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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혁명에 관하여 1개념~5개념
생물학과 문화를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는 마음의 과학인 인지과학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한 만큼이나 오랫동안 마음이라는 개념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그 개념이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온갖 역설, 미신, 기괴한 이론들을 낳았다. 20세기 전반부에 행동주의 심리학자들과 사회 구조주의자들이 인간의 마음을 가급적 피하는 게 상책인 수수께끼나 관념적 덫으로 간주하고 그 대신 명백한 행동이나 문화적 특성들을 선택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감할 정도였다.
그러나 1950대 초, 인지 혁명과 함께 그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신적 과정들을 이해하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더 확고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한때 매력적으로 보였던 수많은 빈 서판 학설들이 이제는 불필요하고 심지어 모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은 우리가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을 혁신시킨 인지 혁명의 다섯 가지 개념이다.
제1개념: 정신 세계는 정보, 연산, 되먹임(feedback)의 개념을 통해 물리적 토대를 가질 수 있다.
마음과 물질을 확연히 구분짓는 일이 당연하게 보였던 것은 행동이 다른 물리적 사건들과는 다른 종류의 계기를 통해 촉발하는 것처럼 보이기 떄문이다. 보통의 사건들에는 원인이 있지만 인간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예전에 “과학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BBC 텔레비전 토론회에 참여했다.
그 자리에서 한 철학자는 인지 혁명에 반대하면서, 누군가가 감옥에 가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것이야말로 인종들간의 증오를 부추기기 딱 좋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의도나 증오는 물론이고 감옥까지도 물리학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증오’나 ‘감옥’을 분자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행동에 대한 설명은 이야기(narratives)와 같고 그 이유는 행위자들의 의도 속에 담겨 있어서 자연과학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렉스라는 사람이 전화기를 향해 걸어가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전화기 형태로 된 자극들이 렉스의 팔다리를 움직이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오히려 그가 친구인 세실과 통화하기를 원하고 세실이 지금 집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예측력이 높은 설명은 없다. 만약 렉스가 더 이상 세실을 친구로 여기지 않기로 결심을 했거나 그날 밤 세실이 볼링장에 갔다는 사실을 기억했다면 그의 몸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물리적 사건들과 의미, 내용, 관념, 이유, 의도 등과의 간극은 이 세계를 정확히 둘로 갈라놓는 것처럼 보였다. “증오를 부추기거나” “세실과 통화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 에테르처럼 가벼운 일들이 어떻게 물질이 공간 속을 이동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지 혁명은 강력한 새 이론을 이용해 관념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통합했다. 바로 정신 활동이 정보, 연산, 되먹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믿음과 기억은 정보의 집합으로서 데이터 베이스에 담긴 사실과 비슷하지만, 행동과 구성의 패턴들로 뇌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다르다. 생각과 계획은 이 패턴들의 체계적인 변형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작동과 비슷하다. 바람과 노력은 되먹임 순환으로, 자동 온도 조절 장치와 비슷하다. 목표와 현재 상태의 불일치에 대한 정보를 받고, 그런 다음 그 차이를 줄여 나가는 작업을 실행하는 것이다. 물리적 에너지를 뇌 속에 데이터 구조로 변환하는 감각 기관과, 뇌가 근육을 조절할 때 사용하는 운동 프로그램이 마음과 세계를 연결한다.
