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 도 관 ( 靑 濤 館 )
청도관(靑濤館)'은 태권도 최초의 도장으로 1944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전수를 시작한 시기는 1946년 2월 27일부터라는게 정설이다.
당수도(唐手道) 청도관은 글자 그대로 '푸른 파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청년기상 과 활동력을 상징으로 삼았다.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李元國)은 19세 때인 1926년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중.고교를 거친 뒤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진학하는데, 이때 일본 공수도(空手 道)의 본관(本館)인 '송도관(松濤館.쇼토칸)'에 입문하여 공수도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후나고시(船越)'선생으로부터 가라데를 전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송무관 (松武館)'의 창설자인 '노병직(盧秉直)'관장과 함께 가라데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도관 출신으로는, 유응준.손덕성.엄운규.현종명.민운식.한인숙.정영택.강서종 백준기.우종림.남태희.고재천.곽근식.김석규.한차교.조성일.이사만.이준구.김봉식등이 있다.
청도관 분관(分館)으로는, 인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종의 국무관(國武館), 서울 서대문구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광주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과 최홍희의 오도관(吾道館) 등이 있다.
1대 관장은 이원국(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밀항), 2대 관장은 손덕성, 3대는 엄운규이다.
2. 조 선 연 무 관 (朝鮮硏武館.지도관 )
'지도관(智道館)'은 1946년 3월 3일 '전상섭'에 의해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로 출발하였다.
청소년 시절 유도(柔道)를 수련했던 전상섭은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배웠는데, 1943년 귀국후 서울 소공동에 위치했던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치게 된다. 그 후 해방이 되자 전상섭은 지체없이 '조선연무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관원을 모집한다.
한국전쟁시 전상섭이 행방불명되면서 조선연무관은 사실상 해체되는데, 당시 지도사범으로 있던 윤쾌병(尹快炳)이 이종우와 명칭을 '지혜로운 길'을 의미하는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한다.
지도관 출신으로는, 배영기.이종우.김복남.박현정.이수진.정진영.이교윤.이병로 홍창진.박영근 등이 있는데, 지도관은 특히 다른 관에 비해 대련(對練:겨루기)을 중시해 70년대까지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완.조점선.황대진.최영렬 등이다.
지도관의 대표적인 분관은 이교윤의 '한무관(韓武館)'이며, 초대관장은 전상섭, 2대 윤쾌병, 3대 이종우 등이다.
3. 무 덕 관 ( 武 德 館 )
무덕관(武德館)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서 '황기(黃 琦)'에 의해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했다. 황기 관장은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 그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주장
하지만 황기 관장의 무력(武歷)을 방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수련생은 관번 1번인 김운창을 비롯, 홍종수.최희석.유화영.남삼현.김인석 이복성.황진태.원용법.정창영.이강익 등으로 모두 철도국 직원들이었다.
1955년 서울시 중구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한 황기는 그해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신설하고 한중(韓中)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 를 개최했다.
1960년 무덕관은 53년에 설립한 '대한당수도협회(大韓唐手道協會)'를 '대한수 박도회(大韓手博道會)'로 개칭한다.
무덕관은 1965년 3월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돼 황기를 제명하고 통합의 길 을 걸었다. 그 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고 뒤이어 홍종수, 오세준이 이었다.
무덕관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
4. Y M C A 권 법 부 ( 창 무 관 )
창무관(彰武館)은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며 조선연무관 에서 전상섭과 함께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尹炳仁)에 의해 1946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 YMCA권법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어린 시절 만주에서 '주안파'를 익힌 윤병인 관장은 해방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가라데를 배웠는데, 무술의 경지가 높아 5단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일본인을 제치고 대학내 가라데부 주장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윤병인은 자신의 중국 무술을 보고 한눈에 매료된 가라데 창시자인 '도야마 간켄'과 서로의 무술을 교류하며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YMCA권법부는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남석.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자와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명명(命名)한 것으로, 두 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았다.
