씨 시가 김주상 선생 그림과 함께 오른쪽 벽에
붙어있어 연이어 순서대로 시들이 붙어있다. 회원들의 시화전은 처음 해
보는 것이었는데, 관람객이 많이 와 주어 그때 우리는 기쁘고 흐뭇한 가운
데조금은 흥분되어 있었다.
나는 뉴욕의 어려운 생활 중에도 해마다<뉴욕 한국일보>의 신춘문예 심
사를 10년이 넘도록 해오면서 많은 후배를 배출했고, '한국어 동화 대회'도
12 년째 심사하고 있다. 또 1980년 신년벽두면 어김없이 여기저기 신년시
(新年詩)를 썼고, 수많은 신문에 창간시를 썼다.
그랬다. 나는 그것이 문학인 양, 동포의 가슴을 여는 일인 양 기를 스며
지켜 나갔다. 군가가 군인의 사기를 높여 주듯이 이민의 고달픔과 어려움
을 담은 시들이 용기와 힘을 줄 것이라 생각하며...
이민의 땅.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비인간 적인 것이 공통화 된 이곳엔
영혼을 감동시키는 이민 문학이 필요하고, 작가에 의해서 이민자의 문화
생명이 유지될 수 았으리라 생각하며.
빛으로 열리는 하늘-새해에
빛의 바다에 배를 띄우며
아직도 뜨거운 우리의 가슴에 때어나는
역사(歷史)의 하늘
은총의 아침이 열립니다.
이 황야의 위에 환희의 언어로 돋아나는
우리들의 풋풋한 약속을
향기로운 새벽에 띄웁니다
참으로 무성했던
지난날의 사라
떠나지 말게 하시고
진실하게 가슴을 여는
새 땅에
처음으로 깨어지는 종소리를 든게 하소서
저희를 흔들었던 수많은 방황
소나기로 대륙을 적시지 못한 이민의 구름
첫 풀잎에
영롱한 이슬 방울로 앉게 하소서
세계는 은밀한 떨림으로
당신의 새 잔을 받으며
정의롭게 살고
저 하늘 동포의 눈물을 씻어줄 1997년
다시 떠오르는 태양 위에
영원한 대지 위에
첫사랑의 황홀한 입맞춤을 허락 하소서.
그러나 아무리 신년시나 기념시를 기고해도 원고료는 거의 없었다. 의사
가 인턴, 레지던트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의사가 되듯, 문인도 많은 공부를
하고 수련을 거쳐온 것인데 이곳 언론은 그것을 나몰라라 했다.
뉴욕에 있는 이불 씨는 비록 철거 당하기는 했어도 'Modern Art
Museum'에 생선을 걸어놓고 그 썩는 과정을 미술의 장르라고 표현할 수
있었고, 또 이창래 씨는 'Native Speaker' 라는 영어 소설로 미국을 온통
들썩들썩거리게도 했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는 얼마나 풍요롭고 우아하던
지 우리는 모두 경탄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전위예술이 범람하는 뉴욕에서 한국마로 문학을 한다고 한들 누
구도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뉴욕의 시간은 그림일 뿐이었다. 그림 속
의 뉴욕에서 나는 사랑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뉴욕은 한국말로 시를 쓰고 한국말로 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서는 아무리 흔들어도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황폐하고 척박한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구도의 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마냥
쓸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냥 외롭지만은 않았다.
'소파 문학상'을 타신 허병열 선생님도 옆에 계셨고, 참다운 문학을 하고
자 몸부림치며 나를 자극하고 있는 수필가 이영주 씨도 옆에 있었다. 그녀
는 날마다 자신이 읽은 책을 정확히 평하여 이야기해 주거나, 그녀의 특별
한 감각으로 음악에 대해 설명해 주곤 했다. 그리고 아란, 소설가 김지원이
있었다, 뉴욕에는.
이 땅에서의 나의 목소리는 비록 모기 소리보다도 가늘고, 우리의 노력
들은 계란을 바위를 치는 형상이라 할지라도 결코 추락하거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참다운 문학은 형틀에 매달려서도 태양만 있으면 행복해 할 수 있
는 바로 그것이고, 죽음의 병 가운데서 구언이 되는 그 무엇이며, 나이아가
라 폭포 물방울이 10만 평의 잔디를 키우듯 생명을 키우는 물기가 되는 것
일지니. 그러므로 나는 문학을 버릴 수 없었다. 문학을 버린다는 것은 내
인생, 내 신앙을 버리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한국문인협회'가 뉴욕에서 심포지움을 열었을 때, 전정한
프랑스말은 그 나라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캐나다 퀘백에서 찾듯이 뉴욕이
한국말이 한국의 영원하 고전이 되리라는 믿음을 가슴에 품은 채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다.
"저희는 조국에서 태어나 조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타향
에서 피는 꽃은 얼마나 아프게 저의 눈을 찌르고 허드슨 강변의 바람은 또
얼마나 세차게 저의 머리칼을 헝클어 놓았는지요. 그러나 낙후된 일본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 전후(戰後)가수 '미소라히바리'같이 때로 절망스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교포들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겠습니다. 문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와 모국어가 얼마나 생명력 있게 자라는가를 보여드리겠습니
다."
워킹 뉴욕커
호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밤엔 명멸하는 네온사인 속에 십자가
의 붉은 빛이 촘촘히 섞여 있다. 조국의 밤하늘에 떠있는 십자가를 바라보
는 일은 뜨겁고 감격스럽다.
아마도 남편은 지금 어둠침침한 가게 뒷방에서 기도를 마치고 밝아오는
밖을 내다보며 물건을 주문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창백한 얼굴로 늘
부족한 은행 잔고를 메꾸려고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애
써 불경기에 찌든 표정을 씻어내려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고국에 와서 많은 선배와 문우들을 만나고, 이 하루 일도
하지않고, 서 있지도 않는 것이 도무지 꿈만 같은데, 남편은 나 없이 또 이
하루 혼자 애쓸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미국 생활.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주일
을 빼고는 단 하루도 쉴 수 없었던 날들.
아침 7시 반,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면 밖의 빛을 일별한 물건들이 나를
반긴다. 모두가 가짜 보석들이지만 빛나기는 마찬가지다. 정혜문 시인네 매
니제 빅터가 불을 켠다. 갑자기 환해진 가게의 반은 우리의 주얼리들이 반
은 가방들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물건두ㅡ에게 눈인사를 하고 또 하루를
지낼 것을 약속하고 뒷방으로 들어간다.
우리 직원들은 모두 와 있다. 남편은 10분쯤 후에 차를 주차시키고 샌드
위치를 사들고 가게로 들어선다. 진회색 바바리로 야윈 몸을 감싸고 들어
서면서 언제나 가방쪽을 바라보며 인사하고는 뒷방으로 들어온다.
뒷방에서 그이와 나는 차례로 조그맣게 기도를 한다. 아이들과 이웃의
정혜문 시인네를 위해. 나를 믿음으로 이끌어준 그 분들은 옆에서 12년 동
안 가방무역을 하며 함께 동고동락을 해온 분들이다. 언제나 고마운 마음
으로 그 가정과 사업과 교회를 위해 정혜문 시인의 그 깨끗한 사랑에 감사
하며 기도한다. 또 김영란 집사의 미소띤 얼굴에서 느껴지는 평화와 그 가
정의 축복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둘이 커피를 마신다. 남편은 크림과 설탕을 넣고, 나는
블랙으로 마시는데 때때로 맛있는 커피는 멀리까지 가서 사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늙음을 확인하곤 한다. 이런것들이 이다
음에 생각날 것 같다. 그러니 왕창 불안하기만 한 삶은 아니다.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중엔 미세스 서가 있다. 그녀는 유학생의 부
인으로 외모도 수려한 뿐더러 활달하고 지혜롭게 우리 상점을 돕고 있다.
신세대를 막 거쳐서 인지 디자인 감각도 뛰어나 일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에 있었으면 아주 다르게 발전 했었을 여성이다. 쑥색 조끼
에다 검정 스웨터를 받쳐입고 정리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선 30대의 젊음이
팔랑거리고 있다.
그녀가 나오고 조금 지나면 스티브가 출근한다. 스티브는 건상이 친구의
동생이다. 그는 여섯 살에 미국에 왔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툴러서 알아든
기는 하되 전문적인 용어와 한글 맞춤법에는 약하다. 그러나 70년대 한국
가요난 소위 '뽕짝'을 좋아할 정도로 한국적인 냄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서 정혜문 시인의 맏딸 지은이가 들어온다.
"지은이가 오늘은 더 예뻐보인다."
나는 싱그러운 젊음이 빛나는 그녀의 보습을 보고 이렇게 인사를 건넨
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간 아버지의 무역사업을 돕고 있는데, 가
슴엔 문학의 꿈을 감추어 두고 가끔 에세이나 단편을 써서(물론 영어로 쓴
다.) 상을 타오기도 한다.
"머리를 잘랐어요. 선생님도 잘 지냈어요"
지은이는 이 나라에서 자랐지만 한국말을 똑똑하게 히고 제 엄마 같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룬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선경과 수경이 들어온다. 바르고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김영란 씨의 딸들이다. 정혜문 시인의 둘째딸 지숙은 화장기 없이도
선명하게 밝은 얼굴로 화가답게 화판을 메고 들어온다. 그들은 후러싱에
있는 정혜문 시인의 집에서 밴트럭으로 함께 여기 맨하튼의 가게로 나와
앞쪽에서 왁자지껄 얘기 하다가 각자 자기의 직장으로 헤어진다. 가끔씩
이렇게 젊음이 물결치고 있는걸 바라보는 일은 일상에 싱그러움을 더해 준
다.
