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출현 (마태복음 3:1-6)
여기에는 복음 시대를 알리는 여명이었던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설교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세례 요한이 출현한 시기. "그 때에," 또는 "그 후에"란 말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까지만을 취급한
앞장의 사건들보다 훨씬 후에란 뜻이다. 또한 "그 때에"란 말은 하나님께서 복음이 시작되는 때로
정하신 시기, 즉 "때가 찬"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도 가끔 이러한 의미로 "그 때에"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한 이레"가, 그 중에서도 메시야께서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그 언약을 굳게 하실"(단 9:27) 마지막 이레의 후반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모두 때를 맞추어 일어난 것들이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관하여 출생시와 출생 전에 영광스러운 일들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권능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특별한 징조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기대되지만 사실은 전혀 그 반대였다. 그리스도가 열 두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박사들과 논쟁하시던 것을 제외하고는 요한이나 그리스도에게 서른 살이 되기까지 특별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 그들의 청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그들 생애의
대부분도 모두 어두움과 불명료함(tempus adhlon)에 싸여 있다. 이들의 유년시절은 마치 상속자가
비록 후에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는 할지라도 나이가 차기 전에는 다른 종들과 다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견상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알려 준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으로 역사 하실 때에도 "스스로 숨어 계신다"(사 45:15)는
것을 보여 준다.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
"고 고백하고 있다(창 28:16). 우리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가에서 내다보시기 오래
전에"(아 2:9) 벽 저편에서 계신다.
2. 우리의 믿음은 주로 그리스도의 직무와 사업에 염두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직무와 사업에서는 그의 권능을 "나타내시지만", 그의 인격에서는 "숨기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God-man)이셨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가 하신 말씀과 행하신 것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는 그를
들을 지어다."
3. 젊은 사람은 비록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공적인 업무에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 즉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한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잉태와 출생에 대해 누가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마치 광야에서 외치기 위하여 구름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처럼 성년이 된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하고 있다. 3백년 이상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불빛이 오랫동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선지자로 오실 그분이 그토록 기다려졌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나 선지자 행세를 하는 자까지도 없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례 요한을 가리켜 "내가 내 사자를
보내노니"(말 3:1)라고 말씀하였다.
Ⅱ. 세례 요한이 맨 처음 출현한 곳은 "유대 광야"였다. 유대 광야는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 광야에는 여호수아 15장 61, 62절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대로 여섯 성읍과 그 고을들이 있었다.
세례 요한은 이 성읍들과 마을에서 전파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헤브론 가까이에서 출생하여 그
때까지 이 부근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그가 오랫동안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던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요한은 그가 이스라엘에 나타난 후에도 그가 맡은 일과 어긋나지 않는 한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했음을 보여 준다.
"주의 말씀"이 여기 "광야에서" 요한을 찾아내었다. 어떠한 곳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은 없으며, 오히려 성도들이 하늘과 더불어 가장 신령한 교통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소란함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다윗이 시편
63편을 기록했던 곳도 "유대 광야"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과 가졌던 신령한 교통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호 2:14). 율법이 주어진 곳도 광야였으며,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이스라엘"이 먼저 광야에 발견되었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교훈 하셨
"(신 32:10).
세례 요한은 아론의 반차를 쫓은 제사장이었으나 광야에서 전파하는 일을 하였을 뿐, 성전에서
결코 제사장 직무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론의 자손이 아닌 그리스도께서는 가끔 성전에
나타나셨으며 마치 권세를 가진 자처럼 성전에 앉아 계시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말라기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너희가 찾는 주께서 홀연히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라"(말 3:1)고 하였다. 이 말씀은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사자가 성전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밀어내어 광야로 쫓아낼 것을 암시한다.
복음이 광야에서 시작된 것은 광야와 같은 이방 세계에 대한 위로를 의미한바 이제 "내가 사막에
백향목을 심을 것이며"(사 41:18, 19), "광야가 열매맺는 땅이 될 것이며"(사 32:15), "광야가
기뻐할 것이라"(사 35:1)는 예언들이 분명히 성취되었다. 70인역에는 "요단의 광야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곳은 바로 요한이 전파하던 광야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스스로를 "은둔자"라고
부르면서 세례 요한을 따르는 행세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해도
가지 말라"(마 24:26)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따르는 자들을 "광야로 유혹하여" 끌고간
자도 있었다(행 21:38).
Ⅲ. 그의 설교. 세례요한은 전파하는 것을 그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싸우거나 논쟁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파하면서"(1절)나타났다. 왜냐하면 "전도의 어리석음"에 의해 세워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1. 그가 전파한 내용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2절). 그는 이것을 "유대 땅"에서, 소위 "유대인
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던 자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회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말씀을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유대광야, 즉 평범한 시골 사람들
가운데서 전파하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유혹의 길을 완전히 벗어나고 도시의 허영과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무죄할 수는 없으며,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임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케 하기"위한 것이었다. "회개하
"(Metanoeite)는 말은 "스스로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며 처음 생각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하여 두
번 생각해 보라, 즉 "되씹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네 생활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
마음을 고치라. 네 생각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잘 생각해보고 고치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참된 회개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죄와 성결,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해 그전에
가졌던 것과는 "다른 생각들"을 갖게 되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한 방향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마음"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과거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는
자는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이며(행 17:30),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준비와 자격이다. 만일 사람의 마음의 범죄로 말미암아 악해지고 더럽혀지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예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인간의 마음에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였으므로 편안해지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아야 하며, 안식을 얻기 전에 수고해야만
하였다. 아픈 상처는 찾아내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치료받을 수 없다. "나는 상하게 한 후에,
낫게 하는 자니라."