이 일반 개념을 마음의 컴퓨터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을 컴퓨터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말 그대로 인간이 만든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와 같이 작동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과 인간이 만든 정보 처리 장치를 동일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공학적 구조가 일치하는 다른 경우들과 똑같다. 생리학자는 사람의 눈과 카메라가 모든 면에서 똑같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아도 눈의 작동 과정과 카메라의 작동 과정을 동일한 광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의 연산 이론이 하는 일은 지식 획득, 생각, 노력의 존재를 기계속의 유령 없이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그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과정들이 어떻게 지적일 수 있는가, 무심한 물리적 과정에서 어떻게 합리성이 출현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만약 어떤 물질 덩어리(가령 뇌 조직이나 실리콘)속에 저장된 정보의 연속적인 변형이 이 세계의 논리, 가능성, 또는 인과의 법칙을 따르는 연속적인 추론을 그대로 모방한다면, 그로부터 이 세계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산출될 것이다. 그리고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지성”이라는 말로 정확히 정의된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마음의 연산 이론에도 홉스라는 선구자가 있었다. 그는 정신 활동을 작은 운동으로 설명하면서 “추론은 단지 계산”이라고 적었다. 350년 후 과학은 마침내 그의 선견을 따라잡았다. 실험실에서 과학자들은 지각, 기억, 심상, 추론, 의사 결정, 언어, 목록, 파일, 트리, 배열, 루프, 명제, 네트워크 등과 같은 연산 수단으로 모형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지 심리학자들은 머리 속의 그래픽 시스템을 연구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어떻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정신적 이미지로 ‘보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장기 기억속에 담긴 개념 망을 연구하고 있으며, 왜 어떤 사실들은 다른 사실들보다 쉽게 기억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왜 어떤 문자들은 즐겁게 읽히고 어떤 문장들은 골치 아프게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언어 시스템에 사용되는 처리 장치와 기억을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연산 과정에 있다는 가정 하에, 자매 분야인 인공지능에서는 지금까지 정신적 재료만이 수행해 낼 수 있다고 가정했던 놀라운 일들을 평범한 물질이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1950년대에 컴퓨터는 계산, 데이터 정리, 정리 증명 등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미 “전자 뇌”라 불리고 있었다. 곧 이어 컴퓨터는 철자 교정, 조판, 방정식 계산을 수행했고, 주식 선정, 질병 진단과 같은 제한된 주제에 대해 전문가처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십 년 동안 우리 심리학자들은 학생들 앞에서 어떤 컴퓨터도 글을 읽을 수 없고, 말을 해독할 수 없으며, 얼굴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대단한 권리를 옹호했지만, 이제 그러한 자랑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문장을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있으며,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얼굴 인식 시스템은 인권 운동가들이 공공 장소에 설치된 보안 카메라에 사용될 경우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음을 우려할 정도로 발전했다.
맹목적 인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이 저차원의 성과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입출력 과정은 연산 모듈로 대신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판단. 사고, 창조 능력을 가진 인간 사용자가 있어야 한다. 그라나 마음의 연산 이론에 따르면 그 능력들도 정보 처리의 특정한 현태들이므로, 연산 시스템으로 실행할 수 있다. 1997년 딥블루라는 이름의 IBM 컴퓨터는 체스 세계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물리쳤는데, 딥블루는 이전의 컴퓨터들처럼 단지 야만적인 힘으로 수조 번의 수(手)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패턴에 지능적으로 반응하는 전략을 갖춘 컴퓨터였다. 《뉴스위크》는 그 대국을 가리켜 “뇌의 마지막 항전”이라 묘사했고, 카스파로프는 대국 결과에 대해 “인류의 종말”이라 평했다.