이장로님은 맨 뒤에 들어오셨다. 10년을 넘게 한지붕 아래서 지내며 봐
온 그분은 어렵지만 친밀감이 느껴지는 인자한 분이다.
"오늘은 눈이 올 것 같지요"
"옛날엔 눈오는 것이 기다려지고 좋았는데 미국에 와서는 눈도 아름다운
줄 모르겠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니 이장로님은 그저 웃으셨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장사가 안 되니까요. 눈만 오면 정말 장사가 안
되잖아요, 사람들이안 오니까. 거기다 길도 막히고 집에 쌓인 눈 치우는 일
도 보통일이 아니에요."
정말 뉴욕은 눈이 무섭다. 온 교통을 마비시키는데다 비상령까지 발동시
킬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셔서 제가 만든 찰떡 접수세요."
앞쪽에 앉아 있던 정문혜 시인이 나를 부른다. 그 얼굴에 평화가 넘치는
듯하다. 그리고 김영란씨가 마른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노는 것이 보인다.
"아유, 웬일이에요, 이렇게 일찍…."
보라색 코트, 보라색 스카프, 반지까지 보라색인 그녀는 구두 역시 단정
하다. 그리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오늘 기독교 방송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녹음했고요, 이 꽃은 주문받은
거예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는 또 하루를 시작한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내가 현실적인 생각에 치우치지 말아야지해도
그게 그렇지만은 않아서 가게에 직원이 안 나온다든가 하면 초연해지지 못
하고 안달을 한다. 아주 안달바가지다. 그럴때마다 그들을 생각하며 새로운
마음가짐을 추스리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문혜 시인, 김영란 씨와 함께 어울려 살며 특별히 믿음으로 도
움을 받기도 하고, 시시콜콜 속상한 얘기도 털어놓으며 지내온 시간은 차
곡차곡 쌓여 어느덧 10년을 넘기고도 한참이다. 정문헤 시인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소천하셨을 때는 오히려 정문혜 씨는 담대한데 나는 흰수염의 인
자하신 모습이 떠올라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가게 안에 진열된 주얼리들은 제각각 감정을 갖고 있다. 때로 내가 가게에
서 책을 펼치면 모든 장신구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책을 접곤
했다.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진주 세 줄로 철사로 둥글게 엮은 CHOKER는 신부들에게 인기가 많고,
그냥 한 줄짜리는 들러리나 화동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들은 각기 자기가
제일인 양 뽐내고 있다. 가짜 금귀걸이, 목걸이들도 천층만층인데 돌로 만
든 것부터 크리스탈, 라인스톤 등으로 만든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나름
대로의 자태가 있다.
가게 안의 많은 물건들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50전짜리 플라스
틱 반지를 고를 것이다. 이 반지는 하나씩은 안 팔고 다스로만 파는데 위
에 금가루 같은 알갱이가 샛노랗게 붙은 하트형으로 사랑스럽게 생겼다.
Y자 목걸이는 때묻은 벽에 피곤하고 엉성하게 걸려 있다. 그래도 라인스
톤은 제모습을 드러내며 반짝이고, DARIA 물건들은 관록을 드러내듯 중
후하게 누워 있다. 머리에 꽂는 것들도 가지런히 묶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입구 맨바깥에 걸려 있는 인도제 팔찌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며 몸살을 앓고 있는데 게으르고 늙은 주인을 닮은 듯 힘겹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물건들에 더 애정이 가곤 한다.
제일 밋밋하게 생긴 스페인제 마요카 펄과 이탈리아나 영국제 세트는 진
열장 안에 점잖게 누워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나는 이것들과 10년이 넘도
록 함께 대화하며 지내왔다. 단지 아픈 세월이었노라고만 하기엔 이야기거
리가 너무나 많은 나날이었다.
가게에서 파는 주얼리들은 여러 사람에세 사는데, 내가 돌아다니지를 못
해 주로 우리집에 오는 세일즈맨들에게 산다. 수석을 채집하시는 박두진
씨는 수많은 돌 중에서도 눈과 눈이 만난다고 했는데 주얼리들도 그랬다.
거기에도 만남과 인연이 있었다. 때때마다 마지못해 사는 것도 있었고 물
론 속는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여러 가지 중에서 내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어서 사면 그게 히트를 쳤다. 나는 내 나이나 미감을 무시하고 대담하게
사는 편이었다. 젊은이들이 보고 "이런 게 팔릴까요?" 그러는 것도 가끔씩
샀었다. 그러면 그게 이상하게도 잘 팔렸다.
주얼리쇼에도 갔었다. 그러나 구경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돈이 될 만한
것을 고르는 것이다 보니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주얼리들이라 해도 지루
하고 머리 아픈 일로만 다가왔다. 다른 이들이 장식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이쁘게 보이다가도 막상 그게 상품이라는 생각에 닿으면 하나도 이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꽃장사하는 이들에게 꽃이 야채보다 나을 게 없는 것
과 같았다.
고장나는 주얼리도 많았다. 내 분에 그런 게 잘 안 보였는데 사람들이
종종 뭐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런 건 직원들도 고치고 나도 고치고 어떤
것은 회사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한국에서 오는 건 부실한 게 많았다. 그게
많이 부끄러웠는데 그런 건 한국으로 돌려 보내지도 못하고 그냥 버렸다.
아침 첫손님은 리버데일의 어느 학교 교사라는 흑인 여자였다. 도무지
교사라는 내새라고는 없는 그녀의 갈색 풍뎅이 모양과 라인ㅅ톤이 가득 박
힌 커다란 거미 모양의 부로치 두 개를 골랐다.미세스 서는 봉투에 담아
주며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습관적으로 '바이!'라는 이산를 하며 스팀이 들
어올때마다 조금씩 흘로 고인 물을 길레로 훔쳐냈다. 감자기 마음이 이 낡
은 건물과 같이 쇠약해 가는 것 같아서 입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뒤이어 필라델피아에서 장사를 하는 낸시가 들어왔다.
"낸시야, 너 참 오랜만이다. 한 6달 만이가?"
아니야, 8달 만에 왔어."
가냘픈 그녀의 몸매가 더 작아 보였고, 그녀의 눈은 초첨없이 허공을 향
해 있어서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훑어보면서 물었다.
"낸시, 무슨 일이 있었어?"
"두 가지 큰일이 있었어."
"무슨일이야?"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언제?"
"일주일 전에."
"건강해 보이셨는데…."
낸시의 시아버지는 터번을 쓴 인도 노인으로 꼿꼿한 모습이 아주 당차게
보이는 분이었다. 낸시가 외상을 하고 가면 언제나 당신이 직접 와서는 조
목조목 따져서 갚고 가는 틀림없는 노인이었다.
"충격 때문이야."
"무슨 충격인데?"
"6개월 전에 우리 아들이 총에 맞았어."
"어머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펄쩍 뛰면서 말했다.
"우리 아들 알지. 존, 그 아이가 N.Y.U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었어."
남편이 없는 낸시는 나를 만알 때마다 할아버지를 닮은 존의 자랑을 끝
없이 해댔기 때문에 나는 그애를 한번 보고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보다 큰 키에 눈썹이 검고, 잘 생긴 전형적인 인도 청년 이었다. 피부
가 인더인 답지 않게 백색이어서 황갈색의 어머니와는 아주 다른 모습 이
었다. 어머니가 물건을 사러 올 때마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 다니던 그는
과묵한데다 신사 같은 위엄이 엿보이던 청년 이었다.
"여름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날 도와준다고 가게에 나와 일을 했는데 흑
인 강도 총에 맞아서 그만..."
"어떻게 그럴수가... 너 정신 차려야 해. 그래야 살아."
"나는 그 아이가 가고 6개월을 꼬박 누워 있었어."
그녀는 이제 눈이 말랐는지 퀭한 눈으로 자기가 고르고 있는 인도제 구
리 목걸이만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지금은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데."
" 그게 이상해. 한 8개월쯤 되어서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오히려 이
렇게 일어나 장사도 시작하게 됐어."
그녀는 주섬주섬 물건을 사기 시작했는데 그게 440불이나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닥쳤던 그 동안의 악운들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 추운 겨울날 아
침부터 많은 매상을 올려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면서 그녀를 보냈다.
그리고서 제프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몇 년 동안 오는 단골이지만 빈 밧
스 두 다쓰쯤만 사가기 때문에 거의 말을 않하고 팔기만 하던 손님 이었
다.
구런데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부인이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왜 혼자 오셨어요?"
"다리를 다쳐서 그냥 차에 앉아 있었요."
"많이 다치셨어요?"
"그렇지는 않은데 걷기가 좀 힘들어서..."
할아버지는 부인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는지 자주 밖을 흘
끔 거렸다.
"실례지만 부인이 몇 살이세요?"
나는 어떤 때 내 다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나이 차이를 물으려 이런
질문을 했다.
"일흔 두 살이에요. 나는 일흔넷이고."
"아이고 젊어보이시네요."
나는 속에 없는 말을 내뱉곤 곧 후회했다. 제프의 표정이 말이 아니게
쓸쓸해졌기 때문이었다.
"으리는 결혼한 지 55년이 됐어요."
"어머나 참 아름다운 일이군요."
"아내가 열 일곱, 내가 열 아홉 때였지요. 결혼하고 한달만에 나는 징병
으로 끌려 갔어요. 1942년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에 나는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 왔어요. 참 행운 이었죠..."
제프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50불을 지불하고 갔다.
"마마, 바라또, 바라또."