2. 세례요한은 이러한 외침의 내용을 강화하기 위하여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국가적 자비를 얻기 위해서나, 또는 일시적인 국가적 심판을 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요구 내용은 같으나 그 이유는 새롭고 순전히
복음적인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자격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자격에서 고려되고 있다.
여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은혜, 계약의
복음적인 성취, 또는 믿는 자들에 대한 천국의 개방을 의미한다. 이 "왕국"의 주권자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즐거움으로 그의 충실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며, 영적인 왕국이다. 그 근원도 하늘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곳도
하늘이다. 요한은 이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때 천국은 바로 문 앞에 있었으며
성령의 부르심과 복음적 은혜의 풍성함이 완전히 드러남에 의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
(1) "가까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자극제"이다. "죄에 대하여" 또한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것이 복음적인 회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그를 통한 사죄와 용서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다. 친절은 남을 정복하며, 겸손케
하고, 녹아지게 한다.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천국의 법과 사랑을 저버리고 범죄한 나는 얼마나
몹쓸 인간인가!
(2)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가장 큰 "격려"가 된다. "회개하라,
그러면 네 회개로 네 죄가 사하여질 것이다. 의무의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비의 길에서 너에게 돌이키시리라." 사죄의 선언은 전에도 도망하고
피했던 죄인을 발견하여 데리고 온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 사람의 끈과 사랑의 띠로
회개하도록 이끌려진다.
Ⅳ.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된 성경의 예언(3절). 세례 요한은 복음 시대와 복음 은혜를 가리키는 가장
복음적인 이사야서의 예언의 첫머리에 언급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사야 40장 3,4절을 보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1.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 스스로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요 1:23). "나는 소리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며,
사람이 그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알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세례 요한에 의해
알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받아들여져야 한다(살전 2:13). 바울이 무엇이며 아볼로가
무엇인가? 그들은 한낮 소리에 불과하였다. 요한은 깨우쳐 주는 크게 "외치는 자의 소리"(fwnh
bowntoj)라고 불리워진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라고 불리우셨는데, 이것은 분명하고 명료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소리"였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일깨웠고, 그 다음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계시록(14:12)에서 보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레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이 들렸던 것이다"(계 14:3).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삼손의 어머니는 "강한 독주"를 마시지 않았음에도 삼손은 "강한 사람
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형벌로 말미암아 벙어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벙어리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권능이 하나님께 있으며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세례 요한이 맡은 임무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주를 위해 한 백성을 예비케 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눅 1:17).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을 암시했던 사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화려한 옷으로 정장을 한 선구자로서가 아니라 운둔자의 검소한 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지나가기 전에는 그 길을 깨끗이 다듬기 위해 관리들이 파송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1)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이 그 당시의 세대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서 주의 길을 예비하였다. 이
당시 유대인의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 모든 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신앙심은 크게
쇠퇴하였고, 종교의 생명력은 장로들의 유전과 규범에 의해 타락하고 무기력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인물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식과 권력의 열쇠를 그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은 유대인의 특권을 극도로 자랑했으며, 그들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확신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겸손케 하기 위해 근래에 로마의
속국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겸손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처럼 방자하고 교만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부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산들을 평탄케 하기 위해, 즉 그들 자신이 품고
있는 교만한 마음을 끌어내리고 그들 자신의 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좀더 잘 받아들여지고 효과적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세례 요한이 가르쳤던 회개와 겸손의 교훈은 그 당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영혼 속에 들어오시게
하고 "마음을 낮추어" 그를 다윗의 자손(삼하 19:14)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많은
일들이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의 의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 장애물은 치워 없애기 전에는 언제나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편견은 제거해야 하며, 교만한 생각은 낮추어야 하며, 또한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한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기 위해 영원한 문들이 열리기 전에 먼저
놋쇠문들은 깨뜨러져야 하며, 철 빗장은 끊어져야 한다. 죄와 사탄의 길은 "굽으러진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려면 그 길들이 "곧바르게"되어야 한다(히 12:13).
Ⅴ. 세례 요한의 복장과 모습, 그리고 그의 생활 방식(4절). 메시야를 이 세상의 일시적인 왕으로
기대했던 유대인들은 그의 선구자야말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옷차림을 갖추고 올 것이며, 또한
그가 타고 올 수레도 역시 굉장할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주님이 보시기에는 큰 자"였을 것이나 이 세상의 눈에는 천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스도 자신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은 영적인 것이며, 그 왕국의
백성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가난하게 되고 멸시받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영광과
즐거움과 부귀를 다른 세상에서 얻는다.