어떤 사람들은 체스라는 게임이 불연속적인 수(手)와 분명한 승패 때문에 규칙에 능통한 컴퓨터에 아주 유리하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반면 사람은 수가 무제한적이고 목표가 불투명한 복잡한 세계에서 산다. 분명 이곳에서는 인간의 창의성과 직관이 필요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컴퓨터가 절대로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최근에 개발된 인공 지능 시스템들은 그럴듯한 소설을 쓰고, 모차르트의 작품처럼 들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멋진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리고, 재치 있는 광고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그렇다고 해서, 뇌가 디지털 컴퓨터처럼 작동한다거나, 인공 지능이 인간의 마음을 복제해 낸다거나, 컴퓨터가 의식을 가져서 1인칭 시점의 주관적 경험을 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추론, 지성, 상상, 창조가 정보 처리의 형식들이며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물리적 과정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인지과학은 마음의 연산 이론을 이용해 기계로부터 적어도 하나의 유령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제2개념: 마음은 결코 빈 서판이 아니다. 빈 서판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때에, 환경이 빈 서판에 무엇인가를 새겨 넣는다는 비유는 그리 엉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체를 새겨 넣는다는 비유는 그리 엉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체계가 과연 어떤 종류의 연산을 통해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계획하는 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빈 서판의 문제는 더없이 명백해졌다. 빈 서판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판에 새겨진 무엇인가가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을 다른 때에 학습한 패턴들과 결합하고, 그 조합을 이용해 새로운 생각을 서판에 쓰고, 그 결과를 읽고 목표를 향해 행동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판에 새겨진 것들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게 된다. 로크도 이 문제를 인식하여, 백지 위에 적힌 것을 보고 인식과 사고와 연상을 수행하는 이른바 “오성(understanding)”이라는 것을 언급했다. 물론 마음의 이해 과정을 “오성”에 의존해 설명하는 것은 순환 논리이다.
로크에 응하여 빈 서판 이론에 힘찬 반론을 제기한 철학자는 고트프리트 빌헴름 라이프니츠(1646~1716)였다. 라이프니츠는 “지성에는 먼저 감각을 통해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경험론의 좌우명을 되풀이한 다음 그 뒤에 “지성 그 자체를 제외하면”이라는 말을 추가했다. 마음에는 단지 학습을 수행하는 매커니즘일지라도 선천적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화소들의 파노라마가 아니라 사물들의 세계를 보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말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내용을 추론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로크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위업이 “오성”이라는 하나의 추상 명사로―혹은 “학습”, “지능”, “가소성”, “적응성”으로―귀착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언급했듯이, 그렇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기능이나 신비한 소질들을 꾸며 냄으로써……그리고 그 기능이나 소질들이 작은 악마나 작은 도깨비처럼 별 수고 없이 필요한 모든 일을 척척 수행해 낸다고 상상함으로써 [체면치레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필요한 톱니바퀴도 없는 주머니 시계가 어떤 시계학적(horological) 기능에 의해 시간을 가리키거나, 맷돌 같은 장치가 전혀 없는 방앗간에서 어떤 분쇄 기능만으로 탈곡을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홉스의 영향을 받은)라이프니츠도 홉스처럼 자신의 시대를 앞질러, 지능은 정보 처리의 한 형태이며 그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기계 장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우리도 알고 있듯이 컴퓨터는 자동차 회사의 조립 생산 라인을 가동하기는 하지만, 말을 이해하거나 글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사람이 먼저 적절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야 한다. 이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일을 수행하는 인간의 경우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가구 사이를 돌아다니고, 문장을 이해하고, 사실을 기억해 내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추측하는 등의 평범한 과제들이 최첨단 인공 지능 기술로도 하기 어려운 만만찮은 공학적 도전임을 인지 모델 설계자들은 깨닫고 있다. 그런 과제들이 이른바 ‘문화’라는 것에 의해 수동적으로 빚어지는 실리퍼티 덩어리로 해결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기대를 접고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인지과학자들이 본성-양육 논쟁을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들은 인간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표준 장비들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한쪽 끝에는 모든 개념이 (심지어 “문의 손잡이”와 “핀셋”이라는 개념까지도)선천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제리 포더와, “학습”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며 아이들이 언어는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있다. 정반대 편에는 비교적 간단한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훈련시키는 러멜하트, 맥클런드, 제프리 엘먼, 엘리자베스 베이츠 등의 연결주의자들이 있다. MIT에서 시작된 첫 번째 극단은 모든 방향이 서쪽으로만 향하는 신비의 땅, 이스트폴(East Pole)에 있다. 샌디에고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시작된 두 번째 극단은 역시 모든 방향이 동쪽으로만 향하는 신비의 땅, 웨스트폴(West Pole)에 있다.(포더가 MIT의 한 세미나에서 제안한 이름이다. 세미나에서 그는 어느 “서부 해안 이론가”에게 큰소리로 야단쳤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이론가는 예일 대학 소속이라고 지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일 대학은 동부 해안에 속한다.)