뒤이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페루 출신 마리아 였다. 마리아
는 40대 노처녀 노점상이다. 때때로 경찰에 물건을 빼앗기고 얼굴에 창상
을 입은 채 물건을 사러오곤 해서 몇 번인가 싼값으로 판 적이 있다. 그녀
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더욱 가엾고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때로는 직원들 몰래 목걸이 몇 개씩을 그냥 집어주곤 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노랗게 물들인 탓인지 생기가 넘쳐 보였다.
"깐또 곰뿌라(얼마나 사겠어요)?"
"우나 도세나(한 다스)"
나는 목걸이 한 다스를 집어주고 24불을 받아서 얼른 금고에 넣었다. 원
래 30불 짜리기 때문에 싸게 팔았다고 직원들에게 구박받을 것 같아서였
다.
가게에선 날마다 이렇게 각국에서 온 이민 동지들을 많이 만나고 헤어졌
다. 요즘은 타이와 보다 차이나에서 온 상인들이 더 많아졌다. 아프리카나
타이티 사람들이 오면 대하기가 수월하고 정이 갔다. 닳고 닳은 미국 상인
들보다 순박한 그 사람들이 많이 사고 적게 사고간에 진짜 인간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몇번 오다보면 달라졌다. 어떤 때는 장사군
들이 닳고 닳아서 내가 말려드는 것 같았다.
여기 맨하튼의 한인 타운에선 88올림픽 이후 한국인의 긍지가 높아진 것
은 사실이다. 그건 뿌듯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인 타운에서 가장 곤혹스러
운 문제로 세금 문제가 있다. 미정부에서 이렇게 저렇게 매기는 세금이 억
울한게 많아서 피해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좀체로 여유를 갖고 장사
할 수가 없었다.
아침 풍경을 보면 마치 마라톤 경주 같다. 유독 한국 사람만이 물건 산
가방을 들고 뛴다. 아침 시간에 맞쳐 가게문을 열려고 뛰는 것이다. 시간이
돈이니 그러지 않을 수 없다. 그게 가슴이 아팠다. 요새는 더 뛴다. 어떤이
는 숨이 끊어질 듯 달려와서 빨리빨리 달라고 했다. 보는 내가 숨이 가빠
천천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 해보면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여기
저기서 물건을 사는 일은 마냥 어쩡쩡하고 초조 하기만 한데 급하기는 하
고 어떡 하겠는가.
인도인들은 제법 여유만만하다. 여기 돈 몇백불만 가져도 인도에 가면
잘살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벌어도 된다. 그런 것에서 연유한 태도일 것
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소상인이 없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몇 사
람씩은 왔었는데 요샌 없다. 중국인 들도 대국인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다.
중국인 도매상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대개 자기 빌딩을 갖고 있고 가게
문도 일찍 닫는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7일 내내 열면서도 일찍 닫지 못한다. 장사하는 데도
서로 경쟁이 아주 심해 이익이 없이 팔다가 서로 망하기도 하고 그런다.
그래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끼리는 서로 얼굴을 안 볼 정도가
지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옆 건물 스패니쉬 레스토랑을 하던 자리에 새 주얼리 가게
가 들어섰다. 그 주얼리 가게로 사람이 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샘도 나
고 속도 상했다. 우정을 갖고 대해지지가 않았다. 거기에선 우리하고 같은
것을 팔면서 더 싸게 팔았다.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이 4불 50전 하는 예쁜
장신구 박스르르 거기서 4불에 판다고 귀뜸해 줬다. 그 사람들은 소매상이
라 내가 그걸 3불 75전에 팔았다. 한국 사람끼린데도 이렇게 치열한 경쟁
의 대상이 되었고 나도 별 수 없었다.
우리 가게에서 가까운 32가를 지나다 보면 그 이름 마느오도 향수를 자
극하는 갖가지 한국 음식들이 즐비하다. 양념 간장에 비벼먹는 콩나물 밥
에 조개시금치국, 된장맛이 일품인 곰탕, 누룽지 밥에 아욱국, 꽁보리밥, 손
칼국수, 쑥국수, 욕쟁이 콩나물국 등속이 후각을 자극하곤 한다.
점심은 보통 시켜 먹는데 배달하는 사람에겐 1불씩 팁을 준다. 우리는
'중원장'의 단골이다. 거긴 한국에 살던 중국사람이 하는 한국식 중국집이
다.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해 종종 한국 음식을
시켜 먹는다. 그런데 한국 음식을 시켜 먹으면 거추장스러워서 어떤 때는
샌드위치 같은 걸로 때우곤 한다. 오래 시켜 먹다보면 이게 그거 같고, 그
게 이거 같은데도 막상 점심 때가 되면 벽에다 짝 붙여 놓은 음식 메뉴를
보고 고르느라 야단이다.
한 동안 사는게 힘들어서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다. 오이, 상추쌈,
콩밥, 고추장 그런걸 가지고 와서 쌈 싸먹고 그러니까 미원도 안 넣고 좋
았다. 아침은 여느 미국 가정과 진배없이 커피와 빵으로 때우고 늦게 끝나
는 날은 닭튀김 등을 사들고 가 저녁으로 먹기도 한
다.
토요일은 어김없이 중국 음식을 시킨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이하고 나는 하나를 시켜 나눠 먹는데 어
떤 때는 그것마저 남았다. 송지영 선생을 따라 몇번 가본 중국 음식점은
맛이 일품이었다. 선생은 우리 가족을 데리고 가서 중국말로 광동 음식을
시켜 맛도 못보던 음식들을 실컥 사 주셨다.
30가와 31가 사이에는 '조이스 강 미용실'이 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
을 때 나는 거기엘 들러 커트를 하고, 화장품도 사고 그런다. 환장은 많이
안 하는데 화장품을 사는 일은 즐검다. 한때 나는 옷이나 화장품 등을 포
기하며 늙고 싶기도 했지만 낳이 갈수록 나도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리도 했다.
옷은 잘 안 사 입는다. 전에는 영국 옷들 같이 고곤적이거나 들꽃 무늬
가 자잘하게 깔려 있는 로라애슐리 옷들을 좋아해 사 입으면 스트레스 해
소도 되고 재미도 있었는데 나이가 든 탓인지 그 재미가 점점 줄어들었다.
내 몸에 익은 옷들만 입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번은 옷을 사러 갔는데 한국인 노부부가 와서 막 옷을 업어보
고 그러는 모습이 아름답기는커녕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늙으
면 거죽으로 드러내는 건 자제해야지 싶었다. 깨끗하고 단정한 것은 좋지
만 옷을 사러 쏘다닌다든가 하는 건 삼가해야지 싶었다. 그러나 신발은 이
쁜 거 사 신는 게 여전히 기분이 좋아서 색동신발도 사 신고 그랬다.
브로드웨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골목은 밤에 살아나는 곳이다. 그곳 남쪽
에는 600개의 화실이 잇다는 소호가 고풍스런 이름의 깃발을 펄럭이며 뻗
어 있다. 추상화에서부터 조각 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끊임없이 전시가
계속되는 갤러리가 즐비한 그곳은 동쪽 빌리지와 서쪽 빌리지로 나위어 있
다.
그리니치는 자유, 그 정장을 벗은 것 같은 홀가분함이 넘치는 곳이다. 영
혼에 통풍을 주는 거리다. 매일 전화통에 대고 내 일상을 끄집어 내어 들
려주는 아란(소설가 김지원)이 사는 거리이고, 10가엔 영문학 박사 최월희
가 살고 있어 더욱 친근한 동네다.
82년도 뉴욕에서 공부하며 나를 뒤흔들고 돌아간 문정희가 좋아하던 길
들,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은 골목골목들이 살아있는 곳. 조그만 영화관,
치즈빵이 맛있는 제과점, 목욕탕 물건만 파는 가게 등 어느 하나 놓칠 것
없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추억의 마을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이에도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를 사랑한다. 거기 조
그만 카페를 사랑한다. 그 카페에서 가끔 잘톰한 재즈를 들으며 어울리지
않게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싶어진다. 멀고 외롭고 복잡한 세상을 어
떻게 지혜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혼자 조용히 생각하고 싶다. 서울서 온 친
구들을 오헨리가 드나들던 카페 '오헨리'나 관광지가 된 카페 '휘가로'에 초
대하여 이 카페엔 재클린 여사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다녀갔다고 쓸데없
는 자랑을 하는 것도 재미다. 나는 조그맣지만 커피맛이 좋고, 네모난 탁자
에 철의자가 안증맞은,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그런 카페가 좋다.
그리니치엔 우리집 단골 손님 롼의 작은 선물가게도 잇다. 흰며리의 늙
은 총각 롼은 전형적인 그리니치 예술가 타입의 남자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가게를 샅샅이 뒤져 그의 눈에 띈 그리니치 스타일의 팔찌며 목
걸이 등을 골라간다. 대개가 약간 화려하고 고전적인 모양들이다. 그는 새
벽 2시에야 가게문을 닫는다고 한다.
빌리지에서 소호보다 더 남쪽으로 가면 금융가인 월스트리트가 있다. 세
계 경제를 주름 잡는 이곳은 '골드맨 싹스', '스미스바니', '메릴린치' 들 굵
직한 금융중권회사들이 있다. 둘째 아들 건상은 '스미스바니'에서 6년동안
일하다 지금은 '골드맨 싹스'에서 컨설팅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이 자랑
스러워 어떤 사람에게 두 번이나 자랑했었다.
그곳은 세계 각국의 인종이 모여 살면서 각국의 언어 문화를 고수하는
만큼 음식도 다양하다. 센트럴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59가 로코코풍의 식당
에선 오랜만에 정다운 사람을 만나 담소를 나누며 맛있는 갖가지 외국 정
식들을 먹을 수 있다. 인도 음식, 태국 음식, 이탈리아나 프랑스 음식에다
가 하다 못해 헝가리나 나이지리아 음식까지 맛볼 수 있는 곳이 맨해튼이
다.