1. 그의 옷차림은 검소하였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끈을 허리에 띠었다." 그는
서기관들처럼 "긴 옷"을 입지 않았고, 왕궁에 있는 자들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는 시골의 촌뜨기가 입는 옷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골에서 살았고 그의 모습이나 습관은
이런 환경에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처하게 하신 장소와 환경에 우리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요한이
이러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것은,
(1) 그는 야곱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며, 이 세상과 또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운 것들에
대해서는 죽은 자와 같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겸손한"자는 그 겸손을 옷차림에 대한 성스러운 무관심에
의해 나타내 보여야 하며, 옷 입은 것으로 자신을 꾸미지 말고, 다른 사람을 옷차림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2) 세례 요한의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금욕을 행하는 자로서 거친 옷(털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슥 3:4). 또한 이러한
옷차림은 특별히 그가 약속된 엘리야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털이 많이 난 사람"이었으며(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엘리야가 털옷을 입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허리에 가죽끈을 매었다는 사실이 성경 가운데 특별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
(왕하 1:8). 세례 요한은 금욕생활에 있어서 엘리야에게 어떤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세례 요한은 "다시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알 수 있다.
(3) 이러한 옷차림은 또한 그가 마음의 결심이 굳은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의
허리띠는 그 당시 보통 쓰였던 "좋은" 것이 아니라 "강한" 가죽끈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게 될 그 종은 복있는 종이다(눅
12:35, 벧전 1:13).
2. 그의 음식 역시 검소한 것이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런 것
외에는 결코 다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보일는지는 모르나 그가 한적한 곳에 가서 오랫동안
명상을 계속할 때에는 이런 종류의 음식들로 흔히 배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메뚜기"는 나는 곤충의 일종이며 좋은 음식물이며, 구약에서도 정결한 음식으로 규정되어 먹도록
허용되었다(레 11:22). 메뚜기는 요리하는데 번거로운 손질이 필요 없고 소화가 잘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늙어 몸이 쇠약해지면 "메뚜기도 위장에 부담이 된다"(전 12:5)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석청"은 가나안 지방에 풍부했던 야생풀이었다(삼상 14:26). 석청은 방울로 떨어질 때 즉시
거두어들이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돌보거나 보살핀 것이 아니고 벌들이 나무나 바위의 움푹한
곳에 스스로 모아둔 것을 거두거나 한다. 이것은 그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모자란 듯이 먹었음을
말해 준다. 메뚜기와 석청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마 11:18).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 호기심이나 체면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영적인 일들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인 식사를 할 겨를이 거의
없었다.
(1) 이 사실은 그가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관하여 전파했던 교훈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애통하고 억제하도록 촉구하는 임무를 맡은 자는 모름지기 먼저 그
자신이 진지하고 자기 부정적이며 금욕적이고 이 세상을 멸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는 외침이 필요할 정도로 악했던 그 당시 유대의 죄악에 대해 깊이 느낀 감정을
이와 같이 나타내 보였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금식하는 날"이었다.
(2)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임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그가 "천국"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았으며 그 권능을 체험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신적이며 영적인 즐거움을 알게 된 자는 감각적인 모든 즐거움과 장식을 한낮 거룩한
무관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그들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하였다. 이와
같이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의 헛됨을 확신하는 것이 마음속에 천국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Ⅵ. 그를 모시고 따랐던 사람들(5절).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가 다 그에게 나아왔다."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그에게로 나아왔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 즉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부자와 가난한 자, 바리새인들과 세리들, 이 모든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그들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많은 것을 직접 듣기 위해 그에게로
나아왔다.
1.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따랐다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실로 큰
영광이었다. 대개 이와 같이 영광의 그림자조차 좇지 않는 자에게 실로 큰 영광이 주어진다. 또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겸손하고 자기를 부정하며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들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남모르는 가치와 존경을 부여한다.
2. 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몰려와 "천국으로 들어가려고"하기 시작하였다(눅 16:16).
복음이 밝아오는 아침의 "태에서" "젊음의 이슬이" 내리는 것을 보며(시 110:3) 이렇게 많은
고기가 모인 곳에 그물이 던져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3. 이것은 이 때가 바로 어떤 위대하신 분이 나타날 시기였다는 증거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눅 19:11).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을 하면서 전파하게 되자 그들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서슴없이 말하였으며(눅 3:15), 이것이 그처럼 많은 군중으로 하여금 세례 요한의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게 하였던 것이다.
4. 요한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는 자는 그의 책망을 달게 받으면서 광야로 "나아가야만"한다.
이와 같이 참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자는 그들에게 가져다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찾아낼 것이다. 또한 회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자는 이 세상의 번거로움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나아가야만"한다.
5.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은 많았지만 참으로 그것을 고수한 자는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와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스도께서 냉대를 받으셨음을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이 자진하여
듣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참된 신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호기심의
고상하고 다양성 있는 제스츄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기도 하며, 그 설교에 잠시
동안 도취되기도 하나 그 설교의 권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겔 33:31, 32).