그러나 이스트폴-웨스트폴 논쟁이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을 얽어 맨 논쟁들과 다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학습을 위한 선천적 회로가 없으면 학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모두가 인정한다는 것이다. 웨스트폴의 선언문 「선천성 재고(Rethinking Innateness)」에서 베이츠와 엘먼을 비롯한 공동 저자들은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어떤 학습 규칙도 이론적인 내용이 완전히 없을 수 없고, 어떤 서판도 완전히 비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연결주의 모델들(그리고 모델 설계자들)이 극단적 형태의 경험주의에 빠져 있다는 믿음과, 선천적 지식은 어떤 형태든 역병처럼 피해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 견해에 명백히 동의하지 않는다.…… [학습 모델에는] 몇 가지 사전 속박이 필요하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실 모든 연결주의 모델은, 선천적 속박의 요소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전제를 반드시 가지고 있다.
두 극단의 쟁점들은 중요하지만 세부적인 것이다. 선천적 학습 네트워크의 수는 어느 정도인가. 각각의 작업을 위해 그 네트워크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계되어 있는가 등.
제3개념: 마음 속의 유한한 조합 프로그램에 의해 무한한 행동이 산출될 수 있다.
인지과학은 빈 서판과 기계 속의 유령 이론을 또 다른 방향에서 파고 들어갔다. 인간의 행동이 동물의 세계와 비슷한 의미에서 "유전자 속에“ 있거나 ”진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비웃는 사름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은 물고기가 빨간 점을 보면 공격하는 것이나 암탉이 알 위에 앉는 것 같은 반사적 반응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을 숭배하고, 인터넷에서 키치를 경매하고, 기타를 연주하고, 단식을 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접이식 의자로 요새를 만드는 등 그 종류는 끝이 없어 보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훑어보면 서양 문화에 이상한 행위들이 아무리 많은 것 같아도 인류 전체의 이상한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 실리퍼티이거나 자유로운 행위자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빈 서판이 출현했던 시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마음의 연산 이론에 의해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가장 확실한 예는 촘스키의 언어 혁명이다. 언어는 창조적이고 가변적인 행동의 축약본이다. 대부분의 발화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새로운 단어 조합이다. 우리는 정해진 언어 반응이 입력되어 있는 티클 미엘모 인형이 아니다. 그러나 촘스키의 지적에 따르면, 언어는 그 엄청난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언어는 규치과 패턴을 따른다.
영어 사용자는 다음과 같은 완전히 새로운 단어열들을 발화할 수 있다. “Every day new universes come into exitence(매일 새 우주들이 생겨난다).” 이나 “He like his toast with cream cheese and ketchup(그는 토스트에 크림치즈와 케첩을 발라 먹는 걸 좋아해).” 또는 “My car has been eaten has wolverines by(내 차는 오소리들에게 먹혀 버렸어).” 그러나 어느 누구도 ‘Car my been has wolberines by '나, 그 밖의 가능한 단어열들을 말하지 않는다. 머리 속의 어떤 것이 무한한 단어 조합을 생성해 낼 뿐 아니라 대단히 체계적인 조합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이란 것은 바로 일종의 소프트웨어, 즉 새 단어 배열들을 척척 만들어 내는 생성 문법이다. “영어 문장에는 주어와 술부가 포함된다.”, “술부에는 동사, 목적어, 보어가 포함된다.”, “먹다의 주어는 먹는 행위자이다.” 등과 같은 일련의 규칙들이 인간 화자의 무한한 창조성을 설명해 준다. 주어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몇 천 개의 명사와 술부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몇 천 개의 동사만 있어도 이미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수백만 개의 방법이 생겨난다. 가능한 조합은 곧 상상을 초월하는 큰 수로 불어난다.