우리는 식당에 다니는 것을 참 좋아해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인도 음
식점에 잘 갔는데, 어떤 때는 카레 냄새가 역겹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주
갔다. 인도는 음식에다 우유를 많이 쓰는데 특히 후식중에 맛있는 것이 많
다.
각국 음식을 대하면서 발견한 게 있는데, 그건 사람은 어릴 때 먹고 자
란 음식을 못 버린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고요한 음식이 있어서 그게
아무리 나쁘다 해도 못 버리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우리식당'이라는 데를 가서는 권총 강도를 당했다. 갑자기
검은 사람 두 명이 들어오더니 각자 권총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들이대었
다. 오금이 떨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네 사람이 갔었는데 우리말고도 몇 무
리가 더 있었다. 강도들은 테이블마다 가서 만자들한테 돈을 달라고 했다.
나편은 200불쯤 뺏겼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기고 나서도 사람들이 태연히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범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킨 걸 못 먹고
나왔다.
40가와 48가 사이에는 다양한 극장들이 많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지 세계최고의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다. 'Cats'나 'The Phantom of
Opera' 같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뮤지컬의 정상들을 말이다.
나는 한동안 10년 이상 공연하는 뮤지컬을샅샅이 관람했는데 그후로는 그
거리에 가는 일이 뜸해졌지만 볼 거리는 여전하다.
링컨 센터에서 볼 수 있는 오페라나 발레 말고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구겐하임, 현대박물관 등에서는 주기마다 나라를 바꿔 예술품들을 전시하
기에 각국의 예술픔들을 돌아가며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다. 또 지하철에
도 시(詩)가 있고, 정거장이나 고원에는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젊음이 있
다. 그곳이 내가 사는 뉴욕이다.
전세계 인종이 모여서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지키려 애쓰는 뉴욕, 39만
명의 대학생들이 있는 학구열이 높은 도시 뉴욕. 플라자 호텔 푸른 녹이
입혀진 지붕에 창연한 햇볕을 바라보며 이 땅의 주역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는 곳. 그리고 맨해튼의 밤 명멸하는 불빛은 또 어떠한가.
그러나 솔직히 나는 그 뉴욕에서 사는 데 두려웠다. 자다가 깨는 새벽이
면 불안의 정도는 더 심해졌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가 있는 걸까 싶었고,
꼭 굶어죽을 것 같은 불안을 늘 갖고 있었다. 뉴욕의 범죄만이 불안한 게
아니었다. 언어, 문화의 차이, 내 땅이 아니라는 것… 그런 원초적인 것들
이 불안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았어도 삶에 대한 주려움은 마찬가지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 핑계를 다 미국에 산다는 것에다 몰아부치는 거였다.
얼마 전에는 우리 직원 한 명의 생일을 모르고 지냈다가 그 다음날 해피
버스데이라고 쓴 케익을 사다가 조촐한 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케이크를
자르고 이런저런 드링크를 마시는데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물간은 생활을 해야 한다. 오지 그릇에 담기면 오지 그
릇이 되고, 크리스탈 그릇에 담기면 크리스탈 글릇이, 양철 그릇에 담기면
양철 그릇이 되는 것다. 백인과 섞이면 백인같이 굴고, 흑인과 섞이면 흑인
같이 굴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의식 속에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마냥 혼한
스럽고 어렵기만 했다. 거게에 화합은 하되 완전 변절은 말아야 한다는 생
각을 더 강하게 하면서 말이다.
이민의 땅, 브로드웨이.
수많은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뛰어다니는 곳. 이 곳은 많은 한국인들
이 고생하고 살면서 기존 문화를 버리고 돈버는 데만 시간을 쓰며 자신을
잃어가는 곳이었다. 자기의 본질을 잃어버리고서 자신의 빈자리를 찾기 위
하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마구 하면서 변해가는 곳이었다.
그래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야채를 다듬고 햄버거를 구울 수 있는 곳이고
삶의 고단함에 대해 이런저런 푸념을 하면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이민자의 귀에 들려오는 내 나라는 미국에서 20년 고생한 걸 다 털고 돌
아가봐야 하파트 전세값도 안되는 곳이라고 했다. 백화점에서 천 불짜리
옷을 만져 보는 교포 여인을 보고 백화점 점원이 그 옷은 미국서 온 사람
은 못 산다고 말해 버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내 조국. 내란 반란죄로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 있는
곳일지언정 그 땅은 여전히 내 땅이고, 내 조국인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내가 120여 가지의 언어가 통용되
는 인종 박람회 나라 미국에 오지 않고 그냥 충청도 땅에서 안주하며 살았
다면 더 놓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랬다면 정치, 경제 ,
문화 모든 면에서의 나의 고정관념이 정장을 벗는 것처럼 깨질 수 있었을
까? 분명 미국에 ㅇ기에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이 있는 것이다. 되돌아 봤을
때 평타하게만 살아온 삶은 남는 게 없을 것이다. 이곳의 삶은 뻥 뚫린 것
같다고 말하긴 하지만, 거기엔 깨어진 발자취가 귀중하게 남아 있는 것임
을 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이민의 정착 과정이 정금같이 귀한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여기며, '오빌'의 순금 같은 나날이 되기를 바라며 지냈다. 비록 몸
은 부서질지라도 그 인종의 숲, 언어의 숲에 기꺼이 파묻혀 지냈고, 때로
그 숲이 우리의 남루함을 가리워 주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해가는 삶속에서, 뉴욕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종과 언어
사이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 어려운 틈에
서 화평을 이룰 때 상대방과 자신의 모두 승리자가 되어 새로운 것을 창출
할 수 있고, 그게 이민의 진정한 재창조라 여겨졌다.
가슴속의 조국
뉴욕의 가을은 유난히 을시년스럽다.
우리 가족이 유배의 땅에서 맞는 가을은 해마다 더욱 시리다. 하루 하루
삶에 허덕여야 했던 우리는 빛고운 단풍을 즐기지도 못한 채 설악산, 내장
산의 불타는 단풍을 그리워만 하였다.
찬서리 위에 우리를 버린 조국이지만 가슴 속에서 조국은 언제나 그리움
이며 사랑이었다. 상처받은 시대의 희생 제물인 그이와 나 그리고 두 아들
은 여전히 낯선 땅 뉴욕에서 서로 껴안고 보듬으며 가을을 맞곤 했다.
뉴욕 특유의 커피향과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로 인해 그해 가을은 물속같
이 맑고 투명했다. 한낮이 되어가 한가하던 거게에 검은 얼굴이 서넛 나타
났다.
"아유 대니스 아냐?"
대니스는 나이제리아에서 오는 여러 자매 중에 막내다. 큰 체구에 얼굴
이 유별나게 검고 반짝이는 대니스는
"이 사람이 그때 결혼한 남편이야"
라며 남편을 어루만지면서 소개 했다.
"나는 미세스 박 인데요. 반가워요."
바른손을 내밀어 데니스의 남편과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은 존이에요 반가워요."
대니스에 비하여 잘 생기고 양반 같은 인상의 존은 태도와 말씨가 아 주
준수 하였다.
"아유 대니스야 너 신랑 잘 얻었다. 아주 미남인데."
나는 존을 바라보고 대니스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나는 어때서? 저 사람이 나를 잘 골랐지!"
퉁명스럽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참, 이 사람은 언니인데, 이름은 애블론이야."
막 뒤따라온 키 작고 땅따름한 여자를 보며 대니스가 소개했다.
"넌 여기 처음 왔니? 우리 가게에서는 처음 본 것 같은데..."
"처음이야, 언니도."
애블론은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생겼는데 큰 눈이 선량해 보였다.
"도대체 너희는 몇 남매냐?"
"열 명인데 부모가 같아"
부모가 같은 남매라는 것은 그들의 큰 자랑거리였다.
"매기는 부르클린에서 미장원을 한다고 했었고, 그럼 다른 형제들은 다
아프리카에 있니?"
"응, 큰 언니가 매리, 그다음이 모니카, 여기사는 매기 그리고 지난번에
같이 왔던 아마, 피이스, 애블론 그리고 오빠는 마크, 월리, 죠지 이렇게 있
어"
대니스는 진갈색 아프리카 의상에 박힌 노란 점들을 ㅎ어 보며 자기 가
족의 이름을 순서대로 불렀다.
"이번에는 애블론이 물건을 많이 살거야. 장사를 처음 시작 했거든."
두 자매는 소쿠리에 귀걸이며 목걸이를 담기 시작했다.크리스탈 종류를
많이 담는 것 같아서 나는 참견하듯 대니스의 옆으로 갔다. 그녀는 애블론
과 자기나라 말로 쉴새없이 떠들고 있었다. 아프리카에는 프랑스의 식민지
가 많아서 불어를 많이 쓰는데, 그래선지 그들의 말은 좀 색다르다.
"너희 부모는 다 살아계시니?"
"응, 금년이 70이야 오늘이 아버지 생일이라 아마는 못 왔어."
"오늘이?"
"응, 오늘이 10월 26일 아냐!"
10월 26일 이라는 말은일 순간에 나를 허공에 부웅 뜨게 만들었다. 나의
눈앞에느,ㄴ 김재규 부장님과 박정희 대통령이 아득하게 나타났다.