Ⅶ.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맞아들인 의식(6절).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게
된 자들은 요단강에서 그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며," 이로써 그들의 회개와 메시야의 왕국이
가까웠다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1. 그들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자신들이 회개를 입증하였다. 그들은 아마 세례 요한에게는 일반적인
고백, 즉 그들은 죄인이며 죄에 오염되어 있고 그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들이 특별히 지은 죄를 조목별로 고백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을 "의롭게 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나,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들을 "정죄할 것"과 전에 늘 습관적으로 했던 것처럼
일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온 이스라엘이 모여 그들의 죄를 고백하던 일반적인 회개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도사린 악한 죄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고백할 것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화평과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요구되며 또한 슬픔과 수치로
겸손해져서 그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의(義)의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요일 1:9).
2. 그들은 이제 "임박한 천국"의 은혜에 대해 세례로써 보증을 받았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불의에서부터 그들을 "깨끗게 하실" 것이라는 표로 물로써 그들을 씻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례에 의하면,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때, 특히 "복음의 의로 난 개종자
들처럼 모세의 율법을 행할 필요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않는 개종자들을 그들의 종교 안으로
받아들일 때는 세례를 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지도자로
추대된 탁월한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 들일 때에 행한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그것이 하늘로부터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베푼 세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은 이 관례를 따랐으나 그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이 "회개의 세례"(행 19:4
였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세례들과 구별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의식적 예법"은 여러 가지의
"씻는 것이나 세례"에 있었다(히 9:10).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치료하는 율법, 즉 회개와 신앙의
법에 관계된다. 그는 요단강, 즉 이스라엘이 통과했고 나아만이 치유함을 받았던 그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아마도 처음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후일에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요단강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는 또한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써 그들이 종사하던 직업에 따라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죄의 고백은 언제나 다시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의한 거룩한
결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례요한의 설교 (마태복음 3:7-12)
세례 요한이 전파한 가르침은 "임박한 천국"을 생각하고 외쳤던 회개의 가르침이었다. 이제 여기에는
그 가르침의 적용이 나타나 있다. 설교의 생명이 실제 생활의 적용에 있듯이, 세례 요한의 설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이 설교를 적용한 대상. 적용한 대상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7절).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각과 입장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세 종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중에서 두 종파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 중 에센파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은둔 생활을 하였고 공적인 일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의식과 교회의 세력, 장로들의 유전 등에 열심있던 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이들과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흘러서 영들이나 내새의 존재를 부인했던 자연신론자들과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이 세례 베푸는데 온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실상은 호기심으로
들어보려고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 중 몇 사람은 복종하여 세례를 받았을 것이나,
그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29,
30)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의식(儀式)에 나아오지만 그 의식의 참된 힘을
맛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이들에게 모든 진실 됨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가 말했던
것을 그는 또한 모든 무리에게 말하였다(눅 3:7).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세례 요한이 말한 것과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2. 그 적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급소를 찌르는 것이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그들 앞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딛치는
설교였다. 비록 그는 공식적인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교육을 받았으나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는 부끄러워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Ⅰ. 여기에는 먼저 확신과 경각의 말씀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거칠게 말을 했으며, 그들이 평소에
듣고 있었던 랍비라는 호칭도 쓰지 않았고 칭찬도 하지 않았다.
1. 그가 그들을 부르는 데 사용한 호칭은 "독사의 자식들아!"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을 같은
칭호로 불렀다(마 12:34; 23:33). 그들은 "독사"와 같은 자들이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독을
품었으며,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 악의와 적의가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 즉
그들과 똑같은 마음씨를 가졌던 자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이 그 뱀의 후손(창 3:15), 즉 그들의 조상 마귀의 후손(요
8:44)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로 "독사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수지간이었으나 악한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악한 세대는 "독사의 세대
이며, 그들은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이 마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죄인들에게 그들의 참된 본성을 담대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
2.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준 "경고"는 "누가 너희를 일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였다.
이것은 그들이 임박한 진노의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의 처지는 거의
절망적이었고, 그들의 마음은 죄로 강퍅해졌기 때문에(즉 바리새인은 그들의 믿음을 자랑함으로,
또한 사두개인들은 믿음을 대적함으로) 그들 가운데서 희망적인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즉 "무엇 때문에 또는 너희들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천국에 대해 물으려
하는가?"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필 수 있다.
(1) "임박한 진노"가 있다. 즉 지금 현재 쏟아지는 진노 이외에 후일을 위해 쌓아둔 미래에 당할
진노가 있음을 말한다.
(2) 이 진노를 피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이다.
(3) 우리에게 이러한 진노를 피하도록 경고하신 것은 놀라운 자비이다. "누가 우리에게
경고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 교역자들에 의해서, 또한 양심으로 경고하신다.
(4) 이러한 경고들은 때때로 안심하고 있는 자와 그들 자신에 대해 선하다고 생각하는 강팍한
자들에게는 큰 놀라움을 준다.