사실, 문장의 레퍼토리는 이론상 무한하다. 언어의 규칙에는 회귀(recursion)라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회귀 규칙은 하나의 구에 그것과 똑같은 예를 포함시킨다. 이에 따라, “She thinks that he thinks that they think that he knows."처럼 문장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문장의 수가 무한하다면 가능한 생각과 개념의 수도 무한해진다. 사실상 모든 문장이 각기 다른 생각이나 개념을 표현하기 E떄문이다. 언어의 이 조합 문법이 머리 속에서 다른 조합 프로그램들과 맞물리면서 생각과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마음 속의 유한한 장치들이 무한한 행동을 생성하는 것이다. 일단 신체적 행동 대신 정신적 소프트웨어를 생각하게 되면 다양한 문화들의 근본적 차이는 훨씬 줄어든다.
제4개념 : 다양한 문화에 산재하는 피상적 차이 밑에는 보편적인 정신 메커니즘이 놓여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행동의 개방성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로 언어를 이용할 수 있다. 인간은 약6,000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문법 프로그램들은 실제로 내뱉는 말보다 훨씬 적은 차이를 보인다. 성서는 수백 개의 비서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2차 대전 중 미 해병대는 비밀 메시지를 나바호족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토착어로 번역하게 해서 태평양 너머로 전달하곤 했다. 신화나 우화에서 군사적 지령까지 어떤 내용이라도 어떤 언어로든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언어가 같은 천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촘스키는 개별 언어들의 생성 문법은 그가 보편 문법이라 명명한 공통적인 하나의 패턴을 따르는 다양한 변이체들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동사는 목적어 앞에 오고, 전치사는 명사구 앞에 온다. 일본어에서 목적어는 동사 앞에 오고, 명사구는 전치사, 정확히 말하자면 후치사 앞에 온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두 언어 모두 동사, 목적어, 전치사 또는 후치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떄문에 의사 소통 체계를 가능케 하는 다른 모든 장치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서로 관계가 없는 언어들에서도 구를 만들 때에는 항상 핵심어(가령 동사나 전치사)와 보어(가령 명사구)를 결합하고 그 요소에 일정한 순서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영어에서는 핵심어가 먼저 오고, 일본어에서는 핵심어가 나중에 온다. 그러나 구 구조와 관련된 그 밖의 모든 점들은 매우 비슷하다. 거의 모든 구, 모든 언어가 그러하다. 일반적인 핵심어와 보어들을 배열할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128가지나 되지만, 세계 언어의 95퍼센트는 영어 식의 순서와 그 거울상인 일본어 식의 순서, 둘 중 하나를 따른다.
이 균일성을 이해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모든 언어에는 “핵심어-먼저(head-first)"나 ”핵심어-나중(head-last)“환경 중 어느 하나로 전환이 가능한 매개 변인(parametet)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문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학자 마크 베이커는 최근 10여 개의 이러한 매개 변인을 정리했는데, 이것은 전 세계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언어를 포괄한다.
보편적 패턴들에서 변이를 증류시키면 너절한 데이터들이 정리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 회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어떤 규칙의 보편적 부분이 아기의 언어 학습을 지배하는 신경 회로에 자리를 잡으면 아기들은 교육의 혜택 없이도 아주 쉽고 균등하게 언어를 학습할 수 있다. 아기들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단지 흥미로운 소음으로 알고 말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자의적으로 자르고 베는 것이 아니라, 핵심어와 보어를 주의 깊게 듣고, 그 배열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순서와 일치하는 문법 체계를 세운다.