여기 오던해 문화원에 가서 뉴스를 볼 때 사열석에서 손을 흔드는 왜소
한 체구의 박대통령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든든해 보였던가. 비록
유신으로 인하여 국민에게 상처와 수모를 주었을 망정, 지혜보다는 폭력과
술수로 정권을 찬탈했을망정, 국민은 울분하며 70년대 정치의 악몽, 그 절
망을 버리지 못하여 미국으로 남미로 많이들 보따리 싸가지고 떠났을 망정
ㄱ는 나에게 조국 이었던 것이다. 그 조국의 기일(忌日), 10월 26일 그분은
결국 죽음으로 영웅이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부신ㅁ 햇살 활짝 퍼지던 오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부
장님은 그 영웅의 뒷그늘에 숨겨져 있다. 지금껏 포승줄에 묶인 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왜 그분이 보통사람이라면 할수 없었던일, 일
신의 영욕을 위해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하셨는지, 그분이 얼마나
이 나라를 사랑했는지…. 또한 우리 가족이 뉴욕에서 갖은 고생을 극복할
수 있게 한것도 바로 죽음으로써 나라를 살린 김재규 부장님의 정신이었
다.
10·26 직전에 윤보선 전대통령 관저에 나타난 군복차림의 방문객에 대
한 기사가 떠오른다. '뒷수습을 해달라'는 메모지와 윤 전대통령이 임종 전
에 '그때 군복차림은 김재규였어.'라고 쓴 카피종이가 쇼케이스 위에서 발
견되었다고 했다.
김재규 부장님의 의거가 우리나라를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었다
면 우리 가족이 희생되고 윤동주와 같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주 시인도 회색감옥에서 순국하면서 가슴
속 조국을 노래하며 나뭇잎 하나에도 별 하나에도 조국을 느끼지 않았던
가.
그러나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의 나날들은 참으로 시린 날들이었다. 아
침마다 강물이 되어 맨해튼으로 흘러가서는 무턱대고 한강물에 빠지고 싶
던 날들, 조국의 흙에 길들여긴 질경이, 도라지, 쑥을 보면서 그 나물들과
입맞추고 싶던 날들,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생길 때마다 가슴속에
조국을 떠올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었던 날들….
그러나 어느새 검은 얼굴들이 정답게 느껴지게 한 세월, 오랫동안 오지
않는 코지나 말타가 종말 보고싶고, 남미에서 오는 손님, 아프리카 손님을
기다리는 날들….
"미세스 박, 왜 그래? 우리 아버지 생일이 10월 26일인데 무엇이 잘못
됐어?"
대니스는 생각에 잠긴 나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기에 다그쳐 묻는 걸
까.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나는 속으로 외쳐댔다.
'대니스야, 10·26이 무엇인지 모르는 대니스야. 너는 모를 것이다. 10·
26으로 인하여 우리 가족이 당한 17년간의 어려움을. 조국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국어가 얼마나 정 깊은 것인지, 가슴속에 조국이 매일같이 얼마
나 얼마나 아우성치고 있는지 대니스야, 너는 모를 것이다. 김재규 부장님
이 누구이며 왜 그분이 총을 쏘아야 했는가를, 내가 울음 울 듯 시를 쓰게
되는지를 대니스야, 너는 모를 것이다.'
나는 속으로만 이렇게 울부짖으며 가을 색깔 목걸이를 대니스에게 사라
고 권했다. 대니스가 오늘 매상을 올려주지 않으면 그이가 더 힘들기 때문
이다.
문밖에 가을이, 뉴욕의 가을이 시퍼렇게 널려 있었다.
다시 뉴욕으로
떠나왔지만 나의 땅은 당신입니다.
건너왔지만 나의 하늘은 당신입니다.
지금 내게 보이는 하늘
그 하늘도 당신입니다.
........
최정자 시인의 노래는 다시 떠나기 위해, 다시 건너기 위해 이곳에 왔던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꼭 일주일 만에 나는 떠난다.
10년이 넘으면 정서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알레르기며 낯설음도 적
어지기는켜녕 더욱 깊어진다는 곳, 서울의 엘리트가 야채 다듬는 일을 하
고, 이민올 때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락이 공장에서 바늘에 찔
려 피로 물들기도 하는 곳, 또 그렇게 살고 나면 떠밀어요 떠나기 싫어진
다는 이민의 땅으로.
스카스데일, 커네티컫, 어빙턴, 로체스터, 핫스데일, 테리타운, 브롱스 등
속의 이름이 이젠 오히려 낯익은 뉴욕, 선명하게 떠오르는 골목들을 끼고
황랴하고 피페한 가슴이 불을 지피는 사람들이 등 비비며 사는 나의 삶터
로.
6·25의 하픔도 4·19의 부르짖음도 그리고 5·16의 변천과 10·26의
그 경악과 혁명도 전혀 모르며 그저 각자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그로인해 때때로 울고 싶도록 샘이 나는 나라.
모든 것을 가질수도 잇고 버릴 수도 있으며, 대통령과 거지가 같은 음식
햄버거를 먹는 나라, 가난하다고 누가 깔볼까 해서 전전긍긍하지 않고 잘
살아도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 나라.
10분만 차로 달려 시내를 빠져 나가면 한없이 넓은 벌에 끝없는 숲이 우
거져 봄이면 꽃, 여름이면 녹음, 가을이면 단풍이 기막힌 곳.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갈 때 할렘을 지나면서 늘 자연림으로 뒤덮여 있는 센트럴파크를
볼소 있는 땅.
쭉 뻗은 5번가엔 고풍스런 청동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들과 싹스백화점,
구치, 티파니 등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한가 하면 30가 웨스트사이드엔 거
의 알몸을 드러낸 백인, 흑인 창녀들이 무리지어 고객을 기다리는 나라. 브
로드웨이의 쇼와 링컨 센터의 음악회, 도서관 뒤안의 차맛보다는 어느 집
에서 강도를 당했고, 어떤 가게에서는 모조품 문제로 주인이 수감을 찼고,
또 누구네는 빌딩을 샀는데 모개지 내기가 힘즐어서 건물은 포기했으며,
매해튼 공립학교는 학교갈 때 몸수색이며 가방 조사를 해서 총기라 없는
것을 확인한다는 등의 얘기를 나누는 거리.
아직도 미국 인구의 3%밖에 안 되는 아시안 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우뚝 서야 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이민 2세들이 의사와 변호사
와 계리사로 쏟아져 나와 자랑스레 가슴을 펴는 곳.
우리 이이들의 2세, 3세의 혈동에 마음이 쓰이고 혹여 자녀가 미국애를
사귀면 어쩌나 하며 눈치만 보는 부모들이 여전히 김치와 된장국을 먹는
나라. 뿌리와 가지가 따로 있어 찢어진 나무로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땅.
음식점, 노래방, 미장원, 선물 센터, 책방 등이 한국말로 쓰여진 32가 한
국인의 거리가 있는맨해튼, 이민의 고달픔이 묻어 있는 브로드웨이. 밥ㅇ을
먹기 위해 륵인애들 손을 잡고, 스패니쉬의 등을 두드리는 교포들이 웅기
종기 모여있는 곳. 고집스레 한국말로 싸우고 한국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불현듯 여기가 어딘가, 어느 땅인가를 되뇌이며 영어도 못라고 한국말도
점점 서툴어 가는 자신이 불안해 지는 땅. 한국 가게 간판들이 즐비한 타
관의 거리에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몇 천 불어치씩 물건을 살 때 양말
하나 사러 갔다가 기가 죽어 나와서 헤매던 곳.
아침이면 도깨비시장에 나타나는 파키스타에서 온 사피, 패들러와 ㅍ인
존, 남미네서 오는 키키, 로사, 아프리카에서 오는 허티, 마마두에게도 정이
붙는 가게, 주근깨 많은 백인 여자 앨리스가 36인치 목걸이를 고르며 새
물건을 갖다놓으로고 투덜거리는 가게. 불행할땐 불행를그대로 두고 일에
매진하면서 견디게 해주는 일터가 있는 땅.
사촌들이 있고 경미의 두 딸이 ABC를 부르며 웃는 나라, 교우들과 옹기
종기 모여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때론 헐뜯기도 하는 곳, 사업을 하는 학
교 후배들을 만날 수 있고, 몇 달에 한 번씩 캔사스에서 뉴욕으로와 우리
물건을 사며 많은 예기를 하는 여고 동창 이정해를 만날 수 있는 땅.
그리고 남편이 있는 그곳, 별이 우난히 푸르른 하늘과 5월이면 영화에
나오는 풍경 같은 정원을 자랑하는 우리집이 있는 곳. 주일 저녁 6시면 어
김없이 미국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오는 두 아들과 된장찌개, 고사리 나물
을 상에 올려 놓고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그립고 그리운 땅.
그러나 장미, 진달래, 나초가 피고져도 여전히 내 가슴숙 조국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땅, 뉴욕으로 돌아간다.
보스턴에 잇는 전직 한국 관리가 교포 내에 변호가, 의사, 박사의 수를
통계내고 있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듣던 화가 김원숙은
"장사도 어렵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도 그것을 딛고 살아가고 있
는 사람, 그 어려움 중에서 웃고 사는 사람, 할 것 다하는 여자, 김정기 같
은 사람이 몇 명인가를 통계내시는 게 더 뜻있는 일일 거예요."
라고 했다며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 주는 동네로 나는 돌아간다.
교포사회에서 문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미동부 문인협괴 회장을 맡아 벅
차하는 나를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전 미주 여선교회 지도자
양성 글쓰기 워크샵에서 3시간씩 당의를 했을 때는 멀리서 온 회원의 눈물
이 내눈에 엉겨붙던곳. 문학적인 분위기를 오랜만에 느껴 본다며감격해서
부둥껴 안던 여인에게 문학의 길을 가라고 어깨를 감싸안아 주며 지꾸 희
미해져 가는 모국어의 색깔을 다시 한번 악착같이 틀어쥐던 땅. '아쿠다가
와 문학상' 수상 작가인 이희성 선생님을 초청해 들은 '남과 북이 모두 내
조국'이라는 말이 절절히 공감하는 회원들이 함께 있는 땅.