Ⅱ. 여기에는 "권고와 지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받았으니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기를 힘쓰라는 것," 또는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를 공언하고 회개의 세례와 가르침에
참예하였으니 너희가 진정으로 참회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마치 뿌리와 같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모든 죄를 버리고 선한 것을
붙잡으며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개혁함으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공연히
마음속에 회개했다고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axionj thj
metanoiaj)들이다. 죄를 뉘우친다고 하면서도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회개한 자라는 명칭이나
회개한 자가 가지는 특권을 소유하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다.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회개를 공언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회개한 자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며, 회개한
죄인으로 합당치 못한 어떤 일도 행해서는 안 된다. 회개한 자로서 합당한 일이란 겸손하고 눈이
높지 않은 일이며, 가장 적은 자비에도 감사할 줄 알며, 극심한 고통도 참으며, 죄는 그
모양이라도 경계하며, 죄로 접근하는 것도 삼가며, 해야할 모든 의무에 있어서 넘치게 행하며,
남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자비로운 것 등이다.
Ⅲ. 여기에는 또한 그들의 외적인 특권을 믿고 회개에의 부르심을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9절).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육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속삭여 교역자들이 힘써 만나려 하고, 기대해야 할 하나님 말씀의 확실하고 힘있는
권능을 밀쳐놓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헛된 생각들이며 예레미야는 이럴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에 대해 "너희는 마음을 씻으라"고 명령하고 있다(렘 4:14).
Mh, doxhte-"하지 말라, ∼인체 하지 말라, 즉 속으로 ∼라 하지 말라, 이것이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교만을 품지 말라"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여
스스로 기뻐하지 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편안히 졸거나 헛된 기대를
꿈꾸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하는 말을
주목해 보시며, 우리 영혼의 그릇된 안심과 기대, 그리고 우리 영혼이 스스로를 속이며 그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거짓을 모두 잘 알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망하게 하는 거짓말을
오른편 손 안에" 감추며 그것을 고백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혀 아래로 굴러 버리고"만다.
그들은 마귀의 계획을 지킴으로써 마귀를 이롭게 한다. 이제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자랑하는 구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며,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죄인들이 아니다.
그들이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가 택한 백성이요.
거룩한 민족인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1)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관계와 그와 맺어진 계약에 관계된 것이 너를 거룩하다고
일컬어 너희 마음과 생활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2)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을지라도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일에서
제외되거나 임박한 진노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회개치 않음을 그대로 묵인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비록 선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지닌 선한 관계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설령 경건한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고 종교적인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경외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위해 기도해 주는 훌륭한 친구들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회개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더불어 맺은 언약의 특권에 참예할 자격이
있다. 즉 우리는 그의 자손이기 때문에 "교회의 아들들, 즉 여호와의 전"(렘 7:4)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대개의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에 스스로 지나친 신뢰를 둠으로써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2. 이러한 구실은 얼마나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이었는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기들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이며, 따라서 그들이 만일
멸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는 교회 때문에 곤란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이러한 자만심이 실로 어리석은 것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속으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간에)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고 외쳤다. 그는 이제 "통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바라 근처의 요단
(요 1:28)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곳은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통과한"일이 있으며
여호수아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게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세운 열 두 돌이 있는
곳이었다(수 4:20).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돌들이 단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지칭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아마도 이사야 51장
1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너희를 떠난 반석"이라는 구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삭을 이와 같은 반석에서 떠내신 하나님은 만일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일도 다시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당시 그곳에 있던 "이방인
군인들"을 가리키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 자신을 위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을 멸망시키고 돌로 또 다른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으셨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너희와 같이 강퍅하고
냉담하고 쓸모 없는 죄인들보다는 오히려 이 돌들이 더 훌륭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현 세대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결코 세상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의 확신에는 낙심을 주지만 시온의 아들들의 소망에는 격려가
된다. 만일 유대인들이 꺾이어 넘어진다면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마 21:43; 롬 11:12).
Ⅳ. 여기에는 경솔하고 안일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또한 시대의 표적을 모르고 그들에게 닥칠
재난의 때에 무관심한 유대인들에게 두려움의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있다(10절). "너희들의 주위를
살펴 보라.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려라!"
1. "너희의 재난이 얼마나 엄격하고 급박한가? 도끼가 너희 앞에 옮겨져 이미 나무의 뿌리에
놓였으며, 또한 선한 행실을 지속해야할 때가 이르렀다. 지금이야말로 너희들이 멸망할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왔으며, 즉각적이고 진지한 회개 없이는 도저히 이를 피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빨리 너희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며 이 심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방법을 많이 허용하신 곳에는 시간을 적게 허용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라." 이제 그들은 마지막 시련을 당해야할 위기에 놓여 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며 이후에는 결코 없다.
2. "만일 너희가 이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너희의 운명은 얼마나 쓰라리고 비참할 것인가!"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져 있다고 선포된 것은 하나님은 그 선포에 있어서 진지하심을 보여 주며,
또한 "모든 나무마다" 그 타고 난 재능이나 영광에 있어서 아무리 "높다고"할지라도, 외적인
직업이나 행위가 아무리 "푸르다"고 할지라도 회개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버림
을 당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내어버림"을 당하며, 결국
쓸모 없는 나무들은 가장 적합한 장소인 하나님의 "진노의 불"속에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 그들이 소용될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땔감으로 적합하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대개의 심판이 그러했듯이 싹이 돋아날 뿌리는 남겨둔 채 가지를 자르든지
나무둥지를 베어내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을
여지없이 멸망시키는 전체적이고 최후적이며 회복시킬 수 없는 완전 파멸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끝장을 내실 것이므로 진노는 극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Ⅴ. 요한의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전파해야만 한다.
