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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부(元傅) (1220-1287) | - 원관(元瓘) (1247~1316) | - 원충(元忠) (1290-1337) | - 원호(元顥) ( ?-1356) | - 원선(元宣) (배 안복종 녀) | |
- 녀: 기유걸 | |||||
- 녀: 김승용(金承用) | |||||
- 녀: 박거실(朴居實) | - 녀: 이제현 | ||||
- 녀: 민적(閔頔) | - 민변(閔抃) | - 민제(閔霽) | - 원경왕후 | ||
- 녀: 김광철(金光轍) | - 김회조 | ||||
- 원경(元卿) (?∼1302) | - 원선지(元善之) (1281~1330) | - 녀: 유보발 (1304-1340) | |||
- 녀 : 안원숭 (1309-?) |
원부(元傅, 1220-1287)의 증조 예(禮)는 상의봉어(尙衣奉御)이고, 조부 승윤(承胤)은 좌사간 지제고(左司諫 知制誥)를 지냈으며, 아버지 진(瑨)은 도재고판관(都齋庫判官)이었는데 공이 귀하게 되자 예빈경(禮賓卿)에 추봉되었다.
원관(元瓘 : 1247~1316)의 어머니이자 원부(元傅, 1220-1287)의 부인은 봉성군대부인(峰城郡大夫人)으로 예빈시경(禮賓寺卿) 염수장(廉守藏, ?-1265)의 큰딸이다. 고려문과방목에 회헌 안향의 후부인이 염수장(廉守藏)의 딸이라 했으나, 염수장의 묘지명에 사위는 원씨(원부), 최씨(최충약으로 추정) 뿐이며, 안씨(안향)는 없다.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7969
원호(元顥)의 사위이자 원선의 매부 기유걸(奇有傑)은 기철(奇轍, ?-1356)의 아들이며,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친정조카이다.
권보(權溥) - 권겸(權謙) - 원호(元顥, ?-1356)
- 녀: 이제현(李齊賢, 후부인이 박거실의 녀)
- 녀: 안유충(安惟忠, 죽산 안전의 아들)
민적(閔頔) - 민사평(閔思平)
- 민유(閔愉) : 순흥 안목 사위
- 민변(閔抃) - 민제 - 원경왕후
- 민환(閔渙)
민사평(閔思平, 1295-1359), 及菴先生詩集 해제에 가계도가 있다.
閔霽[주:字仲晦呂興人文度公前朝及第壬午拜至左相父忭祖頔曾宗儒外許伯妻父宋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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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元顥)
생몰년 : ?-1356
시대 : 고려
분야 : 문신/관료 > 정치 > 권신
원호(元顥)에 대하여
원호(元顥)
?∼1356(공민왕 5). 고려 공민왕 때의 권신.
본관은 원주(原州). 문순공(文純公) 부(傅)의 증손이며, 찬성사(贊成事) 충(忠)의 아들이다.
18세 때에 음보(蔭補)로 호군(護軍)이 되어 집안의 권세를 믿고 도량하였으며, 밀직부사로 있을 때 충혜왕을 집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충정왕 때 만호(萬戶)가 되어 서북면에 파견되었으며, 1354년(공민왕 3) 찬성사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원나라에서는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고려의 장상급(將相級) 인물을 지명하여 정예부대를 인솔하여올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인으로 하여금 군사 2, 000인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견되는 것을 꺼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가 되고자 하니, 의중을 알아차린 왕은 그를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으로 일단 봉한 뒤에 유탁·염제신 등과 같이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듬해에 귀국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평소 참소를 잘 하였는데 공민왕 즉위초에는 홍언박(洪彦博)의 권력 행사를 질투하여 홍언박에게 이지(異志)가 있다고 참소하였으며, 또 1356년 태사도(太司徒) 기철(奇轍), 태감(太監) 권겸(權謙), 그리고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盧Ʂ) 등에 의한 모반이 적발되었는데도 한가귀(韓可貴)·구영검(具榮儉) 등이 기철일당을 체포하지 않는다고 참소하였다.
이에 왕은 원래부터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함께 하옥시켜 대질하게 한 뒤 사람을 시켜 옥중에서 쇠뭉치로 타살하게 하였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菖熙〉
http://koreandb.empas.com/history/people/detail?sn=1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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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충(元忠)
원충(元忠)에 대하여
원충(元忠)
1290(충렬왕 16)∼1337(충숙왕 복위 6). 고려 충숙왕의 행신(倖臣).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정보(正甫). 찬성사를 지낸 관(瓘)의 아들이며, 중찬(中贊)을 지낸 부(傅)의 손자이다.