오하이오에서 30년간 시를 쓰고 살며 시집을 펴낼 때마다 나를 울려주는
이, 가슴에 등불을 하나 켜고 있던 아버지를 이해하는 아들을 가진 마종기
시인이 숨쉬는 땅.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눈물겨운 내력이
나와 그대에게 숨어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부딪히고 깨어져야만 황홀한 고통을 맛보는 것이라는 그의 노래를 들으
며내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글을 쓰겠다고, 이민의 서러
움을 서로 달래 주고 끌어안겠다고 다짐하던 그 땅. 그리고 매일 한 번씩
전화하며 우리 문학의 숨통을 틔우고 그 전화한 내용을 아침마다 Fax로
보내주는 아란이 있는 땅.
조국의 하늘을 뒤로 하고 나는 돌아간다, 그 땅으로.
서울 방문 닷새째 날 틈을 타서 큰시아주버님 막내 결혼식에 갔었다. 예
식장 밖에서 나를 알아본 큰조카딸 경옥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나를
얼싸 안았다. 시누이는 '언니' 라고 부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누이의
딸들을, 시동생의 작은아들을 어루만지는 나의 손엔 두꺼운 시간이 묻어나
고 있었다. 또 큰 언니의 딸인 조카는 나의 젊은 날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1959년도 일기장을 싸들고와 뭉텅뭉텅 쥐어지는 그리움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우리집이 있던 장위동에도 가봤다. 좁은 마당 한 켠에 자리한 예쁜 화단
은 아스라한 기억의 줄을 끄집어냈다. 아이들의 어린시절이, 그이와 나의
청춘이, 빨간 넝쿨 장미가 부신 햇살 속에서 너울대던 그때가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장위동 고개에서 묻어나는 행복했던 우리의 보금자리 흔적
은 이곳과 저곳으로, 그때와 지금으로 끊어진 필름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두세 편씩 청탁원고를 쓰고 방송과 문예지, 신문사를
누비며 다니던 1970년대의 나의 서울은 어디애서도 ㅊ을 슈가 없었다. 경
북궁, 비원, 압구정동, 장위동 언덕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17년 6개월 만에
돌아온 서울은 내겐 낯선 타향의 거리일 뿐 이었다.
낯설지 않았던 서울의 모습은 슬프게도 통일되지 않은 조국의 아픈 모습
뿐이었다. 뉴욕에서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는 린튼 박사는 북
한의 군부대를 방문하고 나서 말했다. 30세 젊은이가 50세쯤으로 보일 정
도로 마르고 이가 빠진 모습이더라고, 배고픈 군인도 먹어야 할 것 아니냐
고, 그들은 굶고 있다고... 조국엔, 이 땅엔 정치가가 아닌 지도자가 필요할
것일진저.
나는 정치나 경제를 모른다. 다만 한 대한민국 장교가, 한 외교관이, 한
애국 시인이 그리고 그 가족이 바다 건너 타국 땅에서 자신의 일거리를 잃
고 얼마나 춥고 배고팠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우리 같이 내 나라에서 군
사문화에 희생된 사람들이 살아나기를, 신문고를 두드리며 조정에까지 그
절규가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고향 냇가의 방망이 소리, 서울 뒷골목 해장국을 그리워하며 해바라기처
럼 조국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살아가는 500만 해외 동포의 가슴을 헤아려
줄 정부의 깃발이 꽂히기를 말이다.
언니는 내가 떠난다고 용돈을 아껴 노자를 보태주고, 조카들은 처음온
이모를 금칠갑 시킨다. 언니와 공항에 도착하니 둘째 형님이 기다리고 계
셨다. 아랫동서와 시누이가 보낸 해물들을 양손 가득 들고서.
그리고 보문동 사모님이 멀찌감치 나를 벌견하시고 달려 오셨다. 한 손
엔 선 물 꾸러미를 들고, 감색 슈트를 입은 사모님은 엇저녁 뵈었을 때 보
다 훨씬 더 젊고 활기차 보였다.
"사모님 뭐하러 나오셨어요, 이렇게 아침 일찍..."
"미세스 박 한번 더 보려고 왔지. 만나니까 갑자기 ㅇ날 생각이 나고 떠
난 분들이 온 것 같아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사모님의 눈은 내 얼굴에서 남편의 얼굴과 오래전에
떠나신 김재규 부장님의 얼굴을 찾으셨으리라. 그 물기어린 눈 속에 젖은
세월 17년의 영상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사모님의 손을 꼭 잡았다. 맞잡
은 두 손 위로 간절한 염원들이 배었다.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그리고 뉴욕에도 오세요"
"가고 말고, 박실장님께 안부 전해줘요. 그리고 박실장님과 함께 한국에
또 와야지"
나는 사모님을 꼭 겨안았다. 그리고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언니를, 형님
을 꼭 껴안았다. 이 품안에 조국을 안 듯이...
트랩에 오른다.
가야한다.
겨울이면 얼음꽃이 나뭇가지마다 유리같이 피는 나라.
허드슨 강이 녹으면 봄이 오는 나라.
국가(國歌)도 끝까지 외우지 못하는 나라.
남의 나라, 남의 하늘을 향해 가야한다.
서울의 하루로 브로드웨이의 1년을 산다고 해도 모자랄 시간, 겨우 일주
일을 머물다 나는 서울발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17년 6개월 전 그 연둣빛 꿈보따리 대신 낮은 담장에 누워 있던 푸진 햇
살 한 됫박을 퍼담아 간다.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도 못하고 떠나는 서울은 내가 없이도 17년 6
개월간처럼 여전히 아파트가 들어서고, 시집이 쏟아지고, 아기들이 태어나
고, 노인들이 죽어가리라. 도도히 흘러가는 역사의 강 어느 언저리에 하늘
은 여전히 프르고 햇살은 맑으리라. 나의 삶이 숨쉬는 곳, 브로드웨이의 하
늘도 여전히 개이고 해가 뜨고 지듯이.
부웅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나는 어린애처럼 두 다리 뻗고 조국에게 조르고 매달리고 싶다.
"싫어요, 난 가기 싫어요. 안 갈래요."
다시 읽는 글들
필자는 1996년 6월부터 1997년 6월까지 미동부 한국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
했으며, 1988년도부터 《뉴욕 중앙일보》와 《뉴욕 한국일보》에 각각 '생
활 隨想'과 '화요칼럼' 그리고 '수요칼럼'을 기고해왔다. 그 기고문 중 인상
적인 몇 편을 골라 재음미 해보고자 한다.
맨발의 톨스토이
《중앙일보》 1990년 6월 8일 생활 隨想
좁지만 아늑한 나의 서재엔 남창이 있고 창문 밖에는 측백나무와 산철
쭉, 은사시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나뭇잎 위에 달빛이 은은히 머물고 지나며 비가
오는 날은 빗방울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가 문득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
움을 함께 느끼게 해주곤 한다.
몇 년 전 이 집에 이사했을 때 식당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내가 좋아
하는 눈치를 알고 가족들은 기꺼이 나의 공간(서재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을 내주었다.
지난번 집주인이 싸게 팔고 간 통나무 책상도 마음에 들고 고풍스러운
날개가 달린 전등이나 창문 위에 나무로 섬세하게 짜서 단 덧문도 분위기
를 살렸다.
도대체 하루종일 노동을 하는 나의 처지와 분수에 맞지 않는 이방은 이
후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글도 쓰곤 하는 방이 되었다.
도구나 내가 이 방에 앉고 싶어하는 것은 86년도엔가 화가 C여사가 소
련을 방문했을 때 내 생각이 나서 샀다고 전해준 톨스토이의 사진이 있기
때문인데, 그건 책상에서 바라보기 편하게 걸려 있다.
흰 수염에 검은 바지 차림인 노문호가 긴 윗도리에 검정 허리띠에다 손
을 찌르고 자갈과 흙이 섞인 땅을 맨발로 밟고 서 있는 사진이다.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문득 톨스토이의 이 사진을 바라보면 나는 나
이답지 않게 피가 끓어오름을 억누를 수가 없다.
그가 밟고 잇는 그 땅을 그는 영혼으로 졍작하였다. 진리를 사랑하고 형
식의 신을 벗어버린 맨발의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없이 살고 있는 나
에게 사색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세계문학사에 태양처럼 빛나는 그는 위대한 현인이었고 예언자였고 사도
였고 성자였다. 《전쟁과 평화》에서, 《부활》에서, 《안나카레니나》에서
만났던 그는 변함없이 작가의 길, 성도의 정신에 방향 제시를 하고 있다.
영원불멸의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의 사명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타국에
와서 어렵게 살아가면서 우리가 남겨야할 것은 종포의 방황과 아픔과 울부
짖음이 담긴 진실된 작품이다.
그가 이 시대의 이민자로 뉴욕에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썼을까하고 상상
해본다. 기계문명 시대가 짊어진 메마름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
는 인간의 이기심과 마찰, 후머니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에 저항하는 폭탄 같은 붓을 움직였을 것이다.
이 시대에서라면 우부녀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의 사랑은 기찻길에
서 죽어가는 그런 낭만적인 《안나카레니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향기롭고 고귀한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시인
의 허황된 꿈일까.
브롱스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공원이나 어빙턴에 있는 워싱턴 어빙의
집을 고국에서 온 문우들과 방문하면서 우리도 후손에 무엇인가를 남겨놔
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진정 형식과 교만의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흙을 밟고 푸른 하
늘을 바라보았을 때 사회주의 혁명도, 레닌도 막지 못하는 참다운 가치, 영
원한 부르짖음을 남길수 있지 않을까.