1. 여기에는 세례 요한보다 더 높은 그리스도의 위엄과 탁월성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비천하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자(11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단지 표시로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고전 3:6; 왕하 4:31).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기 때문에 큰 권능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는 더 큰 것을 가지셨다. 주님이 보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 요한은 실로 위대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무가치하고 비천한 자로 여기고 있다.
(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그에 비하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를 잘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보다 능력이 더 많으시며,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의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서 그 효력을 발생한다.
(2) 세례 요한은 그가 그리스도에 비하면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비천한 줄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예를 주신 자는 매우 겸손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에 비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높여지기 위하여
기꺼이 그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만이 전부가 되기 위하여 그 자신 아무 것도 아닌 자,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2. 여기에는 그들이 지금 급박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출현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보냄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예언되었을 때(말 3:1, 2), 이에 곧
뒤따라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며,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을 것이라"(3절)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엘리야가 온 이후에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올
것이며," 세례 요한은 여기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은혜의 사역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즉 너희 중 어떤 사람에게)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불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베푸신 성령의 특별
은사에서 이 일을 행하셨으며, 그 자신이 요한의 이 말들을 이 일에 적용시키고 있다(행 1:5).
그는 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은혜와 위로에서 이 일을 행하시고 있다(눅 11:13; 요
7:38, 39; 행 11:16 을 보라).
[2] 성령으로 세례 받는 자들은 "불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등불"로
나타난다(계 4:5). 성령은 조명의 역할을 하며 모든 것을 밝게 하며 덥게 하며 태운다. 즉
성령은 "태우는 영"으로서 모든 부패와 그 불순물을 깨끗이 태워버리며,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을 그 자체와 같이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든다. 또한 불은 하늘을 향하여 탄다. 또한
성령의 불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삼커버린다. 그리스도는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신
(눅 12:49).
(2)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심판의 마지막 결정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12절).
그는 손에 키를 들고 계시다." 참 빛에 의해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능력과, 또한 모든 심판이 위탁된 인격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권리는 "그의 손 안에 있는 키"이다(렘 15:7). 이제 그는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당이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사 21:10). 교회의 모형인 성전은 타작 마당 위에 세워졌다.
[2] 이 마당에는 밀과 겨가 섞여 있다. 참 신자는 실속 있고 유익하고 가치 있는 밀과 같으며,
위선자는 가볍고 속이 비고 쓸모 없고 무가치하고 바람에 날러가 버릴 겨와 같다. 밀고 겨는
현재 똑같은 외적 신앙 고백과 똑같은 가시적 집단 속에 함께 어울려 섞여 있다.
[3] 타작 마당이 정하게 되어 밀과 겨가 구별되는 날이 온다. 이러한 종류의 어떤 일이 종종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승들을 바벨론에서 부르시는 때이다(계 18:4).
그러나 대규모로 키질하고 구별하는 날, 즉 교훈과 공력(고전 3:13), 사람들(마 25:32, 33)에
대해 판결하는 때는 마지막 심판날이다. 그때에 성도와 죄인은 영원히 구분될 것이다.
[4] 하늘은 창고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그의 모든 밀을 즉시 모아들일 것이며 그 중의
한 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잘 익은 곡식들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모을 것이다. 죽음의 낫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에게로 모이게 하는 데 사용된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함께 소집되며,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전하며 더 이상 노출되지 않는다.
외부적으로는 타락한 이웃들과 분리되며, 내부적으로는 타락한 감정들과 격리된다.
그들에게는 결코 겨가 없다. 그들은 "곳간"(마 13:30)과 "창고"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철저히 정결하게 된다.
[5]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겨를 태울 것이며, 정녕 위선자와 불신자의 운명(몫)과 형벌,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밭
에 있지만 그때에는 "마당"에 있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마태복음 3:13-17)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거의 삼십세가 된 지금까지 갈릴리에 은거하셨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지리하고 어두운 밤이 지난 후, 보라! "의의
태양"은 저렇게 영광 중에 떠오르고 있지 않는가! 바야흐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예언적인 직무를
수행하실 "적절한 때가 이르렀다." 그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택하지 않고(그는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이곳에 왔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를 주었던" 곳을 택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자들"이 그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들만이 그를 환영하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하였고, 그가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것도 그리스도가 출현하시기 약 6개월 전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는 "요단강 인근 지방"에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이를 위해
최근 6개월 동안 행한 일을 이전 몇 해 동안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리리로부터 "요단강"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의식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어떠한 수고나 고통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보다
밀접하게 갖기 위하여 기꺼이 그에게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발견하려는 자는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권유를 받고 가까스로 이를 허락하였다(14, 15절).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신 것은 그의 위대하신 겸손의 한
실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자마자 겸손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를
그 자신이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 사역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의 첫 단계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무릇 높이 오르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예의 이전은 겸손이다"(Before honour is humility).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에게 대한 무상의 존경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는 것을 주목하여 보고 그에게 행했던 봉사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무릇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세례 베풀기를 말리며 거절한 사실(14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려 했을 때 한사코 이를 말렸던 베드로와 같이(요 13:6, 8) "이를 말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겸손은 믿음이 강한 신자라 할지라도 단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놀라운 것이며, 또한 너무 깊고 신비스러우므로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즉시로 그것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흑암의 이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
반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겸손하게 이 영예는 자신이 받기에 너무도 큰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눅 1:43). 요한은 이제 큰
명성을 얻었고 널리 존경을 받았지만 이 얼마나 겸손한가! 하나님께서 더욱 존귀히 여기는 자는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영혼이 계속적으로 낮은 데 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의하라.