8세에 음보(蔭補)로 동북면도감판관이 되었다.
18세에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에 있으면서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왕씨(王氏)를 받고 이름을 주(鑄)로 바꾸었다.
벼슬이 누전(累轉)하여 우사윤(右司尹)이 되었으나 왕은 대언(代言)을 맡게 하려 하였다. 이것을 사양한 데 대하여 왕은 노하여 사여(賜與)한 성명을 깎고 지철주사(知鐵州事)로 좌천하였다.
그뒤 왕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하자, 압록강에서 왕을 맞이하여 전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뒤 대언이 되고 밀직부사를 거쳐 평리(評理)가 되었다.
1321년(충숙왕 8)에서 5년간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줄곧 왕을 시종하였다. 이에 앞서 상왕으로서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충선왕은 1320년, 자기를 신임하던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원나라의 간신배의 모함으로 토번에 유배되었다가 진종(晉宗)이 즉위한 1323년에야 소환된 일이 있다.
한편, 1321년 4월 원나라에 간 충숙왕은 이듬해 심왕 고(潘王暠)의 참언으로 영종(英宗)에 의하여 힐책을 받고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게까지 되었다.
심왕은 충숙왕을 퇴위시키고 고려 국왕이 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1322년에는 권한공(權漢功) 등이 백관을 모아 심왕의 국왕취임을 위하여 원나라의 중서성에 글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영종이 피살되고 진종이 즉위하자 충숙왕은 국왕인을 되돌려받고, 그 이듬해 5월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에 충숙왕을 섬긴 공으로 찬성사가 되고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의 호를 받게 되었다.
高麗史. 〈朴菖熙〉
http://koreandb.empas.com/history/people/detail?sn=15059
원충 묘지명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633
원충 누나 박거실처원씨묘지명(朴居實妻元氏墓誌銘) : 원씨(元氏 : 1288~1334)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529
4녀는 선수왕부단사관 광정대부 전정당문학(宣授王府斷事官 匡靖大夫 前政堂文學)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다.
원충 매부 김승용 묘지명: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51
김광재 묘지명에는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사위라 했다. 김승택과 김승용은 김방경의 손자로 형제간이다.
원충 장인 장모 : 원충 부인은 충선왕비인 순화원비(順和院妃)의 동생이다.
홍규묘지명(洪奎墓誌銘)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7900
홍규처김씨묘지명(洪奎妻金氏墓誌銘):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58
홍규는 고려 전기의 명필 홍관의 5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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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관(元瓘, 1247-1316)
- 생몰년 : 미상
- 시대 : 고려
- 별칭 : 정(貞)/관(灌)
- 분야 : 문신/관료 > 재상 > 재상
원관(元瓘)에 대하여
원관(元瓘)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충선왕 때의 재상. 원관(元灌)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정(貞).
아버지는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부(傅)이고, 동생이 충렬왕 때 응방(鷹坊)을 관장하였던 경(卿)이며, 아들은 충숙왕 때 첨의찬성사에 오른 충(忠)이다. 세번 장가들었는데, 장인은 홍녹도(洪祿道)·곽세필(郭世弼)·김신(金信)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79년(충렬왕 5)에는 독로화(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다.
그뒤 고려에 돌아와 1287년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보문각학사를 역임하였고, 다음해에는 전법판서로 있다가 환관(宦官)과 내료(內僚)들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으며, 1298년 충렬왕이 복위한 직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9년(충선왕 1)에는 밀직사가 되었다.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益柱〉
http://koreandb.empas.com/history/people/detail?sn=15049
묘지명: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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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부(元傅)
- 생몰년 : 1220-1287
- 시대 : 고려
- 분야 :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문신
원부(元傅)에 대하여
원부(元傅)
1220∼1287(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삼한공신(三韓功臣) 극유(克猷)의 9대손이며, 아버지는 진(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에 보직되고, 1269년(원종 10) 추밀원부사가 되어 이듬해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다.
127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충렬왕초에 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년(충렬왕 3)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유경(柳璥)·김구(金坵) 등과 함께 《고종실록》 찬수의 명을 받았다.
전추밀부사(前樞密副使) 임목(任睦)이 사고(史藁)를 보니 공지(空紙)이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탄핵하려 하자, 그는 유경과 의논하여 저지하고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고가 백지인 것은 그가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사고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8년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행차하는 데 종행하였고,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고금록 古今錄》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 高麗史, 高麗史節要. 〈秦星圭〉
묘지명: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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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선지(元善之 : 1281~1330) 묘지명(墓誌銘)
원선지(元善之 : 1288~1330)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할아버지는 중찬(中贊) 부(傅)이며,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경(卿)이고, 어머니는 홍록준(洪祿遵)의 딸인 개령군부인(開寧郡夫人) 홍씨이다.