초여름의 훈풍에 톨스토이가 맨발로 서 있는 사진 속의 100여 년전 나뭇
잎들이 흔들린다.
흑인친구 윌리
<중앙일보>1990년 10우러 13일 생활 수상
윌리는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일한 흑인 친구다.
우리가 그 가게를 정리하고 헤어진 지 수삼 년 동안 서로 자세한 소식은
모르고 지냈지만 풍문에 그는 부르클린 어디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는 그 당시 저녁 쿡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내와 두 아들을 둔 가장이었
다. 한마디로 착하고 참된 친구였다.
남미 계통의 약삭바름에 없는, 친근한 미소를 지닌 잘생긴 흑인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에 우리 가족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위리를 가장 그리워하
면서 생각만 해도 흐뭇해 했다.
장기화로 치닫는 처지애브뉴 사태를 보면서 나는 문득 윌리가 솥뚜껑만
한 손을 불끈 쥐고, '가게 문을 닫고 여기서 떠나라!'고 외치며 데모 대열에
서 있는 것을 상상하며 오금이 저리는 통증을 참을 길 없었다.
위릴는 우리의 충복이었던 반면에 약에 위하여 며칠씩 못 나올 때도 있
었다. 그는 변명하거나 이해를 구하기도 전에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무언의 언어였다. 우리는 그를 이해하고 용서했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얼마나 슬기롭고 부지런하고 치열한 단일 민족인지를! 그리고 우
리는 이곳에서 여명기의 맥박으로 살고 있고 약물을 먹어가며 안일하게 살
아가지 않는 것을... 더구나 한인 사회는 기다릴 수 있는 자만이 이긴다는
조상이 물려준 순리의 정신을 이어바다 참고 견뎌오면서 오히려 흑인 사회
와의 유대 강화만을 촉구해왔던 것을!
우리는 호흡과 피가 같은 한민족으로서 살점 한 점 한 점과 혼을 쏟아
키운 그 사업을 흑인들의 힘에 모려 포기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동
안 우리의 인내심만을 보여왔다면 이제는 우리의 드셈을, 우리의 결속을,
우리의 빛남을 윌리의 잘생긴 검은 얼굴 앞에 드러낼 때가 온 것 같다.
텔레지전에서 나오는 얼굴들은 낯선 이방인들이 아니었다. 얼키고 설킨
관계들을 갖고 있는 우리 친구의 모습이었다. 딘킨스를 후원하고 지지했듯
이, 월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듯이 이 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누리는
친구로 대화를 받아 주길 원한다, 우리 가족이 브루클린 처치애브뉴에서
위리를 만나 서로 용서하고 관용하는 눈물의 화해를 하는 꿈을 꾸는 것은
나의 센티멘탈일 뿐일까.
우리는 힘 모아서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한에서 '보이콧'의 소음속에 떨
고 있는 형제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힘차게 우리
의 친구 윌리에게 다가가서 9개월간 흔들렸던, 그리고 아팠던 매듭을 지어
야 하겠다. 가을이 가기전에 희 이를 드러내고 웃는 윌리의 뉘우침이 보고
싶다.
우리의 하늘
<중앙일보>1990년 3월 9일 생활 수상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 중에 <하늘>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세 식구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의사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그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속에 집어넣는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그리고 박노해의 겁나는 하늘은 관리들이고, 검은 하늘은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이라 했다.
그는 현실 속의 허위와 맞서서 숨막히는 현장의 빼앗긴 삶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외침을 이 시 안에 몰아 넣었다.
이역만리 남의 땅에 와서 몸의 익지도 않은 노동을 해가며 살아야 하는
우리 교포의 하늘은 무엇일까 하고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물론
사장님도, 의사 선생님도, 또 돈 많고 힘 있고 높은 어른들도 두렵고 겁나
고 검은 교포의 하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포에게는 더 겁나고 두려운
검은 먹구름의 하늘들이 수없이 많다.
첫째로 언어 장벽이라는 길들여지지 않은 답답한 하늘이다. 보통말은 불
편 없이 하다가도 싸움을 한다든가 아니면 아주 전문적인 것을 설명해야
할 때 우리는 가습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익혀온 내 나라
혼과 피가 담긴 언어를 바꾸기도 ㅇ거니와 이 나라의 풍습이 담긴 은어나
전문어 앞에서 망연자실할 때가 많다. 여하튼 영여는 교포의 하늘이다.
돈보따리를 싸들고 오지 않는 한 노동자인 우리에게 다음에 두려운 하늘
은 건물주라 할 수 있다. 사업을 하기엔 너무나 생경한 현실적인 모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여 가게가 자리잡을만 하
면 집세를 배로 올린다든가, 당치도 않게 나가라고 하는 유대인 랜드로드
의 맑은 안경 속 날카롭고 매정한 논매는 가히 겁많은 교포의 겁나는 하늘
일 수밖에 없다.
하늘은 또 있다. 이민국 에서 영주권 인터뷰하는 흑인 여자는 우리의 검
은 하늘이다. 쓰러지지 않는 정신으로 뼈 아프게 일하는 봉제공장이나 식
당, 야채가게 등을 덮쳐서 불법체류자를 조사하고 잡아가는 이민국 직원은
우리의 피빛 하늘이다.
교포의 하늘은 또 많다.
불친절한 영사관의 높은 뉴욕에 거주하는 교포는 더욱 멸시하며 거지 취
급하는 내 나라의 언론인이나 김포공항 세관일들..
우리는 이곳에서 스패니쉬, 흑인, 콧대 높은 백인들에게 물건을 팔고 사
며 그들으 ㄹ하늘같이 모시고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조국의 자식인 관리
들을 하늘이라 일컬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낯선 따에 뿌리내리기 위하여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그러나 우
리는 첨예한 모순들과 맞닥뜨려 찢어지고 갈라진 구심점을 통합하여 달구
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가 이땅에서 받아야 하는 수모를 극복하고
여기에 흘린 땀방울을 돌려받기 위해서 뜨겁게 힘을 모아야 한다. 교포의
재력도 합쳐져야 함은 몰론이고, 문학, 예술, 언론도 각각의 힘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것이다.
우리의 두렵고 겁나고 검은 하늘은 우리 교포의 단합과 사랑의 힘으로
푸른 하늘로 변화하고 기적이 이 아메리카 뉴욕 땅에 전개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서로의 푸른 하늘이 되기를 바란다. 골병들고 짓밟혀도 끝내 푸른
하늘로 펴쳐지는 한민족의 민족혼을 뉴욕 하늘에 나부끼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뉴욕에 피는 들국화
《중앙일보》1981년 가을 유필
어둠이 조금씩 걷히는 새벽 6시, 가을비를 털며 셀비아가 가게로 들어선
다.
"블랙커피, 노 슈가."
조금은 여윈 얼굴에 윤기 잃은 눈동자 거기에 화장이나 차림새도 수수하
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첫손님인 그녀에게 커피를 주자 조금 웃으면서 그
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오랫동안 같은 시간에 우리집을 찾는 그녀는 거리의 여자인 듯도 하다.
그녀가 태어난 고정, 살아온 세월 아무 것도 나는 모른다. 단지 그녀의 얼
굴이 희다는 것과 동정심이 많아서 소리를 질러대는 흑인 거지에게 옷을
주었다는 것 등을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표정이 천하지 않다는
것뿐.
그런데 오늘 아침, 체념 섞인 미소를 띠고 들어서는 그녀에게서 나는 내
고향 가을 언덕에 피던 들국화를 보았다. 짙푸른 가을 하늘을 이고 선들
바람 속에서 고고히 피어 있던 연보라빛 들국화를 !
그녀가 고상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무엇인가 삶을 비켜낸 것 같은
모든 것을 버릴 것 같은 욕심없는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그런 그녀
에게서 문든 나의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이것은 가을이 주는 예민함과 값싼 감상은 아닌 것 같다. 대리석에 정을
치듯이 피땀을 흘려가며 온 정혼을 기울여 단지 살아보고자 몸부림쳤던 나
의 뉴욕 생활. 사무침도 한도 희미해질 정도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던 나
날, 나를 취하게 할 시도 눈물도 떠나가던 바짝 마른 정감, 이 해에 한국에
서 가깝게 모시던 두분의 문단 선배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먼
하늘을 몇 번 올려다 보았을 뿐, 애통함도 빛바랬던 나의 감정 세계.
이 가을에 나는 다시 나를 찾고 싶은 것일까.
옛날처럼 아름다운 언어와 사랑의 영혼을 다 바쳐서 미치도록 취하게 할
시를 쓰고 싶고, 낙엽 색깔의 블라우스와 립스틱과 또 같은 빛깔의 매니큐
어를 바르고 멋 안 나는 몸매에 멋도 내고 싶다.
보무의 고생은 알지만 도대체 이렇게 현실적이고 가라앉은 상업적인 분
위기에 뛰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 나의 젊은 두 아들에게 엄마의 신경통이
나 호소하던 걸 참고, 달콤한 음악이나 그림이나 시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은 웬일일까? 가을 탓일까?
또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는 친정어머니와 충청도 고향산천을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의 부도는 오직 효였음을 새삼 깨달으며….