이 개념은 문화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변이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사회 구조주의에 공감하는 다수의 인류학자들은 가령 분노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감정들이 어떤 문화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몇몇 인류학자들은 감정이 전혀 없는 문화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캐서린 러츠는 이팔루크족(멜라네시아의 한 부족)이 우리처럼 ‘분노’를 경험하는 대신, 그들의 말로 “송(song)”이라는 것을 경험한다고 썼다.
송은 금기를 깨거나 건방진 행동을 하는 등의 도덕적 위반에 이해 촉발되는 일종의 노여움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 범죄자에 대한 물리적 공격은 용인되지 않지만, 피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위협하거나 쑥덕거리는 것은 허용된다. 송의 표적이 되는 사람은 서양인들은 모를 것이라 추정되는 다른 감정을 경험한다. 두려움의 상태인 “메타구(metagu)”가 그것인데, 이 상태에서는 송에 빠진 사람을 진정 시키기 위해 사과하거나 벌금을 물거나 선물을 제공해야 한다.
촘스키를 비롯한 인지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론 맬런과 스티븐 스틱은, 이팔루크족의 송과 서양의 분노를 같은 감정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감정과 관련된 단어의 의미에 따라, 즉 그 의미를 표면적 행동에 따라 정의하는가 아니면 그 밑에 감추어진 정신적 연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행동에 따라 정의된다면 감정은 문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팔루크족은 생리 기간에 여자가 타로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나 산모가 출산하는 집에 남자가 들어오는 것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가 큰소리로 인종에 대한 통칭을 부르거나 중지를 곧추세우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만, 우리가 아는한 이팔루크족은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이 마음의 메커니즘들―폴 에크먼과 리처드 래저러스 등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어펙트 프로그램(affect programs)" 또는 ”이프-덴 공식(if-then formulas)“이라 부른다.(연산 어휘에 주목하라.)―에 따라 규정된다면 우리와 이팔루크족은 별 차이가 없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권익이나 존엄성이 모욕당하면 그 반응으로서 상대에게 벌을 가하거나 정확한 보상을 요구하고 싶은 불쾌하고 격한 감정을 갖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 모욕으로 간주되는가, 특정한 상황에서 인상을 찡그려도 무방한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종류의 보복이 허용되는가 등의 문제는 그 사람의 문화에 달려 있다. 자극과 반응은 다를 수 있지만 정신 상태는, 우리 언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단어가 있든 없든,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언어의 경우처럼, 학습해야 할 문화적 부분들을 학습하는 것도 정신적 연산을 선천적 메커니즘이 없다면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팔루크족 사이에서 송을 자극하는 상황들 중에 금기 위반, 게으르거나 무례한 태도, 공유의 거부 등이 포함되는 반면 금기에 대한 존중,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 물구나무서기 등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팔루크족은 처음 세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세 가지 모두 하나의 정서 프로그램을 일깨워, 모욕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것들이 동일한 반응을 자극한다고 생각하기가 더 쉬워지고, 세 행위를 단일한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묶어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배울 점은, 친숙한 행동 범주들―결혼 관습, 금기 음식, 무속과 미신 등―은 문화에 따라 확연히 다르고 학습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범주들을 만들어 내는 더 깊은 정신적 연산 메커니즘들을 보편적이고 선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옷을 입지만, 외모를 통해 지위를 과시하려는 노력은 모두 같을 수 있다.
그리고 일족의 권리만을 배타적으로 존중할 수도 있고 그 존경을 부족, 국민, 인류 전체로 확대할 수도 있지만, 이 세계를 내(內)집단과 외(外)집단으로 구분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인공물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온 세상이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등, 의식을 지닌 존재의 의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생각도 문화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어떤 사건들을 설명할 때 목표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정신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행동주의자들은 거꾸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다.
제5개념: 마음은 상호 작용하는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이다.