돌아가신 원(大元)의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이자 고려국(高麗國)의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겸 판내부시사(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兼 判內府寺事)인 원공(元公) 묘지
칙수 장사랑 전 요양로 개주판관(勅授 將仕郞 前 遼陽路 盖州判官) 계림(雞林) 최해(崔瀣)가 짓다.
지순(至順) 원년(충혜왕 즉위, 1330) 윤7월 병술일에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 원소신(元昭信)이 50세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9월 갑신일에 장례를 지내면서, 장례에는 묘지명이 없을 수 없으므로 아들과 사위 등이 부인의 부탁으로 계림(雞林, 崔瀣)에게 글을 청하였다. 아, 우리 나라의 옛 습관에 지위가 이부(二府, 僉議府와 密直司)에 오른 사람은 장례를 지낼 때에 모두 명(銘)을 지었는데, 하물며 공은 행실이 단정하여 무리들의 칭송을 받았으니, 해(瀣)가 감히 누구의 묘라고 사양하고 허락하지 아니하겠는가.
원씨(元氏)의 적(籍)은 북원(北原)에서 나왔다. 극유(克猷)라는 분이 있어 신성왕(神聖王)이 삼한(三韓)을 평정하는 것을 도와 공신(功臣)의 칭호를 얻고 관품이 정의대부 병부령(正議大夫 兵部令)에 이르렀다. 그 뒤 대대로 더욱 칭송되는 인물이 있었으니, 병부는 좌복야(左僕射) 징연(徵演)을 낳고, 복야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영(穎)을 낳고, 상서는 각문지후(閣門祗侯) 우경(禹卿)을 낳고, 각문은 검교소보(檢校少保) 덕(德)을 낳고, 소보는 감찰어사(監察御史) 심부(深夫)를 낳고, 어사는 상의봉어(尙衣奉御) 예(禮)를 낳고, 봉어는 좌사간(左司諫) 승윤(承胤)을 낳고, 사간(司諫)은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된 진(瑨)을 낳고, 복야는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순공(文純公) 부(傅)를 낳고, 문순은 동지밀직(同知密直) 경(卿)을 낳으니, (卿은)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띠고 무략장군 정동행중서성도진무(武略將軍 征東行中書省都鎭撫)가 되었다. 무략공(武略公)이 지첨의부(知僉議府) 홍녹준(洪祿遵)공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개령군부인(開寧郡夫人)에 봉해졌으니, 이들이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공의 이름은 선지(善之)이다. 7세에 부임(父任)으로 서면도감판관(西面都監判官)이 되고, 17세에 무직[虎職]으로 바꾸어 산원(散員)이 되었다. 27세에 낭장(郞將)에 임명되고, 28세에 섭좌우위호군(攝左右衛護軍)이 되어 봉선대부(奉善大夫)를 대유하였다. 다음해에 덕릉(德陵, 충선왕)이 불러 대도(大都)에 이르자 크게 총애하고 대우하여 중현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사복정 지삼사사(中顯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司僕正 知三司事)로 뛰어오르고, 또한 아버지의 직책을 계승하여 선수 소신교위 정동도진무(宣授 昭信校尉 征東都鎭撫)가 되었다.
이 때에 덕릉이 원의 조정에 머무른 지 오래 되었으나 귀국하려는 뜻이 그다지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황경(皇慶) 계축년(충선 5, 1313)에 공이 지금의 정승인 화평군(化平君, 金深)과 함께 원의 조정에 고하여 덕릉을 모시고 본국으로 오려 하였으나, 이 때문에 덕릉의 뜻에 거슬려 화평은 임조(臨洮)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공은 파직되어 돌아왔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 1, 1314)에 좌천되어 통직랑(通直郞)으로 지면주사(知沔州事)로 나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지치(至治) 신유년(충숙 8, 1321)에 기용되어 판선공시(判繕工寺)가 되고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제수되었다가 곧 대사헌(大司憲)으로 바꾸고 판전의시(判典儀寺)로 옮겼다. 이 해에 덕릉이 서쪽의 토번(吐蕃)으로 가게 되고 상왕(上王, 忠肅王)이 원의 조정에 들어갔다가 억류당하였는데, 고려 사람들이 파당을 나누어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니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바른 태도를 지키고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 11, 1324)에 밀직(密直)에 들어와 부사(副使)가 되었다가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옮겼으나, 겨우 1년 만에 파직되었다.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상호군(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上護軍)으로 집에 머물러 있은 지 6년 만에 돌아가셨다.