(1) 요한은 그가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내가 당신에게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였기 때문이다(11절).
[1]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지만"(눅 10:15),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많이 소유한 자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와 같이 불완전한 상태라면 더욱 더 가져야 하며 또한 더욱 많은 것을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2] 요한은 그가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는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같이 부패하였으며
또한 그 자신도 깨끗케 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청결한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잔존하는 불결한 죄의 더러움을 가장 민감하게 깨닫고 있으며,
또한 매우 진지하게 영적인 씻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리스도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이나 우리를 위해 하셔야만 하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지고성과 거룩성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들이 더욱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욱 구분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4]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이 대화는 요한을 매우 존경하고 그를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한은 아무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그가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부터 버림을 받아 파멸 상태에 놓여 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들의 위대성에 금이
가거나 경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5]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음
"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보다 앞선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서 받아야 하며, 그를 주시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6]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푸는 교역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전파하고 있는지를 특별히 유의해야 하며,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네 자신을 조심하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2)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가 그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죄인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에게(by), 죄인으로(as), 죄인들 가운데서 (among)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이 구절에 대한 예수님의 취소(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그리스도는 요한의
겸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그의 사양을 그대로 수락하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의 이유를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방법을 취할 것임은 온당한 사실이다.
(1) 그리스도는 어떻게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셨는가? 그것은 "이제"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오히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Afejarti - "이제 허락하라." 즉 "이제 그것을 받도록 하라."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매사는 알맞은 때에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지
"인가?
[1] 그리스도는 "이제"겸손의 상태에 있다. 그는 자신을 비웠으며, 아무런 명성을 취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따라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는 완전히 순수하였지만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으려 하셨으며, 따라서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지금 명성을 얻고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그의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
그것이 현재 하늘의 섭리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이제 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성령
세례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행 1:5) 베풀어질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이제" 그
절정에 이르렀다.
[3] 그것은 "지금 행해져야만"한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이며, 그 일을 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 1:31-34).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 현현되어야 하며, 가장 겸손하고 겸비했던 그 자신의 행동에서 하늘로부터 기사에
의해 두드러지게 되셔야만 한다.
(2) 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이유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는 타당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은혜스러운
것이었다(히 2:10; 7:26). 우리는 해야 할 것만 아니라 합당한 것을 행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좋은 평판이 있는" 것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자신에게 매우 합당한 것으로 여기셨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휘트비 박사가 설명한 것과 같이) 모든 신적 제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법칙을 준행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나타낸다. "그가 이와 같이 하여" 회개의
세례에 의해 그의 길을 준비시키려고 요한을 보내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법칙과 마찬가지로 모범에 의해
선한 모든 것을 후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요한과 그의 세례를
훌륭하게 언급하였으며, 그는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맨 처음 행하시고," "그 다음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의 사역자들도 똑같은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씻음에 대한 "의식적인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세례에 대한 복음적 의식을 그의 교회에
천거하셨으며, 그것을 존귀케 하셨고, 그것에 어떤 효능을 두시려했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물 씻음에 복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물 씻음을 반대하신 것은 그것이 인간이 발명하고 고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쫓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과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아주 만족하였으며, "이에 그는 허락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그에게 베푸신 영예를 극구 사양했던 겸손은 이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봉사를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겸손을 구실로 우리의 의무를
사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Ⅱ. 하늘은 엄숙하게 특별한 영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꺼이 빛내어 주었다(16, 17절).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세례를 받았던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머물러 있었지만"(6절), 그리스도는 고백할 죄가 없으므로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물에서"(aps ton
ndatoj)란 말은 그가 물로 씻음 받기 위하여, 즉 그의 머리와 얼굴을 씻기우려고(요 13:9) 내려갔던
"강가에서"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그가 옷을 벗고 세례를 받았다면 그 옷을 입었다든지,
벗었다든지의 설명이 반드시 있어야 할텐데 여기에는 그런 부대 설명이 없다. 그는 최고의
상쾌함과 확고한 결심으로 일을 착수했던 사람처럼"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까지 얼마나 곧장 걸어가셨던가!"
이제 그는 "물에서 올라 오셨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목을 집중하였다.