다양한 문화의 감정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솔직한 얼굴 표정은 세계 어디나 똑같은 반면,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은 정중한 자리에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할 줄 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서 프로그램은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방식으로 얼굴 표정을 유도하지만, 표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에는 “과시 규칙들(desplay rules)"로 이루어진 별도의 체계가 우세해진다.
두 메커니즘의 차이는 인지 혁명이 간파해 낸 또 다른 진실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준다. 혁명 이전에 해설자들은 “지성”이나 “오성”과 같은 거대한 블랙 박스에 의존했고, 인간 본성에 대해 가령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상하다거나 본질적으로 비열하다는 등의 총괄적인 선언을 남발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마음이 일월론적인 힘들 또는 종합적인 특성들이 부여된 균질의 구(球)가 아님을 알고 있다.
마음은 일련의 생각 또는 유기적 행동을 생산하기 위해 여러 부분들이 협력하는 일종의 모듈이다. 마음은 산만한 요소들을 걸러 내고, 기술을 습득하고, 신체를 제어하고, 사실을 기억하고, 정보를 일시적으로 보관하고, 규칙을 저장․실행하는 등의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독립된 정보 처리 체계들을 가지고 있다. 이 정보 처리 체계들을 하나하나 분리시키면 가령 언어, 수, 공간, 도구, 생물 등과 같이 서로 다른 종류의 내용을 전담하는 정신 능력들(때로는 다중 지능(multiple intelligences)이라 하기도 한다.)이 나온다.
이스트폴의 인지과학자들은 내용에 따른 모듈들이 주로 유전자에 의해 분화된다고 추측하고, 웨스트폴의 인지과학자들은 그것들이 처음에는 작은 선천적 경향으로 시작한 다음 감각적 입력물의 통계적 패턴에 따라 굳어진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뇌가 균일한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리고 정서 프로그램들에서는 또 다른 층의 정보처리 체계들, 즉 동기화와 감정을 위한 체계들이 발견된다.
최종 결론은, 어떤 습관이나 충동이 한 모듈에서 나오더라도 다른 어떤 모듈에 의해 각기 다른 행동으로 나타날 수―또는 완전히 억압될 수―있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인지 심리학자들은, 가령 인쇄된 말을 보고 소리 없이 발음하는 경우처럼 습관적인 반응을 생산하는 경향의 기초에는 “습관 체계(habit system)”라 불리는 모듈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 주의 체계(supervisory attention system)"라 불리는 또 다른 모듈이 그 모듈을 압도하면, 가령 인쇄된 말의 잉크 색깔을 말하거나 그 말의 내용에 해당하는 행동을 생각하는 등 특정 문제와 관련된 정보에 집중하게 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번도 실행해 본 적이 없는 멋진 복수전을 상상하거나 마음 속으로 부정한 관계를 그리는 등의 일들이 정신 체계들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지 혁명에서 비롯된 인간 본성 이론은 행동주의나 사회 구조주의와 같은 빈 서판 이론들보다는 유대-기독교의 인간 본성 이론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 분석 이론에 더욱 가깝다. 행동은 방사되거나 유도되는 것도 아니고 문화나 사회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의제와 목표를 가진 정신 모듈들의 내적 갈등에서 나온다.
마음이 보편적이고 생성적인 연산 모듈들의 체계라는 인지 혁명의 개념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들을 통해 수세기 동안 정립되어 왔던 문제 제기 방식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인간은 유연한 존재인가 미리 설계된 존재인가, 행동은 보편적인가 문화에 따라 다른가, 행위들은 학습되는가 선천적인가, 우리는 본질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등의 문제 제기는 오늘날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이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은 미리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마음에는 무제한적인 생각과 행동을 생성할 수 있는 조합 소프트웨어가 갖추어져 있다. 행동은 문화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을 생성하는 정신 프로그램들의 설계는 다를 필요가 없다. 우리가 지적 행동을 성공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그 학습을 수행하는 선천적 체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선한 동기와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똑같은 행동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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