공은 많은 것에 통달하고 재능이 많았으며 일을 처리하면서도 침착함과 섬세함을 갖추지 않는 적이 없었다. 거문고와 바둑도 절묘함이 당시에 최고였으며, 일찍이 의(醫)로써 사람을 이롭게 할 만하다고 하여 널리 좋은 약재를 사들여 법에 따라 알맞게 조제하였다. 약을 구하는 사람이 날마다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나게 되었다.
부인은 언양군부인 김씨(彦陽郡夫人 金氏)로 작고한 재상인 문신공(文愼公) 변(賆)의 딸이다. 자녀를 두었으니, 아들 구수(龜壽)는 복두점녹사(幞頭店錄事)이고, 송수(松壽)는 아직 어리다. 딸은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 유보발(柳寶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제위보판관(濟危寶判官) 안정계(安靖系)에게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고 어진 사람은 수를 누리는데
누구는 복을 받아야 하나 후하지 아니하고, 수를 누려야 하나 오래 살지 못하는가.
저 푸른 하늘은 이 일로 어찌하여 우리 뜻을 저버리는가.
앞서 굽혀졌던 것은 뒤에 펴지며
하늘은 끝까지 인색하지 않고, 사람은 함부로 받는 일이 없으니
자손에게 알려서 오직 선인(先人)의 업(業)을 지키도록 하노라.
원[大元] 지순(至順) 원년 경오년 9월 일, 전 통직랑 도관직랑(前 通直郞 都官直郞) 송한(宋翰)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大元故征東都鎭撫高麗國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兼判內府寺事元公墓誌」
勅授將仕郎前遼陽路盖州判官崔 瀣譔」
至順元年閏七月丙戌征東都鎭撫元昭信年五十以病卒將以九月甲申葬葬不可無誌子壻」
等以夫人之命索文於雞林崔瀣嗚呼東方故事位登二府者葬皆得銘矧公行實端方雅爲衆」
允瀣敢以謏墓爲辭而不諾耶元氏籍出北原有諱充猷佐」
神聖王定三韓號功臣官至正議大夫兵部令厥後益大代稱有人兵部生左僕射諱徵演僕射生」
兵部尙書諱頴尙書生閣門祗侯諱禹卿閣門生檢校少保諱德少保生監察御史諱深夫御史」
生尙衣奉御諱禮奉御生左司諫諱承胤司諫生贈左僕射諱瑨僕射生僉議中賛文純公諱傅」
文純生同知密直諱卿始受」
宣命帶金符爲武略將軍征東行中書省都鎭撫武略公娵知僉議府洪公諱祿遵之女封開寧都夫略」
人是爲公考妣也公諱善之生七歲以父任爲西面都監判官十七換虎職爲散員二十七拜郎」
將二十八攝左右衛護軍帶奉善大夫明年」
德陵召至大都大見眷遇䠫拜中顯大夫密直司右副代言司僕正知三司事又襲父職」
宣授昭信校尉征東都鎭撫是時」
德陵入侍」
聖朝久殊無東歸意國入遑遑罔知所出皇慶癸丑公與今政丞化平君告」
朝廷欲奉」
德陵就國因忤」
德陵旨化平有臨洮之行而公罷歸延祐甲寅貶官以通直郎出知沔州未幾還至治辛酉起判繕」
工寺拜通憲大夫尋改大司憲移判典儀寺是年」
德陵西往吐蕃而」
上王入」
朝見留東人分曹流言而多有詭隨而公守正不撓士論是之及泰定甲子入密直爲副使遷同知」
司事才一年罷爲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上護軍家居六年而終公通介多能處事徐詳無不」
辦者琴與棊絕一時甞以醫可利人廣市良材依法修合丐藥者日踵門待之無隨 容人多賴」
以活者妣彥陽郡夫人金氏故相文愼公諱賆之女生子男龜壽爲幞頭店錄事松壽尙幼女適」
神虎衛郎將柳寶鉢次適濟危寶判官安靖系曰」
嗚呼爲善者福而仁者壽孰以宜福而不厚宜壽而不久耶彼蒼者天此其何負吾意屈於前者」
伸其後天不終靳人無妄受告而子孫惟先人之業是守」
大元至順元年庚午九月 日前通直郎都官直郎宋 翰書」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