YMCA권법부 출신으로는 이남석.김선구.홍정표.박철희.박기태.김주갑.송석주. 이주호.김순배 등이 있다. 한편 2대 관장인 이남석, 3대 관장을 지낸 김순배와 뜻이 맞지 않았던 홍정표.박 철희는 창무관을 떠나 1956년 서울 신설동에 '강덕원(講德院)'을 개관했다
5. 송 무 관 ( 松 武 館 )
송무관은 1946년 노병직(盧秉直)에 의해 개성에서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노병직 관장은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과 일본 유학생 시절, 송도관(松濤館;쇼토칸)의 후나고시 선생 밑에서 함께 가라데를 배웠다. 해방 직전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궁사장(활터)이었던 관덕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 삼아 가라데를 가르친 것이 송무관을 창설한 계기였다고 한다.
노병직 관장은 수련생들에게 반드시 1백번 이상 권고대(※주먹단련대)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도했는데, 4급 이상이면 꼭 실전 대련을 시켰고, 추운 겨울에는 모한수련(冒寒修練)을, 더운 여름엔 모서수련(冒署修練)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무관은 이회순.이영섭.김홍빈.한상민.송태학.이희진.조규창.홍영찬.강원식 등 많은 사람들을 배출했지만 기간도장 중 관세가 가장 미약했다. 초대 관장 노병직에 이어 2대 이영섭, 3대는 강원식이다
6. 오 도 관 ( 吾 道 館 )
오도관은 군(軍) 장성 출신의 최홍희(崔泓熙)와 남태희(南太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홍희가 1954년 제3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 을 창설하기 까지는 부관 남태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운 뒤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과 인연을 맺는데, 1953 년에 제주도 보병 제29사단에 있던 최홍희 장군과 만나게된다.
오도관에는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한차교.우종림.고재천.김석규.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도 손덕성.현종명 등 청도관 출신이 주류였다고 한다. 현종명은 1954년부터 10년간 오도관 관장직을 맡았다.(당시 최홍희는 명예관장) 1955년 '태권도'란 명칭을 창안해낸 최홍희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내어 본격적으로 전군(全軍)에 태권도를 보급하기에 이른다. 특히 오도관은 월남전쟁으로 1960년대 초부터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계기로 민간도장과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관세(館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오도관은 최홍희가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한 후 일탈행동을 하면서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현종명.곽병오(작고).백준기 등이 관장직을 맡았다.
7. 강덕원 (講德院)
강덕원은 한국전쟁직후 어수선하던 시기인 1956년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 A nmae="traditional8">홍정표와 박철희 두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초대 관장은 홍정표다. 강덕원이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은 YMCA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이 납북 된 이후 권법부를 재건하려던 이남석, 김순배와의 갈등으로 파생되었다.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베풀 '강(講)'에 큰 '덕(德)'자를 써서 '덕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다.
강덕원은 50 중반에 창설된 신생관(新生館)이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현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과 훗일 대한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맡아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 정화.이정후.이강희.한정일.김병수.지승원.임복진 등이다.
강덕원은 서울 창신동-청진동-서대문-서울운동장-서대문로터리 등으로 도장을 옮기다가 이금홍이 3대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이전, 정착하였고 현재 '강덕원 무도회(강무회)'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8. 한무관 (韓武館)
1956년 8월 이교윤 관장이 창설한 한무관은 50년대 중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신생관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당시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던 한국체육관의 부관장인 이상묵의 허락을 얻어 당수도를 가르친 이교윤은 1년만에 2백명 이상의 수련생을 확보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도관 관장이던 이종우와 갈등이 증폭되자 이상묵의 제의로 지도를 중지하게 된다. 그 후로 이교윤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강문고등학교 뒷편 공터에 한무관 간판을 내걸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데 이 것이 한무관이 생기게 된 발판이었다고 한다. 1969년에는 중앙도장을 서울 왕십리에 개관한다
9. 정도관 (正道館)
정도관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청도관 출신인 이용우(현 국기원 심사위원)에 의해 서울 서대문 로터리에 중앙본관이 개관되었다. 정도관은 모체관인 청도관과 이렇다 할 마찰없이 관을 개설했다는게 여느 신흥관의 파생과정과 다른 점이다.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라는 관훈의 정도관은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차원, 목포, 김제 등지에 지관을 개관하며 관세를 확장해나갔다.
정도관의 초창기 수련생으로는 장용갑.김재기.김기동.오부웅.주계문.박태현 등이고, 그 뒤를 이어 박경선.심명구.김명환.김학근.전영근.전선용.이종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