1. "보라, 하늘이 그에게 열리지 않았던가!" 적어도 별이 총총한 창공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그에게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이.
(1)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앞에 놓여진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떠맡은 임무를 계속
수행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은 지금 그가 착수하고 있는 일을 다 마쳤을 때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열려 있다.
(2)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하늘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죄는
하늘을 닫았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개방하셨다." 신적인 빛과 사랑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두루
임하였으며,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았으며, 하나님께 의무로 보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중개되는데, 그는 밑 부분을 땅에 두고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이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안락한 교제를 갖거나 마침내 하늘나라를 얻게 될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이행할
때에만 그와 더불어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2.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또는 비둘기처럼)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또는 비추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보았고(막 1:10), 요한도 그것을 보았으며(요 1:33, 34), 또한
아마도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이것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공적인 취임임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 그를 비추었다." 옛 세례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영"은 마치 새가
둥우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새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시지만 성령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 아니라, " 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라"(사 11:2; 61:1)고 예언되었으며, 이곳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왜냐하면,
[1] 그는 예언자이시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도 언제나 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예언적인 임무를 신적 본성(휘트비 박사의 말)에 의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수행하셨다.
[2]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었다. "성령은 그에게 내렸으며,"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은사와 위로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에게 파급되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하여 "사람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
(2) "성령은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 이 비둘기가 살아있는 실제의 비둘기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환상에서와 같이 비둘기와 유사한 형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일 형체나 형상(눅
3:22)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의 형체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보여지는
존재는 특별히 제 이위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 중 하
(하늘은 지금 열려져 있다)임에 틀림없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비둘기가 이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성령은 비둘기 같이 성령이다. 이 성령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같지
않으며, 불쾌감이 없는 결백한 비둘기 같다. "성령"은 공중의 왕이지만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잔인한 새인 독수리와 같은 형체로 내려오지 않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무해하고 악의가 없는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왔다. 그리스도의 성령도 이와 같았다. "그는 다투거나 들레지 않을
것이다." 기독자들은 "비둘기와 같이 남을 해하지"말아야 한다. 비둘기는 특히 눈이
두드러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아 5:12)과 교회의 눈(아 1:15; 4:1)이 비둘기의 눈과
비교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동일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많이 운다(사 38:14). 그리스도는 종종 우셨다. 참회하는 영혼은 "골짜기의 비둘기
에 비유된다.
[2] 비둘기는 희생 제물로 드려졌던 유일한 날짐승이었으며(레 1:14),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성
"에 의해 "하나님께 자신을 흠 없이 바쳤다."
[3] 노아 홍수 때에 물이 감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관한 기쁜 소식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전달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사람에게 전하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은
선하시며 악이 없으시다." "반구(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 들림"(아 2:12)으로써
갈대아의 석의(釋義)는 "성령의 소리"를 이해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하신다는 것은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3. 이 엄숙함을 설명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던 "하늘로부터의
소리가 있었다." 성령은 그 자신을 "비둘기"의 형체로 나타내셨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소리"로
나타내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신 4:12). 일찍이 하늘로부터 땅에 왔던 최고의 소식인 복음은 그렇게 왔고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하고 명백하게 그리스도에게와 또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여기에서 어떻게 우리 주님을 인정하고 계신가를 살펴보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는 내 아들이다"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난" 그의 아들이시다(골 1:15; 히 1:3). 또한
이것은 초자연적인 임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임신"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졌다(눅 1:35).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세상의 구속자라는 특별한 임무와 사명을 맡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를 위해 성별
되었고, 파송되었으며, "아버지의 양육을 받았으며"(잠 8:30), 임명되었다. "내가 그를 내
장자로 삼을 것이다"(시 89:27).
[2]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지닌 애정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가 아끼는
아들, 그의 "사랑의 아들"(골 1:13)이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 전부터 자기의 가슴속에 품고
계셨으며(요 1:18), "언제나 그의 즐거움"이었다(잠 8:30). 그러나 특별히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또한 사람의 구원 역사를 떠맡은 일에 있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자"(사 42:1)이다. 그는 구속의 언약에 동의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였다"(요 10:17; 3:35). "보라,"
그리고 경탄하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가를!" 그는 실로 그의
사랑하는 자를 내어 버렸고 그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게 하셨다.
아니,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유일하신 아들, 그가 사랑하신 이삭을 우리의 죄를 위해 서슴없이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은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시려는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자와 신앙으로 그와 연합된 자를 기뻐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의 자녀들을 싫어하셨으나 지금은 그의 분노가 사라졌으며, 또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영접"하셨다(엡 1:6). 모든 세계여, 주목하라. 이 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양손을
얹으신 평화의 조성자, 중개자이시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요 14:6) "그 안에서 우리의 영적 제사는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선물을 거룩케 하시는" 제단이기 때문이다(엡 2:5). 그리스도에게서(out
of)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in) 하나님은 화목케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모든 복음의 총합(sm)이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그가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실한 말씀"이다. 우리는 기꺼이 이 말씀에 의견을 함께 해야 하며, 그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구세주이며 "우리는 그를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