나의 어린시절 할머니의 밥상에서 마음대로 반찬을 집어먹지 못하던 것
은 바로 어머니의 효도 때문이었다. 맛있는 것을 자식에게 먼저 주는 지금
의 가치관과는 너무나 다른 우리 어머니는 귀여운 막내딸인 나에게 당신의
시어머님의 반찬을 집지 못하게 하셨다. 할머님이 밥상을 물리시고야 우리
가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서 이 가을에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된
두아들을 보며 잘못 비뚤어질까 염려하면서 새삼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가을볕이 내리쬐던 고향 신작로, 들에 익던 콩, 수수, 참깨 등 가을 곡식
들이 오늘따라 그립다. 고향이, 조국이 나를 외면하고 나를 버렸을 때 나는
이 타관에 들국화로 피었다 찬서리에 져야 하는가.
마른 나뭇잎과 시퍼런 한 쓸어내는
바람의 울음
흔들리는 타향
찬서리 위에 나를 버렸던 그대
그래도 그대 찾아 헤매이다
짓밟혀 깨어진 가을 달
이것은 졸시 〈가을 뉴욕〉중의 몇 구절이다. 끝없는 방황과 그리움을
강렬히 서정하고자한 것이다. 조국의 수없이 흩어진 들국화를 감싸안아 줄
가슴은 없는지. 어쨋든 이 스산한 가을, 고향을 생각하며 어머니를 목매이
게 불러보고 싶다.
오헨리가 바라보았을 마지막 잎새가 굴러 떨어지는 어느날, 그리니치 빌
리지 어느 찻집을 가보리라. 피곤하고 바쁜 틈을 내어서 중년의 마디 굵어
진 남편의 손을 잡고 헨델이나 모차르트를 들으며 마주 앉아 뜨거운 차를
나누어 마시리라. 그날은 이렇게 비가 지척거려도 좋으리라.
나이 사십이 훨씬 넘은 여자가 맞는 이 을씨년스러운 타향의 가을을 여
기까지 색칠하고 있을 때 셀비아는 블랙커피를 다 마시고 쓸쓸한 얼굴로
가을 빗속으로 사라져간다. 아니다, 그녀는 들국화가 아니라 생소한 이국의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가을 탓에 나는 가끔 혼돈을 하고 즐거운 착각에 빠지곤 하나보다. 어둠
이 걷힌 브로드웨이 거리를 느낌 없이 바라본다. 나는 가을비가 되어서 다
시 살벌한 생활의 터전에 서 있다.
국제 결혼
《한국일보》1994년 3월 16일 수요칼럼
이민 역사가 깊어지면서 2세들이 결혼 적령기에 도달하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본인들 이상으로 국제 결혼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내가 아는 가정은 과년한 딸을 출가시키고도 초청은커녕 결혼했다는 사
실까지도 쉬시하며 숨기고 있다. 그 사위가 어디 모자라는 사람도 아니고
좋은 학벌에 가정도 온화하며 성격도 좋다고 한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
유만으로 순 경상도 사람인 아버지가 머리를 싸매고 누워 반대하였다고 한
다.
억지로 결혼은 시켰지만 떨떠름한 생각을 버리지 못해 아직도 주위 사람
들에게 체면 손상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몰론 농경 시대
에 집안끼리의 맺음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던 우리 나라 전통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일 수 있다. 더구나 동서양의 다른 피를 바
로 나의 직계가 섞어야 한다는 상상을 하면 아찔해진다.
그러나 결혼은 본인들이 하는 것이다. 국제 결혼이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인식은 한국 기지촌 여성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수준
차이에서 오는 결과임을 어찌하랴. 결혼에 이르는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
남녀들을 이해해 주고 감싸줄 때가 온 것이다.
작년《한국일보》생활 수기에 당선되었던 SEUAN ALLEN은 오늘 전화
를 통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5월이면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고 기뻐했다.
국제 결혼한 부인들의 모임에도 가끔 나가면서 족외 결혼이 결코 불행하
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늘 확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모임은 국제 문화
권의 교량 역할을 하며 이 나라 주류 사회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
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며 남편과 상호존중하는 태도로
화목하게 지낸다고 한다. 시댁과의 관계도 아주 좋고 미세스 알렌은 오히
려 한국인끼리 결혼한 친구보다 시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흐
뭇해 하였다.
결혼엔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숭고한 사랑
이란 단물을 빨아먹고 버리는 것이 아니므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과
같은 국제 결혼이 있다면 이 세상에 끝날 때까지 깨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도의 차이만 있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탓에 서로 화
합하기가 어려운 데 국적이 다른 국제 결혼이란 결코 극복하기 쉬운 문제
는 아닐 것이다.
한국인은 사랑의 표현을 침묵으로 하므로 처음에는 서로 이해를 못하여
많이 다투었으나 서로 다른 문화를 익혀감으로써 여러 가지 벽을 허물 수
있었다고 미세스 알렌은 고백했다.
그리고 국제 결혼을 해 중년이 넘은 한국 부인들이 사우나, 에어로빅 같
은 걸 하며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것을 보며 이민 1세들보다 얼마나 안정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자신의 노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덧붙였다.
한 시어머니는 말했다.
"저는 두 며느리를 맞이했습니다. 큰며느리는 미국에서 자란 교포 2세이
며, 작은며느리는 이탈리아 계통의 미국 여성이었습니다. 큰며느리는 약혼
시절 나를 미세스 민이라고 불렀는데, 결혼 후엔 그래도 '어깨가 푹푹 쑤신
다. 좀 주물러 다오' 라고 한국말로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탈리아계
인 작은며느리는 약혼 시절부터 나를 꼭 맘(Mom)이라 불러주며 식당 같
은 델 가도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엔
그 집에 가면 그 큰 엉덩이를 땅에 대고 무릎 꿇고 인사하는 것이 귀여웠
지만 '어깨가 푹푹 쑤신다. 좀 주물러 다오' 라는 말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떤 문제든지 장단점이 있듯이 국제 결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행복이란 시야를 가지고 국제 결혼을 바라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내 고향
《중앙일보》1991년 2월 16일 생활 유상
세월의 계절풍은 어김없이 불어와 이 땅에서 다시 우리의 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마다 이맘 때면 문득 지난날이 밀물같이 파도쳐온다. 오랜 기억
을 더듬어 찬찬히 되새겨보면 40년도 더 지난 나의 어린시절의 음력 서날
이 그림같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샘물같이 고여드는 육친의
정이 사모치게 그리워진다.
지금 생각하면 세 가지 흰색이 먼저 떠오른다.
첫째는 내고향 충청도 음성 땅에서 설이면 많이 쌓여 있었던 흰눈이다.
둘째는 방앗간에서 방금 빼다 놓은 김이 나는 흰떡의 먹음 직한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어머니는 언제나 흰 옷을 입으셨고 설날은 더욱 정하고 눈부신
흰 옷을 차려입으셨었다. 이 세가지는 진하고 뜨겁고 향기롭게 남아 있는
추억의 흰 빛깔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물감을 들이고 다듬이질하고 바느
질해서 만들어 주신 다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아니면 연두 저고리를 떨쳐
입고 옆집에 살던 복순이와 서로 실빔 자랑을 했다. 그 아이의 깃과 옷고
름에는 금박무늬가 없어 그앤 내 옷을 바라보며 금박무늬 붉은 옷고름을
부러워하곤 하였다.
그 아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어렵게 자라고 있었다. 동
네를 돌며 우리는 함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과 푸짐한 음식상을 받곤 하
였다. 특별히 우리 어머니는 복순이에게 나에게보다 더 많은 세뱃돈을 주
시며 가엾어 하셨다.
점심 때는 동네 한가운데 널판을 준비하고 널뛰기를 하면서 한 해의 건
상을 기원하곤 다. 오빠들은 제기 차기, 썰매 타기로 오랜만에 휴일을 즐기
며 그 동안 만들었던 연날리기를 시작했다.
제방 가득히 동네 아이들이 모여 짙푸른 겨울 하늘에 발시린 줄도 모르
고 흰 연을 뛰운다. 방패연, 가오리연 등 이름도 많고 모양도 다른 연들은
하늘 높이 떠오른다.
이런 민속놀이는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져 농가에서는 대부분 이 보름 동
안은 완전히 일손을 놓고 쉬는 휴가철이 되었다. 보름 전엔 대보름 달맞이
쥐불놀이가 정월 초승부터 시작되고 연들은 대부분 보름날이면 연줄을 끊
고 떠나 보낸다.
어머니는 정월 초하룻날의 세배 때부터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한 해의
무사를 그때의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선으로 탯줄처럼 이어져 이곳 뉴욕
에까지 넘치게 되었다.
그때의 풍속들은 먼훗날인 지금까지 아름다운 인정으로 내 가슴속에 남
아 있다. 그래서 동야의 설이라고 인도, 태국, 중국 등에서도 폭줄놀이, 불
꽃놀이를 한다는 뉴스는 여지껏 나이 먹은 나를 들뜨게 한다.
한국에서도 이 날을 민속의 날이라고 하여 연휴로 쉰다니 이곳에서도 상
점을 닫고 '동양의 설'로 하루쯤 전통 문화를 이어주는 날이 되었으면 한
다.
지금도 나의 눈엔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난한 이웃들의 정갈스런 한복과
붐비던 떡집, 명절 기분을 한껏 높이던 풍물놀이의 꽹과리, 징소리들…. 흰
눈 덮인 고향 신천의 그림 같던 풍경들, 그리고 창호지문 사이로 비치던
설날의 그 황홀하고 조용하던 햇살이 보고 싶다.
명절 기분을 내기 위해 퀸즈칼리지에서 하는 음력설잔치는 조상의 숨결
을 잇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어린날 피워올렸던 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읊은 누구의 싯귀처
럼 그 옛날 쏘아버린 나의 화살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늙어가고 있을 복
순이의 가슴에선 지나간 시절의 편린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아름답던 설
날의 널뛰기 추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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